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지적장애 아동한테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주변에서 걱정해, 우린 알지만 학부모가 보면 곤란하잖아...]
[ 팔을 뒤로 묶는게 서로 안전한 방법인데... 알겟습니다. 주말에 제네바 협약이라도 정독하고 오죠 ]
[ 뭐 제네바....?! 너... ] 그 뒤로 그 선임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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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없이 조퇴하는 걸 보고 기관장과 선임들은
술마시고 놀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일만 하며, 어설프게 여선생을 좋아하고, 책만 읽고,
스쳐도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유리멘탈 찐따새끼가 멘탈 터져서 튕기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업용 아바타였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언젠가 정면 충돌할 때 그들이 대비하지 못하게 하도록
항상 자아를 감춰 왔던 내 전략이 빛을 발한 부분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뺐겨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몽골인밖에 없는 물류창고에서 몽골어로 욕을 먹고
중국인 사수 아래에서 시멘트를 섞다가 뒤통수를 얻어 맞아가면서도, 떳떳한 자유를 얻어왔다.
그런 내가, 앞으로의 1년을 VR을 할 수 있도록 개척하기 위해서. 내가 뭘 준비했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들은 아직 몰랐다.
폭행 피해를 주장하며 근무를 거부하고 있자. 기관장이자 교장은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나를 달랬다.
기관장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정도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치면서 살래?
선임들도 다 사과하기로 했으니까 그만 해. 사이좋게 지내야지.."
나 " 저는 가해자와 같은장소에서 근무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근무지명이 [남자들의 세계] 였습니까? 사단법인 천사의 학원인줄 알고... 빠따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
기관장 "너가 자꾸 모나게 나오면 우리도 너 아동학대한 증거 다 찾을거야? 같이 법대로 해볼까?"
"예 하십쇼."
기관장은 당황했고. 나는 감기로 병가를 낸 뒤 협박한 녹취록을 들고 병무청으로 향했다.
내 담당은 자리에 없었지만, 큰 소리로 이 학교는 범죄기관이라며 아무 직원이나 잡고 보여줬다.
교장은 병무청에 갔으니 병가를 인정 못 한다는 식으로 견제했지만, 결근 처리하라고 하고 다음은 국민신문고를 올렸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 피고인 소환은 늦어도 다음 주에 이루어진다.
국민신문고의 답변 의무 기간은 2주이고, 병무청에서도 안건을 올리는 데 시간이 걸릴 터
기관이 나를 아직 과소평가하고 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밀어붙여야 했다.
더는 모범공익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나는 더이상 범죄집단에서 약점 잡히며 근무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근무지 이전을 주장했고
기관 측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아동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심적, 물적 자료들을 동원하며 나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관의 실수였다.
"그렇군요. 제가 임의로 모종의 유형력을 행사했군요." 라며 내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게 해 주시죠. 그리고 앞으로는 일체의 유형력을 행사하지 않겟습니다!" 라고 했다.
"너 그거 근무거부로 신고할거야!" 라고 했지만 이내 기관장은 자신의 모순을 깨달았다.
"아시죠? 화장실에서는 다른 공익들이 장애아동에 대한 구타나 얼차려도 하고 있는거... 같이 해결해야죠."
기관장은 부정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우리 쪽에 보고가 올라온게 없으니 그런 일은 있은 적이 없다."
"그럼 지금 있었던 일로 만들어 봅니까?" 하며 휴대폰을 꺼내자 교장은 황급히 대화를 끝내려 들었다.
사실 욕설이 섞인 불충분한 녹취록 뿐인 증거였지만, 이새끼는 존나 쫄았나보다ㅋ
전쟁의 시침은 상호 파괴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고. 학교 근무 공익 출신 남교사가 말을 걸었다.
"이대로면 너도 우리도 좋은 꼴은 못 봐. 선임한테 한 대 맞을 수도 있잖아 꼭 그래야돼?"
나는 말했다. "내가 인생의 밑바닥을 기었는데 한 대 맞은 게 분하겟냐. 난 그새끼를 선임이라고 생각 안한다.
이 사건으로 같이 빵에 간다면, 인생 길이길이 최대 업적으로 장인어른께도 자랑하겟다."
그러자 그는 포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날 저녁, 교장은 아버지를 불러 왜곡된 이야기를 하며, 아들을 진정시키고 일을 좋게 끝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도 다 알고있고, 교장이 협박한 녹취록은 108페이지를 넘겨서 매일 인쇄되던 중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있는 테이블에 녹취록 화일을 내려치듯 던졌고. 그들은 그 뒤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의 근무지는 곧 노인 복지관으로 이관되었고, 더이상 모범공익 같은 거 안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