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에의 헤드셋 속에는 가상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가볍게 깜박이는 네온 불빛들, 머리 위로 천천히 흐르는 거짓된 구름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마누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짓눌린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그녀를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카의 아바타가 그 앞에 나타났다. 익숙한 모습, 익숙한 동작. 한때는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설렜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모에… 오랜만이야." 마누카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요즘 현실에서 힘들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녀는 디스코드로는 자주 연락해왔지만, VRChat에서의 접속은 드문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하려 했지만, 그 빈 공간이 점점 그녀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오랜만이네, 마누카," 모에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속은 뒤엉켜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요즘 현실에서 일이 많아서 자주 접속하지 못했어. 널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노력할게, 더 자주 들어올게."
모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누카의 진심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 진심이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감정에 대해 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마누카, 그만하자." 모에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마누카는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
"그만하자고. 우리… 이제 끝내자."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접속을 자주 못해서 그래? 미안해, 내가 정말 더 자주 들어올게. 내가 노력할게. 제발… 이러지 마." 마누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모에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모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누카… 나, 너한테 질렸어."
그 순간, 마누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아바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화면 너머로 그의 혼란과 분노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뭐라고…?"
"너한테 더 이상 설레지 않아. 네가 없어도 이제는 괜찮아. 오히려… 다른 사람한테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어. 그게 진실이야." 모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이 가진 무게는 가혹했다.
마누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차가웠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누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결국 그거였구나.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거였어."
"아이리라는 사람이 있어," 모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가더라. 그리고 나도 그걸 부정할 수가 없었어."
마누카는 그 순간 폭발했다. "꺼져! 정말… 꺼지라고!" 그의 분노가 이어폰을 넘어 현실에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의 말은 칼처럼 날카로웠고, 모에는 그 칼날이 자신의 마음을 베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모에는 잠시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누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안해, 마누카. 정말 미안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사과를 남기고, 모에는 그 세계를 나갔다.
마누카는 홀로 남았다. 조용한 월드 안에, 그만의 공간 속에서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마누카의 눈에는 더 이상 그녀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공간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누카는 결국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고, 그녀는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 현실과 가상, 그 경계에서 흔들리던 마음은 이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었다. 가상 속에서조차,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