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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나비와 태양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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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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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235421
  • 2021-09-05 15:22:44
 



신사의 아침은 오전 6시에 시작된다. 나는 그보다 한 시간 앞서 일어나 몸가짐을 정결히 하고 옷을 갖춰 입는다. 그 후에 본관 내부를 청소하고, 토리이부터 참도까지 똑같이 청소하면 대부분의 아침 일과는 끝나게 된다. 학기 중에는 이후에 곧바로 등교하지만 지금 같은 방학 중에는 계속 신사에 남아 책을 읽거나 번화가로 헛된 발걸음을 옮기거나 한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덕분이다.


최근 매일 아침 마음의 기미를 노트에 적는 일을 개을리하지 않고 있다. 기미라고는 하나, 단지 그날그날 떠오르는 내용을 손이 가는 대로 적을 뿐이다. 요즘 들어 다시 적게 된 말이 있다. 일념통천, 한결같은 마음으로 열중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원하는 일이 성취된다는 뜻이다. 중학교 때 책을 읽다가 발견한 이 문구는 무척이나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염원하는 세계로의 문을 꼭 이 문구가 언젠가 이루어 줄 것만 같았으나, 허무한 일이라 여겨 쓰지 않게 된 것이 반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계기가 있어 다시 쓰게 된 것이 1개월 전의 일이었다.


신사 한구석에서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두 줄의 문장과 이름이 유치한 글씨체로 삐뚤빼뚤하게 적힌 그 명함을 볼 때마다 나는 나답지 않게 감동하여 어느새 웃고 있는 것이었다- 신사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서 명함을 품속에 급하게 집어넣었다. 이런 걸 아는 사람에게 들켰다가는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동안 쌓아 올려왔던 이미지라는 것은 깨지기 쉬운 것이라서, 설령 혼자 있을 때더라도 몸가짐과 행동을 가볍게 할 수 없다.


목소리는 어느샌가 토리이를 건너 본관 앞에서 나고 있었다. 누군지 확인하고 나서 나는 조심스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카논과 쿠쿠가 참배 후 소원을 빌고 있었다. 카논은 여전히 남자 중학생 같은 옷차림이고, 그에 반해 쿠쿠는 화사한 하늘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쿠쿠를 향해 카논에게 예쁜 옷을 골라주면 어떻겠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숨어 있는 모습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두 사람의 뒤로 다가갔다. 


“너네 언제 왔던 거야?”


“아, 스미레쨩. 어디에 가 있었어? 그냥 지나가는 김에 스미레쨩이 생각나서 들러 봤는데, 없어서 스미레쨩도 늦잠을 자는 때가 있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성실한 내가 늦잠을 잘 리가 없잖아. 방학 때도 제대로 일찍 일어난다구. 뭐야, 쿠쿠. 그 눈빛은.”


“얼굴이 붉은데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닌가요? 스미레 씨가.”


“뭐? 너는 이상한 소리를 다 하네. 멀쩡하거든.”


갑자기 얼굴로 열이 몰려드는 건 조금 전에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고, 두꺼운 무녀복으로 옷을 감싸고 있던 탓이다.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덥다. 


“그런데 어디 가던 길이야? 오늘은 연습도 없잖아.”


“쿠쿠는 카논과 데이트를 가려고요.”


“뭐. 데, 데이트?”


“응. 보고 싶었던 가수 공연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옷가게도 가게. 스미레쨩도 같이 갈래?”


나는 순간적으로 쿠쿠의 눈치를 살폈다. 어지간히도 태연한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순간적으로 그런 그림을 마음속에 그렸던 건 나뿐인 걸까? 그러나 곧 둘 중 그 누구도 나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도 갈게. 옷 갈아입게 잠깐만 기다려줘.”


신사 뒤편에 있는 집에 들러서, 두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시간을 들여 갈아입었다. 알아서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던가 하겠지. 카논에게 받았던 명함은 지갑 속으로 옮겨 넣었다. 이건 나에게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라서, 어디에 가던 몸 근처에 두지 않으면 금방 신경이 쓰이고 만다. 간신히 아껴두었던 새하얀 원피스를 골랐다. 특별히 힘을 줘서 입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은은하게 주홍빛이 도는 립스틱으로 마무리했다. 붉게 물든 얼굴은 약간의 화장으로 간신히 가려지는 듯 보였다.


