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화(令和) 4년 왜(倭)나라에 말갈애태(靺鞨曖態)라는 양인(洋人)이 들락날락하니 오랜 기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여 만인을 혼란케 하는지라. 말갈애태의 본명은 확실치 않고 다만 그를 먼 데서 왔다 하니 뭇사람들이 그저 말갈족인 줄로 알고,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모습에서 본따 말갈 애태(曖態, 희미한 모습)라 불렀다. 본디 서역(西域) 근방(近方) 사람으로 이름이 괴상코 난잡하여 이름을 어려워하며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가 많으니, 엇비슷한 다과(茶菓) 이름으로 음차(音借)하여 불렀으매 이를 못마땅히 여겼다.
그의 가문 사람은 서녘 오랑캐 땅에서 대대로 조선으로 치면 예조(禮曹)의 계제사(稽制司, 과거 왕실의 의식과 음악 따위를 맡아 보던 기관) 자리에 해당하는 벼슬에 나갔다 하는데, 그 땅이 격원(隔遠)하므로 조선에 아는 이가 별로 없으리라 여겨진다. 말갈애태의 말수가 적어 세부히 알기 어려우나 자(字)는 위인(偉人)을 자칭했다. 그러나나 그의 오만이 드높은고로 아무 사람은 빈추(貧醜, 빈천하고 추함)라 일컫고, 아무 사람은 또 말갈 액투(厄透, 액운이 깊이 사무침)라 일컫고, 아무 사람은 재민(災愍, 재변과 근심)이라 일컬어 멸칭(蔑稱)하니라.
말갈애태가 당초 가문(+家門)의 명(命)을 받자와 어린 나이에 왜나라에 당도해 학원우상(學院偶像)을 하기로 하였는데, 비록 가무(歌舞)는 뛰어났으나 오만한 성질을 고치질 못해 학원우상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아 가벼이 여겼다. 하여 선의파선(善意波仙)이 칭송한 리애라(利愛羅)의 삽곡화음(澁谷華音)을 홀로 대(對)했을 때마저 마음쓰기가 인색하고 함부로 깔보듯 했다. 그가 삽곡화음에게 시조를 지어 희롱한 뒤 후환을 두려워해 급히 도망하니, 그 모습이 무척 날래 급히 달려온 남천(嵐千) 사또가 무예에 일가견 있으되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고, 아무리 눈 좋은 사람이라도 도저히 쫓지 못했다 한다. 그가 지은 시조는 아래와 같다.
澁谷歌論(삽곡가논, 삽곡의 노래를 논하다)
愚墮態未太(우타태미태)
어리석게 떨어진 위신은 큰 것이 못 되고
隊氣懦已濃(대기나이농)
너희 무리의 기세는 이미 나약함이 농후하구나.
魂吐努遇他(혼토노우타)
다른 곳에서 만날 땐 혼을 토하며 힘쓰거라.
未勢殆惹婁(미세태야루)
아니면 (내게)기세가 거의 이끌리리.
또한 가무(歌舞)로 요요기패수(謠謠器覇秀, 노래의 으뜸가는 그릇)에서 리애라를 눌러 이기니, 그의 방자한 태도가 더욱 흥(興)이 올라 학원우상들의 으뜸을 뽑는 라부라이부(羅府羅異部, 각 마을에서 각기 다른 노래패가 벌이는 것)도 함부로 여겼으되, 삽곡화음은 분하기도 하였으나 자세를 가다듬어 리애라는 으뜸이 아니라고 겸손히 대답(對答)하니 이 아니 겸허하리오?
선의파선이 말갈애태에게 패퇴(敗退)하여 위기를 느꼈으므로, 라부라이부에서 장원급제를 하기 위해 당가가와 평안명근(平安名菫) 등이 심기일전해 가무에 힘쓰는 날이 늘고, 하여 후배(後輩)들이 선배(先輩)들을 감히 따라가지 못하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도저히 없어 모두가 심란히 여기는데, 또 삽곡화음이 홀로 있을 때만 말갈애태가 나타나 정신(精神)을 현란케 하니 근심이 가득한지라.
말갈애태는 스스로 지은 시조를 아껴 수차례 인용하니, 종국(終局)에는 라부라이부에서도 삽곡가논을 읊으며 장원급제를 감히 호언장담(豪言壯談)하였다. 이에 그를 보던 좌중(座中)의 제인(諸人)이 경악하여 당혹해 하였다. 이에 리애라의 당가가(唐可可)나 미녀매이(米女梅以)는 노기 어린 얼굴로 분개하고 약채사계(若菜四季)는 냉정히 실력을 살피어 선의파선보다 한 수 위로 보는지라.
허나 드높은 오만에 상제(上帝)가 천벌을 내리셨는가, 말갈애태는 라부라이부에서 탈락(脫落)하여 마당을 뜨기로 되었으니, 왜에도 법도가 있을지언정 저 서방 오랑캐 법도대로 마구 무례(無禮)히 굴며 용인하지 못하였다. 이에 뭇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해 조목조목 비하했다.
