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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DAY1 (2)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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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405230
  • 2021-12-01 15:28:41
 




(2) DAY+1


쿠쿠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눈이 그쳐 있었다. 휴대폰에 출국까지 ‘DAY-1’ 이라고 정확하게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쿠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는 눈이 쌓일 만큼 오는 일은 별로 없다고 들었었는데, 마침 이렇게 거리가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보니 쿠쿠의 마음은 들뜨기도 했고 침울해지기도 했다. 내일 아침에는 아마 이 거리를 볼 틈도 없이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쿠쿠는 옷을 차려입고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방은 여전히 다 치우지 않은 짐으로 어질러져 있었는데, 쿠쿠는 일부러 방을 이런 상태로 유지해 두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방에 누군가를 부를 구실, 별로 큰 구실이 아니어도 되니까 쿠쿠는 적당한 이유 하나를 만들어 두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제 분명 저녁이나 밤에 스미레가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오지 않은 것을 두고 쿠쿠는 도무지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스미레가 준 부적은 쿠쿠에게 가장 가까운 곳, 그러니까 심장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쿠쿠는 그 부적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그걸 매면 가슴 한가운데에 부적이 닿도록 해두었다. 스미레가 부적에 담아 준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나 막상 만들고 나니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 들키는 게 부끄러워서 이미 정리된 옷 속에 숨겨둔 상태였다. 하필이면 어제 스미레가 부적의 행방을 묻는 탓에 속으로는 무척이나 동요했지만 겉으로는 그럭저럭 아무렇지도 않은 티를 냈다.


자신이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본국에 돌아가면 하루하루를 이곳에서의 나날을 그리워하면서 살 것이 틀림 없었다. 쿠쿠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더는 과거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서 확실한 꿈을 향해 나아가며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눌려 자라온 쿠쿠에게 그것은 단지 상상 속의 반항에 불과했다. 이곳에 와서 자신이 얼마나 드넓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는지 쿠쿠는 날이 갈수록 실감했다. 자신의 꿈에서 애써 등을 돌리고 돌아간다면 쿠쿠는 조금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으나 결국 받아들이는 것 외에 마음 쓸 것이란 없음을 쿠쿠는 알고 있었다.


모든 부원들이 쿠쿠를 배려해주었다. 그 누구도 이별을 입에 담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쿠쿠가 원하는 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습을 계속했었다. 쿠쿠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누구의 눈물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일주일 전 집에 찾아온 스미레와 대화를 나누다가 실수로 ‘일주일 뒤에요’라고 날짜를 털어놓아 버린 걸 쿠쿠는 잊지 않고 있었다. 


곧 스미레가 찾아올 시간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몸짓으로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쿠쿠는 작별 인사는 기대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조금 더 밝은 말들을, 이 슬픔을 가볍게 이겨내게 해줄 그럴듯한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카논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의 절반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누군가가 짧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분명히 스미레였다. 쿠쿠는 살짝 목을 가다듬고, 거울을 한 번 확인한 뒤 문을 열어 주었다. 추위로 상기된 얼굴의 스미레는, 어제는 오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문의 원래 목적대로 짐을 정리하고, 빠뜨린 물건이 있지는 않나 확인하면서도 스미레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쿠쿠에게 할 말 없어요?” 쿠쿠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물었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스미레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물건이 전부 다 정리되었는지 확인하고, 쿠쿠는 코코아를 두 잔 타서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맨바닥에 스미레와 함께 앉았다. 쿠쿠는 스미레에게 티아라를 주었던, 이미 까마득하게 먼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가을날을 떠올렸다. 그날 있었던, 서로의 운명이 하늘 아래에서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송두리째 끌어낸 감정은 지금은 이미 사라져버린 걸까? 자신이 이 사람에게서 그토록 간절히 갈구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쿠쿠는 더는 떠올려내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오면, 그때는 더는 춤도, 노래도 하지 않겠지만 만나주실래요?”


