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야기 자체는 그냥 뻔하고 무난한 왕도식 구성임
갈등이 있는데 알고 보니 거기 오해가 있었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가 어쩌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
문제는 이러한 형식에서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빌드업과 그 해소가 엉망진창이고 작위적이라는 점인데
이게 어쩌다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음.
때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감.
러브라이브 시리즈의 각본가 하나다 쥿키는 2018년 1분기 방영작 《우주보다 먼 곳》(이하 요리모이)의 시리즈 구성을 맡는다.
바로 전 분기(2017/q4) 방영작이었던 러브라이브 선샤인 2기에 이어 연속으로 쥿키 각본의 작품이 방영되는 것이라 그에 대한 우려가 상당했음
요리모이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라는 점 또한 불안감 조성에 한몫 더했고(하나다 쥿키는 원작이 없거나 부실한 경우 각본의 퀄리티가 상당히 불안해지기로 악명 높음).
이 요리모이라는 시리즈는 네 명의 여고생이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민간탐사대의 구성원이 되어 남극으로 떠난다는 내용임.
하늘과 우주공간의 경계를 나누는 카르만 라인의 위치가 해발 100km 상공인데, 도쿄부터 남극점까지의 거리는 거진 14,000km에 육박하므로 본 제목은 그럴싸하면서도 상당히 호들갑스럽다고 할 수 있음(서울에서 대전까지도 우주보다 멀다).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지만, 어차피 이 시리즈 다들 안 볼 거 아니까 그냥 쓰겠음(다만 여기서 미리 밝히는데 이 시리즈는 꽤 괜찮은 작품이므로 혹시 관심있는 사람은 이 글 마저 안 읽는 것을 추천).
네 명의 주인공 중 코부치자와 시라세(이하 시라세)라는 캐릭터가 있음.
이 캐릭터는 주인공 일행의 남극 여정의 발단이 되는 인물인데, 설정상 그녀의 어머니는 국립극지연구원 소속으로 남극을 탐사하던 중 블리자드에 휘말려 행방불명이 되었음. 이때 시라세는 중학생이었고 작중 현재시점으로는 고2. 그녀는 모친의 실종 이후 수년간 학생 신분으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100만엔의 현금을 모으게 됨. 그 돈으로 남극에 가려 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임. 이후 나머지 세 명의 주인공들이 어찌저찌 여기에 휘말리고, 결과적으로는 시라세가 100만엔을 쓰지 않고도 과거 시라세 모친의 동료였던 인물이 이끄는 민간탐사대에 특별대원으로(정확히는 SNS팀 같은 것) 들어가 남극으로 향하게 됨.
앞서 네 주인공이 각자의 이유로 남극행을 선택했다고 썼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구심점이자 최대떡밥은 실종된 시라세 모친의 존재로, 그 시신 또는 어떤 흔적이라도 찾아내는 것이 주인공 일행의 목적이 되는 것.
시라세타치는 우여곡절 끝에 시라세 어머니의 무전 신호가 끊긴 지점까지 도달하지만, 눈뿐인 허허벌판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리 만무. 결국 시라세는 체념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로 생각하는데, 남은 세 친구가 베이스캠프를 샅샅이 뒤진 끝에 어느 창고에서 시라세 어머니의 랩탑을 발견해 냄.
랩탑을 받아든 시라세는 캠프 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랩탑을 충전기에 연결한 후 전원을 켠다. 랩탑에는 비밀번호가 걸려있고, 시라세는 이 숫자 저 숫자 넣어 보다가 본인의 생일을 입력하고 마침내 모친의 어카운트로 로그인하는데...
여기서 잠깐. 극중에 초반부부터 매 화마다 꾸준히 삽입되었던 컷이 있는데 바로 시라세가 그 어머니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장면. 시라세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 실종된 그녀의 어머니에게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
마침내 로그인된 화면에는 지메일이 열려 있고, 이윽고 계정이 서버와 동기화되며, 한 통, 한 통, 수십 수백 수천 통의 메일이 수신함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모두 시라세 본인이 어머니에게 보낸 것들. 수문이 열린 오래된 댐처럼, 터질 듯 치밀어 오르는 메일 화면을 지켜보던 시라세는 그간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 커다란 상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며 폭발하듯 오열한다.
상기 에피소드는 동분기 방영되었던 '바이올렛 에버가든' 엄마의 편지 에피소드와 함께 최루탄 쌍두마차로 화제를 불러모았고, 본 시리즈는 작품성에 대한 평가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됨(bd 1권 초동 판매량 7000장)
국내에서는 극중 남극 탐사 관련 역사 인식 문제로 우익 논란까지 터지는 등 좋지 못한 해프닝이 있었던 탓에 관심을 별로 못 받았는데, 일본내에서는 상당히 흥행한 시리즈였음. 지금도 괜찮은 청춘ㆍ일상계 작품으로 꾸준히 회자되는 중.
이제 다시 하나다 쥿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쥿키는 요리모이의 성공으로 오리지널 각본에 대한 본인의 오명과 불명예를 깨끗이 뒤엎는 데에 성공함. 바로 이전 분기 럽샤인 2기에서 공중부양 신기한 스쿨버스를 연출하며 개같이 털렸던 그 쥿키가 바로 그 다음 분기에 홈런을 쏘아올린 것은 이야기적으로도 실제 드라마틱.
