러브라이브 선샤인 마이너 갤러리 저장소

제 목
번역/창작 [SS] DAY1 (1)
글쓴이
Sakulight
추천
12
댓글
3
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405229
  • 2021-12-01 15:28:35
 



5편을 끝으로 생각 중이고, 먼저 완성한 두 편 먼저 올려 봄.





(1) DAY-1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나 밤늦게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갈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 생각은 어려서부터 쭉 이어져 온 꿈에 대한 끝없는 다짐은 아니고, 보기 좋게 꺾여 얻지 못한 승리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었다. 그건 다만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와 자그마한 몸짓에 불과했다. 그 생각에 나는 ‘좋아함’이라는 가볍고도 아릿한 이름을 한 번 붙여 본다. 


그 겨울날 내가 운 이유를, 기쁜 날에 흘리기로 약속했던 눈물을 기어코 흘리고 만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결국에는 패배하고 마는 것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고, 내가 그것을 ‘분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나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차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만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를 매일같이 바란 적이 있었던가? 어제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에 눈이 가득 쌓인 신사를 보았을 때, 나는 3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로 이틀이 남았음을 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은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뿐이며, 그렇다고는 해도 결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회에서 떨어지고 난 뒤 나는 연습을 좀 많이 했다. 신사의 주변은 혼자서 체력을 기르거나 안무를 연습하기에도 꽤 괜찮을 만큼 텅 비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저 연습을 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이틀이 남았다고는 해도 결국 나의 무심한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와 내일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영원한 방학을 어쩌면 나는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체육복 차림에 겉에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갈색 코트를 걸친 나는, 교문으로부터 일자로 눈 위에 찍힌 한 쌍의 발자국을 발견해냈다. 지금은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고, 나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방학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발자국으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도중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발자국 간의 보폭이 좁고 신발 크기도 작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발자국은 교문을 쭉 가로질러 현관문 안에서 끊겨 있었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바닥 군데군데에 눈으로부터 생긴 물기가 남아 있는 걸 알 수 있어 나는 그 자취를 쫓아 걸었다.


나는 내 발이 일상의 익숙한 경로를 따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옥상 문 맨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옥상 위의 인기척이 내 마음을 파르르 떨리는 위험한 감정으로 가득 채웠다. 스스로에게 들어가지 않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미 문을 열면서 겨울 공기로 내 뺨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고, 내가 방금 전까지 마음속에 그리던 눈동자가 내 눈앞에 있음을 알았다. 그 눈동자, 그 뺨, 그 입술은 창백했다.


“일찍 왔네?”


쿠쿠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방학에는 입지 않는 교복 차림을 쿠쿠가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쿠쿠가 그 옷을 입고 온 의미를 알 것 같았으나, 그렇기에 더욱 더 옷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연습할 생각 없지?”

“눈이 쌓여버렸는걸요.” 쿠쿠가 새하얗게 뒤덮인 옥상에서 뒤돌아 쪼그려 앉으면서 말했다. 쿠쿠의 그런 변명이 그녀답지 않은 이유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재빨리 눈을 치우고 연습을 하자고 집요하게 재촉했을텐데......


순간 나는 뺨 한쪽에 통증을, 그러니까 눈덩이가 스쳐 지나가면서 남긴 상쾌한 아픔을 느꼈다. 그 눈동자는 평소의 쾌활함을 띄고 있었다. 나에게도 아이다운 즐거움이 되살아나 마침 살짝 뭉쳐있던 눈덩이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 눈덩이는 빗나가고, 쿠쿠가 두 번째로 던진 눈덩이는 내 가슴팍에 정통으로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어쩐지 분하다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다가가 눈으로 젖어있는 새빨간 양손을 꽉 붙잡은 나에게 쿠쿠는 저항을,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랑스러운 반항을 하려고 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피할 길 없는 시선과 따스한 숨결이 나의 피부 위에 닿았다. 새삼스럽게 나는 그 눈동자가 무척이나 크고 예쁘다고, 그리고 나 자신이 참으로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고 그 짧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서로의 손에 느껴지는 물기 어린 따스함과 함께 바라본 눈동자를 통해, 내가 그녀를 –단지 그녀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쿠쿠가 알아차렸다고 직감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떼었다. 쿠쿠의 작은 손에 머물렀던 물방울은 지금 나의 손바닥 안에 축축하게 맺혀있었다.


