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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문학상] 시오세츠 비 오는 날의 밀회
글쓴이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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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748589
  • 2022-07-04 17: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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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보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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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분도 축 처지고, 습한 공기도 그렇고, 또 비가 오면 연습도 못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작년에는 비 때문에 중요한 행사가 중단된 적도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쳐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동호회 활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가 엉망이 될 뻔했어요. 이러니 비를 좋아할 수가 없죠.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의 저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제 시끄러운 소리가 그립다고 말할 정도로요. 

저는 「빗소리 정도는 성량으로 극복하면 된다고요!! 」 라고 말하고 다닐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사실 의외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아예 유키 세츠나가 아닌, 나카가와 나나로서 하루를 살아가고는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제 모습이 걱정되셨는지 어머니가 부드럽게 물어보셨습니다.


「나나, 비 많이 오는데 오늘은 일찍 오니?」


「음… 아뇨, 그래도 여러가지 회의할 것도 있고, 돌아오는 건 비슷할 것 같아요」


이런 날에 기분이 다운되는 것은 어머니도 잘 알고 있기에, 별로 간섭하시지도 않고, 이렇게 별 의미 없는 대화, 이 가족간에 서로 삭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제외하면 그렇게 대화를 많이 주고 받지도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좀 너무한가요. 하지만 비가오면 저는 사고방식까지도 이따금씩 부정적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네요. 

그도 그럴게 저는 항상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정을 담아 큰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이니까요. 

아마 제 대사를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끝에는  항상 느낌표가 두개 이상씩 붙어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평소의 제 대사들을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마 이번엔 안심하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비 오는 날의 저는 조용하답니다.


이런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면, 평소의 제 모습과는 너무 큰 갭 때문에 괜한 걱정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장마철같이 비가 많이 올때면, 집에 틀어박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학생회장이 된 이후로는 학생회에 틀어박혀 일만 했었고요. 

하지만 이젠 3학년이라 무턱대고 만화를 보기에는 어머니 눈치도 보이고, 학생회실에 틀어박히는 계획은 학생회장이 아닌 제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하나'라는 사소한 고민을 안고 비가 오는 등굣길을 걷고 있으니, 벌써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옷이나 가방을 비롯한 여러 곳이 비에 젖어버렸습니다. 

덕분에 몸은 끈적거리고, 기분은 한층 더 가라앉았네요.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이곳저곳을 닦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수업이고 뭐고 머릿속으로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이 늪 같은 저기압 속에서 흐리멍텅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 벌써 시간이 지나, 어느새 저는 동호회실 앞에 서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고 해서 동호회에 얼굴도 비추지 않는건 오히려 더 큰 걱정을 하게 만드니까요. 

하지만 문 반대편에서 느껴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고 있던 제 옆에서,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츠나씨? 들어가지 않고 뭐하는 중이신가요?」


「아, 시오리코씨… 그게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 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시오리코씨와 저의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서먹서먹합니다. 

알고 지낸시간은 벌써 1년이라 대화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좀 더 친밀한 관계가 되진 못했다고나 할까요, 특히 오늘같이 비가 올 때는 그나마 대화를 주도하던 제 기분이 완전이 다운되기 때문에, 어색함만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시오리코씨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동호회실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그래도 무슨 고민인지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들어가버릴 줄이야, 이렇게 차가운 사람인지는 몰랐네요 시오리코씨. 


앗, 생각해보니, 곤란해하고 있는 제게 먼저 대화를 걸어준 사람은 시오리코씨였는데,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숨기기만 한 제가 잘한 건 없죠. 

멋대로 시오리코씨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네요. 

비가 오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도 드물지 않게 하게 되는 점이 무섭습니다.


「역시 들어가지 않는게 좋으려나…? 괜히 이런 기분으로 대화했다가 무심코 상처 입히거나 하는게 아닐지…」


그런 혼잣말을 하며 다시금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 동호회실 문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나온 사람은 방금 저를 내버려두고 들어가버렸던 시오리코씨. 

하지만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제 손목을 잡고 저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무슨 짓인가요!!??」 하고 큰소리로 물어봤을텐데, 어디로 갈 지 몰라서 우물쭈물 방황하고 있던 저를 어딘가의 목적지로 이끌어주는 그 뒷모습에 저는 그저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츠나씨, 동호회 분들에게는 말해 두었습니다. 당분간 제 일을 조금 도와주세요.」


「네? 그게 갑자기 무슨…」


「아까 전에 동호회실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동호회실에 들어갈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신 것 아닌가요?」


방금 전까지 시오리코씨를 나쁘게만 생각한 제가 더 비참해 보일 정도로, 그 정도로 시오리코씨의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고 있는 제게 그 온기는 너무나도 기대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분명 다른 분들에게 걱정끼치고 싶지 않으신거겠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해결될 때까지는 학생회실을 마음껏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그, 그건 시오리코씨가 곤란하게 되는 게 아닌가요? 오늘 동호회에서 다음 라이브에 관한 회의를 한다고 했는데다, 여러가지 정할 것도 많은데 저 때문에 여기서…」


「아뇨, 어차피 저도 이번 기회에 학생회에서 할 일을 몇 가지 미리 정리해 둘 생각이었거든요.」


「그치만…」


「어차피 날씨가 이래서는 연습도 못할 것 같고요. 그러니까 부담 없이 편하게 앉아주세요.」


생각해보면 사실 저는 비 때문에 기분이 다운된 것뿐인데, 그 모습이 시오리코씨한테는 엄청 큰 고민을 안고있는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괜한 걱정 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이라는거죠.

