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자마자 이상한 걸 느꼈다.
가슴이 무거웠다.
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상한데, 정말로 그랬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가슴께에 낯선 무게가 먼저 따라왔다. 이불이 미끄러지고, 후드티 안쪽에서 말도 안 되는 볼륨이 흔들렸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천장을 보고.
이불을 보고.
다시 내 몸을 봤다.
“……어?”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낮고 맑았다.
당황해서 낸 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차분하게 들렸다. 누가 옆에서 들었으면 별로 놀란 사람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지르려 했다.
“아.”
비명도 쿨했다.
망했다.
뭔가 크게 망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평소보다 짧아진 다리가 허공에서 허둥댔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감각도 이상했다. 침대 높이가 갑자기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침대가 달라진 게 아니었다.
내가 작아졌다.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길고 희었다.
손목은 얇았고, 손등에는 어젯밤 컨트롤러 스트랩이 눌러 만든 자국이 없었다. 손톱 끝은 둥글고 깔끔했다. 내 손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정했고, 남의 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멍하니 손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따라왔다.
너무 잘 따라와서 더 이상했다.
“꿈이겠지.”
말해놓고 바로 후회했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아니, 이 와중에 그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낮고, 맑고, 살짝 무심한 여자 목소리였다. 애교 섞인 하이톤이 아니라, 차갑게 정리된 물 같은 소리.
내 말투가 그 목소리에 얹히니까 이상하게 더 민망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몸의 중심이 한 번 흔들렸다.
가슴 때문이었다.
분명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앞쪽의 무게가 내 균형을 조금씩 바꿨다. 그렇게까지 크게 움직이는 건 아닌데, 의식하는 순간 온몸이 어색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보지 말자.
아니, 봐야 했다.
이건 내 몸이니까.
아니, 내 몸인가?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문장이 꼬였다.
나는 결국 양손으로 후드티 가슴께를 눌러 잡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걷는 동안 머리카락이 볼을 스쳤다.
짧은 머리였다.
그런데 내 머리보다 훨씬 부드럽고 가벼웠다. 턱 아래까지 떨어지는 숏컷. 고개를 움직이면 앞머리가 눈가를 살짝 가렸다가 돌아갔다.
그 감각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머리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피직스본 값을 세 번이나 수정했으니까.
나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거울 속에는 숏컷 미소녀가 서 있었다.
차분한 눈매.
짧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
흰 피부.
작은 얼굴.
입꼬리는 거의 올라가 있지 않은데, 이상하게 무심한 미소처럼 보이는 얼굴.
쿨뷰티.
내가 아이리를 처음 샀을 때, 상품 페이지에 적혀 있던 홍보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オリジナル3Dモデル「愛莉」Ver.1.01』
가격.
5,500엔.
나는 그걸 새벽 세 시에 샀다.
그때는 그냥 예뻐서 샀다.
진짜 그냥.
헤어가 마음에 들었고, 표정이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기본 의상도 깔끔했다. 가슴이 좀 많이 크긴 했지만, 아바타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왜 지금 그게 내 몸으로 거울 앞에 서 있냐고.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내 얼굴을 만졌다.
거울 속 나의 아이리도 똑같이 손을 올렸다.
볼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턱선은 작았다.
입술은 얇게 닫혀 있었다.
눈을 조금 가늘게 뜨자, 상품 페이지에서 봤던 그 무심한 표정이 그대로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와.”
감탄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처음 나와야 하는 말이 그게 아니어야 하는데.
거울 속 아이리가 너무 잘생기게 예뻤다.
예쁜데 귀엽다기보다, 날카롭게 정돈되어 있었다. 웃지 않아도 그림이 되는 얼굴. 대충 서 있어도 분위기가 생기는 얼굴.
내가 유니티에서 쉐이프키를 열심히 만졌던 얼굴.
기본 아이리보다 눈매를 더 낮추고, 입꼬리를 덜 올리고, 볼 홍조를 줄였다. 너무 귀여운 쪽보다는 시크한 쪽이 좋아서.
그 결과물이 지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사락, 하고 움직였다.
“아니.”
나는 바로 자세를 되돌렸다.
“지금 감상할 때가 아니잖아.”
