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쳐도 물기는 어딘가 남는다. 화요일 저녁, 나는 지하철 3번 출구 옆 곁길로 내려가 이름 모를 소극장에 들어갔다. 포스터에는 “전생 상영―1일 1회.” 그 아래 작은 활자로 “환불 불가, 기상 악화시 딜레이 가능.” 매표 창구엔 단정한 앞머리의 직원이 있었고, 손톱은 바다빛 에나멜로 칠해져 있었다.
“혼자예요?” 그녀가 물었다.
“네, 대개 혼자에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늘 손님은 한 분 뿐이에요. 좌석은 D열 12번. 거기는 늘 비워둬요.”
왜 늘 비워두는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표는 얇았고, 종이 냄새가 났다. 종이 냄새는 오래된 비닐봉지의 냄새와 은근히 닮아 있다. 나는 표를 접었다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극장 안은 적당히 차가웠다. 따뜻함의 반대말이 꼭 추움은 아닐 때가 있다. 상영 전 안내 자막이 떴다. “핸드폰 전원 OFF. 상영 중 대화 불가. 당신이 과거였던 사람의 집중을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괄호 안에는 영어 번역이 조악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껐다. 누군가의 집중을 방해할 이유가 오늘의 나에겐 없었다.
불이 꺼지고, 화면이 켜졌다. 흑백이다. 가느다란 바람이 모래 위를 훑듯이, 스크래치가 프레임을 가로질렀다. 첫 장면은 바람 많은 항구였다. 깃발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쉬지 않고 흔들렸다. 그 앞에 우편 가방을 멘 남자가 지나갔다. 그 남자의 윗입술 오른쪽에 점이 있었다. 나는 그 점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눈도 먼저 그 점을 찾는다.
상영 속 나는—아니, 그 남자는—항구의 레코드 가게 앞에서 멈췄다. 문 위의 방울이 번쩍였다. 안에는 낮게 돌아가는 팬이 한 대, 그리고 여자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턱 아래에 작은 두 번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카운터 위에는 ‘BILL EVANS—NEW JAZZ CONCEPTIONS’라는 자켓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는 지갑에서 두꺼운 지폐 한 장을 빼내며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이 말했다. “이건, 밤에 어울리네요.”
사람은 입 모양으로 많은 것을 말한다. 그 밤, 그 남자는 레코드를 봉투에 넣어 가방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의 여자는 그에게 뭔가를 손에 쥐여주었다. 작은 은수저. 손잡이 안쪽에 얇게 ‘K’와 ‘N’이 새겨져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작은 방. 모서리가 둥근 탁자, 낡은 스탠드, 두꺼운 유리컵, 얼음 세 개. 창문 밖으로는 전깃줄 위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균형을 잡고 있었다. 나는 얼음이 녹아가는 속도를 보며 아마 여름이겠거니 생각했다. 남자는 봉투에서 레코드를 꺼내, 바늘을 올리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모습이 내 눈을 닮았다. 무언가를 믿고 싶을 때, 나는 눈을 그렇게 감는다.
중간중간 필름은 이유 없이 튀었다. 기억은 늘 완벽한 필름이 아니다. 한 장면이 사라진 자리에는 간단한 자막이 붙었다. “해당 기억은 분실되었습니다.” 나는 뜻 모를 아쉬움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인터미션. 불이 켜지고, 스피커에서 낮은 피드백이 한 번 울렁거렸다. 복도에는 자판기가 있었다. 나는 미지근한 캔 커피를 뽑았다. 통으로 된 설탕과 우유가 적당히 섞여 있는 그런 커피. 프로젝션 룸 문이 열리고,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회색 작업복에 깨끗한 손이었다.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말했다. “대체로요.”
“전생은 소비재가 아닙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봐요. 소모하고, 평가해요. 본인이 주연이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요.”
나는 대답 대신 캔을 흔들어 보였다. 흔들린 탄산이 잠깐 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나는 빈 극장에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불이 어두워졌다. 두 번째 막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막은 다리 위에서 시작했다. 가을쯤으로 보였다. 강은 무난히 흘렀다. 나는 스크린 속의 내가 우편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봉투는 조금 무거워 보였다. 그 무게는 한 사람의 결심만큼의 무게였다. 남자는 두 번 쳐다보고,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봉투를 다리 밑으로 던지지 않았다. 던지지 않는 것이 던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결심이 필요한 밤들이 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전생에서 했던 선택들이 연쇄적으로 화면을 통과했다. 레코드 가게의 여자는 항구에서 멀어지는 배를 탔다. 남자는 우체국에서 월급봉투를 받아 들며, 은수저를 셔츠 안쪽 주머니로 옮겼다. 가끔 강가로 나가 오래된 녹나무 옆에 섰다. 화면은 크고 느리게 줌인했다. 은수저는 흙 속에 숨겨졌다. 그 위에는 얇은 낙엽이 한 장, 그리고 바람.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의 겨울이었다. 눈이 내렸다. 레코드 가게는 불 꺼진 채로 문이 닫혀 있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눈을 털었다. 눈발이 흩어지는 모습이 오래된 필름의 반점처럼 보였다. 스크린은 거기서 멈췄다. ‘THE END’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작은 글씨가 화면 하단에 떴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불이 켜지고, 스피커에서 깊은 숨 같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떤 선택들은 버튼을 찾는 데 절반이 걸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매표 창구의 직원은 계산대를 닦고 있었다. 바다빛 에나멜이 한쪽 손톱에서 조금 벗겨져 있었다.
