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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사쿠라우치 리코. 2학년 사쿠라우치 리코는 자금 즉시 이사장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난데없이 마리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온 교실에 울려퍼진다.
난 샌드위치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클래스메이트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로 꽂힌다.
...뭘까 이거
신종 괴롭힘?
권력을 적극 이용한다는 점에서 질이 아주 나쁜데.
[리코쨩?...뭔가 했어?]
[범죄?! 범죄는 아니지 리코쨩? 괘...괜찮아! 나는 언제나 리코쨩 편이니깐!]
[에엣, 범죄?! 그거 큰일 아냐?!]
옆에서 같이 식사중이던 요우쨩과 치카쨩이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더니 손을 붙잡고 꺄아 꺄아 거린다.
후훗, 귀여운 아기고양이들 같으니.
너희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범죄를 불러오는 거라구.
그래, 그것은 죄악 그 자체.
...뭐라는 걸까, 나는.
아무래도 욧짱에게 너무 물들어버린 모양이다.
[그럴리가 없잖아. 어차피 별 것 아닐 거야. 잠깐 다녀올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정리한 뒤 이사장실로 향했다.
이사장실의 문을 두드리니 들어와- 하는 하이텐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마리씨는, 창문을 등지고 몸에 맞지 않는 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잔뜩 폼을 잡은 모습은 영화 대부의 한 장면이라도 연출해보려고 했던 듯 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마리씨인 이상 여러모로 아웃이다.
[흐응~리코, 어서 와. coffee? 아니면 tea? 그것도 아니면...나?] [커피로 할게요, 제가 내릴 테니까 앉아계세요.]
진부한 만담을, 나는 가볍게 흘려보낸다. 아직 무르군요 마리씨.
저는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쿄에서 왔다는 사실, 잊으셨나요?
과거에 정체되어있는 시모네타는 통하지 않는답니다.
귀국자녀라고 봐주지 않는다구요?
[oh~no no! guest는 그냥 seat down 해 있으면 되는 거라구? watashi가 할 테니깐~]
아니, 와타시는 영어가 아닌데 말이죠, 발음을 굴려 봤자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같이 하죠.]
[ok~]
마리씨가 로스팅한 커피를 꺼낼 동안, 나는 드리퍼 같은 도구들을 꺼내 준비한다.
길티키스 관련해서 셋이 만날 때는 거의 야바 커피 아니면 이사장실이었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준비를 끝내고 물을 부은 뒤, 마리씨와 나는 나란히 서서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
마리씨의 귀국자녀 컨셉, 슬슬 어쩔까 싶지...
진짜 귀국자녀긴 해도 말야.
many, much도 헷갈리는 영어 실력이니까. 곤란하잖아.
2년 동안의 유학은, 그 임팩트있는 헬기 퍼포먼스는 대체 뭐였던 건가요.
카난을 내 몸과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주위엔 카난 이상으로 나이스 바디인 숙녀들 천지, 그들과의 연애로 바빠서 영어 공부는 할 새도 없었다.
이런 스토리인가요.
그렇다면 용서해드리도록 하죠.
뭐, 무늬뿐인 이사장이라고 해도 스쿨 아이돌과 겸업해서 여러모로 힘내고 있는 것 같으니...영어같은건 쳐다볼 새도 없겠죠.
이 리틀데몬1호는 2호가 정말 자랑스럽답니다. 계속 힘내주시길.
사이좋게 한 잔씩 커피를 나눠 들고, 우린 이사장실 쇼파에 마주본 채로 앉았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나와 다르게, 비스듬히 쇼파에 기대 슬쩍 다리를 꼬는 마리씨.
드러난 매끈한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역시 아쿠아 최고의 바디.
눈이 즐겁네.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하반신 전체를 천천히 핥아올라가고 싶어.
마리씨는 내 머리를 눌러 막으려고 할 테지만 그 손에 힘은-
[어딜 보는 걸까나~ 엣치 스케치 사쿠라우치씨~]
마리씨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차, 잠깐 정신을 놓고 말았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마리씨의 몸...역사 대단해. 방심할 수가 없네.
