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창작 잘 대주는 옆집 누나 글 써옴
- 글쓴이
-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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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gall.dcinside.com/vr/4967358
- 2025-08-27 09:40:53
1
막차가 끊기기 직전의 동네 술집은 언제나 같은 냄새가 난다. 조리대에서 튀어나온 기름, 식초에 절인 양파, 젖은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23:47. 벽시계의 초침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나는 처음으로 들었다. 분명 예전에도 있었을 텐데 그날 따라 귀에 붙었다.
지연 누나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옆집이었다. 같은 복도, 한 칸 건너. 이웃이라고 부르기엔 서로 아는 게 너무 없었고, 모른다고 하기엔 초인종 소리와 낮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취향만큼은 익숙했다. 누나는 매번 같은 맥주를 시켰고, 난 주머니 사정에 따라 소주와 맥주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우린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방충망 고치는 법, 계단참에 버려진 녹슨 자전거 얘기, 새벽마다 돌아다니는 검은 고양이 얘기. 그 정도. 술이 한 병 반쯤 들어가자 누나는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했다.
“대현, 나는 네가 줄곧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성실은 재능이거든.”
“그럼 누나는요?”
“나는 잘 떠다니는 쪽.”
누나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둥근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어떤 밤들은 가벼운 대화가 계단처럼 이어진다. 가만히 발을 올려보면 그게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그날 밤이 그랬다.
술자리가 끝났을 때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복도의 센서등이 하나씩 켜졌다가 꺼졌다. 내 문 앞에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누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동작이 신호라는 것도, 누군가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무엇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서로가 한 번씩 멈추어 서서 상대의 숨을 확인했고, 창문 밖 도로 위의 택시 두 대가 서로 비켜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기울었다. 불빛은 침대 위까지 닿지 않았다. 우리가 한 일보다, 하지는 않은 말들이 더 오래 남았다. 기본적인 것들, ‘괜찮아?’, ‘이제 잘까?’ 같은 말들이 그 밤의 거의 전부였다.
잠은 깊지 않았다. 새벽 네 시쯤, 누나가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소리가 났다. 돌아누우려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누나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왔을 때, 차갑던 발끝이 내 종아리를 스쳤다. 나는 그 온도를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그때는 몰랐다.
2
우리는 특별히 약속하지 않았지만 며칠에 한 번씩 같은 방에서 밤을 보냈다. 낮에는 각자의 생활이 있었다. 나는 오후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누나는 어디 다니는지 뚜렷하게 말한 적이 없다. 때로 집에서 일을 하는 것 같았고, 때로 오후 늦게까지 나갔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택배 상자가 간간이 복도에 쌓이는 것을 빼고는 생활의 흔적이 적었다.
만남의 방식은 대체로 비슷했다. 저녁 무렵 누나가 “라면 있어?” 하고 문자를 보내면, 나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대파를 어슷하게 썰고, 계란을 하나 풀어넣었다. 누나는 올 때마다 자기 집에서 그릇을 하나 가져왔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설거지할 때 그릇의 바닥을 보면 작은 흠이 있었다. 흠집은 일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걸 ‘달의 바닥’이라고 혼자 부르기로 했다.
밥을 먹고 TV를 켰다. 드라마는 대개 중간부터 보기 시작해도 따라가기 쉬웠다. 사람들은 결국 비슷한 위로를 반복했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 누나는 볼륨을 낮추고 창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했다. 나는 그 사이 식탁에 손목을 올리고, 손등을 ‘달의 바닥’ 옆에 뉘어놓았다. 누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불필요한 단어들이 줄었다. 우리는 늦게까지 깨어 있었지만 서로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누나는 내 음악을 물었다. 나는 오래된 재즈를 틀었다. 특정한 곡이 나오면 누나는 “이건 쓸쓸해”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고, 실은 나도 잘 몰랐다. 쓸쓸함의 진짜 색깔 같은 건 감으로밖에 분류할 수 없다.
3
의심은 보통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서 발아한다. 그날 나는 도서관에서 늦게 나왔다. 비가 내렸고, 운동화가 젖었다. 복도에 들어서기도 전에 누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불빛이 얇았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그냥 쉬어’, ‘아니야, 그 정도면 됐어’. 드라마에서와 같은 문장들이었지만, 목소리는 그보다 낮고 진지했다.
