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주변에서 VRC 유행이 한참 돌 때
휴학까지 때리고 반년넘게 목표로 달리던 공모전이 있었는데 결국 좆같이 내고 삶이 많이 무기력해진 상태였어
시간은 비는데 할 건 없고 알바시간만 잔뜩 늘려서 돈벌어서 뭐했냐면 그냥 술만 처먹었지
평소에는 친구 불러서 아는 형 불러서 학교 후배 불러서 만나서 술마시고 약속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혼자 술마시고
오늘은 좀 힘드니까 적게 먹어야겠다 생각하는날은 맥주 두 캔 먹고 잤을 정도니까
술을 안 마시면 잠이 안 왔어. 새벽만 되면 너무 고통스러웠지.
공모전 마감 뒤로는 하는것도 없고 일어나도 그냥 멍하니 인터넷만 쳐다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술처먹고 다음날 일어나서 반복하고
한 달 정도는 그냥 끔찍했어 거울을 보는데 도저히 사람 몰골이 아니더라
그래도 별 수 있겠나 싶었어. 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는데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깨달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 VRC를 하고 있더라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멀리했지
나는 원래 좆목질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좆목질에 최적화된 게임을 했다간 뭔 일이 일어날지 너무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엄청나게 땡겼지. 다들 너무 재밌게 하고 있는데.
결국 나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과 싸우는 건 그만두고 욕망에 이끌려 VRC를 설치하게 됐어
처음에는 친구를 사귀지 않겠다 다짐하고 돌아다녔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주위에도 시작했다는 사실만 알리고 친추같은 걸 안 했어. 나는 좆목질 대신 다른 컨텐츠를 선택했지.
지금은 모르겠는데 옛날 Hub 맵 있지? 거기 가운데에 랜덤한 맵으로 데려다주는 포탈이 있었는데
진짜 하루종일 그 포탈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진짜 어떤 맵이든 안 가리고 끝부터 끝까지 다 가보고 그 안에 있는 창작물들을 미친듯이 탐했어.
오로라가 펼쳐진 설산, 조용한 해변가의 별장, 붉은 달이 떠있는 정원, 눈내리는 숲속의 바, 만들다 만 것처럼 보이는 학교
말 그대로 여행이었어. 작은 모니터 안에서 펼쳐지는 여행.
거울을 켜면 보이는 아바타는 내 파트너. 절대 지치지 않는 소녀와 함께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지.
그게 정말 너무 좋았어. 맨날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썼으니까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어.
나에게 VRC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게임이었지.
유일하게 멀리한 건 사람
친구들이 VRC 아이디 물어봐도 안 알려주고. 맵을 돌아다니다 친절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와도 'I don't speak english.' 한마디만 외치고 도망쳤어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앞에 썼듯이 이런 게임 빠지면 진짜 조지겠구나 생각했었어
그렇게 사람을 피해다닌지 며칠 뒤, 맵을 하도 싸돌아다녀선가 금새 파란색이 되어있더라
평소처럼 허브 중앙 포탈로 뛰어들었는데 판타지 집회소로 떨어지게 되었어
안에는 일본인들이 가득했는데. 평소처럼 맵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슬금슬금 나한테 다가오더라
처음엔 무시하고 피했지. 근데 그럴수록 이 사람들이 점점 더 다가오는거야
평소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바로 허브로 돌아갔을텐데 그 날은 왜인지 그러질 않았어
쫓아오면 도망가고. 쫓아오면 도망가고. 의미없는 추격전을 반복하다 결국 저쪽에서 먼저 마이크를 열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 때 나는 마이크를 켜지 않고 이모지를 통해 대화를 했어.
한참 그렇게 놀다 보니 그 사람들의 친구들이 슬슬 모이기 시작하더라.
슬슬 나랑 노는 것도 끝이겠구나. 그렇게 느낀 나는 그 때부터 마이크를 켜고 대화를 했지. 근데 상대방 쪽에서 전혀 받아주질 않는거야.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나?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건 완전무시.
솔직히 좀 시무룩했어. 여태까지 그렇게 사람을 멀리한 주제에 이제와서 사람때문에 시무룩한것도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그랬어.