하지만 그걸 떠나서 시오리코씨가 제게 배푼 호의는, 갈 곳 없는 저에게 있어서 정말 간절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오리코씨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 여기서는 솔직히 털어놓는게 좋을 것 같네요.


「저… 시오리코씨, 할 말이 있는데요…」


「네, 무슨 일이시죠?」


「그, 고민에 관한…」


「아, 굳이 억지로 이야기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부담없이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아, 아뇨 그게….」


그렇게 저는 시오리코씨에게 제가 안고 있는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반응이었습니다.


「시오리코씨... 저는 나름 진지한데요…」


「아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그런 이유로 문앞에서 우물쭈물 하고 계셨다는게,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서요…」


귀엽다니… 아무리 키가 좀 크고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저는 선배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도 이걸로 한 명 제 비밀을 아는 사람이 생겨서 뭔가 안심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후련한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비가 오면 시오리코씨를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차례 웃음바다가 지나간 이후에는 다시금 조용해졌습니다. 

사실 이 정적이야말로 시오리코씨와 저의 관계에서 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어색하기보다는 편안한 느낌이네요. 

따라서 문제는 이 고요함보다도,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지루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이곳에 온 까닭에 공부할 책이나 읽을 책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엔 어머니에게 이미 늦을 거라고 말해두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모처럼 저를 위해 힘써준 시오리코씨를 좀 도와줄 수 없을까 살펴봤지만, 이젠 학생회도 아닌 저로서는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대로 가면, 지루한 채로 두리번거리거나 멍때리고 있던 오늘 아침의 제 자신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기분은 다운됐는데 거기에 지루함까지 겹치니까요. 

하지만 시오리코씨 앞에서 그렇게 변했다간 또 괜한 걱정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지개라도 킬 겸 몸을 일으켜서 스트레칭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시오리코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제게 이런 제안을 해주었습니다.


「세츠나씨 저랑 교내 순찰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교내순찰, 저도 작년엔 자주 했던 일이었죠, 이런 비가 오는 날은 빼고요. 

이런 날은 교내에 사람도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다들 실내에서 동아리 친구들과 수다나 떨고 있으니, 이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비냄새와 습기, 그리고 텅 빈 복도를 혼자 순찰하기가 좀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지금처럼 지루한 상황에서는 조금 모험적인 면이 있는 편이, 저에게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시간 때우기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게다가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시오리코씨가 같이 있으니까요. 별로 무서울 것도 없겠고, 그래서 저는 교내 순찰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저는 시오리코씨와 함께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비오는 날의 학교는 역시 칙칙하고 으스스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런 시간에는 더더욱이요. 

예전에 제가 학생회장이었을 적에는, 비오는 날 교내순찰 같은 걸 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시오리코씨는 정말 똑 부러진 사람이라서 그런지 예외가 없네요. 


「비가 오는 날의 학교는 뭔가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아무말 없이 걷고 있던 저희 사이의 적막함은 시오리코씨의 질문을 시작으로 조금씩 지워져갔습니다.


「색다른? 음… 솔직히 저는 좀 으스스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런가요? 교실에서 들리는 수다 소리나, 빗소리, 저희 발소리도 전부 어우러지는데다가, 침침한 자연광 때문에 돋보이는 형광등 불빛도 어딘가 독특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애초에 비가 오는 날에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는 저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거기다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 냄새까지, 저는 으스스하다기보다는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시오리코씨는 비 오는 날이 꽤나 좋으신가보네요?」


「아, 그러고보니 비가 싫다고 하셨었죠? 그렇다면 으스스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저희는 조용히 걷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이렇게 걷다보니, 방금 전 시오리코씨가 말했던 그 소리들과 풍경들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지만, 막상 느껴지기 시작하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오묘한 소리를 들다보니 어느새 니지가사키 한 바퀴를 다 돌아버렸습니다. 

원래 교내순찰을 이렇게까지 오래, 넓게 하는게 아닌데, 시오리코씨는 평소에도 이렇게 하시는 건가요? 

오늘은 학생회 일 도중에 나와서 이 정도였지만, 만약 학생회 일을 끝까지 마치고 이렇게 순찰을 한다면, 굉장히 늦어질텐데요… 

아니면 혹시 지루해하는 저를 위해 미리 해둔다는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저와 어울려주신 걸까요. 

그런 결론에 도달하니 오늘은 시오리코씨에게 신세만 지는 것만 같아서 조금 미안했습니다. 

내일은 부디 비가 그쳐서 원래의 유키 세츠나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제 슬슬 집에 갈까요? 」


그렇게 저희는 각자 우산을 펼치고 아직도 굵은 빗줄기가 내리는 하굣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을 하는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것도 있었고, 대화를 하려고 해도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또 각자의 우산을 쓴 채로 둘이 걷게되면 생기는, 그 은근한 거리감 때문에 결국 저와 시오리코씨는 헤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들리는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습기와 비 때문에 지친 몸과 마음을 욕조에서 녹이고나서 뽀송뽀송한 상태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당장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저는 이제 3학년이고, 스쿨 아이돌과 공부를 병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어중간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책상에 앉아 책을 폈고,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해내겠다는 마음을 지키고자 열심히 공부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느새 창문 밖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적 속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빗소리를 알아차린 것도 그때 즈음이었습니다. 