잠깐이었는데 길게 느껴졌다. 나는 내 방 문 앞에서 시계를 봤다. 00:26. 시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숫자일 때 더 견고하게 박힌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내 신발을 냄새 맡더니, 관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고양이의 꼬리 끝이 계단 모서리를 사라지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떤 얼개가 똑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잠들기 직전까지 라디오를 켜둔 채 빈 화면을 바라봤다. 다음 만남 때 이야기하자고 마음먹었다. 기다리는 동안 의심은 단정한 문장을 선호했다. 단정은 언제나 유혹적이라서, 사실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다음 며칠은 사소한 징후들이 모였다. 누나는 약속 시간을 조금씩 늦췄다. “미안, 오늘은 일이 길어졌어.” 메시지의 마침표가 평소보다 많았다. 내 방에 오면 창문을 먼저 열었다. 바람을 들이면서 휴대폰을 엎어두었다. 통화가 와도 잠깐 보고는 다시 화면을 뒤집었다. 그 동작이 자연스러워 보일수록, 나는 그 자연스러움이 불편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서 있었다. 층수가 바뀔 때마다 누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 좀 바쁘죠?” 내가 물었다. “응, 일이 조금 겹쳐.” 누나는 웃었다. 웃음이 얇았다. 그날 밤,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컵 하나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립밤 냄새를 맡았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수세미에 세제를 더 짜서 문질렀다. 냄새는 거의 사라졌지만, ‘거의’가 남았다.
또 한 번은 복도에서 마주친 이웃이 “요즘 밤늦게도 환하네요”라고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무의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심 중인 사람에게 모든 말은 의미가 된다. 의미는 다른 말들과 빠르게 연결되어, 합리처럼 보이는 모양을 만든다.
나는 누나에게 묻는 대신, 질문을 빙빙 돌렸다. “전화 자주 오네요.” “응, 뭐… 그냥.” “누구예요?” “일하는 사람.” “회사 사람이에요?” “가끔은.” 대화는 그쯤에서 얇아졌다. 내가 한 발 더 들어가면, 누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물러남이 능숙할수록, 나는 더 미숙해졌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혼자 계단을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센서등이 켜졌다 꺼졌다. 계단참의 창문에 내 얼굴이 어둡게 비쳤다. 휴대폰을 켤 때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았다. ‘요즘 힘들어요?’라고 쓰다가 지웠다. ‘그날 통화는 누구였어요?’라고 쓰다가 지웠다. 질문은 조심성과 공격성 사이에서 모양을 바꾸다가,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다음 번 우리가 만났을 때, 라면 두 그릇과 찬물 두 잔이 식탁 위에 있었다. 누나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오늘은 계란 반숙이네.” 나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국물의 김이 조용히 올라갔다. 김이 사라지는 속도를 보면서, 말의 순서를 정리했다. 먼저 묻고, 그다음 듣고, 마지막에 내 마음을 말하기.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온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날 밤, 누나 누구랑 통화한 거였어요?” 내가 시작했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 그거?” 누나는 잠깐 웃었다. “그냥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이면… 남자죠?” 내 말은 질문이었지만, 억양은 거의 단정에 가까웠다.
“굳이 구분해야 해?” 누나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올 말았다가 놓았다. “별일 아니었어.”
익숙한 말이 또 나왔다. 나는 목을 고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의 온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 나는… 내가 뭔지 모르겠어요.” 내가 낮게 말했다. “우연인지, 하나의 선택지인지.”
“대현아.” 누나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 한 단어가 진정시키려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지금 여기 있는 게 다야.”
그 말은 좋았지만, 내 안에서 이미 굳어진 얼개와는 닿지 않았다. 나는 더 구체적인 걸 원했다. 선명한 경계, 변명의 부재, 나만이라는 증명. 눌러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는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탁자에 가벼운 소리가 났다.
“나는 특별하지 않잖아요.” 내가 먼저 말했다. “누나한테.”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해. 근데—”
“근데가 붙잖아요.” 내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식탁 위 김이 사라진 자리에서, 갑자기 방이 커 보였다. 나는 내 손등을 바라보다가, 부엌의 시계를 보았다. 20:19. 숫자가 또렷했다.