그 일본인들이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드는걸 보면서 난 다시 허브로 돌아왔지
그리고 마이크가 제대로 연결되어있지 않다는걸 깨달은 건 시간이 좀 지난 뒤였어...
아무튼,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친구 한 명을 친추했어. 원래 옛날부터 VRC를 하던 친구.
궁금했던 것도 물어보고 같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긴 하더라.
그러던 와중에 신사에서 어떤 한국인을 만났어. 일본에서 유학중이라고 했는데
말이 참 많은 사람이었어. 일본어도 잘 하고 영어도 잘 하고
나랑 똑같은 파딱인데 그 친구가 중심에서 떠드는걸 보면서 나는 부러워하기만 했지
그런데 자꾸 나에게 관심을 주는거야. 님은 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냐고.
나는 친구를 사귀었다간 큰일날 것 같아서 맵만 구경한다. 라고 평소처럼 대답하니까
'친구 사귀는 게임인데 친구를 안 사귀면 어떡해요? 아니다, 뭐 알아서 하세요.' 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라.
마음이 흔들린 건지 어떤 호승심이 불탔는지는 몰라도 그 때부터 그 친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꽤 많은 이야기를 했고 헤어질 즈음에는 친구가 되어 있었지
그 친구랑 돌아다니며 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났어.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는 나름의 안정을 찾았지.
그렇다고 해서 맵 탐방을 그만둔 건 아냐. 여전히 그건 나에게 메인 컨텐츠였고, 그 날의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항상 그 친구와 만나게 되었어.
VRC를 시작하고 일주일? 10일? 쯤 되었을 때 MR을 주문했어.
모니터 액정으로만으로는 더이상 만족할 수 없었던 거야. 화질 짱짱한 오디세이 플러스 샀어.
그때부터 맵 탐방이 더욱 즐거워지더라. 오랜만에 다시 창작 의욕도 솟을 정도였지.
앞에 말한 친구와의 이별은 금방 찾아왔어. 과몰입이나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그 친구가 어느순간 들어오지 않더라.
MR이 나에게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내 주위에도 인간관계가 구축되었었지. 원래 VRC를 하는 친구가 많았으니까 훨씬 수월했어.
정도를 모르고 마시던 술도 절제하게 되더라. 친구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긴 싫으니까.
그 때부터 집에서는 최대 소주 한병이라는 룰을 정해놓게 되었지.
일 끝나고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 사서 오디세이 끼고 VR세계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병나발을 불던 나날...
딱히 누굴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한 건 아냐.
원체 친구들이 많이 모여서 다같이 하하호호 떠들고 어쩌다 접속자가 적어서 소수가 모이면 술과 함께 이야기는 좀 더 깊어지고
그렇게 만나서 놀던 친구들끼리 정모도 하고 난생 처음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함께 파티도 해보고 즐거운 추억이었어.
술을 줄이니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라.
방황은 고작 한 달 정도였지만 돌아오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 게임이 없었으면 과연 난 어쩌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 안에서 진심으로 행복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올해 4월에는 지금의 여자친구랑 사귀게 되었어. 첫 만남은 화본역이었지. 그 뒤로는 이제 집에서 술을 잘 안 마시게 되더라.
좋은 인연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지.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제 고작 10개월 남짓한 추억이지만 밀도는 꽤 높았어. VRC에 과몰입한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과몰입하면 뭐 어때.
뭐... 처음 시작할 때 걱정했던 대로 좆목은 지금도 조지게 하고 있어. 초반에 같이 놀던 그룹은 이제 VRC에서 모이진 못하지만 다른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어.
나는 지금의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음에 감사해. 그리고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데에는 VRC의 영향이 작지 않지.
VRC는 나에게 정말 고마운 게임이고, 이 안에서 만난 친구들은 정말로 고마운 사람들이야.
다들 상처받는 관계보다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과몰입하는것도 좋지만 그 사람이 평생 내 옆에 있을 수는 없는걸.
없어지는 사람에 너무 상처받지 말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나자.
뭐든지 고이면 썩기 마련이야. 지금 떠나는 사람도 인연이 닿고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게임은 즐겁자고 하는 거니까. 즐겁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오늘도 새벽 감성에 고통받는 브붕이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다들 잘 자고 오늘 하루도 힘내. 그럼 굿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