*


점심을 먹으면서 당장 내일 있을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곡의 컨셉은 어떤 게 좋은지, 의상은 또 어떤지, 안무와 가사 배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등. 카논과 쿠쿠가 옆에 딱 붙어 앉아 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내가 앉아 있었다. 카논은 조금 전에 나와 쿠쿠가 추천해서 산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조금 프릴이 많은 블라우스를 입었다. 부끄러운 건지 어색한 건지 자꾸만 한 쪽 머리를 습관적으로 쓸어 넘기는 손을 보고 있다가, 시선이 다가오는 기척에 슬쩍 눈을 돌렸다.


“스미레 씨는 어떤가요? 이 의상 괜찮은 것 같나요?”


낯선 의상이 그려진 노트가 갑자기 눈앞에 들이 밀어져 당황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어느샌가 흐름을 완전히 놓쳐 버렸다. “나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또 너무 지나치게 하늘하늘한 것 같기도.”


“스미레쨩도 이렇게 말하잖아. 나는 별로 이런 의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할까......”


“쿠쿠는 카논이 지금 이렇게 입은 모습도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맞아. 카논. 평소에도 그렇게 입으면 좋잖아. 무대 위에서도.”


“스미레쨩은 대체 어느 쪽인거야? 그래.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스미레 씨도 은근히 보는 구석이 있네요.”


나는 갈수록 불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은 조금도 모른 채, 아직은 나에게는 낯설기만 한 친근한 표정을 지어주는 쿠쿠가 있어서, 아니, 여전한 거리감으로 일관하는 카논이 있어서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단지 즐겁기만 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나의 유별난 자존심과 단둘이 남아있는 상황에 대한 상상이 나를 자리에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카논이 입을 열었다. “이번 곡의 센터는 어떻게 할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이번에는 스미레쨩이 해봐도 좋다고 생각해. 댄스나 노래는 여전히 잘하고, 스쿨아이돌에도 꽤 익숙해진 것 같으니까. 처음부터 하고 싶어 했잖아.”


“내가 해도 괜찮은 거야?”


그동안 바라오던 제안에 솔직하게 기쁨을 표현하지 못한 건 나답지 못한 일이었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저쪽에서 짓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해주면 되잖아.” 하고 뒤늦게 알아채고 반응했으나, 이미 속마음을 전부 까발려버린 듯한 불안한 기분을 애써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왜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토록 오만하고 당당하게 센터를 요구했으면서, 이제와서 왜 겸손한 척을 하고 있는 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스미레 씨도 여전히 카논이 센터에 더 잘 어울린다고 보고 있는 거네요!”-이런 쿠쿠의 동조에 나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미레쨩은......”


“아니야, 역시 카논이 해줘.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


“응. 일단 알았어. 이건 나중에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이야기는 다행히 이렇게 일단락된 듯 보였다. 나는 이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며 시간이 금방 간다고 둘러대곤 가게에서 나갔다. 


내가 센터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까닭은 아니었다. 단지 카논이 더 센터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카논이 센터에 선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런 것뿐, 어떠한 감정의 논리도 끼어들어 있지는 않다. 왜 카논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냐면...... 아마도, 속으로나마 조금은 이 사람을 좋아, 아니 동경하고 있다는 이유로 충분하다. 이걸 만약 카논이나 쿠쿠가 알게 된다면(그런 일은 결코 없겠지만) 절대로 믿지 못할 것이고, 그 점에서 나는 쓸 대 없는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에는 카논이 보고 싶어 했던 가수의 공연을(마침 공교롭게도 이전에 카논과 쿠쿠가 노래했었던 그 무대에서 열린다고 한다) 보러 가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7시가 다 되었지만 한여름 특유의 긴 태양의 광선이 여전히 거리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쿠쿠는 이따금 오늘은 이미 지쳤다고 투덜거리면서 카논의 뒤를 바쁘게 쫓아다녔다.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건조한 눈빛으로 쿠쿠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또 쓸데없는 짓을, 거의 습관적이라고 할 정도로 의미 없는 미소를 카논이 보고 있지 않은 사이에 보내 버렸다. 쿠쿠는 그 대답으로 한쪽 눈을 감으며 입을 삐쭉거렸는데, 그게 카논을 상정한 행동인지 아니면 둘만의 비밀스러운 의사의 표시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대략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앞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는 조금 떨어져 무대 옆쪽에 자리를 잡았다. 쿠쿠는 이제는 거의 칭얼거리면서 카논의 목에 기대듯이 팔을 두르고 있었는데, 나는 반쯤은 어이가 없어서 카논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쏘아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약 노골적으로 카논과 쿠쿠의 관계를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낸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은근히 눈치가 좋은 구석이 있는 쿠쿠에게 나의 낮 동안의 이상했던 태도를 포함한 확증을 주게 될 뿐이라는 상상이 나를 막아섰다.