“대현, 지금은 이렇게 말로 밀고 당기기 싫어.” 누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설명을 잘 못해.”
“설명 못 하는 건 이해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만이라는 건… 그건 설명이 아니라 선택이잖아요.”
누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사이 라면이 조금 불었다. 젓가락에 걸린 면이 툭 끊어졌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그리고 말이, 내가 준비하지 않은 문장으로 밀려 나왔다.
“누나, 어차피 아무한테나 대주잖아요. 나 같은 놈 없어도 상관없죠?”
말은 방 안에 놓여 있던 가장 무거운 물건처럼 탁자 위에 떨어졌다. 누나는 손을 멈추었다.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그 순간, 그동안의 사소한 징후들이 한 줄로 서는 소리가 났다. 줄의 맨 앞에 내가 서 있었다.
4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되었다. 나는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는 일을 계속했다. 손님들이 바코드 리더에 책을 갖다 대면 ‘삑’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하루에도 수백 번 들었다. 소리는 단정하고 정확했다. 삶의 다른 영역은 그렇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상체를 세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엇인가 빠져나간 자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몸 안에서 미세한 소음이 났다. 나는 이유 없이 오래 걷거나,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한강까지 걸어갔다가, 강물에 비친 아파트 불빛을 세었다. 열일곱 번째 불빛에서 세기를 멈추고, 아무 상관도 없는 소망을 빌었다.
옆집은 조용했다. 택배 상자도 더 이상 쌓이지 않았다. 복도 끝에 있던 쓰레기 봉투가 며칠씩 묶여 있는 걸 보고서야, 그 집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여러 번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문자를 쓰다 지웠다. 지우다가 문장 끝에 마침표가 남았다. 마침표만 있는 메시지는 보낼 수 없었다.
밤마다 라디오를 켰다. 디제이는 같은 시간에 같은 농담을 했다. 청취자들이 보내는 사연은 비슷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 ‘오늘은 이상하게 라면이 먹고 싶었다’. 나는 부엌에 서서 라면을 끓였다. 팬에서 김이 오를 때, 문득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문을 열어 복도를 본다. 불빛은 빈자리 위에도 똑같이 떨어졌다.
5
비가 온 뒤였다. 늦여름의 열기가 사라졌지만, 공기에는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오후 네 시쯤, 복도 끝에서 탄 냄새가 올라왔다. 처음엔 누군가 라면을 태웠나 싶었다. 냄새는 점점 진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집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대신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두드렸다. 여전히.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나’라는 단어만 혀끝에 남았다.
잠시 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얼굴 절반만 보였다. 그럼에도 누나인 걸 알아보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동자 주변이 붉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누나는 문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이로 탄 냄새가 새어 나왔다. 냄비는 꺼져 있었고, 탄 자국은 얇은 테두리처럼 남아 있었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빈 병, 구겨진 영수증, 열지 않은 상자들. 내가 알던 집의 최소한의 질서가 사라져 있었다.
“누나.” 내가 말했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는 몸을 문 뒤로 조금 숨기듯 물렸다. “지금은… 미안. 나중에.”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내 무릎이 매트에 닿는 소리가 났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미안해요.” 나는 말했다. 어쩌면 그 단어는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틀렸어요. 누나, 나… 좋아했어요. 처음부터. 잘 몰랐던 건 나였어요.”
복도에 바람이 없어서, 내 말이 그대로 머물렀다. 누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사이 센서등이 한 번 꺼지고 다시 켜졌다. 누나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얼굴이 전부 보였다. 창백했고, 그러나 낯익었다. 가장 익숙한 얼굴의 가장 낯선 모습.
“들어와.” 누나는 말했다.
6
우리는 말을 아꼈다. 말을 아낀다는 건 때로 생각을 아끼는 일이었다. 나는 부엌의 가스레인지에 올라앉은 냄비를 씻었다. 까만 테두리가 거의 지워질 때까지 베이킹소다를 뿌리고 문질렀다. 누나는 쓰레기 봉투를 묶었다. 빈 병을 분리수거용 상자에 담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먼지 냄새와 오래 닫아둔 방의 냄새가 뒤엉켜 나갔다. 바닥을 닦고 나자 집이 조금 가벼워졌다.
