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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긴 이별을 위한 짧은 새벽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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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307040
  • 2021-10-03 15:20:06
 



3일 동안 순식간에 쓴 건데 애니 스토리가 이렇게 될지 몰랐네.. 감안하면서 읽어 줘.


-


다음 촬영을 위해 시부야로 가는 전철에 올라탔을 때, 카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덜컹거리는 전철에서 그녀로부터는 거의 1년 만에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상쾌한 기분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스미레쨩-하고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별일이네. 네가 전화를 다 하고. 1년 만인가?”

“미안해, 그동안 대학 일로 여러모로 바빠서...... 스미레쨩은 혹시 요즘 바쁘니?”

“마침 다음 일정 때문에 시부야로 가던 중이었어. 바로 내일 오후에 일이 있는데.”

“그러면 오늘 밤은 잠깐 만날래? 오랜만에 모두와 만나보고 싶어서.”

“모두, 라는 건. 우리 포함해서 5명 전부 다?”

“응? 당연하지. 유이가오카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술을 마시려고. 전부 다 성인이 되고 모이는 건 이게 처음이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딱히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가 있다기보다는, 모두의 달라진 모습들을 만나는 건 어쩐지 기분이 썩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뭐, 나는 다른 4명과 비교해도 별로 부족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누군가를 내 마음속에 불러냈을지도 모른다.


“갈게. 주소 보내줘.”

“8시까지 와줘. 모두에게도 스미레쨩이 오기로 했다고 전해둘게.”

“아니,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전화가 끊겼다. 


시부야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한참이나 그들의 안부를 떠올렸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셋은 예술대학 진학. 렌은 피아노 전공이라고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한 녀석은...... 모르겠다. 졸업하고 나서 따로 연락한 적도 없었고, 본국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여기에 계속 남아있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카논이 온다고 말한 걸 보니 계속 여기 있었나 보다. 녀석이 관심이 있는 건 스쿨 아이돌 뿐이었고 공부는 잘했으니까, 적당히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음에 틀림 없다. 만나게 되고 그쪽에서 먼저 나를 꼬집으면, 얼마 전에 내가 출연한 무대 영상을 보여줘야겠다. 그러면 녀석은 처음으로 나에게 진심으로 당황해서 할 말을 잃고 얌전해 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라고 보지만......


가게는 지하에 있었다. 어두컴컴한 불빛 안에서 가벼운 재즈가 흐르고, 그들은 구석에 있는 4인 테이블에 앉았는데 카논이 이쪽이라며 손을 들었다. 코트가 각자의 의자에 걸려 있었다. 나는 어쩐지 어색해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살짝 들어 보았다. 빈자리에 내 맥주가 올려져 있었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에 조금 마신 모양이었다.


“스미레도 술을 마실 줄 아셨군요-” 너는 처음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적어도 너보다는. 이쪽은 이런저런 좋은 자리에 초대받기 시작한 몸이라서 말이야. 항상 나만 맨정신으로 가게를 나가지.”

“정말, 1년 만에 만났는데 바로 그러기야? 5명 다 모을 시간이 나지 않아서 힘들었다고. 오늘만큼은 사이좋게 지내.”

“미안해요 카논......” 내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마 방금과 같은 그런 부분이다. 카논 앞에서는 막 사귄 풋풋한 연인처럼 꼬리를 내리면서, 내 얼굴은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몇 개월 전에 신주쿠에서 스미레 씨를 본 적이 있어요.” 렌이 말했다.

“으음, 언제였더라? 워낙 일이 많아서 말이야.”

“거리에서 촬영 중이시던데, 드라마 아닌가요?”

“아 맞아-” 나는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봤니?”-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TV는 잘 안봐서......” 하고 치사토가 멋쩍게 덧붙였다. 하긴 그건 별로 흥행하는 드라마는 아니었고, 내가 맡은 건 대사 몇 줄 뿐인 조연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에 비하면 졸업한지도 2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나름 괜찮다고 볼 수 있다. 1년 뒤에 유행하는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래도 스미레쨩은 벌써부터 출연하고 돈을 받으니 대단한 게 아닐까?”