음... 그런데, ‘정적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에서 시오리코씨가 떠오른 건 이상한 일일까요? 

그도 그럴게 오늘 하루 종일 겪었던, 일종의 감각적인 체험이었으니까요, 그런 감각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 때 갑자기, 휴대전화의 짧은 진동이 느껴졌고, 혹시나 시오리코씨가 아닐까 싶어서 긴장된 마음으로 휴대폰을 켰습니다.


「세츠나씨 혹시 내일도 학생회실로 오시나요?」


예상대로 시오리코씨가 보낸 메시지였습니다. 

확실히 이대로 가면 내일도 비가 오는 건 확정이라고 봐야겠죠. 

그렇지만 제 쓸데없는 고민 때문에, 또 다시 신세를 지는게 과연 옳은 행동일까요? 

분명 동호회의 다른 동료들도 잘 설명하면, 시오리코씨처럼 이해해줄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부터 동호회에 가서 아무일 없다는 듯이 지낸다면, 시오리코씨의 저 문자메시지를 무시하는 일이 되는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비록 저 메시지가 제게 학생회실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에 하나 그런 마음이 숨겨져 있는 내용이었다면, 시오리코씨가 저를 위해 해준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끝에, 시오리코씨는 오늘 저 때문에 학생회 업무를 도중에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네 이건 제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겠네요. 내일도 학생회실에 가야겠습니다. 


「네!!」 라고 답장한 뒤, 느낌표는 괜히 붙였다고 이불을 펄럭거린 건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 싫은 또 다른 이유는, 아침이 되어도 전혀 밝아지지 않는 점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상쾌한 햇빛이 아니라, 어두침침한 습기로 시작해야하니까요. 

그렇게 평소보다 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뜬 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습니다. 


「오늘도 늦니?」


어머니의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답합니다. 

오늘도 학생회실에서 시오리코씨를 도와줘야하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으니,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거센 비가 오는 등굣길은 좋아하려 해야 좋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곳저곳 젖은 교복을 준비한 수건으로 닦고 나서야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실 시간이 됐습니다. 

수업은 언제나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교사라는 직업은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교실부터 복도까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시간은 이미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창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하네요. 

비 오는 날엔 시간을 시계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게 또 하나의 불편한 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반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다시금 학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네요, 어제는 멀뚱멀뚱 하는 사이에 정신을 차려보니 동호회실 앞에 서있었는데, 오늘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 하나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점심시간도 또렷하게 기억나네요,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츠나씨, 어서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시오리코씨」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온 학생회실에서 시오리코씨와 저는 여느 때와 같은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원래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한펜이 학생회실 책상에 떡하니 올라가서 털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어라? 어째서 한펜이…」


「그게…」


이렇게 세찬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바깥을 뛰어다니던 한펜과 우연히 눈이 마주친 뒤에, 한펜이 시오리코씨에게 다가왔고, 온 몸이 쫄딱 젖은 한펜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시오리코씨는 이따가 고양이 쓰다듬기 동호회 분들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학생회실에서 잠깐 보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오늘은 저와 시오리코씨 사이에 빗소리만 가득한 시간이 줄어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렇게 귀여운 생물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는 힘드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시오리코씨는 곧바로 일어서버렸습니다.


「저 그럼 한펜한테 줄 먹이를 가지러 잠깐 갔다오겠습니다.」


「네? 아… 네」


마침 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타이밍에 휙 하고 가버리시네요. 

좀 차가운 태도에 조금 심술이 납니다. 

란쥬씨나 아유무씨에게는 허물없이 대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시오리코씨는 저랑 작년부터 학생회에서 같이 일한 사이인데, 아직까지도 이런 거리감이 있는게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말투 때문일까요? 저희는 서로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니까요. 

그럼 이따가 시오리코씨가 돌아왔을 때 시험삼아 한번 편하게 불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저는 선배니까요, 후배한테 편하게 말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거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오리코씨에게 「요, 시오리코!」 하고 친한 친구들처럼 불러본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오리코씨는 올 생각을 안하고, 대신 한펜이 자꾸 옆에서 들러붙습니다. 

이젠 니지가사키의 명물이 되어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건가요?

아니면 오히려 이런 태도가 인기의 비결일까요?


「요녀석, 처음 봤을땐 엄청 작고 귀여웠는데, 지금은 완전히 장난꾸러기가 돼버렸네요, 앗!」


큰일입니다. 한펜이 멋대로 복도로 뛰쳐나가버렸어요… 

어떡하죠, 이러면 편하게 말을 걸기는커녕 죄송한 마음에 더 거리가 벌어질지도 몰라요. 

만회하려면 당장 잡아오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 쪽으로 뛰어 갔는데 마침 도착한 시오리코씨를 보고 놀란 나머지,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우와앗..!」


「괜찮으세요?」


제대로 넘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시오리코씨가 저를 잡아줘서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시오리코씨가 제 손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저는 괜스레 당황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다보니, 아까 전 생각했던 계획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산되었습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펜은 그저 시오리코씨가 가져온 밥에 이끌려서 저희 주변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밥을 먹은 뒤, 한펜은 곤히 자고있습니다. 