목소리가 차분해서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세면대를 붙잡고 다시 거울을 봤다.
아이리의 몸.
아이리의 얼굴.
아이리의 큰 가슴.
새로 넣은 숏컷.
아이리의 손.
그런데 눈동자 안쪽에서 당황하고 있는 건 분명히 나였다.
하도윤.
어제까지 VRChat에서 아이리를 쓰던 사람.
오늘 아침부터 아이리가 되어버린 사람.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무섭기보다는 당황스러웠고, 당황스러운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 * *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들었다.
Face ID는 당연히 실패했다.
“그렇겠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작아서 그런지 키보드가 묘하게 넓게 느껴졌다. 그래도 금방 익숙해졌다. 화면이 열리자 디스코드 알림이 쌓여 있었다.
[미카: 도윤아 어제 왜 갑자기 나감?]
[푸딩: 오늘도 그 숏컷탈코페미 아바타 끼고 와라]
[유리: 근데 도윤이 이번 아이리 진짜 잘 어울림]
나는 세 번째 메시지에서 손을 멈췄다.
아이리.
그건 내 이름이 아니다.
아바타 이름이다.
내 닉네임도,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도 계속 도윤이었다. 누가 나를 아이리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도윤이 쓰는 그 아이리.”
“도윤 그 숏컷 아바타.”
“그거 원본 아이리였나?”
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도윤이 쓰는 아이리.
그 말이 이상해졌다.
나는 지금 아이리를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이리였다.
나는 답장을 치려다가 멈췄다.
뭐라고 보내야 하지.
나 지금 그 아이리 됐음?
이거 버그임?
혹시 너희도 자고 일어나면 아바타가 됐냐?
아무 문장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장 평범한 답을 보냈다.
[도윤: 늦게 자서]
곧바로 답이 왔다.
[미카: ㅋㅋㅋㅋㅋ 또?]
[미카: 오늘 접속함?]
[도윤: 몰라]
[푸딩: 몰라는 접속한다는 뜻임]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짧게 새어나온 웃음이 방 안에 떨어졌다.
맑았다.
그리고 낮았다.
나답지 않은데, 이상하게 나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옷장을 열었다.
밖에 나갈 생각은 없었다.
없었는데, 일단 옷은 갈아입어야 했다.
지금 입고 있는 건 어제 입고 잔 반팔과 트레이닝 바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옷인데 바뀐 몸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반팔은 어깨가 흘러내렸고, 가슴 부분에서 이상하게 당겼다. 바지는 허리에서 줄줄 내려갔다.
나는 옷장 안쪽을 뒤졌다.
큰 후드티.
검은색.
평소라면 대충 입고 나가는 옷이었다.
지금 입으니 손등까지 소매가 내려왔고, 밑단은 허벅지를 덮었다. 문제는 가슴이었다. 후드티가 크면 가려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실루엣이 묘하게 더 살아났다.
“……이건 좀.”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숏컷.
검은 후드티.
말없이 서 있는 쿨한 얼굴.
그 아래로 숨길 수 없는 큰 가슴.
망했다.
이건 너무 잘 어울렸다.
나는 후드 끈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한쪽 어깨를 살짝 내리고 서 봤다.
바로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한 번 더 봤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
이제 진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PC.
VRChat.
아바타 데이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조금 높았다. 발이 바닥에 완전히 닿지 않았다. 짜증이 나야 하는데, 어쩐지 웃겼다. 나는 의자를 낮추고 마우스를 잡았다.
마우스가 컸다.
키보드도 컸다.
세상 전체가 살짝 커진 것 같았다.
VRChat 홈페이지에 로그인했다.
계정은 그대로였다.
닉네임도 그대로.
Doyun
프로필 사진도 어제 찍은 아이리 사진이었다.
나는 업로드한 아바타 목록을 열었다.
내 아이리가 있었다.
썸네일 속 아이리는 지금 거울 속 나와 거의 같았다.
단 하나 달랐다.
썸네일 속 아이리는 훨씬 더 완벽하게 침착했다.
나는 지금 그 완벽한 얼굴로 계속 허둥대고 있었다.