누나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바닥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우리의 사이에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이런 빈 탁자를 본 지 오래였다.
“대현아.” 누나가 먼저 말했다. “나는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만 그랬어.”
“알아요.” 내가 말하자, 누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직 모를 수도 있어. 나는… 어릴 때부터 네가 좋았어.” 누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좋다는 말은 여러 켜가 있잖아. 그걸 굳이 설명하고 싶진 않아. 다만, 네가 자라서 혼자 나가 살게 된 날부터, 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진정됐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들리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는 판단은 보통 비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비교할 자료가 없었다. 나는 그저, 누나의 말이 집 안의 공기를 바꾸는 걸 느꼈다. 무겁던 것이 조금씩 내려앉고, 고요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날 네가 한 말은… 칼처럼 들렸어.” 누나가 말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했어. 내가 잘 떠다니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근데 떠다니는 건, 내려앉을 곳을 못 찾았다는 뜻이기도 해. 네가 나를 아무에게나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어. 그게 제일 무서웠어.”
나는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누나의 손도 탁자에 닿았다. 손과 손 사이에는 얇은 틈이 있었다. 틈은 조심스럽게 좁혀졌다. 손끝이 닿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으로 가서 쌀을 씻었다. 묵직한 냄비에 죽을 끓였다. 나는 대파를 썰었다. 칼날이 도마를 치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리듬에 맞춰 숨을 쉬었다.
7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다르게 만났다. 나는 더 많이 물었다. 누나는 더 자주 대답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관계는 길어진다. 우리는 길어지는 방법을 서툴게 배웠다.
아침에는 누나가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커피를 내렸다. 나는 식탁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종이의 잉크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점심에는 둘이 시프트를 맞췄다. 누나는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즈음 돌아왔고, 나는 그 사이 빨래를 널었다. 창가에 걸린 빨래들의 그림자는 늦은 오후가 되면 길어졌다.
밤에는 오래 걷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는 같은 속도로 걷지 않았다. 누나는 반 발자국 앞서 걷는 걸 좋아했고, 나는 따라서 걸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나는 누나의 손등을 본다. 흉터 하나 없는 손등이었다. 나는 그 손등을 내 눈에 익힌 다음, 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신호등이 바뀌면 우리는 건넜다. 그 움직임이 안심이 되었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집에 불을 모두 꺼두고 앉아 있었다. 창밖의 불빛이 벽에 떨어졌다. 멀리서 구급차가 지나갔다. 우리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대신 냄비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끓였다. ‘달의 바닥’ 그릇을 식탁 위에 두고, 국물이 조금 넘치도록 담았다. 그릇의 흠집은 예전 그대로였고,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누나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하잖아. 괜찮다고. 근데 괜찮다는 게 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괜찮지 않아도 돼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그냥, 오늘을 지나가면 되니까.”
그 말을 믿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믿는 동안, 하루는 칼날처럼 기울었다가, 그다음 날은 생각보다 둥글게 굴러갔다. 합의된 속도가 있었다. 그 속도를 맞추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에 가까웠다.
8
가을이 시작되었다. 한강 근처의 작은 공원에 우물 모양 조형물이 생겼다. 실제로 물은 나오지 않았고, 투명한 유리 벽 안쪽에 작은 동전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나는 동전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채소 가게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백 원짜리였다. 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빌 거야?”
“소원은 말하면 안 이루어진대요.”
“그런 말 누가 만들었을까.”
“아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누나는 웃었다. 우리는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고, 잠깐 침묵했다. 유리 너머에서 아이가 달려왔다. 아이는 유리를 손바닥으로 두 번 치고, 어머니에게 끌려갔다. 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울었다. 누나는 내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나는 누나의 등뼈가 만드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아주 천천히 별들이 지나갔다. 물론 실제로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뼈의 굴곡은 어둠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
“대현.” 누나가 말했다. “네가 오해했던 날, 그 통화는… 아픈 친구한테 한 거였어. 이야기해도 됐는데, 그날은 그냥 힘이 없었어. 설명도 힘이 들 때가 있더라.”