“그만하자.”

“스미레 답지 않네요.”

“그래서,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 온 이유는 뭐야?”

“마지막으로 학교를 둘러 보려고요. 교복은 지금이 아니면 입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친한 친구를 연기하는 어색함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꼭 모든 게 다 결정된 것처럼 행동하는데, 나중에 혹시나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거라고? 몇 개월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거야.”

“스미레 말이 맞아요. 어쩌면 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죠,”


나는 쿠쿠의 고분고분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잠시 뒤 나는 카논에게 연락해서 오늘은 눈 때문에 연습을 쉬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금방 그렇게 하자는 대답을 받았다. 나는 쿠쿠와 잠시 학교를 돌아보겠다고, 꼭 찾아오지는 않아도 된다는 답장을 보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교실을, 강당을, 황량해진 정원을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이나 걸어 다녔다. 쿠쿠는 종종 한 군데에 멈춰 서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나는 쿠쿠의 마음이 텅 비어버린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한겨울의 태양이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는 투명한 연못 위의 다리에서 끊겼다.


“이제 돌아갈 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계속 이곳에 있으니까 더 마음을 놓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은 연민에 대한 무언의 거부를 표하는 듯이 보였다. ‘스미레, 쿠쿠를 불쌍하게 보지 말아줘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스미레의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줘요.’ 라고. 만약 쿠쿠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면, 나도 그에 맞는 의연함으로 눈물 한 방울 없이 작별을 맞이해야만 한다. 나는 쿠쿠의 흔들리지 않는 시선에 문득 쑥스러워져 연못으로 눈을 돌렸다. 투명한 연못 속의 세계에는 내가 부끄럼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쿠쿠의 모습이 거울처럼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곧 연못 위에는 거친 겨울 바람이 지나가더니, 넓은 파동이 일어나 한순간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망쳐 놓았다.


우리는 학교를 나왔다. 나는 쿠쿠가 가는 방향을 쫓아갔는데, 목적지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쿠쿠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싶었는데, 어느 날 아침 신사에 찾아온 쿠쿠에게 부적을 건네주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쿠쿠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어져서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번에 준 부적, 갖고 있어?”

“......당연하죠, 그런 건.”

“보통 어디에 둬?”

“왜 물어보는 건가요?”

“선물을 준 사람이 그 선물이 어떻게 취급되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잖아.”


쿠쿠는 대답하지 않고 조금 걸음을 서둘러 걸었는데,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귀가 추워서 그렇다기에는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내 호기심은 순식간에 한계에 도달했다. 걸음을 빨리해 팔목을 붙잡고, 순수한 장난기 어린 눈빛과 쉽게 찾아온 승기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너,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지? 네가 거짓말 하는 거, 난 금방 전부 다 안다니까.”

“스미레는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지금 숨길 게 뭐가 있다는 건가요? 집에 가면 보여 줄 수 있으니까요.”

“흐응.”


나는 어쩐지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저번에도 올라간 적 있는 계단을 올라가서, 지금은 방 안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며 쿠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의외로 아직은 화려한 방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다만 무거운 짐은 이미 뺀 듯, 침대가 있던 자리에는 흰 이불 한 장만이 초라하게 접혀 놓여 있었다. 내 눈은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곳을 살펴 부적을 찾아보려고 한 듯하나 발견해내지 못했다. 이미 상자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물건들이나 휑하게 빈 옷걸이만큼 근미래를 선명히 비춰주는 풍경도 없었기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조금 전의 자신감을 순식간에 잃은 나는 괜히 이렇게 말했다.


“미안, 잠깐 급한 일이 생각나서...... 저녁에 다시 와서 짐 정리 좀 도와줄게. 느긋하게 갈 거니까 내가 준 선물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디가 좋을지 천천히 생각해보고. 혹시 지금은 화장실 세면대 위 같은 곳에 두고 깜빡 잊어버렸다던가......”

