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이상 블렌더를 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요, 저는 이제 블렌더 화면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메쉬를 전부 망가뜨릴것만 같아서, 내가 이전에 어떻게 해 나갔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한 채 그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뿐 입니다.
제가 건드리는 모델링은 도저히 무언가로 거듭나기를 거부합니다. 핏을 맞추려 하는 의상들은 나를 정말 싫어하는 것인지 금방 쪼그라들어 내게 못생긴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본들이 달그락거리며 저를 비웃습니다. 더 이상 블렌더는 내게 안정을 가져다 주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내게서 블렌더를 들어내면 무엇이 남는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겐 결국 사랑뿐 남겠지요
사랑이 남는다는 것은 내게 3개월 간격으로 대상이 바뀌는 호르몬 놀음 뿐이 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제 장례식에서 부디 제 모델링을 숨겨 주세요.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초심자의 무모한 발걸음이 차마 마르지 못한 길바닥에 찍혀 흉한 자국이 되었을 뿐입니다.
아 그래도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진심으로 내가 살던 시간 중에서 가장 행복한데 왜 하필 이럴 때 나는 붙잡던 명줄에서 미끄러져서 휙 날아가버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