스미레는 얼굴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대답하지 않았고, 쿠쿠는 그 표정에서 후회라고 부를 만한 감정을 읽어냈다. 쿠쿠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스미레가 먼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걸 자신은 조금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받고 싶었다. 거친 파도가 치는 시간의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자신들만을 위한 화창한 봄날의 섬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찾아올 그 날을 기다리며 나날을 하루하루 지나가게 내버려 두자고. 스미레의 마음을 더는 읽어낼 수 없었던 쿠쿠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스미레는 어느샌가 바닥에 놓여있던 한쪽 손으로 쿠쿠의 손을 부드럽게, 가볍게 쥐고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쿠쿠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기를 낼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뜨거운 심장의 고동 소리만으로도 자그마한 방은 가득 채워졌고 휴일 거리의 소음도 이미 사라졌다.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약속하게 해줘.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라고 말해줘.”


‘약속할게’가 아니라 ‘약속하게 해줘’라니. 쿠쿠는 스미레가 힘주어 말한 그 자그마한 말의 차이를 느끼고는 거의 전율에 가까운 기쁨에 휩싸였다. 


“네. 약속해주세요. 그리고 말해줄게요. 스미레의 말이 맞아요. 떨어져 있다고 해도 끝은 아니에요. 또한...... 새로운 날의 시작이기도 해요.”


쿠쿠에게는 불현듯 곧이어 다가올 작별은 무언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그러니까 슬퍼할 이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몇 년을 스미레와,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쿠쿠는 상냥한 손의 온기와 흔들림 없는 시선을 받아들이면서 스미레를 향한 마음이 다시금 신선하게 샘솟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란하던 기분은 이내 정갈해졌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각오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만나러 와줘.”

“만약 가지 못하면요?”

“그때는...... 내가 찾아갈게.”

“정말요?”

“정말이라니까.” 스미레가 웃음을 살짝 흘리면서 말했다.


쿠쿠는 스미레와의 화해를 조금 더 일찍 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려 한다. 쿠쿠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스미레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하루가 지나면 사라져버릴, 손으로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스미레였다. 그리고 그 가을날이 쿠쿠에게 한껏 안겨주었던 기쁨은 미처 그것을 만끽할 사이도 없이 어느새 겨울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간다.


바닥에 앉아 있어 굳어있던 몸을 일어나면서 가볍게 푼 쿠쿠는, 스미레에게 이제는 가 보아도 좋다고, 이렇게 찾아와서 원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고 아무런 꾸밈도 없이 말했다. 그리고는 생각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스미레는 곧장 등을 돌려 나가려고 하다가, 다하지 못한 말이 떠오르는 미련 때문인지 다시 쿠쿠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제 카논하고 나눈 말을 들었어.”

갑작스러운 이 잘못된 말에 쿠쿠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날아든 분노가 쿠쿠로 하여금 스미레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녁에 오지 않은 거였군요? 그걸 지금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카논은 아직도 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도 그걸로 네가 알아채지 못하는 곳에서 포기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고...... 나는 단지 친구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그리고 그걸 알려주는 건 네가 해야 할 일이고.”

“스미레가 무슨 자격으로 카논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건가요? 쿠쿠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그런 희망이라도 품는 일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그건 내버려 두면-” “나가요.”


너무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눈물을 본 스미레의 얼굴은 선명한 고통으로 일그러지더니, 작별 인사조차 없이 싸늘한 적막만을 남겨두며 스미레는 방을 나갔다. 쿠쿠는 곧바로 주저앉아 조금 전까지 스미레의 손의 열기가 머물렀던 자신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쿠쿠는 아무도 마음속에 떠올리지 않기 위해 괜히 짐들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카논도, 스미레도, 지금은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고 다만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심코 상자에서 목걸이로 만들어 둔 붉은 부적을 꺼냈을 때, 쿠쿠는 부적에 묶어둔 검은 끈이 느슨해져 부적이 곧 떨어져 나갈 듯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


쿠쿠는 새벽 5시에 눈을 떴고, 휴대폰에는 ‘D-DAY’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다시는 찾을 일이 없게 된, 깨끗하게 텅 비어버린 방에는 자신의 몸집만 한 캐리어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쿠쿠는 미리 꺼내둔 옷가지들을 늦겨울 새벽의 공기에 떨면서 겹쳐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와 푹 눌러 쓴 모자 차림으로 방을 나왔다. 어딜 보아도 눈으로 뒤덮여 있고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거리 위에서 쿠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던 곳을 뒤돌아본 후 천천히 공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더 넓은 대로에 다다라서 택시를 잡아탔다.