“빨리 가기나 하세요.” 하고 말한 쿠쿠에게 떠밀려 나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밖으로 쫓겨났다. 부끄러움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가득 차서 나는 문 앞에서 잠시 서성였다. 그리고 곧 다시 신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얼굴과 부적과 후회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운명이란 게 있다면 기꺼이 그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그건 분명히 대회의 마지막 날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그 어느 날들과 겉보기에는 아무 다를 바 없는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연습을 끝마치고 둘러앉아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쿠쿠의 사정을 완전히 잊고 거의 방심에 가까운 안도감에 빠져있었다. 어떤 같잖은 이유를 붙여도 나에게서 쿠쿠가 떨어져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렵게 친구가 되었으니까, 마음속으로 특별하다고 외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시 옥상 옆의 부실에서 나는 쿠쿠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로, 바람도 불지 않고 부실 안을 태양이 가득 내리쬐었다. 내가 곧이어 나올 쿠쿠의 고백을 알아챈 것은, 쿠쿠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것을 발견한 후였다. 나는 쿠쿠에게 시선을 보내어 비밀의 유일한 공유자로서 나름의 힘을 보태려고 시도했던 듯하나, 나조차도 차마 이별을, 내 생애에 있어서 ‘최초의 결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 새삼스레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눈은 앞으로 고정한 채로 나는 슬쩍 쿠쿠의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그것이 쿠쿠에게 신호가 되어야 했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와 동시에 손을 뗀 나는 눈을 감았다. 


“여러분 모두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 있어요.” 가까스로 눈을 뜬 나는 환자가 의사를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쿠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나에게는 빤히 보이던 그 치유할 길 없는 병명을 내리고, 나는 의외로 절망하기보다는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다. 


“쿠쿠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가족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회에 출전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그게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었던 조건이었어요. 설마 정말로, 여기까지 와서 여러분들과 헤어져야만 한다고는......” 


더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릿한 서글픔에 나는 몸을 떨며, 또 다른 감정이 점차 나를 휘감아 가는 것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또 다른 누군가가 무어라고 말한 것 같지만 나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점차 세계가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뛰쳐나와 목적지도 없이 달리면서 내 안의 소중하고도 낯선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심장은 빠르게 뛰고, 머릿속은 쿠쿠의 마지막 얼굴로 가득 찼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나의 감정에 붙은 아릿한 이름은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는 부를 수 없는 확고한 아픔- 사랑이라고.


그 티아라, 쿠쿠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준비한 그 왕관이 나의 보기 흉한 ‘짝사랑’을 만들어 냈다. 삶의 그늘진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나의 등을 떠밀어, 무대 위, 무대 위에서도 가장 화려한 조명이 내리쬐어지는 눈부신 곳에 설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은 쿠쿠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나의 처지를 인정했다. 그리고 또한 이별 후에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것은 그 소중한 선물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저녁이 되어 쿠쿠의 짐 정리를 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이별이 아니라 부적 생각을 했다.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서로 나누어 가진 부적이 드넓은 바다를 뛰어넘어 마음을 이어주리라는 말은 그렇게 이상하게는 들리지 않았다. 쿠쿠는 내가 준 부적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그걸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쿠쿠에게 건네준 것과 같은 부적을 보면서 이것과 같은 물건이 늘 쿠쿠의 곁에 있음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되기 마련임을 알았다.


쿠쿠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나는 방에, 따스한 쿠쿠가 있는 방에(지금은 너무 추운 날씨니까) 거의 다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는 대사로 충분한 걸까? 쿠쿠가 나에게서 듣기를 원하는 말, 소중한 사람과의(쿠쿠도 나를 실은 친구로서는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있을테니까) 작별 인사가 되어야 할 말은 어떤 것이어야만 할까? 새삼스럽게 나는 그 누구와도 헤어져 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대사를 하고 등을 돌려 걸어가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계단에서부터 쿠쿠의 방 안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았다. 목소리가 조금씩이나마 방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인데, 쿠쿠를 보아 둘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누군가가 찾아갔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 누군가를 경계하여 본능적으로 계단 층계참에 멈춰서서 목소리를 엿들어보려고 한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순간 문이 열리며, “연락할게.” 라는 목소리가, 정확하게는 카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래쪽의 계단으로 다리를 뻗었는데, 카논이 곧바로 내려오지 않고 쿠쿠와 마주 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카논은 작별 인사의 전주를 미리 이곳에서 해두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점차 대화를 엿듣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납게 여겨졌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네 덕분이야.” 목소리는 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무척이나 먼 곳까지 왔고,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도 무언가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야. 아이돌로서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카논-” 

나는 카논의 목에 휘감기는 쿠쿠의 팔을 본 듯했다.