덕분에 또 저와 시오리코씨는 빗소리만을 들으며 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기 가만히 앉아서, 시오리코씨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니 떠오른 생각인데, 다른 학생회 임원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어제는 원래 시오리코씨가 동호회 활동을 하는 날이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오늘까지 없는 건 좀 이상하네요.


「저… 다른 학생회 임원들은 오늘 안나오는 건가요?」


「아, 오늘은 제가 모두 돌려 보냈습니다. 이제 슬슬 시험도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네? 오히려 다같이 모여서 빠르게 끝낸 뒤에 공부에 전념하는 편이 시오리코씨에게 더 편한 것 아닌가요?」


「그, 그건…」


어라? 시오리코씨의 반응이 어딘가 심상치가 않네요.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것일까요?


「호, 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든가…?」


「아뇨, 아뇨 그런건 절대 아닙니다. 학생회 임원 분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애초에 세츠나씨도 알던 분들이고, 제가 임명한 사람들인데, 절 괴롭힐 리가 있나요?」


「그건 그렇네요… 죄송해요 시오리코씨의 반응이 이상해서 그만, 괜한 생각을 해버렸네요.」


「네? 전 평소랑 똑같았다고 생각하는데요」


거짓말은 서툰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학생회 일을 혼자 떠맡아서 질질 끌고 있는걸까요. 

혹시 저와 있을 시간을 만들기위해서…는 아니겠죠? 

네, 역시 이건 너무 나간 것 같네요, 비가 오면 생각이 많아지다보니, 또 무심코 이상한 생각을...

애초부터 저와 시오리코씨가 둘이서 만나봤자 어색함만 생겨날 뿐인걸요. 


어쩌면 새로운 학생회 임원들을 제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배려해 준 것일까요? 

1학년 임원들도 분명 들어왔으니까요. 

그 시오리코씨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 때문에 시오리코씨가 혼자서 학생회 일을 독박 쓰고 있다는 것이 되겠죠… 

단순히 제 기분이 안좋아졌을 뿐인데, 그 때문에 시험기간에 혼자서 학생회 일을 하고 있는 시오리코씨에게 너무나 미안해졌습니다. 

저는 작은 성의라도 보이기 위해, 가는 길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오리코씨, 혹시 오늘 업무 끝나고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그, 그러면 이따가 저랑 식사라도 같이 하실래요?」


왠지 헌팅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저는 조금 덧붙였습니다.


「아, 아, 그러니까 이건 그, 저를 위해 배려해주신 시오리코씨에게 감사의 의미로 사는 거고, 딱히 다른 의미는 없고 또… 아, 아무튼 그러니까,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제 사소한 고민을 털어놨을 때처럼, 시오리코씨는 또 한번 웃음을 참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시오리코씨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츠나씨, 꼭 저한테 정체를 들켰을 때처럼 당황하시네요.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신다면, 사양하는게 오히려 실례되는 행동이겠죠. 그러면 오늘도 제 업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어제 오늘 시오리코씨와 지내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말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 치고는 드물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어서 그런가요, 그래도 어딘가에 콕 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보다는 이렇게 아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다고는 생각합니다. 



「세츠나씨, 저 다 끝났습니다.」


「아, 네!」


말이 많아진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저는 또 한번 텐션이 높아져 있던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점은, 진짜 맑은 날에는 아무렇지 않을 일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괜히 혼자 신난 것이 들켜버릴까 괜히 조마조마하다는 것입니다.





고양이 쓰다듬기 동호회에서 한펜을 데려간 뒤에야 저희는 비로소 학생회실 밖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도를 걷고 있으니 어제 같이 교내 순찰했던 일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각들도 다시 한번 제 몸을 간지럽히네요.


「뭔가 세츠나씨와 이렇게 둘이 있는게 너무 오랜만이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요, 제가 학생회장을 내려놓은 이후부터는 접점도 줄어서 동호회가 아니면 특별히 볼 일이 없긴했죠.」


「저는… 이렇게 다시 세츠나씨와 친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네요.」


‘사실 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뭔가 부끄러워져서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저희 둘 사이에는 빗소리와, 발걸음 소리와, 수다 소리만 남았고, 그것을 들으면서 걷다보니 벌써 교사 바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오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는 순간. 이게 무슨 일일까요? 

시오리코씨가 허둥대는 아주 희귀한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츠나씨, 저 실수로 우산을 학생회실에 두고 와서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시오리코씨가 그 말을 하고 난 뒤 돌아서서 학생회실로 향하는 그 찰나의 순간, 저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충동이 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충동의 원인은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러니까… 제가 그, 시오리코씨의 손을 붙잡고, 제 우산을 펼치면서, 같이 쓰고 가는 건 어떠냐는 말을 전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행동을 곱씹어보며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시오리코씨가 말을 걸어 왔습니다.


「우산, 제가 들까요?」


그러고보니 시오리코씨는 저보다 키가 조금 컸던가요, 그렇다면 제가 들고있어봤자 시오리코씨가 불편하기만 할 테니, 여기선 부탁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까 전에 일어난 우산 사건 때문인지, 간단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결국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우산을 시오리코씨에게 넘겨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산 하나는 사람 두 명이 들어가기엔 생각보다 비좁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계속 저도 모르게 시오리코씨의 몸 이곳 저곳에 조금씩 닿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정도 거리에서는 자꾸만 옆 사람의 향기가, 습한 공기와 어우러져 한 층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더 이상 잠자코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서, 저는 먼저 말을 꺼내봤습니다.


