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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앞으로의 나날 (1)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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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250927
  • 2021-09-12 15:42:34
 





(1)


흔히들 시간은 즐거울 때는 빠르게 흐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견디기 힘들도록 더디게 흐른다고들 한다. 내가 쿠쿠를 보지 못하며 지낸 지난 1년간이 꼭 그러했다. 내가 쿠쿠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은 돌이켜보면 별똥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가듯이, 어느샌가 찾아보려 해도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가 버린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내의 그럭저럭 괜찮은 음대에 진학했다. 쿠쿠나 치이쨩이 걱정해 주었던 것과는 별개로 큰 무리 없이 졸업 후에도 계속 노래를, 그것도 전문적인 방향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지만 어째선가 나는 전혀 기뻐하지 못했다. 곁에는 늘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암울한 중학생 때의 입시 실패와 마찬가지로 자그마한 슬픔에 늘 잠겨 있는 상태였다. 쿠쿠에게서 편지가 온 것은 그런 날이 늘 계속되던, 손이 얼어서 기타를 치기 힘들 만큼 춥던 졸업 후 처음으로 맞는 어떤 겨울날이었다.


겨울밤 외로운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우편함에 네 이름이 적힌 편지가 있던 기분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쿠쿠.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떨리는 손과 심장을 붙잡고 어두운 방 가운데 책상 앞에 앉았다. 봉투 위에는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우리 집의 정확한 주소와, 밑에는 읽을 수 없는 한자들로 적힌, 아마도 쿠쿠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可可’ 라고 적은 귀여운 글씨를 보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에 나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애써 울음을 삼켰다. 평소답지 않게 쉽게 감동해 버리는 건 아마, 나가기 전에 몸을 뜨겁게 하려고 몰래 꺼내 마신 술 때문일 거야. 평소에는 간혹 치이쨩으로부터 쌀쌀해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인 내가, 가끔 몰래 술을 마시고, 전적으로 내 변덕 탓에 조금이라도 말싸움이 붙으면 어느샌가 어이없이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다.


쿠쿠의 소중한 사람, 카논에게-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책상에 머리를 대고 가만히 있었다. 시작부터 눈물을 흘려 버리면, 쿠쿠가 힘들여서 썼을 편지를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잖아. 조금만 진정하자. 제발- 몇 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무심코 창밖을 보니, 정말로 오랜만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쿠쿠의 소중한 사람, 카논에게

일단, 이렇게 편지로밖에 말을 하지 못하는 걸 사과드려요. 떠날 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카논은 아마 이해해 주셨으리라고 생각해요. 조금 성급하지만, 빨리 써두지 않고는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먼저 간단하게 쓸게요. 사랑하고 있어요. 카논.


나는 망연하게 ‘카논.’이라고 적힌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헛웃음을 지을 때쯤엔 이미 눈물에 가려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 내리던 눈이 함박눈으로 바뀔 때쯤이야 나는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논은 분명히 놀랐겠죠? 쿠쿠가 핸드폰을 엄하신 부모님에게 빼앗긴 건 맞지만 인터넷 메일 정도는 쓸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편지를 쓴 건 카논을 놀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정말로 이 이상으로 운이 나빠져서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미안해요.


쿠쿠는 잘 지내고 있어요. 카논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부모님이 원해서 가야 했던 대학교도, 견디기 어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공부하고 있어요. 카논은 잠자기 전에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쿠쿠는 신기할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고등학생 때를 생각해요. 카논과 처음 만났던 날, 카논과 지칠 때까지 연습을 하던 날, 처음 함께 무대에 섰던 날, 무대가 끝나고 서로 마주 보던 날들 말이에요. 그 즐거운 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항상 기분 좋게 잠이 들 수 있어요. 카논도 그때를 분명 지금도 생각하시겠죠?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겠-


하필이면 읽던 부분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바람에 잠시 읽기를 멈춰야 했다. 미안해, 쿠쿠. 나는 이미 잠자리에 들 때 어떤 꿈도 꾸지 않아-


카논은 어떻게 지내나요? 분명히 늘 즐겁게 노래하면서 지내겠죠? 쿠쿠가 가기 전에 카논이 대학에 합격했단 걸 듣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카논은 아마 예전보다도 더 노래를 잘하겠고, 예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겠죠? 저는 그런 모습을 이따금 멍하니 생각하곤 해요. 그렇지만 항상 카논이 부르는 노래는 카논이 처음 만났던 날 무심코 불렀던 그 노래에요. 가사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멜로디는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쿠쿠가 카논을 만날 수 있게 되면 기타를 치면서 불러 주실래요?


