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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Spring Rain (3) (完)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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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078610
  • 2021-05-31 14:31:53
 




(3)


“자, 아-하세요.”


“저기, 시오리코씨, 잠깐만요. 저 스스로 먹을 수 있으니까요.”


슬쩍 벌어진 저의 틈새 사이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차마 삼켜버리기 아깝다는 듯이 천천히 씹어 넘기니,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가 미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리곤 방금 먹은 딸기가 여태까지 먹었던 것들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행위에도 저는 호사스러운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데려간 곳은 하라주쿠의 어느 길목의 디저트 가게였습니다. 평범하게 저희 또래의 여학생들이 가득하고, 몇 분마다 끝없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 말입니다. 저는 의외로 당신에게도 평범한 소녀스러운 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파르페를 저에게 떠먹여 주고 제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실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꽤 예전부터 저의 마음을 눈치채고 계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이 기쁨보다 앞서는지, 기쁨이 부끄러움보다 앞서는지 알 수 없어서, 저는 스푼에 크림을 잔뜩 떠서 당신의 얼굴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우아한 속눈썹을 돋보이며 그 단아한 입술로 제가 썼던 스푼 위의 크림을 깨끗이 먹었습니다. 그 스푼은 불빛 아래에서 촉촉한 반사광을 은밀히 내뿜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런 평소 같지 않은 모습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어딘가 단정하지 않고 들떠있는 행동들이 당신이 겪었던 회한의 후유증을 감추어두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러고보니 시오리코씨는 의외로 이런 것도 좋아하나 보네요.”


“특별히 좋아한다기보다는, 예전부터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요. 나나씨는 어떤가요?”


“평소에는 그다지 올 일이 없는 가게이기는 하지만 시오리코씨가 있다면 좋아요.”


당신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지만, 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단지 앞으로도 자주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다고, 그런 자그마한 소망을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문득 쳐다본 창밖의 하늘은, 중량감 있는 잿빛의 섬세한 우울을 품고 있었습니다. 날씨만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번에 당신과 밖에서 만났던 때처럼 화창하고 산뜻한 봄날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단지 그런 풍경이 당신이 더 우아하게 보여서 기분이 한껏 들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귀가가 늦어지면 안되니까 일단 미나토구 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마침 근처에 요요기 공원이 있으니 잠깐 같이 걷기만 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죠. 떠올려보면, 당신과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올해 중반만 넘어가도 저는 당신을 만날 구실을 금방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유한성이, 당신과의 순간 하나하나를 각별한 시간으로 만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오리코씨도 저도 분명히 바빠지지 않을까 싶겠지만, 최근 들어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 건 당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만약 나나씨가 저와 같은 대학에 진학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는 가(家)에서 기대받고 있는 것이 있으니 최상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 나나씨가 올해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그럼 당분간은 만나기 어렵겠네요.”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최대한 만끽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말과 함께 당신이 저에게 준 미소라는 보물이 저의 마음을 강한 충성심으로 치켜세웠습니다. 어린 마음에 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때 정말 당신이야말로 제가 인생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사용해 대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저만이 당신의 자그마한 매력조차 극도로 민감하게 느끼니, 이미 저는 포로로 삼아진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저희는 버스를 잠깐 타고 내려 길거리를 막연히 걸었습니다. 벌써 5월 중순이기 때문인지, 해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달라붙은 미묘한 더위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뒤를 따라 길가에 있는 적당한 옷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서로 사줄 옷을 골라보자고 했더니, 당신은 어딘가 음흉한 것만 같은 미소를,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대체 무엇을 저에게 주려고 하는 걸까요.


당신 때문에 옷에 관련해서도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는 좀처럼 떠올려낼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다 적절히 어울리니까 오히려 고르기가 어려워진다고나 할까요. 평범한 건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각별한 느낌이 들만한, 당신에게 자주 저를 떠올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사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당신이 제 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습니다. 그건 흰 스커트였는데, 무릎을 넉넉히 드러내고 팔랑거리는 재질이어서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입지 못할 것만 같은 치마였습니다, 그때 당신의 어딘가 자신만만한 표정은 아까 디저트 가게에서의 들뜬 행위의 연장으로 보여졌습니다.


“저기, 이런 건 너무 짧지 않나요.”