“괜찮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대체로요,” 내가 말했다. “끝에 질문이 나오더군요.”
“늘 나와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대부분은 N을 누르죠. Y를 누른 사람도 있어요. 한동안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감상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빈 칸에는 오늘 날짜와 시간, 좌석 번호가 인쇄되었고, ‘발견물’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그 칸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빈칸을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에서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꺼내보니 아주 작은 은수저였다. 손잡이 안쪽에는 ‘K’와 ‘N’이 얕게 음각되어 있었다. 창구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이미 그런 일쯤은 여러 번 겪었다는 표정으로, 펀칭 스탬프로 종이를 딱 하고 찍어 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나는 은수저를 셔츠 안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겨울엔 어떤 물건도 체온을 곧잘 잃는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양파와 토마토 캔과 스파게티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봇대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내쪽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두 사람처럼 잠깐 눈을 맞추었다. 그대로 충분했다.
집에서 물을 끓이고, 달군 팬에 양파를 오래 볶았다. 오래 볶으면 양파는 패배를 인정한 듯 달게 변한다. 토마토를 붓고, 소금을 조금, 후추를 조금. 라디오는 어딘가에서 끌려온 재즈 채널을 틀어주고 있었다. 바늘은 없지만 음악은 충분히 회전했다. 주방 창문을 열자 바람의 냄새가 들어왔다. 어제의 바다와 오늘의 강 사이쯤 되는 냄새였다.
식탁에 앉아 포크를 든 다음, 나는 잠깐 멈췄다. 포크를 내려놓고, 셔츠 주머니에서 은수저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손바닥의 온도가 천천히 금속으로 옮겨가는 동안, 나는 그 수저가 전생의 흙 속에서 어떻게 잠들어 있었을지 상상했다. 누군가의 기다림은 물건을 통해 이어진다. 손잡이의 이니셜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다. K가 누구였고, N이 누구였는지도. 그렇지만 어떤 알 수 없음은 돌덩이처럼 길을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길을 길답게 만든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나는 베란다의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허브는 절반쯤 누렇게 변해 있었다. 흙을 조금 손으로 파보았다. 손톱 아래로 흙냄새가 들어왔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도 사람은 뜻밖의 안심을 느낀다. 나는 흙을 다시 덮고, 손을 씻었다.
밤이 깊어졌다. 전화기를 켰다. 알림은 별로 없었다. 오래전에서 잘려나온 듯한 번호가 하나, 메모에 남아 있었다. 한 자리 모자란 번호. 나는 그 빈 칸을 추측으로 채워 몇 번이고 눌러보았다. 신호는 가지 않았다. 세상에는 연결되지 않는 선들이 많다.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 그것은 종류가 다른 평온을 준다.
잠들기 전에, 나는 침대 머리맡에 은수저를 놓아두었다. 책은 반쯤 읽다 덮었다. 라디오는 어느새 신호가 약해져 사각사각한 백색소음만 흘려보냈다. 눈을 감으면, 항구의 바람과 녹나무의 잎사귀와 레코드 가게의 작은 방울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들을 셈하지 않았다. 인생을 세려고 들면, 셈은 늘 어긋난다.
다음날 아침, 나는 출근 대신 산책을 나갔다. 골목을 돌아 빵집에서 갓 구운 식빵을 샀다. 종이봉투의 따뜻함이 손에 닿았다. 극장 앞을 지나갈 때, 문은 닫혀 있었다. 개점 시간은 오후 세 시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로비를 잠깐 들여다보고, 어제 받았던 ‘감상 기록’을 꺼내 뒷면에 한 줄을 적었다.
“발견물: 은수저, 바람, Y와 N 사이의 침묵.”
나는 종이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바람은 오늘도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았다. 어제의 상영은 끝났지만, 경계는 어디까지나 느슨했다. 사람은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충분한 이유 없이, 그러나 아주 조용히. 그리고 그 조용함이 때로는 가장 많은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