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진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진짜 미안! 오늘 밤 안에 전부 다 끝내야만 하는 상황이야!」
「유우 쨩? 지금 막차도 끊긴 거 알고 있어? 이제 와서 못 온다고 하면 어떡해!」
「정말 미안 아유무! 지금 부스 다시 들어가야 해! 이 죄는 나중에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유우 쨩! 뭐야, 끊었어?!」
부쩍 쌀쌀해진 번화가의 공기에 흰 분노가 퍼져나갔다. 아유무는 떨리는 손으로 꺼진 화면의 스마트폰을 쥐었다. 코끝이 빨개져 갔다.
「지금 몇 시인줄은 아는 거야...? 오늘은 데리러 가 줄테니 마음놓고 동기들이랑 마셔도 된다고 한 게 누군데...!」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는 단어가 언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의 거리감이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이었고, 이를 세간에서는 연인이라 칭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아는 거냐고...」
허공에 덧없는 원망을 날려보내는 아유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런 걸로 울고 싶지는 않다는 분노어린 자존심에, 아유무는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됐어. 두고 봐. 오늘 일, 후회하게 해 줄테니까.」
아유무의 주먹이 떨렸다. 취한 신체에 스미는 늦가을 밤바람은 지독하게도 잘 느껴졌다. 날씨 탓인지, 뚫린 마음 탓인지, 몸도 떨리는 느낌이었다. 입고 있던 코트 깃을 여미며, 아유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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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그리 높은 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힐이라면 힐인 신발을 신고 철제 나선계단을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텔에서야 최상층이 스위트룸이라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맨션의 최상층은 아무래도 그저 고통을 위한 곳 같았다.
「아하하... 늦은 시간에 미안... 그런데 이 맨션,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어떻게 5층에 사는 거야?」
「지금 잘 올라오셨네요. 저도 매일 그렇게 올라와요.」
「그런 말이 아니라~」
아유무는 짐짓 볼에 바람을 넣으며 벗은 구두를 현관에 정리했다. 술기운 탓인지, 자정이 넘은 시간에 갑자기 남의 집에 실례하는 사람의 태도로서는 다소 풀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제 집에 처음 오시는 게 이런 형태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 손님용 슬리퍼는 옆에 신발장 가장 위에 있어요.」
아유무는 신발장 가장 윗칸으로 손을 뻗으며 낑낑댔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있어? 좀 꺼내줘~」
「저랑 키는 1cm밖에 차이 안 나시잖아요...」
낑낑대는 아유무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내며, 시오리코는 슬리퍼를 꺼내곤 신발장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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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따뜻해~」
목욕을 마친 아유무의 뺨에서는 김이 나는 듯했다.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코코아를 양손으로 감싸 잡으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어쩌다 지금 여기 계시게 된 건지 물어도 될까요. 곤란하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래도 쫓아내지는 않을 테니.」
「그래, 들어 봐, 시오리코 쨩! 연인이 한밤중에 거리에 내던져졌는데! 나 바빠~ 하고 안 오는게 말이 돼? 심지어 오늘은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던 주제에?」
무언가 말하기 힘든 사정이라도 있을까 나름 농담까지 섞어 배려했건만, 시오리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유무는 열변을 토했다. 게다가 시작된 것은 타카사키 유우, 그녀의 소꿉친구 겸 연인의 이야기였다. 시오리코의 선배이기도 한 아유무의 연인은, 아무래도 아유무보다 음악을 우선시한 모양이다.
유우를 향한 원망과, 거기서 급작스럽게 이어진 유우의 음악에 대한 예찬, 하지만 음악도 좋지만 연인이 최우선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급선회에 시오리코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더 바짝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의 내용은 정말 집중하고 싶지 않은 성격의 것이었지만.
「제가 뭐라 말을 얹을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두 분 사이의 일이고.」
무어라 돌려줄 말을 찾다가 결국 포기한 기색이 역력한 대답이었다. 사실 아무 대답도 되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꼭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유무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뒤로 묶었던 머리를 고쳐 묶기 위해 잠시 풀며, 시오리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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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시오리코 쨩, 머리 길러?」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퉁명스러운 대답. 취기에 분노가 더해진 상태였다고는 하나, 집에 들어와 목욕을 하고 한참 대화를 했으면서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조금 마음이 꺾였다.
부드러운 외모, 부드러운 성격.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살면서 화를 내 본 적이 없을 것만 같은, 어떤 면에서는 걱정되기도 하는 사람. 미후네 시오리코가 우에하라 아유무를 보며 처음 느꼈던 인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의 앞에 보이는 아유무의 모습은 곧바로 기억 속의 아유무 씨와 매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실망했다거나 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시오리코는 담담하게 눈앞의 현상을 받아들였다. 그런 것에 능하기도 하고.
아유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도 모를 때, 한 학년 위의 아유무는 니지가사키 학원을 떠났다. 선배들이 떠나고, 3학년이 되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시오리코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냈다. 남이 보기엔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시오리코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해 혼자 살게 된 방에도 여전히 걸려 있는 스쿨 아이돌 동호회의 단체사진을 몇 분이고 바라본다는 사실을, 남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사진은 아유무로부터의 연락을 받자마자 떼어 숨겨 두었지만.
「시오리코 쨩, 혹시 화났어...? 역시 이런 시간에 다짜고짜 오는 건 좀 아니지...? 정말 미안!」
코코아의 탓인지, 연인에 대해 열변을 토한 탓인지, 아유무는 평정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스스로가 한 일을 파악하고, 지켜야 할 예의를 챙겼다.