“그렇지만 정말로 나나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라이브 때를 제외하면 이런 건 잘 안입으셨지만, 분명히 입어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잠깐 탈의실에 들어갔습니다. 동호회를 그만둔 후로 저는 언제나 안경을 쓰고 한쪽으로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새로 산 뻣뻣한 청바지에 위에는 흰 블라우스를 입었습니다. 신발은 굽이 적당히 있는 구두를(키가 작으니까) 신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키에 짧은 스커트를 입는 건 부적절해 보였습니다. 갈아입어 보았지만 다리가 오랜만에 훤히 드러난 듯한 감각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시오리코씨가 보기에는 어떤가요?”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요. 뭐랄까, 작년의 기억도 나고 어찌보면 귀여운 것 같기도 하네요.”


전신 거울로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니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듯했지만, 마음이 일깨워주는 부끄러움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오랜만에 입었다는 이유라기에는 지나친 것이, 아마 당신이 골라 주셨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리가 조금 더 길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나씨는 저에게 뭘 골라주셨나요?”


“아직 고르지 못했으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평범한 옷가지로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왕이면 자주 당신이 저를 되새기게끔 만들 수 있는 것...... 악세사리라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마침 이곳에는 목걸이나 반지 등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목걸이와 반지 사이로, 붉은 인조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 하나가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인조 보석 특유의 어설픈 느낌은 없었고, 적절히 정제되어, 적어도 저의 시선으로는 중요한 물건이 될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이 반지가 저의 손길을 통하여 당신의 새하얀 손가락 사이에 어떠한 저항 없이 파고들어 꼭 알맞게 끼워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반지라면 저는 마음에 드네요.”


“아뇨, 이런 것보다는, 차라리 목걸이가 어떨까요,”


“그 반지가 좋아요. 그걸로 해주세요. 어디까지나 제가 받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직접 끼워드릴 수 있게 해주실래요?”


은은한 광택이 돌고, 섬세함을 위해 태어난 듯한 손가락이 저의 앞에 놓여졌습니다. 저는 한 손으로 손가락 밑부분을 부드럽게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약지에 반지를 밀어 넣었습니다. 어떠한 저항도 없이 반지는 손가락 안의 제 자리를 찾아갔고, 반지 위의 보석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가지는 중대한 의미 따위는 모른 채 낭만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왼손 약지는 결혼 때에 반지를 끼우는 곳이 아니었던가요?


“정말 딱 맞네요 이 반지.”


“자주 차고 다녀 주실래요?”


“누가 보는 곳이 아니라면요.”


그 말은 항상 차고 있겠다는 겉치레 같은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저에게 각별한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약 이 반지가 당신이 홀로인 순간마다 함께 한다면, 그때마다 자연스레 저의 모습이 그 반지에 새겨지게 될 것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 반지는 당신에게 있어 저를 떠올리게 만들고, 저는 반지의 형상을 빌려 당신 곁에 함께할 수 있게 되겠지요.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저는 그로써 당신과 떨어져 있는 동시에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차고 있겠다는 말이 아닌데도 기뻐 보이시네요.”


“혼자일 때만 끼는 것이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정말로 그렇네요. 제가 항상 반지를 끼고 있으면 점차 그 의미를 잊어가겠지만, 낄 때와 끼지 않을 때를 구별한다면 낄 때마다 항상 당신을 생각하게 되겠죠.”


부끄러움을 자각할 수 없다는 듯 내보이는 그런 태도는 그만두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불투명함을 투명함으로 치환하여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의 불투명함을 흔들 수 있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흔히 보이기 마련인 수줍음을 그토록 끄집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사드린 치마, 오늘 입고 가주실래요?”


“바람이 부는 날이었으면 안 입었을 거에요.”


저희는 잠깐 미나토구를 돌아다니다가, 오후 5시쯤에는 귀가가 늦어지면 안되니 고토구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쯤 되자 몸은 약간 피로하지만 기분은 들떠 있어서, 문득 길거리의 가게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입꼬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품고 길거리에 드리운 우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발걸음으로, 저희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습니다.


찻길을 끼고 있는 작은 공원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늦봄의 구름 낀 하늘 아래로 온후한 미풍이 공원의 나무들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주말이었지만 날씨가 시원찮고 차도 얼마 다니지 않아서 상당히 한적했습니다. 슬쩍 스쳐 지나간 손등이 작은 쾌감을 새겨주어서, 손안을 건드렸더니 손을 잡혔습니다. 제 손에 가해지는 다정하지만 강인한, 도저히 이대로 잡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 감촉을 통해 저는 확신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문득 공원 옆의 어느 꽃집 앞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투명한 가게의 유리창에 비추어진 이름 모르는 수 많은 식물들 사이에서도 5월의 꽃들이 유독 유혹적인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잠깐, 괜찮나요?”


“시오리코씨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고 했으니까요.”