이후 그는 슈타게 제로, 유포니엄 맹피, 히토리 봇치 등 원작을 가진 미디어믹스 시리즈 몇 편과, 물장판, 그란벨름(이건 평가가 꽤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음. 안 봤지만)의 오리지널 시리즈 구성을 맡았고, 사실상 스핀오프 취급을 받았던 럽라 니지동에는 참여하지 않음.
그리고 2021년 7월. 러브라이브 슈퍼스타의 방영과 함께 쥿키의 러브라이브가 다시 돌아왔다.
방영 초기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음. 혐중정서에 얽힌 탕쿠쿠 논란 및 이모저모, 전작 니지동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코미디에 힘이 실린 각본과 연출로 팬덤의 우려를 순식간에 지워내며 좋은 평가를 얻어냄.
그러나, 사실 쥿키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우리고 우려서 맹물 끓이게 생긴 러브라이브 전통의 폐교서사로 다시 돌아온 그는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요리모이의 자기복제였던 것이다. 방영순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시리즈의 허리였던 치사토 에피소드부터 슬슬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폐교서사의 심장인 렌 에피소드에서 하나다 쥿키는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학교를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스쿨아이돌(뻐킹아마추어)부와도 맞서싸운 하즈키 렌. 일개 학생 신분으로 학교 전체를 지탱해 온 철의 여인인 그녀지만 실제 가정사정은 거의 파탄. 야마가미 집안. 그럼에도, 그녀 또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 여린 소녀였다는 이야기. 아무튼 스쿨아이돌은 안 된다 그거 하면 학교 망함ㅅㄱ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 실은 렌애미도 스쿨아이돌이었던 것. 카논 일행은 동호회 부실에서 렌애미의 일지와 무대 의상을 발견하고 전교생 앞에서 렌에게 그것들을 건넨다. 렌은 오카상 오카상 오열을 하고 그에 전교생 일동 로동당 박수 짝짝짝짝짝
그래서 이게 감동적이었나? 다시 한 번 요리모이 할 수 있었나?
다시 양 시리즈를 놓고 발단부터 비교해 보자
요리모이에서 남극-시라세의 어머니-시라세-나머지 주인공 3인방은 모두 플롯상에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발단이 되는 사건인 시라세 어머니의 실종이 남극이라는 장소적 배경을 규정하고 이어 시라세라는 캐릭터와 그의 목표까지 규정한다. 이후 그녀와 함께 하게 된 3인방 역시 그녀의 목적에 공감하고, 한편으로는 각자의 일상 속에 비어져 있는 어떤 자리,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 남극으로 향한다. 시라세의 어머니란 그 모두의 상실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그녀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남극에 왔으나, 이 이야기는 시라세의 어머니를 찾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시라세의 어머니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자, 곧 퍼즐 전체이기도 하다.
주인공 일행은 시라세의 어머니를 발견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의 랩탑을 발견하고, 그 랩탑에서 시라세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닌, 중학교 시절의 그날부터 시작되어 아직까지 이어진 끝나지 않는 하루의, 어머니를 잃은 그 자신이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시라세의 어머니가 아닌 시라세 본인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이며, 그 발견을 돕고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린 동료들과의 우정이 그 중심에 있고, 그러므로 청춘인 것이다.
사실 이 시리즈의 메인 주인공은 시라세가 아니다. 4인방 중 극의 화자, 즉 메인 스토리텔러는 타마키 마리. 그녀는 극의 시작에서 시라세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녀에게 이끌리고 곧 남극에 이끌린다. 키마리의 동기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우유부단한 자신을 뒤바꿀 여행을 떠나는 것. 시라세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천진난만한 청춘의 발걸음을 남극으로 향해 내딛는다. 주역 4인방 키마리, 시라세, 히나타, 유즈키 각자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모이고, 겹쳐지고, 다시 훨훨 뻗어나간다. 그 하나의 발자국 속에 남극이 있다.
럽슈스는 어땠나? 스쿨아이돌-렌-렌의 어머니-카논쿠쿠스미레치사토는 플롯상에서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나? 8화 이전의 이야기에서 렌의 존재는 스쿨아이돌 활동의 걸림돌이고 그 배경엔 렌의 어머니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 있다. 그리고 8화에서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뒤집는다. 그 이전까지 멤버들과 렌은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었나? 렌의 어머니는? 럽슈스에서 쥿키는 그 모든 것의 접점을 '다 함께 스쿨아이돌'로 퉁쳐버리고 막무가내로 그들을 쥐어 뭉친다. 하나의 팀이 아닌 그저 덩어리. 억지로 짓누른 찰흙 덩어리와 같은 그들의 관계성이 이야기의 끝에 남는다.
쥿키가 요리모이의 성공에서 캐치한 비법 레시피는 '엄마 그리워 울면 감동적'이었나 보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그딴 건 비법이 될 수 없음을 최악의 방법으로 증명해 냈다. 엄마 부르며 울면 감동적. 친구들이 도와줬으니 더 감동적(렌이 멤버들과 딱히 친구조차 아니었음은 차치하고). 전교생이 박수치면 감동 백 배.
럽슈스 1기 방영으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럽슈스 2기가 방영 중이다. 시리즈 구성은 여전히 하나다 쥿키. 리에라의 멤버는 2기에 들어오며 4명이 추가되어 럽라 전통인 9인 구성으로 돌아왔다. 1년 전 겨우 다섯 사람의 관계성을 그려내는 것에도 애를 먹었던 쥿키가 다시 뮤즈 아쿠아 시절로 컴백한 9인 구성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다시 버스를 하늘로 날려 보낼까?
하나다 쥿키. 이번엔 어떤 감동을 선사하게 되는 걸까?
나는 미리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