「그랬다면 진작 쫓아냈을 거예요. 아유무 씨니까, 그러지는 않았지만.」
「나니까 봐 주는 거야? 뭔가 특별대우 같아서 좋은걸. 역시 시오리코 쨩, 상냥하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네. 당신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대화는 위험했다. 아유무 씨니까? 사족을 붙이고 말았다. 더 집중해서 말을 골라야 한다. 대체 뭘 티내고 싶어하는 건지.
「그냥, 몇 년만의 재회가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던 것 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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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리코는 말을 삼키듯 내뱉었다. 아유무가 졸업하고, 시오리코가 졸업하고, 둘 모두 대학에 다니게 되고 나서도 두 사람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카린을 비롯한 3학년들이 졸업한 후에도 동호회 단체 채팅방은 건재했고, 아유무와 2학년들이 졸업하고 나서도 그랬다.
하지만 시오리코는 오랜만에 다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를 돌려 거절해왔다. 물론 시오리코 이외에도 여러 사정으로 일정을 맞추기 힘든 멤버들이 많았기에,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멤버들의 진로가 다양한 것이 시오리코로서는 도움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유무를 좋아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유무에게는 유우가 있다. 모두가 이를 알고 있다. 그 모두에는 시오리코 본인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선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아유무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즉, 앞으로 아유무를 만나지 않겠다는 자조적 선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후네 시오리코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자고 가도 될까? 폐라는 건 물론 알지만...」
시오리코의 가슴이 뛰었다. 이 시간에 후배의 집에 찾아왔다는 것은 물론 묵고 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오리코 또한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우물쭈물 간청하는 아유무를 보니, 가슴의 가장 밑에 숨겨 두었던 마음이 단숨에 솟구쳤다.
「...그러세요.」
가까스로 대답을 꺼냈다. 양 손을 모으고 이 빚은 유우 쨩이 언젠가 성대하게 갚을 거라고 읍소하는 아유무의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유우라는 이름이 들린 순간 시오리코의 고동은 멈춰 버렸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빚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왜 유우 씨가 대신 갚는 거죠?」
필요 없다. 필요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이미 나오고 말았다. 시오리코는 지난 수 년간의 수행 아닌 수행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일 아침까지 연락 없이 안 들어오면, 유우 쨩 엄청 걱정할 거 아냐? 일단 그걸로 나에 대한 죗값은 치러야 할 거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본 시오리코 쨩에 대한 빚도 물론 유우 쨩이 갚아야 하는 거지.」
어떠한 논리에서 나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오리코의 가슴은 급격히 식어갔다. 연락 없는 외박에 자신의 연인이 죽도록 걱정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란 것도 태연하게 말한 것 같다. 아니다. 아유무 씨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박힌 나선은, 모든 것을 꼬아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연기해야만 한다.
「아유무 씨도 짓궃으시네요. 유우 씨, 많이 걱정할 텐데요.」
「그러니까 그게 목적이라니까~ 한번 불안해 봐야 정신 차리지.」
「그걸 위한 과정이 왜 저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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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한 번의 쓸데없는 말. 하지만 아유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유무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게 나였던 것 뿐일 것이다.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아유무 씨에게 있어서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시간이 늦었어요. 묵고 가시기로 결정되었으니, 이제 슬슬 주무시죠.」
화제를 돌린다. 더 이상 아유무와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마침 시계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최근 취침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긴 했지만, 아유무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오리코 쨩은 안 자?」
「저는 평소에도 이것보다는 늦게 자요.」
「뭐어? 안 되지, 그러면! 예쁜 얼굴 다 상하겠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시오리코 쨩이 그렇게 불량학생이 됐다니, 믿을 수가 없어.」
양손으로 뺨이 감싸지는 감촉이 간지럽다. 시오리코의 눈밑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으며 다크서클을 걱정하는 아유무의 손은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얼굴이 뜨거운 걸지도.
「농담은 그만 하시고 어서 주무세요. 저는 잠도 안 와요. 누군가가 와 주신 덕에 하던 일도 중단됐고요.」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권유를 이어갔다. 조금 탓하는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그 자리에서 아유무를 껴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꼭 일찍 자야 해? 꼭이야. 검사할 테니까!」
「네, 네. 제 방 침대 쓰세요. 저는 소파에서 잘 테니까.」
「그래도 그건 너무 미안한데...」
「...아직도 자러 안 가셨나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유무를 침실로 보낸다. 사실 할 일은 없지만, 아유무와 더 이상 같이 있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이런 불순한 사람의 집에 단 둘이 있다는 걸 아유무 씨는 알까?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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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집 소파에서 잠들 준비를 마치고, 닫힌 자신의 방문을 보며 시오리코는 곧게 서 있었다.
「...어쩌면.」
문 손잡이를 돌리는 시오리코의 마음 속에 검은 강물이 흘렀다. 머릿속에서 아유무의 본 적 없는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다. 분명 본 적 없음이 분명한 모습들이, 시오리코의 상상력에 의해 생생하게 펼쳐졌다. 잠든 아유무의 얼굴. 헝클어진 머리. 상기된 뺨. 바로 옆에서 보기만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죄일까, 하는 불온한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미련, 욕망, 질투, 자기혐오.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 스스로를 공격했다.
맨션 5층 맨 끝 집에서 느닷없는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스스로의 뺨을 때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였다.
「시오리코 쨩?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은 큰 소리였던 탓에, 얕은 잠을 허우적대던 아유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오리코는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뜨거운 것이라도 되는 듯 문 손잡이에서 황급히 손을 뗀 시오리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별 일 아니면 다행이라는 아유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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