나는 커피를 들어, 말라오는 입 안을 적셔주였다.
진정하자.
욧쨩에게 무릎베게를 해 주고 경단을 만지는 상상을 하자.
...
후우...됐다.
마음이 저기 북유럽 어딘가의, 아무래도 좋은 호수처럼 평화로워졌다.
욧쨩 효과, 대단해~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놓고 있는데, 눈이 안 가는 게 이상하죠. 조금은 몸단속을 하시는 게 어때요?]
[no problem~ 뭐 어때, 나랑 리코 사인데.]
[에...]
곤란한데~ 나랑 리코 사이라고 하셔도...
저랑 섹x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응.
아무 사이 아니네.
[그런데, 왜 난데없이 방송으로 절 부르신 거죠?] [그게...]
쇼파에서 몸을 뒤척이더니 얼굴을 찌푸리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는 마리씨. 드물게도 난처해하는 모습이다. 그 마리씨가 얘기하기 힘든 일이라니, 도대체 뭐지?
치카쨩네 말처럼, 설마 나 범죄라도 저지른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만 나는 짐작가는 게...
...
성추행?
좋아.
최고의 변호사를 구해 주세요. 오하라 마리씨. 돈은 몸을 바쳐서 어떻게든 할 테니까.
[...리코 말야. 최근 카난이랑, 뭔가 있지 않아?]
엣. 이건...
설마 그건가.
그래.
그거밖에 없지.
본처의 질투.
카나마리 왔다아아아아!!!!
나는 벌떡 일어나 승리 포즈를 취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머리끝까지 희열이 차올라서, 저절로 콧김이 나왔다.
그치만 카나마리라고?
망상이 아닌 거지?
내 인생에 리얼 순도 백퍼센트 카나마리를 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런데.
카난 선배랑 마리씨, 진짜로 그런 관계였구나.
기쁜데.
정말로 기쁜데도.
어쩐지 마음 한쪽이 바람이 스쳐간 것처럼 시려왔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 사쿠라우치 리코.
[으음~뭐라고 할까, 리코는 항상 멤버들에게 힐끔힐끔 엣찌한 시선 보내는데 말야. 카난에게 보내는 시선은 요즘들어 조금 다르달까? 좀 더 sensitive? tender? emotional 한 느낌이지~]
...마리 씨는 예리하구나. 그런데 잠깐만.
앞부분이 좀 신경쓰이는데요.
야한 눈으로 보고 있던 거 다 들켜버리고 있었던 거야?
정말입니까
여태까지 아쿠아 내에서 내 이미지, 어른스러운 쿨뷰티에 상식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변태 여자애였던 거야?
자연스럽게 하교하는 욧짱과 요우쨩의 모습이 머리에서 그려진다.
(최근 리리, 우리 가슴 너무 보지 않아?)
(앗, 요시코쨩도 느꼈어? 연습하는데 자꾸 시선이 느껴져서, 솔직히 좀 소름끼쳐)
(그러니까 요하네!...뭐, 참는 데도 한계가 있고 말야. 그만 해 줬으면 하네~)
(맞다. 리틀데몬 1호 자리 비는데, 요우 선배가 할래?)
위험해 상상 이상으로 마음이 아프다.
크윽...욧쨩...욧쨩에게 미움 받아 버리면 이 리틀데몬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에...엣찌한 시선이라니? 마리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나?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들려줬으면 하는데.]
[어라~신경 쓰이는 건 그쪽이야? 안심하라구. 아직 나 밖에 눈치 챈 사람 없는 것 같거든. 둘만의 s.e.c.r.e.t 이니깐♡]
에헷, 하고 내게 윙크하는 마리상. 짜증난다.
엉망진창으로 범해버리고 싶네요.
내 밑에서 깔린 채로 잘못했다고 울부짖게 만들고 싶네요.