아바타 설명란에는 내가 적어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아이리 수정본_v12]
[숏컷 피직스본 수정]
[표정 메뉴 정리]
[가슴 쉐이프키 100]
[입꼬리 낮춤]
[쿨한데 말 걸기 어렵지 않은 느낌]
나는 마지막 줄을 보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쳤나 봐.”
미친 건 맞았다.
내가 너무 성실하게 나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배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륵.
거울 속 쿨뷰티 미소녀가 배고픈 표정으로 굳었다.
아.
이건 안 쿨했다.
냉장고에는 물밖에 없었다.
편의점에 가야 했다.
나는 현관 앞에서 3분 동안 서 있었다.
운동화를 신는 것도 일이었다.
발이 작아져서 신발이 헐렁했다. 끈을 꽉 묶어도 뒤꿈치가 조금 남았다. 결국 대충 신었다.
모자를 쓸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숏컷이라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아니, 숨겨야 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였지만.
나는 심호흡했다.
“물만 사고 온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이 목소리로 말하면 이상하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을 열었다.
복도 공기가 볼에 닿았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 * *
편의점까지 걸어서 3분.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이었다.
오늘은 모든 게 조금 달랐다.
바람이 목덜미에 닿는 느낌.
후드티 안쪽에서 몸이 움직이는 감각.
머리카락이 귀 아래를 스치는 느낌.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
노골적이진 않았다.
다만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와 어깨가 스칠 뻔했을 때, 상대가 먼저 살짝 비켜줬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너무 단정하게 나왔다.
상대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리고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괜히 당황했다.
별일 아니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나는 물과 삼각김밥, 캔커피를 집었다. 계산대로 가는 동안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나의 아이리가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후드티를 입고, 헐렁한 운동화를 신고, 한 손에 생수를 든 숏컷 미소녀.
표정은 무심한데 자세가 조금 어색했다.
그게 웃겼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았다.
계산대 직원이 말했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 네.”
대답하고 나서 내가 놀랐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목소리가 몸에 딱 맞았다.
직원은 봉투에 물건을 담아주며 한 번 더 물었다.
“영수증은 버려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숏컷 머리카락이 볼 옆으로 떨어졌다.
직원이 잠깐 시선을 피했다.
나는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편의점 앞에서 멈췄다.
바람이 불었다.
후드티가 살짝 흔들렸다.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보았다.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말이 안 되는데.
어울렸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이 모습으로 동네 편의점에 와야 했던 사람처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루쯤은…….”
말하다가 멈췄다.
하루쯤은 뭐.
하루쯤은 괜찮다고?
하루쯤은 이대로 있고 싶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이건 해결해야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디스코드 전화가 왔다.
미카였다.
나는 물건을 내려놓고 화면을 노려봤다.
받을까.
말까.
목소리가 바뀐 건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도 말투는 나다.
내가 나인 건 변하지 않았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잠깐 침묵.
이어폰 너머에서 미카가 말했다.
“……도윤아?”
“왜.”
“너 마이크 바꿈?”
“아니.”
“보이스 체인저?”
“아니라니까.”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나는 입술을 눌렀다.
거울 속 아이리도 입술을 눌렀다.
이 얼굴로 무뚝뚝하게 있는 건 반칙이었다. 내가 봐도 그랬다.
“목이 좀 갔나 보지.”
“목이 갔는데 왜 좋아짐?”
“끊는다.”
“아니, 아니. 끊지 마. 근데 진짜 신기하다. 말투는 완전 도윤인데 소리만 되게…….”
미카가 말을 고르는 동안 나는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
손가락이 작아서 비닐이 잘 안 뜯겼다.
짜증이 날 뻔했는데, 뜯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쿨뷰티 미소녀가 삼각김밥 비닐과 진지하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결국 웃어버렸다.
미카가 바로 반응했다.
“야.”
“왜.”
“방금 웃은 거 뭐임?”
“웃으면 안 되냐.”
“아니, 그냥. 너 그런 식으로 웃는 거 처음 들어서.”
나는 손을 멈췄다.
“그런 식이 뭔데.”
“좀…… 편해 보이는 식.”
미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 그 아바타 쓸 때도 그렇잖아. 뭔가 평소보다 덜 날 서 있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각김밥 비닐이 드디어 뜯겼다.