나는 또 읽기를 멈추고, 듣기 무척이나 흉할 정도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 목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어야만 할 목소리를 찾아 노래를 불러보았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하던 멜로디는 한 박자를 부르자 곧 흐려지고, 가사는 말할 것도 없이 기억나지 않았다. 쿠쿠는 멜로디를 알고 있으니까, 만약에, 만약에 다시 만나서 쿠쿠가 조금만 흥얼거리기만 해도 저절로 가사가 튀어나와 줄 것이라고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쿠쿠가 중학생 때의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조악한 자작곡을 그토록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쿠쿠가 아끼는 곡이 있다면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섰을 때의 곡일 줄로만 알았다. 나에게 그 곡은, 성가신 사람에게 휘말리게 되었던- 아니구나, 소중한 사람과 만나게 해 주었던 곡이었구나.


카논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매일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어요. 완전히 가망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만약 만날 수 있게 되면 꼭 다시 편지를 보낼게요. 그때가 되면 무대 위에서 함께 노래해 봐요. 그게 어디든지 상관없어요. 카논과 함께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쿠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보고 싶어요, 카논. 사랑해요 카논. 쿠쿠는, 카논의 답장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쿠쿠가


글씨가 번져 있어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나는 분명히 ‘愛’라는 한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건 쿠쿠가 흘린 눈물이었을까. 나는 그 부분에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럽게 메마른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고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다가, 옷을 갈아입는 것도 까먹고 그대로 함박눈을 친구삼아 잠자리에 들었다. 


*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쿠쿠에게 답장을 쓰고 싶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편지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사러 가야 한다. 헝클어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어제 입었던 옷에 그대로 코트를 걸친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커피 냄새와 함께, 여동생과 엄마가 무척이나 놀랍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입던 옷 그대로였고 분명히 흉하게 눈물 자국이 남아 있을 테니까. 나는 여동생이 몇 년 전이라면 내가 울었다는 걸 은근히 놀리거나 아니면 때에 따라 걱정해 주었음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딘가 체념이 섞인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애초부터 동정은 구걸한 적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거리로 나섰다. 하늘의 밑바닥이 새하얘졌다.


한겨울 날의 아침. 휴일. 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이따금 사람이 지나가도 급하게 눈을 밟는 소리만 낼 뿐 추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웅크리고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나는 너무 춥다고 투덜거리면서 쿠쿠에게 어떤 답장을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쓰기에는 쿠쿠가 걱정하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미안함을 느낄 게 뻔하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소중한 사람을 속이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과거의 일을 쓰기에도 분명 나는 쿠쿠만큼이나 기억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그런 시절이 한참 전에 지나가 버린 탓에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편지지를 사고 돌아오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다. 치이쨩이 가게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긴 갈색 코트에 옅은 화장기, 졸업하고 나서는 항상 머리를 풀고 다닌다. 나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2층으로 올라가 책상 위에 편지지와 연필을 올려둔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깐 아래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속닥거리는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을 들인다고 해도 무조건 좋은 곡이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편지지의 빈 공백을,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야만 할 그곳에 눈길을 주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몇 개월은 사용하지 않았던 기타의 먼지를 털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기타를 쳐보면 쿠쿠가 편지에서 말했던 그 곡의 멜로디를, 조금은 바뀌어버렸을지라도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겨울 공기에 얼어있던 손으로, 왼손으로 잡는 기타 줄이 무척 어색해졌다는 걸 느끼면서 더듬거리며 가슴 속을 헤매이던 그 멜로디를 쳤다. 첫 코드를 치자 왼손은 무척 당황해하며 다음 코드를 짚었다. 틀렸다. 분명히 이 코드가 아니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이쨩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들어와도 된다고 말했다.


“카논쨩의 기타,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에 쳐봤더니 아직 어색하네.”


“어떤 곡이야? 내가 아는 곡? 아니면 새로운 곡을 만들어보고 싶어진 거야?”


“아니, 그냥 심심해서 손이 가는 대로 해 봤어.”-나는 안색이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치이쨩은 가까이서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진 구석이 있었다. 졸업 후에도 자주 만나던 사이이기는 했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치이쨩이 어느샌가 무척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푼 모습은 추억 속의 귀엽던 머리와는 다르게 단정함이 있고, 몸매는 여전히 유연하기만 해 보이지만 은근하게 자라 있었다. 겨울 공기로 살짝 튼 입술이 오히려 생생함을 더해주었다-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활짝 꽃이 펴있다.