몇 년은 볼 수 없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의미가 없어져 버릴 창 밖의 풍경이 쿠쿠에게는 너무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쿠쿠는 지금도 자신이 어떤 공항으로 가는지, 몇 시에 비행기를 타는지 누구에게도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 이렇게 일찍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죠? 미안해요.’ 


외로운 등대를 닮은 가로등의 불빛이 그녀의 눈에 담긴 푸른 바다를 비춘다. 바다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늘이 맑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주머니 속은 여전히 고요하고, 쿠쿠는 그때까지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단지, 어떤 자존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작별의 순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 것이 서로의 마음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상처받은 마음은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깊이 가라앉아 버리니까.   


공항에 들어선 쿠쿠는 혹시 먼저 와서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곧 자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무척이나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도 누군가가 자신을 마중하거나, 애타는 말을 해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깊이 생각했으면서도 지금은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 쿠쿠는 누군가와 작별을 나누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혼자서 그 무거운 감정을 짊어져야만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누군가가 쿠쿠의 이별을 장식해준다면 곧 상대방의 마음을 눈물로 상처입히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슬픔은 나누어져 한층 견딜만하게 된다는 것을 쿠쿠는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오래도록, 아릿하게 남아 있을 테니까.


도쿄를, 자신의 가장 빛나는 추억이 담긴 그곳을 내려다보기까지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공항에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지만, 여전히 그곳에 쿠쿠가 아는, 보고 싶어하는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가야겠네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쿠쿠는 홀로 캐리어를 끌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함을, 긴 여행의 기억을 단지 사진으로만 남겨두어야 함을 알았다. 추억이여 안녕.


-누군가에게 어깨를 붙잡힌 건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있어서 쿠쿠는 어떤 표정을 지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핏 봐도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렌은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듯한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렌렌이 여기를 어떻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시면 어떡하나요.”

“붙잡으러 온 건가요?”

“아니요.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렌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까지 덧붙이며 그렇게 말했고, 그런 사소하면서도 세심한 배려에 쿠쿠는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1년 동안, 아니, 몇 개월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있게 된다고 해도 이게 끝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언젠가 한 번 찾아오는 때가 있으면 저는 기꺼이 맞이할 테니까요.”


쿠쿠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으며, 자신의 깊은 곳이 흔들릴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그리고 이건.” 렌이 쿠쿠의 손을 잡아 무언가를 건내주면서 말했다. “스미레 씨가 분명 이 시간에 여기 있을 거라면서, 대신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쿠쿠의 손에 들린 새하얀 종이 봉투는 무척이나 얇았지만 그 안에는 편지가, 다하지 못한 말이 적혀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쿠쿠는 곧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적했지만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날아왔다. 읽지 않는 건 어떨까? 읽으면 무엇인가 또 한 번 변하고 마는 걸까?


“전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여기까지 와주어서도...... 늦었네요. 이제 갈게요.”


렌은 손을 흔들어 멀어져가는 쿠쿠를 작별했다. 쿠쿠가 잠시 뒤 등을 돌렸을 때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손에 들린 봉투뿐이었다.


쿠쿠가 좌석에 앉아서 편지를 읽어 보려고 했다. 봉투를 여는 자그마한 손이 어느샌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단 한 장으로 된 접혀 있는 편지를 꺼내고, 쿠쿠는 점차 멀어지는 육지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급하게 쓴 듯 글씨체가 조금 삐뚤어졌고 줄을 그어 수정한 부분도 눈에 띄었지만 스미레가 쓴 편지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렇게밖에 말을 전할 수 없어서 미안해.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도저히 너를 다시 만나러 갈 자신이 나지 않았던 거야. 그건 단지 내가 너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던 것뿐만이 아니라,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자신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곳을 떠나야만 했던 건, 분명히 어느 정도는 내 잘못이기도 하다고 지금이라면 분명히 말할 수 있어.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 너를 빼면 오직 나뿐이었고, 네가 먼저 부모님과의 약속에 대한 말을 모두의 앞에서 꺼내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애써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두려웠어.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게 되면 현실이 꼭 똑같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되어 버렸네.


너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용서를 구하고 싶어. 그리고 만약에 받아들여 준다면, 언젠가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너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너만큼 나의 삶에서 특별한 사람은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네가 바보같이 티아라를 나에게 준 그 날부터 내 안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으니까. 


너를 많이 좋아해. 그리고 무척이나 보고 싶을 거야.