저잣거리에 말갈애태의 이름을 훼(毁)하는 소리가 오가자 리애라가 그를 비록 방자한 오랑캐라 하나 각기 측은히 여겼다. 다음날 말갈애태가 서한(書翰)을 남기고 홀로 유유히 떠났으나, 서역 글씨인지라 도통 읽을 수 없었는데, 마침 삽곡화음의 부(父)가 역관(譯官)이었으므로 서한을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서한에 쓰인 대로 신궁(神宮)에 도달하니 과연 말갈애태가 뜻을 못다 이루어 허(虛)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삽곡화음이 그를 곧바로 꾸짖거나 하지 않고 미소로 대하여 내막(內幕)을 묻자 말갈 애태는 삽곡화음의 너그러움에 탄복하여 바른 대로 일렀다.
저 멀리 서역(西域)에도 이름 있는 가무꾼들이 있어 춤을 가르치는 이름난 학당(學堂)도 있었으나, 저들과 견주어 말갈애태의 수준이 미달(未達)한 것으로 여겨 왜나라의 라부라이부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올 것을 요구(要求)했다. 서역 오랑캐들도 동방의 가무를 중히 여겨 배울 것으로 삼으니, 이 아니 기쁘리오. 허나 삽곡화음이 좋은 말로 이리저리 구슬리려 하는데도 기분이 상하여 마음대로 비하하고 원망하니, 이야기가 진전(進展)하지 못했다.
삽곡화음이 서방 유야납(維也納)이라는 땅의 이름 있는 가무 학당으로 초청을 받잡을 제, 비록 조선에서는 저들을 오랑캐로 여겨도 왜인(倭人)들에게는 낭가삭기에 양인(洋人)에게 땅을 일부 베푸는 등 서방 문물도 명망이 제법 높은지라 갈등하였다. 또 리애라가 삽곡화음의 집에 모여 몰래 엿보며 장차 그를 보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데, 또 그 광경을 말갈애태가 엿보고 있었다. 남천 사또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아 속박해 물으니, 말갈애태도 재주인 도망을 하지 못하니, 말갈애태 몸부림에 사또가 더욱 억제(抑制)해 강경히 나오니, 삽곡화음이 서방의 학당으로 가게 되면 말갈애태 역시 학당에 갈 수 있게 되리라고 바루 고(告)하였다.
이리하야 삽곡화음이 유야납에 가기로 하든 왜국에 남기로 하든 말갈애태가 삽곡화음을 그저 따르므로, 반쯤 체념할 지경이 되어 있었으매, 이에 사또가 자비(慈悲)를 베풀고자 하여 노래패 리애라가 학당에 모인 중에 사또가 삽곡화음더러 유야납을 가라고 이르는지라. 이 사람 저 사람 혼란하여 의견이 저들끼리도 갈라지며 삽곡화음이 결단짓게 하니, 여러 날을 장고(長考)해 보았으되 비록 벗과 갈라지더라도 서방 아악(雅樂) 좋다 하여 떠나기로 결심하는지라.
라부라이부에 장원급제하여 결구 학당(結丘學堂)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니, 곧 떠나기로 된 삽곡화음이 미련이 남아 잠시 옛 벗과 머물었으나, 곧 결단하여 발을 떼어 학당 밖으로 나갈 제, 말갈애태가 결구 학당의 복식을 입고 가로막는지라. 이에 상황을 도저히 모르는 삽곡화음이 당황하여 무슨 변고인고 물었으니, 말갈애태가 보는 그대로라 가로되 삽곡화음이 주춤주춤하며 이리저리 땀을 흘리더라.
실은 오랑캐의 본디 변덕의 기질이 있어 당초 약속을 어기어 유학(留學)을 취소시키매, 말갈애태 귀가 밝아 재빨리 의복을 갖추어 학당에 당도하는데, 다만 이를 모르는 삽곡화음은 대경(大驚)하여 혼절할 지경이 되니, 왜의 기록이 여기서 끊기어 있어 이 뒤의 행방은 알지 못함이라.
사신(史臣)은 논한다.
『말수가 적고 용태가 신출귀몰한 가운데 다만 사특하니, 빼어난 용모와 가무로 백성을 홀리는 눈나(嫩懦, 연약한 사람)일지라. 요사스러운 서양 가무 실력을 갖췄으므로 군중이 생소한 재주에 눈이 현란하여 학원우상을 무척이나 압도하였으나, 오만방자한 기질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니 이 어찌 어리석으리오.
다만 장래 아군이 되어 리애라에 보탬이 되도록 잘 교화하면 크나큰 득이 될 테요, 기질대로 장래 적군이 되어 학당을 혼란케 하면 크나큰 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차후의 행실을 잘 보고 조선의 학동더러 본보기로 삼게 하면 필시 발전이 있어, 입랍(入拉, 끌려들어감)하여 직관(直觀)도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본디 왜의 사서(史書) 십삼편(十三篇)을 조선글로 읽기 쉽게 집필하였으나 이를 원래 기록하였던 화전십휘(花田十輝)와 경극상언(京極尙彦)의 글솜씨가 워낙에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지라, 난잡한 와중에 인물의 행실을 잘 다듬어 기록했었더면 오만한 말갈애태라도 아름다운 가희(歌姬)로서 필히 역사에 이름을 날리었으리라.
허나 이러한 내막을 모르고 다만 그저 보기만 할 적에는, 말갈애태의 독특한 가무로 눈이 즐거워 심중(心中)의 독(毒)을 풀어낼 수 있었으니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해우응 눈나!(駭愚應嫩懦, 눈나를 보고 놀라 어린 척하며 답하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