“이제는-” 목소리는 내가 언젠가 기억하고 있던, 해질녘 놀이터에서의 순간처럼 가늘게 떨렸다-“이제는, 괜찮아진 거야?”


“치이쨩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만약 내가 우울해 보였다면, 그건 단지-”


치이쨩은 어느샌가 나를 아플 정도로 바싹 끌어안고 있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어서 표정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보아서는 안될 눈물을 힐끗 엿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너져 내릴 듯한 포옹에 나는 갈 곳 잃은 양손을 멍청하게 허공에 들고 있다가, 가까스로 치이쨩의 따뜻한 등에 어색하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거짓말 하지마-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카논쨩이 항상 그렇게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미안해.”-나는 미안하다는 단 한 마디로 오랜 친구에게 한 거짓말을 용서받으려는 자신에게 싫증을 느꼈다. 


“치이쨩이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만약 슬프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거야.”


“아직도 떠올리고 있는 거니?”


“응.”-치이쨩만이 과거 나와 쿠쿠와의 각별한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들켜버려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먼저 치이쨩이라면 꼭 알려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쿠쿠와 정식으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이쨩에게 조용히 알려 주었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소중한 친구로 지내왔던 치이쨩으로부터 응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 그 순수하던 얼굴에 이상야릇한 표정이 나타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치이쨩은 무심코 책상 위의 텅 빈 편지지와, 펼쳐진 채로 놓여 있던 쿠쿠의 빼곡한 편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심코 나는 거의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쿠쿠의 편지를 가로챘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조금 전의 행위를 후회하고 말았다. 치이쨩의 얼굴은 조금 전의 따스함이나 깊은 애정으로부터 돌변하여, 도망치고 싶을 만큼 괴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쿠쿠쨩에게서 온 거, 맞지?”-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고, 치이쨩이라면 분명 이런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제멋대로 믿어 버렸다. 쿠쿠에게 답을 써줘야 하니까 가주었으면 좋겠어, 라는 잔혹한 말이 거의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드디어 소식을 알 수 있게 돼서, 기쁘니?”-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내 눈앞에 그토록 가까이 다가와 있던 뺨 위로 맑은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나는 가까스로 기쁘다고 대답했다.


“어떤 내용인지 이야기해 줘.”


“부모님 때문에 입학한 대학 때문에 바쁘다고, 나중에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어.”


“그래? 다른 내용은......” “그것뿐이야. 별 내용은 없었어.”-그곳에 여전히 나를 보고 싶어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나에게 10년 넘게 쏟아져 오던 따스함을 잃게 될까 두려워서, 그런 비열한 마음을 먹고 나는 편지의 내용을 부인했다.  


“나, 이번에 기획사에서 오디션을 받아. 잘 되기만 하면 졸업 후에도 아이돌을 계속하는 게 되네.”


“응원할게. 치이쨩이라면 분명 고등학생 때도 그랬듯 한 번에 될 거야.”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니? 춤이 어떤지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해.”


“미안. 지금은 안돼. 지금은- 해야 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그래. 분명, 카논쨩에게는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겠지.”


치이쨩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미 메말라버린 눈물을 훔쳤다. 거의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치이쨩이 내려가고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를 생각했다. 치이쨩의 눈동자에서 보았던 형용할 수 없는 슬픈 빛을 후회로 되새기다가, 내가 해야 할 일은 쿠쿠에게 답장을 쓰는 것뿐임을 떠올리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쿠쿠에게