다행히 카논은 이런 나와 쿠쿠 사이의 미묘한 눈길의 교차를 알아채지 못한 채, 방금 막 시작된 밴드의 연주와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은 별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무대에 집중해보려고 했으나, 어쩐지 전혀 집중되지 않았고 지나치게 큰 음량으로 설정된 스피커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에게는 언젠가 들었던 카논의 노랫소리가 가장 아름다웠으나, 내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헤안나 스미레’의 이미지 덕에, 말해보았자 솔직하지 못하고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는 인상을 줄 뿐이라고 생각해서 금방 단념하고 말았다. 후회해 보았자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조금 겸손했더라면, 두 사람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진솔한 마음을 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좋은 공연이었지- 나도 언젠가 저렇게 부를 수만 있다면......”


“카논이 더 잘 불러.”


“응?”-카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그런 표정이 나에게는 이미 마주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있었다.


“말했잖아. 카논이 더 잘 부른다고. 카논은 분명 더 멋진 무대에 설 수 있을거야. 무도관이라던가. 그런 곳 말이야.”


“고마워? 스미레쨩.”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은 예상과는 달리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눈에 띄게 당황스럽다는 반응과는 별개로 마음은 조금 후련해졌다. 카논은 의아함과 고마움이 적당히 반씩 섞인 눈동자를 하고 나를 곁눈질했다. 분명히 조금 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도 그런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말을 잃어버리고, ‘이 헤안나 스미레가 칭찬해 주었으니 기꺼이 고마워 해야지’ 따위의 말을 내뱉는 듯한 오만한 얼굴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


“쿠쿠, 먼저 돌아가 볼게요...... 오늘은 완전히 지쳤어요.”


“너무 오래 끌고 다닌걸까나? 스미레쨩은 어떻게 할래?”


“나는 아직 괜찮은데. 잠깐 걸을래?”-나는 정직하지 못한 눈길로 쿠쿠의 안색을 살폈으나, 이미 한참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돌이켜보니, 최근 들어서 카논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별히 단둘이 있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때를 속으로는 무척이나 고대했던 듯하나 막상 이런 상황이 오게 되니 쿠쿠가 사이에 끼어 있는 편이 얼마나 불필요한 긴장을 덜어주어 왔는지 그 중요한 역할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잠깐 우리 신사 쪽으로 가줄래? 할 이야기가 있어.”


“혹시 센터에 대한 거라면-” “그런 게 아니니까. 나는 카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나는 어렸을 적 처음 무대에 섰을 때처럼, 목소리가 막을 수 없는 긴장으로 인해 조금 떨리고, 자랑거리였던 꼿꼿한 걸음이 어색해졌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떨림을 알아채 버린 시점에서 떨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대 전의 심호흡 정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단지 가능한 한 빨리 이 사람에게서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이런 나의 내면의 동요를 눈치챘는지 카논은 일부러 이쪽을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는 이 사람은 애초부터 나에게는 관심을 가져줄 만한 여유를, 최소한 쿠쿠에게 주는 만큼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샌가 태양은 높다란 건물 뒤로 지쳤다는 듯 조금씩 숨기 시작하고, 거리 저 앞에서 외로운 가로등 하나에 불이 막 들어왔다. 길가에 놓인 텅 빈 유리병 위에서 금빛 나비가 태양 빛에 날개를 쪼이며 쉬고 있었다. 이대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신사 앞에서 늘 그렇듯 손을 흔들고,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친구에게 보내는 우정의 미소로 만남을 끝낸다면 오늘은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말을-스미레쨩은 혹시-듣지만 않았더라면.


“잠깐. 멋대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무슨 말이라고 스미레쨩은 생각했는데?”-카논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사라지고 앞으로 할 짓궂은 말을 시험해 보려는 듯한, 아이처럼 참으려 해도 결국은 삐져나오고 마는, 그런 미소가 담겨 있었다.


“딱 보면 안다구. 센터를 거절하는 걸 보니 그때의 자신감은 어디로 간 거야? 같은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잖아. 만약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내 대답은, 애초부터-”


“알고 싶었어. 왜 아까부터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나는, 스미레쨩이 원래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고 오늘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로 괜찮다면 말해줄래?”