「그러고보니, 시오리코씨가 어제 말씀해 주셨던 비 오는 날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뭔지 저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잘됐네요.」



「아, 미리 하려던 학생회 일은 모두 끝나셨나요?」


「네. 덕분에요.」



「음… 내일 주말인데, 뭐 하면서 지내실 생각인가요?」


「비도 오니, 그냥 집에 있을 생각입니다.」


「…」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 보려고 해도, 전부 툭 끊겨버리는 바람에 저는 질문을 이어나가기를 포기하고 그저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시오리코씨와 저는 앞으로도 이렇게 어색한 관계로 있게 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을 때, 이번에는 시오리코씨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츠나씨는, 내일 특별히 할 일이라든지 있으신가요?」


「네? 아, 저도 그냥 집에 있어야겠죠, 이 기세면 내일도 비가 안온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역시 시오리코씨 쪽에서 말을 걸어온다고 한들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맑은 날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아뇨, 맑은 날이었다면 분명 이런 기회조차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의 관계가 이런 상태에서 멈춰 버리는 건 별로 좋지만은 않네요. 

사실 밥을 사겠다고 한 것도,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고 한 것도 모두, 시오리코씨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우산을 같이 쓰자고 권유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우산… 우산? 

생각해보니 시오리코씨에게 당당하게 같이 쓰고 가자고 한 것은 좋은데, 아직도 시오리코씨의 우산은 학생회실에 그대로 남아있지 않나요? 

그것도 모르고 저는 시오리코씨를 멋대로 끌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오리코씨는 지금껏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네요. 

제가 상처 입지 않도록, 스스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를 배려해준 것일까요. 

또 다시 제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오리코씨, 제가 생각이 짧았던것 같아요. 대신 책임지고 오늘은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


「시오리코씨?」


「저… 그럼, 세츠나씨」


앗… 역시 화나신 걸까요, 한참 말이 없다가 나지막이 부른 제 이름,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저를 벌써부터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눈을 꼭 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혹시 오늘 하루 저희 집에서 쉬었다 가는건 어때요?」


「네?!」


「절 데려다주셨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는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아, 그리고 내일 주말이기도 하고, 또 특별히 할 일도 없으시다고 하셨으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요.」


솔직히 이 말을 듣고 난 직후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시오리코씨의 관계가 서로의 집에 놀러 갈 정도로 가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왜일까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제안을 저는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만… 신세져도 괜찮을까요?」


「네!」


대답하시는 시오리코씨의 표정은 너무나도 밝아서, 저도 모르게 자꾸 오해를 하게 됩니다. 

혹시 시오시코씨는 제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말 그대로 오해에 불과할 뿐이라고 금세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런 저런 행동들도 전부 그렇게 보이기 시작해서, 오히려 제 마음이 더 흔들리게 되니까요. 

저는 호의와 호감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랍니다.


어느새 저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했습니다. 

거창하게 말한 것 치고는 너무 평범한 곳에 데려와서 실망하실까봐 걱정이었지만, 왠지 아까부터 시오리코씨는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그런걸 신경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안내 받은 자리로 가서 앉고, 저는 함바그 스테이크, 시오리코씨는 오므라이스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는 사이에… 


어라? 원래의 시오리코씨와 저였다면, 또 한번 정신과 시간의 방이 되었어야 할텐데, 이번에는 비록 상투적인 일상 얘기이긴 해도 나름대로 시끌벅적하게 기다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도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는게 신이 나서 그랬을텐데, 시오리코씨도 그만큼 신이 나셨던 걸까요?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드디어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고, 저희 둘 다, 와~ 와~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원래 음식이라는 것도,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그 기분이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이 기세를 타서 서로 아~ 하고 먹여주는 시추에이션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그런건 역시 상상에서 그쳤습니다. 

그냥 서로의 접시에 조금씩 덜어서 나눠 먹거나 하는 정도일까요.


그런데 시오리코씨는 음식을 먹는 모습도 굉장히 다소곳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집안의 아가씨 같은 느낌입니다.



「네…?」



「?」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제가 한 말로 듣기라도 하신걸까요, 갑자기 제게 반문해오는 시오리코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눈도 크게 뜨고, 묘하게 얼굴도 상기된 것 같네요, 도대체 어떤 말을 들으셨길래 저렇게까지 반응하시는 걸까요?


「방금, 제 먹는 모습이 어떻다고...」


「…」





 지금까지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이 대화를 기점으로 다시 끊겨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식기가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 주변에서 들리는 말소리, 그리고 음악소리뿐. 분명 머리로 생각한 것이었는데, 어째서 그걸 입밖으로 내게 된 걸까요. 

심지어 그렇게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말을.


잠깐만요, 그런데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먹는 모습이 예쁘다는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만한 칭찬 아닌가요? 

저희는 왜 이렇게 서로 민망해하고 있는 걸까요. 

오히려 민망하게 생각하는게 더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아무 말 없어지는 편이 더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왜 이렇게 말을 꺼내기가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거기에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니 괜히 더워지고, 원래부터 있었던 습기 때문에, 실내인데도 땀이 나기 시작해서, 괜히 고개도 들지 않고 묵묵히 먹기만 했습니다. 