“알아요.” 내가 말했다. “이제는.”
“그래도… 네가 다시 돌아온 게 다행이야.” 누나가 말했다. “나는 계속 그 냄새를 맡았거든. 탄 냄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부엌에 들어가지도 못했어.”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제 같이 나가면 돼요. 부엌이든, 어둠이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영웅적인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다. 대신 서로의 온도를 확인했다. 확인은 약속보다 오래 갔다. 손끝이 닿으면, 그때마다 작은 불이 켜졌다. 그 불은 방을 다 밝히지는 못했지만, 한 걸음 앞은 비출 수 있었다.
9
겨울은 조용히 다가왔다. 도서관에는 두꺼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늘었다. 책은 더 무거워졌다. 나는 여전히 ‘삑’ 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주 가끔, ‘삑’ 소리가 고장 난 것처럼 끊겼다. 그럴 때면 나는 기계를 재부팅했다. 그러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를 대표한다.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옆집의 생활은 눈으로도 귀로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누나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다음 날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서걱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틈 아래 놓인 그림자만 보고도 누나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능력은 아마도 좋은 것일 터인데, 가끔은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알고 있다는 건 책임을 부른다.
우리는 가까스로, 그러나 분명히, 연인이 되었다. 처음 만난 밤이 우연이었다면, 그 우연 위에 얇은 날들을 겹겹이 올려 튼튼한 탁자를 만들었다. 탁자는 기댈 수 있을 만큼은 단단했다. 사람은 그런 게 필요하다. 기댈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손을 떼면 다시 서 있을 수 있는 탁자.
연인이 된다는 건 서류를 작성하는 일도, 선언을 하는 일도 아니었다. 어느 밤 우리가 동시에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어느 아침 우리가 각자의 컵을 바꿔 들었다. 설거지를 할 때 나는 일부러 ‘달의 바닥’ 그릇을 내 쪽에 두었다. 누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내 앞에서 반 바퀴 돌려놓았다. 흠집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쯤에서야 나는 알았다. 우리에겐 같은 물건들이 있고, 같은 속도가 있으며, 같은 냄새가 있었다.
10
어느 일요일, 누나는 오래된 사진 상자를 꺼냈다. 사진에는 누나가 있었다. 머리가 지금보다 길었고, 웃음은 지금보다 덜 단단했다. 배경에는 오래된 신문 가판대가 보였다. 사진은 색이 바랬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오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과거는 그 자체로 무게가 있고, 그 무게는 현재의 누나를 지탱하는 데 쓰였다. 나는 사진 속 사람에게 질투하지 않았다. 질투는 현재에게나 쓸 수 있는 감정이니까.
누나는 사진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내 뒤통수가 어쩌다 찍혀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언제 찍힌 것인지, 누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시간에도 우리는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시장에 갔다. 고등어 한 손과 귤 한 봉지를 샀다. 집에 돌아오자 누나는 귤 껍질을 난방기 옆에 말렸다. 방 안에 새 냄새가 났다. 탄 냄새가 사라졌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달의 바닥’ 그릇을 씻어 올려놓으니, 흠집 사이로 귤 껍질 향이 은근히 배어들었다. 냄새는 때로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 무엇이 지나갔고, 무엇이 남았는지 냄새는 안다.
식탁 위에 고등어가 올라왔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에서 기름이 반짝였다. 우리는 천천히 먹었다. 밥 한 숟가락과 생선 한 점, 귤 한 조각 사이에 작은 침묵들을 놓았다. 그 침묵들은 빚이 아니었고, 벌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쓰는 시간의 단위였다.
“대현.”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어디까지 갈까?”
나는 귤 껍질을 하나 더 벗겼다. 껍질의 하얀 섬유질이 가늘게 늘어졌다. 나는 그걸 모아 접시에 올려놓았다.
“아마, 내일까진.”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웃지 않았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둘 사이의 공기가 온도로만 기록되는 밤이었다.
11
나는 가끔 그날의 말, 칼 같은 말의 모양을 생각한다. 사람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그 말이 지나간 자리를 천천히 봉합하는 일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봉합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것도,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바늘이 왔다갔다 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구분했고, 안부를 물었고, 창문을 열고 닫았다.
