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집 밤의 마지막 컵
- 글쓴이
-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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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11 15:50:51
밤이 길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가 없을 때, 밤은 더 길어진다.
전기주전자의 물이 한 번, 두 번, 세 번 끓어오르고, 나는 그때마다 컵을 씻고 다시 올린다. 표면은 아무렇지 않지만,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금속의 얇은 떨림이 전해진다. 이 집의 물은 철 냄새가 난다. 그것이 이 도시의 맛인지, 나의 취향인지 가끔 헷갈린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라디오, 빈 성냥갑, 사과 반쪽, 그리고 이름 모를 번호가 적힌 종이. 종이는 자꾸만 내 숨결을 따라 흔들린다. 창문을 닫았는데도 커튼은 미세하게 움직인다. 바람이 아니라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겠지. 아니면, 공기가 잠깐 어딘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밤에는 사소한 것들이 다 이유를 갖는다. 그것이 밤의 예의다.
나는 몇 달째 같은 노래를 틀고 있다. 재즈 피아노의 서두에서 왼손이 낮게 깔리고, 오른손이 조심스럽게 틈을 만든다. 그 사이로 생각이 흘러 들어온다. 생각은 언제나 제 발로 들어오고, 내가 쫓아내지 않으면 자리를 잡는다. 오늘의 생각은 의외로 예의 바르다. 의자를 당겨 앉고, 손등을 펼쳐 보이며, 여기가 비어 있는지가 먼저 궁금하다고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비어 있어요. 잠시 앉아도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의외로 평범하다. 쓰레기 배출 요일을 확인하는 것, 세탁기를 돌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 새 스폰지를 개봉할 시점을 재는 것처럼.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지우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칸이 있다. 그 칸은 늘 하얗다. 하얀 칸을 오래 보고 있자면, 눈이 먼저 피곤해지고, 그 다음에 마음이 따라온다.
옆집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TV를 본다. 웃음소리가 얇게 벽을 통과한다. 그 웃음소리는 내 방에 들어오는 동안 많이 닳고, 걸려 넘어지고, 그래서 도착하면 거의 기침처럼 변한다. 기침은 사람을 살린다. 몸이 스스로 숨을 찾게 한다. 나는 그 기침을 좋아한다.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예전에 아버지는 매듭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스무 살이 되던 여름이었다. 낚싯줄을 묶을 때 쓰는 단순한 매듭이었다. “힘을 너무 주면 줄이 상한다,” 아버지는 말했다. “방향을 맞추는 게 먼저야.” 나는 그 말을 다른 데에도 써먹었다. 성냥을 켤 때, 구두 끈을 맬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일 때. 방향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힘을 주는 일보다 먼저였다.
나는 종이 위의 번호를 다시 본다. 숫자 다섯 개와 공백, 또 숫자. 글씨는 내 것인데, 뜻은 내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옮겨 적어 온 모양이다. 내 글씨는 늘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서, 급한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급하지 않다. 다만 오늘은 방향을 어디로 맞춰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라디오에서는 디스크자키가 “좋은 밤이에요”라고 말한다. 좋은 밤이란 말의 어감이 마음에 든다. 뒷문이 달린 표현 같다.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나는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편의점의 초록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진다. 누군가는 컵라면을 사고, 누군가는 신문을 접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문을 밀고 나간다. 그들의 뒷모습은 하나같이 가볍다. 가벼워서 좋고, 가벼워서 서글프다. 그 중에 한 사람쯤은, 내게서 흘러나간 공기를 받아 다시 호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세상은 조금 정리된다. 내가 내쉰 것을 누군가가 들이쉬고, 누군가가 내쉰 것을 또 다른 누군가가 들이쉰다. 그것이면, 오늘 밤은 아직 네모 반듯한 모양을 유지한다.
주전자가 끝났다는 소리를 낸다. 나는 조용히 불을 끄고, 컵에 물을 따른다. 김이 올라가며 안경을 잠깐 흐리게 만든다. 안경을 벗어 티셔츠 끝으로 닦는다. 세상이 다시 선명해진다. 선명함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흐림이 더 정직하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명함을 조금 더 원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 밤도 때로는 타협을 한다.
문득, 복도 끝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이 건물에는 고양이가 많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고양이들은 이름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밥그릇의 위치를 기억하고, 창틀 높이를 알고, 문틈의 넓이를 외운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은 그 위치와 높이와 넓이를 어렴풋이 안다. 그 지식은 유년기 어딘가에서 이미 배우고 온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을 다룰 때, 되도록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만 오늘은, 다루는 법을 연습할 뿐이다.
전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숫자를 하나 누른다. 딸깍. 다시 한 번. 딸깍. 세 번째 숫자에서 멈춘다. 손을 거두고, 라디오의 볼륨을 아주 조금 키운다. 소리는 방의 모서리로 흘러가 벽지를 얇게 적신다. 벽지는 물에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금방 찢어지지도 않는다. 용수철 같은 인내를 갖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비슷하다. 쉽게 눌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돌아온다.
나는 문장 하나를 중얼거린다. “내일은 수건을 삶자.” 중얼거림은 약속이 된다. 약속은 작은 기둥이고, 기둥이 세워지면 지붕을 얹을 수 있다. 지붕이 있으면, 비를 버틸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 밤에는.
사과의 다른 반쪽을 칼로 잘라 먹는다. 씨앗이 하나 굴러 떨어져 바닥을 튀긴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작은 소리에도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이다. 라디오는 곡을 바꾸고, 디스크자키가 도시의 새벽 기온을 읽어 준다. 나는 그 기온을 내 방의 온도처럼 받아 적는다. 방과 도시의 차이를 줄이는 일. 그것이 요즘의 내 숙제다. 혼자 있는 방이 너무 방 같지 않도록, 도시에서 조금씩 떼어와 채워 넣는다. 버스 정류장의 숫자, 자판기 불빛의 높이, 편의점 문이 열릴 때 나는 벨소리. 그런 사소한 것들로.
다시 창문을 닫고 커튼을 고른다. 커튼의 주름이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한 번 흐른다. 나는 그 리듬이 마음에 든다. 리듬이 있으면, 몸이 따라간다. 재즈 피아노는 곡의 마지막 구절을 연주하고, 나는 컵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킨다. 혀끝에 남은 미지근함이 내장 깊숙이 내려간다. 그 온기를 따라가면, 아직 내가 있다. 생의 자리를 아주 조금 비켜 앉았지만, 여전히 같은 테이블에 있다.
불을 끄기 전에, 나는 종이의 번호를 냉장고 자석 아래로 옮겨 둔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리.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도 한 번 더 반복한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리. 내일 아침에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아침의 빛은 밤보다 덜 정직하지만, 대신 조금 더 너그럽다. 너그러움은 종종 방향을 가르쳐 준다. 힘을 주기 전에 먼저, 어디로 묶을지를 알려 준다.
벽시계의 초침이 앞으로만 간다. 다행이다. 뒤로 가는 시계를 나는 믿지 않는다. 잘 자라, 라디오 속 남자가 말한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방안의 공기를 한 번, 두 번, 천천히 들이쉬고 내쉰다. 숨은 숫자를 모른다. 다만 다음 숫자를 기다린다. 밤의 마지막 컵을 비우고, 나는 불을 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끝날 이 밤을 조용히 지나간다. 내일의 수건이 햇빛 아래에서 김을 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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