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홍(교육전문가)
잉여인간의 위기
아버지: 니가 사람이냐?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왔어? 이 따위 성적으로 대학을 가? 당장 학교 때려 쳐.
현수: 저 대학 안 갑니다. 예, 때려 칠게요.
아버지: 뭐?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어?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알어? 이렇게 속 썩이려면 차라리 나가 죽어라. 나가 죽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학교성적은 엉망인데 기타나 치며 빈둥거리는 아들 현수를 향해 아버지가 야단치는 장면이다.
잉여인간이란 말은,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들이 당시 능력과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료하게 소일하는 귀족들, 그리고 부패한 정치와 사회 앞에서 이렇다 할 결단이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삶을 소모하는 지식인들을 일컫는 데서 왔다.
오늘날 인터넷시대의 잉여인간의 모습은 19세기 때와는 다르다. 온라인에서 활동을 하지만 남들이 올려놓은 것을 즐기고 감탄만 하는 수동적 인간이 오늘의 잉여인간이다.
또한, TV가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화면 앞에 죽치고 잠자코 앉아“죽도록 즐기기”를 유도했다면, 인터넷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에게 보여지고, 알려지고, 인정받고, 남들과 항상 연결되어 있기를 소원하도록 만들었다.
인터넷시대의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테러리스트의 공격도, 경제침체도, 대학낙방도 아닌 무명씨로 남아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남들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잉여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인터넷 등장이 새로운 친구를 더 많이 만들고 그들과의 관계를 가까이 만들어 주는 듯했다. 하지만, 트위터에 몇 명의 친구와 방문객이 맞팔(서로 친구하자), 소통(댓글달며 놀자), 선팔(먼저 친구신청하면 나도 해주겠다)신청을 했나, 그리고 페이스북에 좋아요(like) 버튼을 몇 명이 눌렀나를 수시로 확인하며 숫자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자존감이 롤러코스트를 타게 되었다.
나아가, 이어폰을 귀에 꼽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즐기는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 사람들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소셜 미디어 사용자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것을 심각하게 듣고 보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에너지드링크를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처럼, 테크놀로지의 기술로 연결되어 디지털 발자취(digital trace)를 서로가 남기지만 인간의 피부와 피부가 닿는 연결점은 얄팍하기 짝이 없다.
바로 그 얄팍함이 외로움/심심증을 증폭시켰다. 이에 따라, 나는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필연성이 없어지고 잉여인간으로 느껴진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은 인간을 길에 굴러 다니는 돌로 여겼다. 길가의 돌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우연히 있을 뿐, 거기에 있거나 없거나 전혀 지장 없는 잉여물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필연적 이유나 어떤 임무를 지니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원치도 않았는데 우연하게 태어나 왜 사는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표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로깡땡은“살로(치사스러운 놈)”라고 불렀다. 테크놀로지는 무수한 청소년들로 하여금 로깡땡에게 맞팔신청을 하게 만들었다.
19세기 산업혁명 때의 문제는 새로 형성된 노동자계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었지만,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기의 문제는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잉여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바뀌고 있다.
로깡땡에게 맞팔신청을 한 청소년들이 겪을 위기는 삶의 의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로봇 앞에서 인간 자체라는 것이 쓸모 없구나 라는 존재감의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