쿠쿠에게 편지가 온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쿠쿠가 잘 지내는지 항상 걱정했었는데 이렇게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학기 중에는 정말 많이 노래를 불렀고, 지금은 방학이어서 보통 집에서 지내고 있어. 쿠쿠의 편지를 읽고 나서 오랜만에 기타를 쳐 봤어. 나는 벌써 코드조차 기억나지 않는 곡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가 만나서 쿠쿠가 멜로디를 흥얼거려준다면 금방 가사까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잠시 펜을 내려두고 다시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쿠쿠는 그토록 긴 편지를, 넘쳐흐르는 그리움과 애정이 생생히 솟아나는, 마치 옆에서 직접 이야기 해주는 듯한 편지를 써주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떤 말을 해야만 쿠쿠가 기뻐하고, 나와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단지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쓸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쓰기도 전에 심한 부끄러움이 밀려와서 그만두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처음 내게 다가와 주어서 내가 다시금 소중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 주었던 건 쿠쿠였고, 졸업을 1년 앞둔 날 깨끗한 사랑의 고백을 노래한 것도 쿠쿠였다. 쿠쿠는 언제나 아주 조금, 한 발자국씩은 내 앞을 걸었고, 나는 그 용기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기만 했던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덕분에 벚꽃이 다 떨어져 벚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내보이고 있던 날로 기억한다. 봄이 한창이라기에는 은근히 쌀쌀한 날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원래부터 체력이 좋지 못하던 쿠쿠는 감기에 걸려 도저히 연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부원 나머지 셋을 먼저 돌려보내고, 쿠쿠를 부축하면서 우산 하나에 의지하여 집을 향해 걸었다. 쿠쿠는 가는 내내 자기 때문에 연습을 못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아마도, 그건 쿠쿠의 잘못은 아니고 연습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 지금은 푹 쉬고 빨리 나아야만 한다고 말해 주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쿠쿠네 집을 갈 때 그 사이에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가게 되는데, 쿠쿠는 걷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지 “죄송하지만 카논네 집에서 쉬어가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쿠쿠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우산 하나를 둘이서 쓴 덕에 젖어있던 옷의 물기를 털고, 쿠쿠는 오한이 들었는지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내가 쓰는 침대의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나는 누군가를 간호해 보는 일은 생애 처음이었기에, 어찌할 줄 몰라 쿠쿠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쿠쿠는 단지 “쿠쿠의 옆에 있어 주세요. 카논.” 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조심스레 쿠쿠가 누워있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세상을 끝없이 감싸고, 흐릿한 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쿠쿠는 이따금 듣기 괴로울 정도로 거칠게 숨을 쉬곤 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혼자만 한여름이 되어 있는 이마의 온도를 재 보았다. 어둠 속에서 쿠쿠의 눈동자는 맑던 어젯밤 하늘의 별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나는 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옆으로 쓸어 넘겼다.


“작게,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노래를 불러 주실래요?”


“어떤 노래를?”


“쿠쿠는 지금 카논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듣고 싶어요.”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쿠쿠와 단둘이 있을 때 부를 만한 노래라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달려 나가는 Shooting Star- 쫓아가서 별이 돼......” 쿠쿠는 곧바로 따라 부르려고 했으나, 감기로 목이 잠겨버린 탓인지 낮게 갈라지는 소리만을 가까스로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희미하게 띄우고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창백하게,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쿠쿠쨩은 지금 아프니까 제대로 부를 수 없는 거야. 나중에, 다 낫게 되면 그때 다시 불러보자.”-쿠쿠는 몸을 일으켜 거의 절박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때 왜 그토록 쿠쿠가 나와 단둘이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몸 상태를 원망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쿠쿠는 나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나날이 곧 스쳐 지나가 버릴 것임을 알고서 그런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그날의 만남에는 이별의 암시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요. 쿠쿠는......”-나는 뭔가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샌가 내 손 위에 올려져 있던 쿠쿠의 섬세하고 연약한 손이, 나를 희미한 미래에서 그때의 그 순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빗소리와 어둠에 잠긴 따스하고 축축한 방 안에서, 나는 야릇한 꽃가루와 닮은 향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입가에, 얇고 부드러운 꽃잎이 입술을 간지럽히고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을 더듬어 따뜻하게 젖은 목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손가락으로 그 열기가 전해져 왔다. 주저하듯 손등에서 떨리던 손을 쥐고 살짝 끌어당기자, 나에게 대답하듯 쿠쿠는 두 팔을 벌려 내 목을 감싸고, 나는 연약한 등을 세게 끌어안았다. 혀가 무척이나 작아서 작고 귀여운 고양이와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한 줄기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따스한 키스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쉬움이 남았는지 쿠쿠는 달콤한 꿈에서 방금 막 깨어난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곧 어색하게 볼을 붉혔지만 서로를 붙잡아 둔 손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앞으로 쿠쿠가 꺼낼 말에 대한 두근거리는 예감으로 몸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저기, 카논......” “쿠쿠.” 나는 이때 무심코 처음으로 쿠쿠를 이름 그 자체로 불렀다. 방 안의 그늘 속에서도 쿠쿠의 얼굴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쿠쿠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실래요?”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쿠쿠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그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쿠쿠를 처음 만난 날부터 느꼈던 그 자그마한 감정을,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그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리고 지금의 이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 같은 감정을, 기꺼이 사랑이라고 노래할 수 있음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또한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을 받아왔었는가를. 이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져 버렸음을.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여전히 쿠쿠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침대 위에서 쿠쿠를 추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내가 달려갈 수 없는 저 어딘가에서 쿠쿠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것을 체험하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종종 쿠쿠와 함께 보냈던 날들을 생각해.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작년 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어. 그때를 상상하면 당장이라도 쿠쿠를 보는 것만 같고, 쿠쿠의 말을 듣는 것만 같고, 쿠쿠를 껴안는 것 같아. 혹시나 해서 묻지만, 최근 몸이 나쁘거나 하진 않니? 쿠쿠는 예전에도 곧잘 아프곤 했었으니까, 이렇게 떨어져 있자니 아무래도 걱정할 수밖에 없게 돼. 나는 언제나 괜찮아. 가끔 외롭다고 느끼는 때가 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일 뿐이야. 그렇지만 쿠쿠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있는 힘껏 껴안아 주고 싶어. 그래도 당장 만날 수 없는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조금이라도 쿠쿠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니야. 쿠쿠가 떠나야만 했던 건 쿠쿠가 선택한 일도, 쿠쿠가 바꿀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순간순간 지금 쿠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그리고 언젠가 내가 상상한 모습을 직접 마주하게 되는 날을 매일매일 고대해. 보고 싶어. 사랑해, 쿠쿠.