편지를 읽어가면서 쿠쿠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편지를 더듬어가며 한 번 더 읽었다. 어느샌가 편지지 위로 눈물이 떨어져, 편지의 뒷부분에 바르게 쓰여진 ‘好’가 흐릿하게 번진다. 쿠쿠는 편지를 접고 눈물이 흐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쿠쿠는 자신의 마음이 스미레의 마음과 완전히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스미레가 편지를 쓰면서 느꼈을 고민, 회한, 부끄러움과 마침내는 좋아함까지 쿠쿠는 그 고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스미레에게 달려가서 손을 맞잡은 채로 조금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고 외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스미레를 좋아한다는, 무척이나 간단하지만 가장 쑥스러운 말마저도 지금이라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쿠쿠는 이미 본국의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      


그녀가 공항에서 나왔을 때는 연락을 받았던 대로 쿠쿠의 언니가 차로 마중을 나왔다. 쿠쿠는 언니가 자신의 눈물 자국을 발견하면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리라고 생각했지만, 언니가 그냥 그것을 발견하게 내버려 두었다. 쿠쿠는 알려주고 싶었다. 이미 다 끝나버렸지만, 단지 그 눈물 자국만을 남겨둠으로써 말 없는 반항을 언니와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바쁘다고 언니와 함께 오지 않았고, 언니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조금은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즐거웠니?” 언니가 물었다.

“응.”

“나와 부모님을 너무 탓하지는 마. 어디까지나 네가 내건 약속이었으니까.”

“알고 있어.”

“피곤했겠다. 내일은 부모님도 오실 테니까 일찍 자 둬.”


쿠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밤중이 다 되어 집에 도착했을 때, 넓은 정원으로부터 이어져 있는 저택은 밤안개 속의 으스스한 성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쿠쿠는 차로 잔디가 깔린 정원을 쭉 가로질러 정문 앞에서 내렸다. 방 하나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던 쿠쿠에게는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과 좌우로 한참이나 이어지는 복도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쿠쿠는 캐리어를 끌고 2층에 있는 자신의 드넓은 방으로 올라가 불을 끄고 틀어박혔다.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성처럼 방 안은 고요했다.


정원의 불빛들이 바닷빛 커튼을 통과해 방 안으로 희미하게 비쳐 들어오고, 쿠쿠는 짙게 드리운 어둠을 도화지 삼아 그 위에 스미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장난을 애써 태연한 척 넘길 때의 조금은 괴로운 표정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의 무심하면서도 우아한 얼굴, 그리고 한두 번 있었지만 잊을 수 없는, 손과 손이 맞닿을 때의 수줍은 듯 살짝 상기된 분홍빛 뺨 같은 것을 한참이나 쿠쿠는 생각했다. 코트 주머니에 있던 편지를 몹시 소중하게 품에 안고 메마른 눈물을 흘렸다. 쿠쿠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차오르는 격정을 해소할 길이 없어, 쿠쿠는 파묻혀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서 커튼을 젖히고 겨울과 통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다시 커튼을 쳐서 옷을 갈아입고, 캐리어로 옮겨 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목에 걸었다. 그 후 거칠어진 숨결은 금세 잔잔하게 가라앉았고, 쿠쿠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누군가를 추억할 틈도 없이 다시 창문을 닫고 쿠쿠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잠깐 켜본 핸드폰에는, ‘DAY+1’ 이라는, 더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알림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쿠쿠는 아무런 꿈도 기억하지 못하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금은 나른한 느낌과, 창 밖에서 낭랑하게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 소리와 함께 쿠쿠는 잠에서 깼다. 분명히 창문을 닫고 잠들었는데도 잠에서 깬 몸이 으스스 떨렸다. 으레 늦잠을 자는 날이면 그렇듯이 햇살은 따사롭고 주위는 여전히 고요한 것 같았다...... 쿠쿠는 잠시 침낭에서 추위에 뒤척이려다가 손을 뻗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DAY-1’ 










헤안나 2021.12.01 15:29:29
ㅇㅇ 112.152 2021.12.01 15:31:45
ㅇㅇ 2021.12.01 15:54:16
한겨울의시어마인드 쿠쿠 눈의 바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말이 근사한데 2021.12.01 16:10:57
Sakulight 즉흥적으로 떠올린 비유인데 나만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구나 ㄱㅅ 2021.12.01 16: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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