밤이 깊으면 나는 가끔 깬다.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신다. 그때 누나의 발끝이 내 종아리를 스치던 첫날 밤을 생각한다. 온도는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물을 마시고 돌아오면, 누나는 잠결에 내 쪽으로 몸을 모은다. 그 움직임은 설명할 수 없지만, 반복된다. 반복은 안정을 만든다. 우리는 그 안정 위에 새로워질 준비를 한다.
12
눈이 왔다. 아침에 커튼을 젖히자, 건너편 주택의 지붕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우리는 장갑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발자국이 쌓였다. 누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떠서 나의 어깨에 올렸다. 나는 웃으며 그 눈을 털어냈다. 드물게,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노래를 불렀다. 누나는 따라했다. 가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그 노래는 우리에게만 맞는 노래가 됐다.
돌아오는 길에 길냥이가 우리를 따라왔다. 누나는 허리를 굽혀 고양이의 등줄기를 한 번 쓸었다. 고양이는 잠깐 몸을 굽혔다가, 금방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들에게 함부로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오래 남고 우리가 고통받는다. 대신 우리는 고양이의 꼬리 흔들림을 기억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자, 라디오에서 누군가 사연을 읽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 대신, ‘오늘은 잠을 자고 싶다’는 말이었다. 말의 방향이 바뀌면, 같은 밤도 달라진다. 우리는 서로를 보았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나는 묻지 않았다. 누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13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만났냐고 묻는다. 우리는 대체로 대답을 아낀다. 술집, 복도, 센서등, 라면, ‘달의 바닥’ 같은 단어들을 말해도, 이야기의 중심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중심은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줄곧 붙들고 있는 중심은 단순하다. 서로를 알아보는 일. 서로를 오해하지 않으려는 일. 오해했을 때 돌아오는 일.
어느 밤, 누나는 나에게 작은 노트를 건넸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안쪽 첫 장에 누나는 짧게 썼다. ‘우리는 여기를 지나가는 중’. 나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따라 읽었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잘 맞았다. 지나간다는 건,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는 뜻이고, 서두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맞잡았다.
문턱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발바닥이 그 얇은 경계를 확실히 밟았다. 안과 밖 사이, 아직과 이미 사이. 그 문턱 위에서 우리는 잠깐씩 멈췄다가, 같은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그다음 날이 있다. 그리고 어떤 밤에는, 또다시 라면을 끓일 것이다. 국물이 조금 넘칠 것이고, ‘달의 바닥’ 흠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릇의 흠집에 맴돌던 탄 냄새 대신, 이제는 귤 껍질 향이 얕게 고일 것이다. 그 흠집의 방향을 우리는 가끔 바꿀 것이다. 이유는 묻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묻지 않는 밤이야말로, 오래 지속되는 밤이라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 우사뿅 | | 2025.08.27 09:41:22 |
| ㅇㅇ | 2025.08.27 09:41:46 | |
| 미드나잇블루크리스탈 | 대주삼 - dc App | 2025.08.27 09:43:36 |
| 레이실 | 야스 어딧서 | 2025.08.27 09:46:01 |
| ㅇㅇ | ㄴㄴㄴㄴㄴㄴㄴ | 2025.08.27 09:47:13 |
| ㅇㅇ | 잠은 깊지 않았다. 새벽 네 시쯤, 누나가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소리가 났다. 돌아누우려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누나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왔을 때, 차갑던 발끝이 내 종아리를 스쳤다. 나는 그 온도를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그때는 몰랐다. 정도면 야스묘사 충분하지 | 2025.08.27 09:47:36 |
| 레이실 | 너 순수문학이야?!? | 2025.08.27 09:48:08 |
| Μο | 로씨아 문학 느낌 | 2025.08.27 09:50:35 |
| ㅇㅇ | 네 | 2025.08.27 09:53:59 |
| ㅇㅇ | 러시아 문학은 이것보다 좀 더 차갑고 음울한걸 담담히 묘사해요 제 레퍼는 무라카미 하루키인 데스 | 2025.08.27 09:54:26 |
| nyya | 문장은 좋은데 감정이 없어 | 2025.08.27 09:5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