빠른 식사를 마치고, 저희는 가게를 나와 다시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느껴지는 우산 하나의 거리, 그 거리에 맞춰 따라오는 감각들은, 방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인지 한층 더 짙게 다가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의 두근거림과, 피어나는 감각들을 느끼면서 걷고 있으니, 어색함 같은 것을 의식할 새도 없이 시간이 지나, 벌써 시오리코씨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잘 지어진 일본식 집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아까 전부터 느껴지는 두근거림 때문일까요, 묘하게 현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꺼려져 우물쭈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츠나씨, 비오는데 서있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라고 말하면서 제 손목을 잡아 당기는 시오리코씨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아까 전까지 얼굴을 붉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심지어 묘한 웃음기마저 띄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저 혼자만 긴장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라 시오리코? 무슨 일이야 친구를 다 데리고오고.」


집에는 시오리코씨의 언니분인 카오루코씨가 계셨습니다.



「아, 카오루코씨? 오늘 하루 신세지겠습니다.」


「그래~ 이름이 세츠나였던가? 오랜만이네」


「언니? 오늘 밖에서 자고 온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두고 간게 있어서 잠깐 돌아왔어, 걱정해주는건 고마운데 금방 나갈거라서.」


「걱정같은거 안했으니까 빨리 나가주세요」


「쳇~ 시오리코 오늘따라 좀 짜네. 아, 혹시 내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걸 걱정하는건가?」


「그러니까, 걱정 같은 거 안한다고요, 빨리 좀 나가요 좀.」


시오리코씨가 언니분과 티격태격 하는 모습도 굉장히 신선한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얌전하고 배려심 깊은 시오리코씨도, 언니 상대로는 저렇게 거리낌없이 대하는군요. 

형제자매가 없는 저는 가끔 이런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오리코, 이제 나가볼게, 둘이 재밌게 놀아~」


「다녀오세요」


「근데 가끔은 좀더 살갑게 인사해주면 안될까?」


「하…」


「미안 미안~ 어우 짜다 짜.」


카오루코씨는 이런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외출을 하시네요. 

그 자유분방함은 가끔 본받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방금 카오루코씨가 장난스럽게 둘만의 시간이 어떻다고 하시던데, 그렇다면 지금 시오리코씨의 부모님도 외출중이신가 보네요? 

사람이 사적인 공간에 단 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긴장할 수 있는걸까요?

어딘가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 죄송합니다. 언니가 집에 있을 줄 몰라서요...」


「아뇨, 사과받을 일이 아닌데요 뭘, 오랜만에 얼굴 볼 수 있어서 저는 좋았어요.」


덕분에 시오리코씨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건 비밀입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우선 비도 많이 맞았으니까 목욕물부터 받아놓겠습니다. 잠시 쉬고계세요, 편하게 누워계셔도 괜찮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말을 들었다고 한들, 이런 방에서 벌러덩 드러눕기는 쉽지 않은 것 같네요. 

그나저나 시오리코씨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건… 

샴푸라든지 바디워시 같은 걸 똑같이 쓴다는 말이고,  그럼 아까 시오리코씨와 딱 붙어있었을 때 느꼈던 향기가 제 몸에서도 느껴지게 되는 걸까요…?



「세츠나씨 준비 끝났습니다.」


「아, 네」


좋은 집이라 그런지 욕실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의외로 집은 일본식인데, 욕실은 평범한 서양식이었네요. 



「세츠나씨, 갈아입을 옷 준비해 놨습니다. 입고 오신 옷은 세탁해둘게요.」


「네!? 아, 네..」


생각해보니 시오리코씨는 저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배려해주는 사람인데, 그걸 생각못하고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속옷도 뱀 허물처럼 널부러져 두었던 걸 시오리코씨가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또 갈아입을 옷은 뭘까요. 

설마 시오리코씨의 옷? 

아뇨 역시 이런 집안에는 손님용 옷이 따로 있을 것 같네요. 

또 이상한 생각을…



「저… 세츠나씨? 생각해보니 여벌옷을 생각을 못하고 무턱대고 초대한 탓에… 우선 제 옷을 갖다 두었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아요.」


처음엔 욕조에 느긋하게 앉아 비와 습기에 지친 몸을 녹이려고도 생각했지만, 갑자기 그런 기분이 사라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욕실을 나왔고, 몸을 닦은 다음, 빠르게 옷을 입었습니다.

샴푸와 린스, 바디워시, 비누, 입욕제, 그리고 옷에서 느껴지는 유연제의 향기와 미묘하게 남아있는 체취. 

온통 시오리코씨의 냄새로 가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후각이 적응하고 나면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게 되겠죠.



「시오리코씨, 저는 다 씻었어요!」


「네, 여기 차랑 간식을 꺼내뒀으니까 드시면서 기다려주세요」


고급스러워 보이는 화과자와 말차, 손님용 옷이 없었던 것은 정말 의외였지만, 손님용 간식은 정말 예상 그대로 나온게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보이는 과자인데도, 손대기가 부담스러운건 어째서일까요. 

접시와 찻잔이 굉장히 멋있어서일까요? 