-카논의 이 반쯤은 맞은 추리도 나를 솔직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생겨난 충동은 오히려 조금 버릇없고-마치 비뚤어진 어린애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의미 없는 호의를 받았을 때처럼-일부러 싫어하는 티를 내는 유치한 행동이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평소대로 행동했을 뿐이야. 오히려 카논 쪽이 오늘따라 유독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럼 마음대로 생각해.”-나는 다급해졌다. “미안해. 사실은 카논의 좋은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스스로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가 버렸다는 예감과는 달리, 카논의 조금 붉어 보이는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스스로 이걸 기회라고 생각하여 곧바로 밀고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마침 때맞춰 노을이 거리 전체에 드리워지고 있었기에 그 빛깔이 정말로 카논에게 나타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이야? 말해 줄래?”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그런 걸 떠나서 카논은, 언제나 친절해.”-나는 무척이나 듣기 흉하게 더듬거리면서도 간신히 말했다.


“고마워? 스미레쨩.”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카논이 이미 눈치채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답은 정해진 채 변하지 않았고, 멋대로 이리저리 착각하면서 상상을 부풀려 나가고 조바심을 냈던 건 이쪽의 실수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느새 신사 바로 밑 계단에 도착해 있었다. 이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평온한 발걸음을 연기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면 오늘의 일은 없었던 것이 되겠지. 다음 연습 때 만나면 나는 또 평소의 나로 되돌아가고, 앞으로 카논과는 이대로 쭉-


오른손을 뻗어 카논의 어깨를 붙잡고, 힘을 주어 이쪽으로 끌어당겨 가까이 마주 보게 했다. 나는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모이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은 카논의 얼굴만큼 부끄러워지는 것은 없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입술에 내 입술을 살며시 포개두고 쓰다듬듯 입술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움직였다. 달콤하고 기나긴 꿈 같은, 그 순간만큼은 영원한 입맞춤에서 아쉬움으로 눈을 떴을 때, 카논의 긴 속눈썹이 뺨 위에 초승달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뺨을 불덩이처럼 한 채 가만히 카논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한 쪽 손은 카논의 어깨를 감싼 채, 나머지 한 손을 카논에 볼에 가져다 대보곤 안심했다. 그곳에만 여름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카논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나, 잡고 있는 어깨에서 카논이 키스할 때부터 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스미레......”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어떻게든 말을 건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을 위한 단 한마디의 말은 아마도 이런 것. “카논, 나는-” 카논의 얼굴이 깜빡이듯 순간 어두워졌다. 태양이 어느새 완전히 져 버린 것이다. 


12시가 되어 마법이 사라져버린 신데렐라처럼 나는 계단을 도망치듯 달려 오르면서 끊임없이 해야만 했던 말을, 이미 잊어버리고 싶은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뒤에서 똑같이 계단을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으슥한 신사의 풍경이 비틀거리는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은 매일 읽는데도, 그 참을 수 없이 말하고 싶었던, 오직 그 한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텅 비어있는 신사의 정적은 거친 숨소리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일종의 체념이 담긴 쓰라린 시선으로 카논을 마주하였다. 숨을 힘들게 고르면서도 그 눈빛은 심장의 깊은 곳에서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도망쳐 버렸지만 카논은 끝까지 쫓아와 주었고, 나는, 아마, 그런 점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나에겐 없는 끝을 내는 용기를, 이 사람만은 처음 만났던 그 자그마한 순간에서조차 누군가에게 전해 줄 수 있을 만큼 가득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가지 말아줘.” 


나는 단지, ‘카논을 사랑해’라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하고 싶어했다. 이 말은 거의 날개치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내 유별난 자존심이 또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카논이 빛이 일렁이듯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는 순간 말하자. 앞으로 조금만 더-


눈을 뜬 순간 나는 자유롭게 달려가는 카논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약간 걸렸다. 나는 새로 덧씌워져 생생하게 살아있는 입술 위의 감촉을 망연하게 한참이나 매만졌다. 카논이 가고 난 저녁부터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더위에 하룻밤을 그대로 밝혔다. 다음날 연습에 내가 피로 반 부끄러움 반으로 고민 끝에 나타났을 때, 카논은 “스미레쨩 오늘도 얼굴이 빨갛네-” 하고 능글거리고, 쿠쿠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完)



센터는시즈쿠 선추후감상 2021.09.05 15:23:18
계란마리 뭐야 창작이야 번역이야? 술술 읽히네 좋다 2021.09.05 15:29:33
Sakulight 창작이요 2021.09.05 15:30:30
계란마리 와 지리네 스미카논 붐 오냐 2021.09.05 15:32:24
Sakulight 2021.09.05 15:33:38
신흥5센요 2021.09.05 15:37:52
센터는시즈쿠 필력 실화냐....미쳤다 2021.09.05 15:41:53
불꽃놀이. 2021.09.05 15:48:24
리코쨩마지텐시 2021.09.05 16: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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