“그렇게까지 대단할 건 없어. 애초에 주연도 아니고.”-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치만 스미레 씨라면 금방 주연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그러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나도 차라리 대학에나 갈 걸 그랬어.”-나는 날아올 말을 기다렸다.


쿠쿠는 아까부터 이쪽에는 무신경했다. 취기가 금세 올랐는지 볼 부분이 조금 달아올랐다는 걸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던 직원에게 독한 칵테일을 한 잔 시켰다. 나도 어쩐지 그런 기분이 되어서 똑같은 걸 주문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나는 쿠쿠의 눈빛을 보고는 놀랐다. 그런 눈빛을 이전에 한 번이라도 쿠쿠에게서 찾아본 적이 있었더라면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연기를 하다 보면 누군가의 표정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이토록 건조하고, 이제는 슬픔이라고 하기에도 익숙해진 우울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쿠쿠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걸 알아차린 건 나뿐인 걸까? 왜 너는, 예전처럼 웃거나 갑자기 신나서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 건데?  


그 표정이 ‘내 탓이 아니다’라는 건 분명하나(애초에 녀석이 나 따위로 기분이 상할 리가 없으니) 그것에는 무언가 말하지 못할 괴로운 사정이라도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만약 눈치챈 사람이 오직 나라면 어느 부분에서는 나에게도 책임이 놓인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가 기꺼이 그 말을 들어주겠다고 나서기에는 그 어색함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우리의 관계는 그런 일반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가면에 충실하기로 했다.


“너.” 나는 딱딱하게 얼어버린 겨울 호수에 돌을 던진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말이야, 원래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였니?” 나는 일부러 전혀 쓸모없는 소리를 했다. 또다시 불편한 시선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으면서- “이제와서 한참 전의 일을 묻는 건가요? 이 근처의 대학에 다니고 있잖아요.” 태연한 척하는 목소리. “스미레쨩은 몰랐겠지만, 쿠쿠와 졸업 전에 이야기해서 어떻게 할지 정했었어.” 그래, 몰랐겠지. 모르고말고. 녀석이 여기에 있던 아니면 볼 수 없는 저기에 있던 간에...... 아니, 차라리 더 이상 이곳에 있어 주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내가 쿠쿠를 걱정한다는 것만큼 우스운 걸 넘어서 슬프게 들리는 말도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 뭐냐? 유치한 장난으로 한껏 물들인 그 꿈같은 시절을 지나서, 지금 이 불편한 시간 속에서 저 사람이 대체 나한테 어떤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거냐? 애초에 우리는 어땠던가, 졸업식에서마저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나 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나는 지쳐 있었나 보다.


나는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기나긴 응시에 질려 버렸다. 잔을 마저 비우고 잠깐 바람을 쐰다며 밖으로 나가, 술기운인지 추위인지 뭔지 모를 위험한 느낌으로 몇 분이나 떨고 있었다. 내가 홀로 서서 생각한 것은 다만, 쿠쿠의 표정에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내가 순간 착각하여 잘못 보고 끝나는 얼굴이었다면 여전히 태연했을 텐데, 이미 쿠쿠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이란 표정은 전부 보아두고 잊고 싶어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꼭 집착하는 사람처럼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마는 것이다.


다시 안에 들어가니 대화가 어느샌가 열기를 띠고 있었다. 새로운 노래, 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벌써 먼 과거의 일들처럼 다가왔다. 어느 아찔하도록 무더운 여름날의, 노을이 마지막 빛을 흩뿌리던 해안가에서의 찬란한 추억들...... 나는 침묵을 지켰다. 쿠쿠는 어느샌가 내게 익숙한 표정을 짓고 카논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정말 나의 잘못된 해석에 불과한 걸까? 나는, 슬프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했다. 이윽고 나는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친근한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는 듯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원래 그러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말도 없이 계속 술만 시켜 마셨기에 살짝 취기가 올랐다. 이제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다. 녀석은 대놓고 취한 티를 내며 카논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두고 “카논이 집에 데려다 줘요-” 따위의 소리를 혀 풀린 목소리로 하고 있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내가 데려다 줄게.” “싫네요. 카논이랑 같이 갈테니까요.” “스미레쨩, 그럼 부탁할게.” 쿠쿠는 순간 술이 확 깬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휘청거렸다. 나는 팔을 거의 거칠게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가게에서 끌고 나왔다.