김이 조금 찢어졌다.
나는 그걸 괜히 오래 봤다.
미카가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도윤이 그 아바타 쓸 때 제일 자연스럽긴 함.”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렇다니까. 어제도 푸딩이랑 얘기했음. 도윤은 쿨뷰티가 적성이라고.”
“내 적성 이상하네.”
“좋은 거지. 어울린다는 뜻인데.”
나는 삼각김밥을 한입 먹었다.
맛은 그대로였다.
참치마요.
그런데 이상하게 더 맛있었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는데, 참치마요는 그냥 참치마요였다. 그 평범함이 웃겼다.
미카가 물었다.
“오늘 접속할 거야?”
나는 거울을 봤다.
내 아바타가 삼각김밥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큰 후드티.
숏컷.
무심한 눈매.
입가에 붙은 김 한 조각.
나는 급히 김을 떼었다.
“몰라.”
“또 몰라네. 접속한다는 뜻이네.”
“진짜 모른다니까.”
“도윤아.”
“왜.”
“오늘 좀 귀엽다.”
나는 그대로 기침했다.
삼각김밥이 목에 걸릴 뻔했다.
“뭐래.”
“반응 개빠르네.”
“끊는다.”
“아니, 진짜 끊지 말고. 목소리 때문인가? 평소보다 놀리는 맛이 있음.”
“너 진짜 끊는다.”
“알겠어, 알겠어. 이따 들어와. 오늘도 그 아바타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그 아바타로 접속할 수 없었다.
이미 그 아바타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통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한참 이어폰을 빼지 못했다.
방은 조용했다.
모니터에는 아이리 수정본 썸네일이 떠 있었다.
거울 속에는 그 수정본이 삼각김밥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서 웃었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웃으니까 아이리의 눈매가 조금 풀렸다.
쿨하던 얼굴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만든 표정이었다.
표정 메뉴 3번.
‘살짝 웃음.’
너무 환하게 웃는 건 부담스러워서, 입꼬리만 아주 조금 올라가게 만든 표정.
그게 지금 내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만졌다.
“……잘 만들었네.”
작게 말하고 나서,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나를 칭찬한 것 같아서.
아니, 정확히는 내가 만든 아이리를 칭찬한 거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조금 애매했다.
* * *
밤이 됐다.
나는 결국 VRChat에 접속하지 않았다.
아니, 접속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이리였으니까.
대신 PC 앞에 앉아 아이리의 상품 페이지를 열었다.
5,500엔.
구매 완료 표시.
샘플 이미지 속 아이리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세상 모든 걸 적당히 흘려보낼 것 같은 얼굴.
나는 화면 속 아이리와 거울 속 나를 번갈아 보았다.
화면 속 아이리보다, 거울 속 아이리가 조금 더 허술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처음 보는 알림이었다.
앱 이름도 없었다.
그냥 흰색 창 하나.
[Avatar Recovery Available.]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래에 문장이 이어졌다.
[원래 신체 정보로 복구하시겠습니까?]
버튼은 두 개였다.
[YES]
[NO]
나는 숨을 멈췄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나온 걸지도 몰랐다.
당연히 YES를 눌러야 했다.
오늘 하루가 아무리 이상하게 괜찮았어도, 이건 원래대로 돌려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하도윤이다.
아이리는 5,500엔에 산 아바타다.
친구들도 나를 도윤이라고 부른다.
나는 도윤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맞다.
손가락을 들어 YES 위에 올렸다.
그 순간 거울 속 아이리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후드티.
숏컷.
차분한 눈매.
너무 큰 가슴 때문에 아직도 자세가 조금 어색한 몸.
그런데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주 작게.
내가 만든 표정 메뉴 3번처럼.
나는 손가락을 내리지 못했다.
이상했다.
돌아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안심보다 먼저 아쉬움이 왔다.
오늘 하루는 별일 없었다.
편의점에 갔다.
삼각김밥을 먹었다.
친구와 통화했다.
거울을 너무 많이 봤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았다.
말이 안 되게 좋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루만 더.”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맑았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결정처럼 들렸다.
나는 YES 위에 있던 손가락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아직 누르진 않았다.
그냥.
눈이 계속 NO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