심지어 테이블도 약간은 예스럽지만 또 그것 나름의 품격이 느껴지고, 방에 장식된 멋들어진 붓글씨들, 장식들, 모든 것들이 다다미 바닥과 합심해서 저를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비싸보이는 물건이 손에 들어오면 어딘지 모르게 애지중지하게 되는 것처럼, 이 화과자와 말차에 함부로 입을 가져다대는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 저는 시오리코씨가 올때까지 하나도 먹지 못했습니다. 



「혹시 단걸 별로 안좋아하시나요..?」


하지만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시오리코씨가 굉장히 침울한 표정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 곧바로 하나를 집어먹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게 너무 맛있어보여서, 시오리코씨가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하하..」


저 말과는 별개로, 사실 시오리코씨가 오자마자 방금 전까지 존재했던 그 부담감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도 거리낌없이 화과자에 손을 가져간 데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시오리코씨도 안심하는 표정으로 제 옆에 앉아서 사이좋게 나눠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친구 집에 혼자서 놀러 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수학여행에 간 것처럼 몸 한구석이 간질간질하고, 마음은 싱숭생숭합니다. 

단지 와서 목욕하고, 간식을 먹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남은 몇시간이 어떤 추억으로 채워질지 너무나 궁금하고 설레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 시오리코씨」


「네?」


「뭐하고 놀까요?」


「저는 그, 사실 세츠나씨랑 보고싶은 영화가 있어서 하나 준비해뒀습니다.」


「오! 영화 좋죠!」


「네, 그런데 지금 보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어서요… 공포영화로 준비했거든요」


공포? 이 비오는 날? 심지어 시간대까지 밤늦게 볼 생각인건가요? 

너무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은데요… 

게다가 영화이야기를 하는 시오리코씨의 기대하는 눈빛이 엄청나서 거절하면 아까처럼 풀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공포영화를 좋아하시는 걸까요. 

저는 그다지 호러 내성이 없어서, 중간에 눈을 감아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그럼 그때까지 음… 보드게임 같은건 어때요?」


「집에 보드게임이 딱히 없어서요, 대신 언니가 갖고 있는 스위치라도 같이 하실래요?」


「좋죠!」


카오루코씨의 스위치를 아무렇지 않게 갖고 오는 시오리코씨도 조금 의외의 모습이네요. 

다시봐도 형제자매란 참 신기합니다.





「크윽… 저는 게임에 적성이 없는걸까요.」


연속으로 5번 패배한 시오리코씨는 분함을 숨기려고 애쓰고 계시지만, 역시 그런 기분을 잘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거기에 분한 표정의 시오리코씨도 신선하고 귀여웠으니, 오히려 앞으로 좀 더 감정을 드러내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지금의 시오리코씨를 반대로 계속 이기게 만든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요? 

초보자를 상대로 계속 이기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앞으로 몇 판 정도는 시오리코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져보기로 했습니다.



「아~ 시오리코씨, 역시 게임에도 적성 있는 것 같은데요?」


「에헤헤, 그, 그런가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에 더해, 처음 들어보는 부끄러운 듯한 웃음소리. 

저는 게임에서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후후, 시오리코씨 오늘따라 감정이 풍부하다고나 할까, 표정이 되게 다양해지시네요.」


「그러는 세츠나씨는 비오는 날인데도 굉장히 싱글벙글 하고있지 않나요??」


「아, 확실히 오늘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요, 시오리코씨랑 같이 있어서일까요?」


「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근데 정말로 시오리코씨랑 같이 있었던 이틀간은 비가 저렇게 오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평소 같은 뜨거운 기분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말 즐겁게 보낸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 서먹서먹 했던 것 때문에, 시오리코씨와의 대화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서게 했지만, 동호회실 앞에서 어물쩡거리던 저를 이끌어준 그 때부터, 예전과는 아예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게임이란건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 물건이군요. 벌써 밤 10시가 다 됐어요.」


시오리코씨는 연승행진에 기분이 좋았었나봅니다. 

반대로 어떻게하면 티가 나지 않도록 질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저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는데 말이죠.





「세츠나씨, 드디어 공포영화의 시간이 왔습니다.」


「하하.. 시오리코씨는 공포영화 좋아하시나 보네요」


「음…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저, 공포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사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한 기분 절반이랑, 조금 무서운 기분 절반입니다.」


「한번도 보신 적이 없다고요? 그럼 이 영화, 시오리코씨도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건가요?」


「네, 공포영화를 보고싶다고 언니에게 부탁했더니, 찾아준거예요.」


카오루코씨가 가져다 줬다는 점에서부터,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대하고 있는 시오리코씨를 뿌리치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결국 저도 같이 그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방의 불을 끄고 좌식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시오리코씨는 들뜬 마음이 표정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소름끼치는 오프닝이 시작되니, 본격적으로 공포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한편, 시오리코씨의 그 들뜬 표정도 오프닝 이후로는 갑자기 울상입니다. 

아무래도 시오리코씨는 저와 마찬가지로 호러에 굉장히 약한 모양입니다. 


영화가 본격적인 이야기로 돌입하기 시작함에 따라, 저희 둘 다 공포감 때문에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인지, 둘 사이의 거리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우산 하나에서의 거리보다도 더 가깝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저는 화면 대신에 시오리코씨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름돋는 비명소리와 효과음들은 여전히 제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소리에 맞추어 눈을 꼭 감거나, 화들짝 놀라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꺄악 거리는 시오리코씨의 모습을 보고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한편, 시오리코씨는 평범한 장면임에도 앞으로 나올 무서운 장면이 두려워서인지, 몸은 잔뜩 움츠러들어있고, 불안한 마음에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자기 옷깃을 꾹 붙잡고 있었습니다. 