한밤중의 추위에 떨면서 나는 팔 하나로 쿠쿠를 부축하며 걸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이따금 팔을 놓으라고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의외로 잠자코 따라와 주었다. 얇은 입술로부터 나오는 하얀 입김에 위스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쿠쿠의 집을 들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위치는 기억해 두고 있었다. 잠깐 계단을 올라가는데도 추위와 취기에 비틀거렸다. 술이 너무 약한 게 아니냐고 적당한 농담 하나를 던져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때의 표정이 순간 되살아나고, 쿠쿠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마는 것이다.  


쿠쿠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공기에 순간 몸이 풀렸다. 적당한 크기의 방 하나인데 벽에는 아이돌 액자가 걸려 있고, 책장에는 추억이 담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쿠쿠는 마치 기절이라도 할 듯이 코트만 바닥에 대충 벗어둔 채 침대 위에 쓰러졌다. 거친 호흡을 따라 배가 희미하게 부풀어 올랐다.


“너, 별로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거야?” 


어떤 대답도 없었다. 단지 곧 잠자리에 들려는 사람들처럼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코트를 벗어두고 침대에 걸쳐 앉아, 기다리면 무언가 말해주겠지 하는 느낌으로 어느샌가 가만히 쿠쿠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쿠쿠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더니 배와 흉부에 손을 가져다 대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속이 쓰린 건가 해서 손을 가져다 대보려고 하니 “만지지  마요.” 하고 저지당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너, 아까 표정이 안 좋아 보였어.”


이번에도 대답이 없어서 나는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였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짓누르려고 하는 기척을 느꼈다- 쿠쿠가 누워있던 몸을 상체만 일으켰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나 있는 이마가 나에게 희미한 확신을 주고, 어서 달려가 보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열이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반응들은 대체 뭔데?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입술에 말의 전조와도 같은 더듬거리는 떨림이 순간 스쳐 지나가다가, 곧 불길한 쓴웃음으로 바뀌어 입술은 애써 태연했다. 나는 그 순간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기에 숨이 막혀왔다. 그건 첫 무대에 섰을 때의 긴장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단지 등을 살짝 밀어만 주면 되었다.


“말해줘. 지금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알아. 너는 고민하고 있는 거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건 짐작하겠지만-”

“이 말을 처음 하는 사람이 스미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내가 너무 정직한 기분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어쩐지 무엇이 나였는지 분간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쿠쿠는 오른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얼굴에 터질 듯이 열이 몰려왔다. 내 손은 쿠쿠의 연약한 힘을 따라가, 뜨겁고 고동치는 무엇인가에 닿아 있었다. 나는 그 극심한 열기에 놀랐다.


“모르겠나요?”

“이게 무슨......”

“가만히 있어 봐요.”


나는 쿠쿠가 시키는 대로 가슴 왼쪽 윗부분, 즉 심장이 뛰는 곳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다. 남은 손으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땀에 젖어있긴 하나 별로 뜨겁진 않았다. 단지 지금 내가 맞닿고 있는 심장만이, 곧 터져버릴 기세로 열을 내며 빠른 속도로 솟구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이거, 당장 병원에-”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럼 너는- 너는 왜 술을 마신 거지? 처음이 아니라면, 분명 예전에도 그랬다는 게 아니고서야 뭐야? 대체 너는 네 몸을 뭘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거냐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는 괜찮지 않을까, 심장이 얌전하게 뛰어줄까, 이젠 아프지 않은 걸까...... 나아질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확인해보고 싶어져요.”