그래도 다행이야.
모두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내게 스킨십해오거나 하지 않게 될 테니까.
내가 마신 물병에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대는 요우쨩의 모습도
내가 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는 치카쨩의 모습도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런 건 싫어.
...마리씨는 뭐, 들킨 이상 이제부턴 대놓고 감상해버릴까나~
좋아- 마리씨. 마음껏 약점 잡아 주세요.
그 약점으로 나를 협박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오히려 부탁드립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세요. 돈다발로 이런 곳이나 저런 곳이나 찰싹찰싹 때려 주세요.
[리코.]
평소의 하이 텐션인 목소리가 아닌, 차분하고 진지한 마리씨의 목소리가 나를 망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린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네.] [솔직히 말해 봐. 카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생각하냐니-
물론 좋은 선배.
착하고, 멋지고, 의지할 수 있는.
하지만 지금 마리씨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간 아마 화를 내겠지.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 아닌 진지한 대답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야.]
좋아하고 있어요. 절대로 나오지 못하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카난 선배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가볍게 떠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마리씨는 왜 내게 대답을 강요하는 거야?
서러움이 북받쳐오른다.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다 내려놓고 울어버릴것만 같다.
마리씨의 상냥함에 의지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선 안 돼.
모두 나에게 기대고 있으니까, 내가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돼.
[...치카쨩이랑 요우쨩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먼저 가 볼게요.]
나는 일어서서 도망치듯 이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마리씨가 따라나오려는 기색은 없다.
나는 그대로 벽에 기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았다.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려보낸다.
[...리코쨩?]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린 쪽, 계단에는,
치카쨩과 요우쨩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들켰다.
울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좋은 거야?
틀렸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아...
치카쨩과 요우쨩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 이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둘을 피해 복도를 내달렸다.
...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서인지 요우쨩에게 뒤에서 꼬옥 안겨져 있었다. 나 잡혀버린거구나.
뭐, 당연한가. 매일매일 운동 삼매경인 체육계 소녀에게 나같은 인도어파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고 요우쨩, 아무리 그래도 치카쨩이 보고 있는 앞에서 백허그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
치카쨩이 위험한 속성에 눈 떠버릴지도 모른다구?
얀데레니 네토라레니 가상 세계에서는 어떨까 싶지만 현실에서는 그냥 범죄니까.
[...요우쨩, 놔 줘.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싫어.]
그러십니까. 그러면 할 수 없지만.
포기하고 모처럼 달라붙어 온 요우쨩의 몸을 마음껏 즐기려고 했더니, 치카쨩이 내 앞으로 와서 손을 잡았다.
...치카쨩,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은 날 좀 내버려뒀으면 하는데.
누구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니까.
우는 모습 들킨 것도 부끄럽고
마음도 정리가 안 됐고
여러가지로 엉망진창이란 말야.
[리코쨩, 줄곧 걱정하고 있었다구. 요즘 리코쨩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리코쨩은 똑똑하니까 혼자서도 잘 할거라고 생각해서 놔두었어. 그런데 리코쨩이 울고 있으니깐...] [미안, 치카쨩 요우쨩. 그래도 이 건에 대해서는 나 혼자 더 생각해보고 싶어.]
[그치만 리코쨩, 잔뜩 혼자서 생각한 결과가, 이렇잖아.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잖아. 도와...]
[치카쨩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엣.]
그만 소리질러버리고 말았다.
처음 고성을 내기 시작할 때부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치카쨩의 손이 천천히 내게서 떨어져간다.
난 도저히 치카쨩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내리깔았다.
[응...미안]
울고 있는 것인지, 치카쨩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 새 내게서 떨어진 요우쨩은 치카쨩의 어깨를 끌어안고, 톡톡 상냥하게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준다.
그리고 그대로 치카쨩을 데리고,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자 잠깐...]
뒤늦게 손을 뻗어보지만, 요우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카쨩을 데리고 가버렸다. 난 내뻗은 손을 거두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나는.
최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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