“쿠쿠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다시 만나줄 거라고 말해주세요.”

“내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한, 나에게 다시금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었던 사람을 잊을 수는 없어.”


고동치는 피의 물결이 내 관자놀이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짓이겨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소리를 죽이며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왔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뺨에 또다시 와닿는 차가움, 눈이었다. 등 뒤에서 잊고 싶은 목소리가 들린 건, 그곳으로부터 얼마 걸어가지 않았던 때였다. 카논의 뺨은 추위 때문에 장밋빛으로 물들었는지 아니면 쿠쿠를 만났기에 그토록 상기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얼핏 연민과도 같은 것이 엿보였다.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하고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도 변명으로 들리는 말을 했다.

“한 번쯤은 찾아가지 않아도 괜찮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카논은 차마 입에도 담고 싶지 않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마침 내일 짐 정리를 도와주기로 했어.”

“스미레쨩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니? 분명히 우리가 쿠쿠쨩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무래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본선에 진출하는 것뿐이었어. 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야. 만약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건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쿠쿠가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지금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건...... 돌아가.”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등을 돌려 또 다른 반론의 여지를 카논에게 주지 않으려 했다. 곧 나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 발소리가 들렸으나, 저녁 길의 인파에 묻혀 조금 뒤 다시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길거리에 쌓인 눈을 보며 나는 신사를 청소해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정신을 차리니 나는 또다시 하라주쿠를 걷고 있었다. 오늘따라 사람이 없고, 두텁게 내려앉은 안개가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보이는 것은 다만 어제 쌓인 눈뿐이었다. 나는 걷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집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걷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뿐더러 내가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나는 얼핏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향해서 내가 이상한 초조감을 느끼며 급하지 않은 척, 그러나 분명히 급하게 걸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목소리가 울렸는데, 그건 어찌 보면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의 행방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안개 속에 깊이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얼핏 잿빛 머리카락을 본 듯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가 보아도 그 사람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스쳐 지나갈 뿐, 내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안개 속에서 몸을 던져 그 사람과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고요하게 일렁이는 햇빛을 보면서, 늦잠에는 시원찮은 꿈이 동반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태연한 척을 했다.


밤사이에 눈은 그쳐 있었다. 하루가 남았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어제 쿠쿠에게 저녁에 가겠다고 한 약속을 떠올렸는데, 그때 가지 않고 지금 가는 일이 어제 카논과 있었던 대화에 대한 실마리를 주고 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는 한겨울의 따사로운 햇빛이 쬐어지고 있고, 나는 그 문 앞에 망설이며 서 있었다. 노크를 두 번 했다. 답이 없다. 그래서 또 한 번 문을 두 번 두드리면서, 나야, 하고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안쪽에서 급하게 신발을 신는 소리가 난다. 그 얼굴은 잠이 덜 깬 것처럼 몽롱하고, 현실감이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같은 꿈이라도 꾼 걸까?


“꿈이라도 꾼 거야?” 하고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마도요.”


방은 여전히 어질러져 있었는데, 나는 쿠쿠의 시선은 무시한 채로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상자 속에 화려한 옷가지들을 넣었다. 쿠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해서 이별을 적어도 슬프지만은 않은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끝이 없었다. 


“스미레......”

“응?”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직감으로 나는 그게 고백이 아닌가 하고 마음 떨려 했다. 그러나 곧 그럴 이유는 없음을, 쿠쿠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쿠쿠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작은 입술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무언가 말을 한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한 말은......