식은 땀 때문인지 목덜미에는 머리카락도 몇 가닥 달라붙어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무서웠던 것인지, 물기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 크고 무시무시한 효과음과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거기에 시오리코씨도 저도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던 것 같네요.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저희는 서로 꽉 팔짱을 끼고 있었습니다. 

시오리코씨는 아직도 무서운건지 눈을 감고 훌쩍거리고 있네요. 

그렇게 서로 조금 진정 된 후 시오리코씨가 눈을 뜨자 곧바로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시오리코씨가 팔짱 낀 것을 자각하신 것도 그 때 쯤이었습니다. 

저는 무서워하는 시오리코씨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지라 계속 팔짱을 낀 채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운 거리,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니 조금 민망해져서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오리코씨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화면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또다시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되자 다시금 저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오리코씨는 아예 자기 옷이 아닌 제 옷깃을 살짝 붙잡고 있기 시작했고, 저도 아까 같은 장면이 또 나오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결국 다시 서로에게 기대기로 하였습니다.


아까는 무의식적으로, 불가항력으로 서로에게 의지했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인 경우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각들, 이를테면 우산을 같이 썼을 때 느꼈던 향기처럼, 이번에는 촉감이 아주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옷이라는 경계를 두고 있으나, 그것을 넘어서 전해지는 체온과 살의 말랑한 감촉은 의식하기 시작하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시오리코씨의 머리카락이 제 몸 이곳 저곳을 간지럽히는 것이나, 그 외에도 숨소리가 들린다거나, 몸의 떨림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여러 감각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무서운 장면들이 자리잡고 있던 제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상상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시오리코씨도 마찬가지였던걸까요? 

이 이후로도 무서운 장면이 꽤 여럿 지나갔지만, 방금 전처럼 비명을 지르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서로의 몸을 기대는 것의 효과를 너무나도 크게 봐서인지, 결국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때까지도 저와 시오리코씨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완전히 끝난 뒤 나타난 밝은 화면은, 어린 시절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리는 장난꾸러기들처럼, 제 얼굴을 확 달아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민망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마치 무서운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습니다. 



「앗, 저,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뇨 저야말로, 먼저 보자고 해놓고도 이렇게 한심하게 세츠나씨를 귀찮게 할 줄은 몰랐어요...」


「…」


어색한 정적이 잠시 지나고,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벌써 잘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잘까요?」


아까 전까지 너무 가깝게 있었던 탓에 민망했는지, 이부자리는 서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깔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불을 끄고 시야가 차단되니, 그 공포영화가 자꾸 자꾸 떠올라서, 결국 다시 불을 킨 뒤 이부자리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럼 이제 진짜로 불 끌게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역시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안심이 되네요. 

이런 안심감 속에서 이불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으니 내일이면 이제 집에 가야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마치 수학여행 마지막 날 같은, 그런 아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미련이 남는지 자꾸 말을 걸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오리코씨, 주무시나요?」


「아뇨, 아직..」


「그….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표현이 서툴러서 이런 상투적인 말들 뿐이지만, 사실 저는 다름 아닌 시오리코씨와 놀아서 특히 더 좋았습니다. 

물론 이 말을 직접 전하기에는 또 부끄러우니 마음속에만 담아둘 생각입니다.



「즐거우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역시 돌아오는 것은 상투적인 대답. 

하지만 이대로 자버리는건 너무 아쉬운 기분이 들었는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저, 혹시 시오리코씨만 괜찮으시면, 이렇게 비 오는 날에 가끔 놀러와도 괜찮을까요?」


「네, 저희 집은 부모님이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요, 언니도 그렇고, 내키실 때 언제든 오셔도 괜찮습니다.」


굳이 비 오는 날이라고 한정한 이유는, 오늘의 이 기억이 너무나 소중해서일까요.



「다음에 올 때는 보드게임 갖고올게요」


「어떤거요?」


「트럼프라든지, 젠가라든지, 아 체스같은것도 있고…」


아쉬운 마음에 시작한 대화가 어느새 꽤나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점점 대화 사이에 간격이 길어지기도 하고, 목소리는 낮아지며, 하품소리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뭔가 무서워서 잠 못들 줄 알았는데, 세츠나씨가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그래도 잠이 오네요」


「저도요.」


눈을 감고 있으면, 금방 자버릴 것 같아서, 눈을 뜨고 천장만 보고 있었던 저는, 그냥 갑자기 시오리코씨가 자는 모습은 어떨까 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옆으로 돌아누웠습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저를 보고있던 시오리코씨와 눈이 마주쳐버렸습니다. 

하지만 둘 다 잠결이라 그런지, 평범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비, 계속 오네요, 아침까지 안그치면, 집까지... 바래다…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시오리코씨는 잠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은 시오리코씨가

인정할수없어 선추후감 2022.07.04 17:10:54
ㅇㅇ 글자 수 때문인지 마지막 짤려서, 다시 나오게 수정함. 봐줘서 고마워 2022.07.04 17:19:17
ㅇㅇ 아련하고 잔잔한거 좋아 2022.07.04 22:03:02
요하네타텐시스톰 2022.07.04 22: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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