......나는 아연했다. 여태까지 이런 사실을, 단지 쿠쿠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동정을 표하기보다도 이 병을 자신을 제외하고는 숨겨온 유약함에 대한 화가 먼저 나고 마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는데?” “듣고 싶나요?” “알려줘.” 나는 어째서 내가 거의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에 내가 그 아픔을 이해하고 싶은 것이라면...... 쿠쿠는 힘겹게 첫 발음을 내딛으며, 무척이나 더듬거리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본 적 없어요. 무슨 말을 들을지 무서워서...... 한 번밖에 말하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 주세요. 중학생 때 어느 날부터, 밤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어났어요. 처음에는 단지 기분 좋은 일 때문이라고, 아니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이건 지금까지도 변함없어요. 단지 갈수록 심해지기만 할 뿐, 그 후로 쉽게 잠들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쿠쿠가 항상 남들보다 쉽게 지치고 말았던 일들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쿠쿠가 그토록 몇 년 전에 열심히 했던 의미를 알 것 같으신가요? 매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도저히 떠나가질 않았으니까...... 단지, 자세한 걸 알게 되는 게 두려웠으니까, 악몽 같은 경우를 쉽게 상상해버리고 마니까, 차라리 모르는 척 잊고 지내는 편이 나으리라고 믿었던 거에요.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침에 눈을 뜨고 밝은 햇살이 비쳐 들어올 때 쿠쿠가 어떤 기분인지 스미레는 여태까지도 앞으로도 알지 못할 거에요. 사실, 마지막 때까지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말하게 되어서......


나는 어느샌가 모든 것을 깨달아버린 슬픔에 휘감겼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의 눈빛으로부터 일말의 동정이라도 쿠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야만 했다. 이제와서 나에게 쿠쿠를 감싸 안고 동정할 자격이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썩은 동정, 썩은 감정. 우리가 3년 내내 지치지도 않고 쌓아 올렸던 미움 위에서 내가 어떻게 감히 위로를 말할 것이며, 쿠쿠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쓰라린 고백을 듣는 건 내가 아니라 쿠쿠에게 소중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나와는 달리 진정으로 쿠쿠를 일어서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반대로 쿠쿠를 무심하게 대해야만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자, 응?”


쿠쿠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인지 뭔지 모를 것을 입가에 희미하게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내 심장의 한 단면에 보기 흉한 칼자국 한 가닥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나는 쿠쿠를 침대 위에 짓누르듯이 쓰러뜨렸다. 슬픔인지 뭔지 모를 내 마음을 쿠쿠에게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를 안타깝게 보고 동정해 줄 것 같아? 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눈물이라도 흘려줄 것 같냐고. 너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나한테 처음으로 그따위 말을 해버린 건데? 카논에게나 가서 말하라고.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아파 왔었다고, 카논이 옆에서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알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이런 모습을 보려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렇지? 그게 아니고서야 뭐야? 내가 너를 소중하게 대해주기를 바랐다면, 나는- 울음인지 뭔지 모를 벅차오름으로 나는 숨이 막혔다. 눈앞이 금세 흐릿해져서 흉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쿠쿠는 단지, 그렇게 세게 누르면 아파요...... 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희미한 빗소리가 들렸다. 쓰라리게 일그러진 내 눈물은, 쿠쿠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나는 내 심장에 맞닿는 거센 고동과, 차갑게 얼어붙은 몸 위에 걸쳐진 팔 안에서 한참이나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쿠쿠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치욕스러웠다. 눈물을 돌이켜 보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그날 저녁의 저편에 닿아 있었다.


“스미레, 쿠쿠를 봐주세요.”