시즈쿠의오필리아 2021.12.01 15:29:42
ㅇㅇ 112.152 2021.12.01 15:31:12
한센루 일단개추박고 나중에봐야지 2021.12.01 15:32:22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4405263 뉴짤 슈카라지 뉴짤 바닷빛 2021-12-01 7
4405262 일반 2021 최다재생 탑3 4 Windrunner 2021-12-01 0
4405261 번역/창작 ss 번역) 어제의 카나타 쨩에게 3 ㅇㅇ 2021-12-01 9
4405260 일반 아뮤보페스 아카이브따는데 얼마나걸렸음? 16 지나가던요소로 2021-12-01 0
4405259 일반 스미레는 최약체가 아니야. 12 헤안나 2021-12-01 4
4405258 일반 쟈네쟈네 쟈넹~ 전속전진 2021-12-01 0
4405257 일반 쟈네쟈네 쟈넹~ 한센루 2021-12-01 0
4405256 일반 앱등뮤직에 1년간 제일 많이들은곡 나왔길래 봤는데 4 아이카안쥬 2021-12-01 1
4405255 일반 쟈네쟈네 쟈넹~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54 일반 슈카 신곡 언제나와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53 일반 빨리감기ㅋㅋ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52 일반 아직 선샤인 보는중인데 요하네 귀엽네 4 히후미짱 2021-12-01 0
4405251 일반 루비에게 5센 나눔 5 ㅇㅇ 183.104 2021-12-01 1
4405250 일반 오늘은 예이 없네 전속전진 2021-12-01 0
4405249 일반 해피... 슈카루타....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48 번역/창작 [SS번역] 아유무「음냐…」새액새액 카스미「니히히! 8 ㅇㅇ 2021-12-01 11
4405247 일반 어 퐁 쿡패드 방송을 1주일만에 해버리네 킷카와미즈키 2021-12-01 0
4405246 일반 비추 많아야 7개던데 화력 존나약하노 ㅇㅇ 117.111 2021-12-01 0
4405245 일반 특정상표 등장 2 ㅇㅇ. 2021-12-01 0
4405244 일반 갤주님 2022년도 달력 나옵니다 3 킷카와미즈키 2021-12-01 6
4405243 일반 슈카 잃어버린 에어컨 리모콘 찾았네ㅋㅋㅋ 3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42 일반 코로나 그냥 감기 아니냐 4 수업시간그녀 2021-12-01 0
4405241 일반 오 세계는사랑에빠져있어ㅋㅋ 1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1
4405240 일반 선샤인 2기 몰아서 봤는데 2 ESORA 2021-12-01 2
4405239 일반 유동차단 낭비하게 만들기 ㅇㅇ 110.70 2021-12-01 0
4405238 일반 바이러스 치사율이 점점 좆밥이 되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9 sttc 2021-12-01 0
4405237 일반 겨울에 듣는 36.5도는 우주 최강의 곡이다...... 5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36 일반 이게 찹쌀떡이야 젤리야 ㅠㅁㅜ 2 ㍿호병장님㌠ 2021-12-01 1
4405235 일반 2022년은 진짜 어떤 해가 될까 4 전속전진 2021-12-01 0
4405234 일반 슈카라지 시작했다 한센루 2021-12-01 0
4405233 일반 슈우우우우우웅 쾅 누마즈앞바다돌고래 2021-12-01 0
4405232 일반 하라주쿠 이쁜동네구나 2 ㅇㅇ 118.235 2021-12-01 0
4405231 일반 리에라 4년 후 예상 4 수업시간그녀 2021-12-01 0
4405230 번역/창작 [SS] DAY1 (2) 5 Sakulight 2021-12-01 10
> 번역/창작 [SS] DAY1 (1) 3 Sakulight 2021-12-01 12
4405228 일반 리에라는 지금 모습도 좋지만 3~4년뒤엔 어떤모습일까 이런 상상도 2 ㅇㅇ 2021-12-01 0
4405227 일반 국사모에서 유독 쿠쿠가 잘 나가는 이유 2 ㅇㅇ 118.220 2021-12-01 0
4405226 일반 역대 탑3안에 드는 짤이다ㄹㅇ 7 강일한 2021-12-01 1
4405225 일반 정신나갈거같애요 3 sttc 2021-12-01 0
4405224 일반 빅라 돌리는 사람이 많이 줄은건가..? 2 yoha 2021-12-01 0
념글 삭제글 갤러리 랭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