카논이


나는 내가 쓴 편지를, 혹시나 조금이라도 쿠쿠가 잘못 받아들일 만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떨리는 손으로, 떨리는 입술로, 마치 그렇게 하면 만나기라도 할 수 있다는 듯이 몇 번이고 봉투에 나의 마음이 지나간 자취를 남겨 두려고 했다. 


헤실거리며 1층으로 나온 나를 여동생이 거의 두렵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편지를 부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따뜻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투명한 이슬이 되어 떨어지는, 여전히 텅 비어있는 거리를 나는 그날 그때처럼 뛰어다니듯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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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6586 일반 오시투표 스미레 카논 역전했네 ㅇㅇ 2021-10-03 0
4306585 일반 2기에 란쥬랑 미아, 시오리코 나오는거 당연히 좋긴한데 5 Soar.μ’s 2021-10-03 1
4306584 일반 공벌레센세 란쥬 6 챠오시 2021-10-03 11
4306583 일반 언냐야... ㅇㅇ 106.101 2021-10-03 0
4306582 일반 카와무라 토모유키 아니가사키 감독 트윗 1 ㅇㅇ 2021-10-03 4
4306581 일반 러브라이브 도쿄 지역구 예선 고교&팀 이름모음 21 스쿠스타 2021-10-03 11
4306580 일반 이 센세도 작화담당이었지 6 しゅうモエド 2021-10-03 12
4306579 일반 애니 미아 아라라기 아니냐 10 ㅇㅇ 2021-10-03 1
4306578 일반 폐허를 보는 걸 좋아한다고 4 분노포도 2021-10-03 0
4306577 일반 와 스미레 뭐야 siri 2021-10-03 0
4306576 일반 파파고 바보네 쥿키눈나 2021-10-03 0
4306575 일반 주차 성공했냐? 1 キセキヒカル 2021-10-03 2
4306574 일반 왤케 아이나 좋아할거같은(욕아님) 문제만 나오는거같냐 ㅇㅇ 106.101 2021-10-03 0
4306573 일반 아키나 : 트윗 러시 쏘리 4 ㅇㅇ 2021-10-03 11
4306572 일반 바-카ㅋㅋㅋ 뉴슈마 2021-10-03 0
4306571 일반 아니이요 바카 챠오시 2021-10-03 0
4306570 일반 문제 좀 킹받네 ㅋㅋ 리캬코 2021-10-03 0
4306569 일반 없어 바보야ㅋㅋㅋㅋㅋ 린냥이 2021-10-03 0
4306568 일반 돌고래네 9 분노포도 2021-10-03 1
4306567 일반 10화의 오시투표 1 ㅇㅇ 221.151 2021-10-03 3
4306566 일반 니지로 갤이 불타길레 9화 노잼인줄 알았는데 12 아사삭 2021-10-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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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6559 일반 슈쨩은 예전에 SSA에 서고 싶다고 했었음 4 しゅうモエド 2021-10-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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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6553 일반 이번주도 아쿠아노래 틀어주시네 Rubesty 2021-10-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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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6549 일반 오늘 저퀄은 이게 제일 커엽네 2 AngelSong 2021-10-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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