“미안해, 나는 단지-”

“쿠쿠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백하는 건, 어쩌면 스미레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스미레가 사실은, 쿠쿠가 당신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상냥하게 대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과 똑같이 쿠쿠를 바라본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완전히 터져버렸다. 나는 저 멀리 어딘가로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나는 처음으로 쿠쿠의 정다운 마음씨 앞에서 온전히 내 마음을 열고 있었으며, 쿠쿠가 이토록 나와 닮아서, 나와는 너무나도 닮은 동시에 나보다는 강한 사람이어서, 그래서 그토록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쿠쿠를 마주할 자신도, 용기도 없어. 나는 항상 너를 거짓으로만 대해왔는데, 지금 내가 어떻게 너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위로하겠어?”

“쿠쿠는 스미레를 전부 이해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쿠쿠가 허락했으니까, 스미레는 쿠쿠를 솔직하게 대하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쿠쿠가 그동안 스미레를 잘못 대해왔던 걸 사과하게 해주세요. 쿠쿠가 언젠가 후회하지 않도록.”

“이제와서 그런 건, 용서하는 게 당연하잖아......”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 심장 바로 곁에서, 쿠쿠의 거센 고동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나중에 또 쿠쿠를 만나러 와 주실래요?” “쿠쿠가 부르면 언제든지 갈게. 나, 실은 아까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바쁘지도 않으니까. 엑스트라 배역 따위보다는 쿠쿠가 더 중요하니까.” 쿠쿠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은 이전과는 달리 조금도 거슬리지 않고, 무척이나 상냥한 울림으로 내 안에 녹아들었다.


“쿠쿠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은 치사해요.” 


......쿠쿠가 하품을 했다. 나는 쿠쿠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날 건가요?” “아니, 그냥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마음 놓고 푹 자. 그러면 분명 괜찮아질 테니까.”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암흑 속에서 눈을 감고 우리의 세상을 감싸는 듯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이 깊어졌다.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텅 비어버린 내 마음속을 차가운 비바람이 가득 채웠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냄새가 나면 분명히 쿠쿠가 싫어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더는 쿠쿠에 대한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비밀을 과연 나 홀로 간직하는 것이 옳은지, 앞으로 쿠쿠를 어떻게 대해야만 할지 한참이나 추위에 떨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맑은 눈물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우리의 과거의 그 자리 위에 앞으로의 기쁨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잃어버렸던 그 행복을, 터질듯한 기쁨을. 나는 행복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얻은 이 감정을, 우리는 활짝 피어나게 해 보일 것이다.


*


밤새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어느샌가 비가 그치고 햇빛이 서서히 희미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쿠쿠는 미소를 입가에 칠해둔 채 일어나 있었다. 아마도 쿠쿠가 기뻐했던 건 이런 순간이었을까. 쿠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바로 그 미소였다고, 나는 쿠쿠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침을 차려 먹었다. 있던 재료로 적당히 요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날아드는 다정한 눈빛이 어젯밤의 일을 상기시켰다. 나는 그 눈빛에서 행복을 읽었다. 그리고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밤새 잠들지 못한 건가요?” 코코아를 마시면서 쿠쿠가 그렇게 물었다.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아서. 그냥,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그제서야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면서 조금씩 졸려오는 것 같았다. 어젯밤은 완전히 눈물로 지쳐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일정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어쨌든 떠나야만 했다.


“이제 가볼게. 꼭 오늘이라도 병원 가.”-뒤돌아선 나를 쿠쿠의 손이, 무척이나 수줍음을 타듯이 새끼손가락 하나를 살며시 붙잡았다.

“스미레는, 분명히 다시 와 주실 거죠?”

“응, 연락할게. 아니, 내일이라도 만나러 올게.”-단지 힘주어서 약속하는 것 외에는,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쓰디쓴 비밀의 무거움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볼에 키스를 받았다. 몹시 부끄러워하며 뒤돌아보자, 쿠쿠는 침대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고마워.”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한겨울의 쓸쓸한 공기를 맞으면서, 언젠가 우리가 기나긴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상냥한 감촉만큼은 영원히 그 빛이 바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完)


ㅇㅇ 112.152 2021.10.03 15:21:10
계란마리 쌉쌀하네 이런 맛도 좋다 2021.10.03 15:25:16
니코냥 스미쿠쿠 화해가 1기에서 될 줄은 몰랐지 2021.10.03 15:26:09
Sakulight 금토일에 걸쳐서 썼는데 애니 스토리가 이렇게 되서 좀 난감했음 2021.10.03 15:26:19
Sakulight 그니깐 ㅋㅋ 근데 그냥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좋아서 2021.10.03 15:26:56
한겨울의시어마인드 쿠쿠의 말이 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또 그런 부분이 좋네 2021.10.03 15: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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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0379 일반 흐응 ㅠㅠㅜㅜㅠㅠㅜㅜㅠㅠㅜㅜㅠㅜㅜㅠㅜㅜ 시즈쿠의오필리아 2021-10-10 0
4320378 일반 ptsd ㄷㄷㄷ 쥿키눈나 2021-10-10 0
4320377 일반 오늘 완전 치료 각이다.. AngelSong 2021-10-10 0
4320376 일반 이걸 손을 잡아주네 ㄷㄷ 한센루 2021-10-10 0
4320375 일반 한 11월쯤 되나? 사라라라 2021-10-10 0
4320374 일반 바로 완치 ㅇㅇ 2021-10-10 0
4320373 일반 이 시각 트위터 트렌드 ㅋㅋㅋㅋㅋ ㅇㅇ 2021-10-10 3
4320372 일반 아... ㅠㅠㅠㅠㅠㅠ 암드바라기 2021-10-10 0
4320371 일반 못부른다 ㄷㄷ 센터는시즈쿠 2021-10-10 0
4320370 일반 PTSD ON 정식세트 2021-10-10 0
4320369 일반 시부야 카논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5만킬로미터의필름 2021-10-10 0
4320368 일반 PTSD ㅠㅠ 교밍 2021-10-10 0
4320367 일반 저기서 노래못할듯 ㅇㅇ 2021-10-10 0
4320366 일반 ptsd 치료 ㄷㄷ 킬러 퀸 2021-10-10 0
4320365 일반 뭐지 월드 투어를 암시? 1 죄악의뽀뽀 2021-10-10 0
4320364 일반 어우 ptsd.. 아무고토모름 2021-10-10 0
4320363 일반 진짜 어떻게 될까 모구라이버 2021-10-10 0
4320362 일반 PTSD ON 한센루 2021-10-10 0
4320361 일반 이게 아오야마의 강당..?? 불꽃놀이. 2021-10-10 0
4320360 일반 진짜 리리이베 때 무대랑 똑같이 생겼네 그레이트삐기GX 2021-10-10 0
4320359 일반 한국 그려진거보소 2 yoha 2021-10-10 0
4320358 일반 무슨 학교가 이리좋아 아사삭 2021-10-10 0
4320357 일반 아이고 ㅠㅠㅠ 그뤼에페 2021-10-10 0
4320356 일반 ptsd 씨게 온다 미숙Dreamer 2021-10-10 0
4320355 일반 한반도 입갤 ㅋㅋ sttc 2021-10-10 0
4320354 일반 그 장소 암드바라기 2021-10-10 0
4320353 일반 한반도다ㅋㅋ AngelSong 2021-10-10 0
4320352 일반 뭐냐 미모리안 2021-10-10 0
4320351 일반 여섯살때부터 난 실신을했어~ ㅇㅇ 2021-10-10 0
4320350 일반 앗 ㅠㅠㅠㅠㅠ 센터는시즈쿠 2021-10-10 0
4320349 일반 무슨 초딩 강당이 왜이렇게커 ㅋㅋㅋㅋㅋㅋㅋ 1 아이폰쓰는갤럭시 2021-10-10 0
4320348 일반 왜케 커? ATM 2021-10-10 0
4320347 일반 쿠카는 끝났다 ㅇㅇ 39.123 2021-10-10 0
4320346 일반 그 장소 Pure 2021-10-10 0
4320345 일반 저 스테이지가 도쿄예선이 아니었네 76 2021-10-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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