당신은 꽃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장미, 튤립, 아네모네 등의 다채로운 빛깔의 봄꽃들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향기를 맡아보거나 했습니다. 저는 그다지 꽃에는 관심이 없었음으로 그저 멍하니 당신의 모습을 막연히 응시하다가, 정말로 진부한 표현이지만 당신은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 속에 둘러싸여 있는 당신의 모습은 꽃으로 당신이 치장되는 것이 아니라, 꽃이 당신의 우아함을 이용해 자신을 치장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장미로만 이루어진 화사한 꽃다발 앞에 멈춰 섰습니다. 장미의 빛깔은 다른 붉은 꽃들보다도 유독 그 채도가 진하여, 독보적인 유혹을 품고 당신의 손에 들어지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그 장미, 사실 건가요?”


“나나씨에게 선물로 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마음에 안드시나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네. 뭐든지 좋으니까요.”


당신은 낭만이란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제가 예전에 했던, 당신은 사랑이라는 과목에 있어서는 낙제생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장미 꽃다발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요. 붉은 장미의 꽃말은 당연히 ‘사랑’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평온한 얼굴 밑에는 짓궂은 얼굴이 숨어 있어서 저의 감정을 유린하려는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그것보다는 순수한 장난과도 같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미인가요? 단지 어울리니까 선택하신 건가요?”


“그런 이유면 안되나요? 생화니까 오래 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겠지만, 물을 담은 꽃병에 꽂아두면 예쁘겠지요.”


당신에게서 받은 장미 다발에 코를 가져다 대었습니다. 말로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산뜻하면서도 자극적인가 싶으면서도 이내 유유히 흘러가는 듯한, 그런 냄새를 맡았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이걸 받았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뜨거운 고백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조금의 오해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공상은, 그것을 현실로 옮길까 고민하기 앞서 당신에게서의 거리감을 마주하고는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드세요?”


“이런 방식으로 주시지 않았다면 마음에 들어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런 방식은, 잘 모르겠어요.”


마치 화가 난 연인을 연기하는 듯한 태도로 길을 앞장서서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조급한 듯한 발소리가 들려와서, 당신의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해 어쩐지 조금 상쾌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저만 당신 앞에서 조심스럽고 수줍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나 버리기 전에 어떠한 방향으로든 감정의 기나긴 흐름을 끝맺을 필요가 있다고, 그리고 그 끝맺음이 이루어지는 때는 바로 오늘이라는 강렬한 예감을 받았습니다. 감정이 상한 척이라도 해서, 당신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저의 시선으로 돌리겠습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건가요? 무언가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제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다니까요. 시오리코씨가 늘 그래왔듯이.”


문득 치사한 짓을 해왔던 건 당신이 아니라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감정을 당신이 눈치채주지 못한다고 불평하기에는, 저는 단 한 번도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 보려고 한 적이 없었고, 불투명한 장막으로 항상 저의 행동을 감싸왔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간단히 거부당하고 단지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상상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부당할 용기 따위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도 본인의 감정에 직면하였지만, 저는 도저히 제 감정조차 순수히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연모하게 된 진정한 계기는, 앞서 말했던 것들이 아니라 저에게는 결여된 올곧은 용기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급히 걸어가던 다리 한 부분에 미세한 냉기를 느꼈습니다. 이윽고 창공의 채도가 점점 탁해지고 나뭇잎의 빛깔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봄비가 세상을 끝없이 뒤덮어 산뜻한 봄날의 공원은 순식간에 음울한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산은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달렸습니다. 한 손으로는 당신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단단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뒤에서 따라오던 당신의 팔목을 낚아챈 채, 적당한 그늘을 찾기 위해 달렸습니다. 근처에 자택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까지 계속 비를 맞으며 간다면 완전히 젖어버리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달리지 않아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온몸이 다 젖고 말 것임을 떠올렸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인건지, 빗줄기는 하얀 옷을 야릇한 모양새로 만들기 충분한 치밀함을 가지고 열심히 저와 당신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손에 저항이 느껴져서 뒤돌아보니, 당신은 나무 그늘 아래 멈춰 서있었습니다. 유독 큰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나뭇가지에 빽빽이 들어선 나뭇잎들은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있어서, 이따금 한두 방울을 빼고는 대부분의 비를 받아내 아래에 건조한 그늘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당신은 숨을 관능적인 상상이라도 금방 허락하고 말 듯이 거세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새하얀 원피스는 거의 젖어 있어서 무방비한 살결이 희미한 천 아래에서 숨결에 따라 움직이며 강렬한 자극을 주었고, 목 부분에는 땀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목선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습니다. 습기와 오묘한 더위로 가득 찬 늦봄에 이토록 비와 땀에 젖어서 느껴지는 불쾌함은, 당신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부터 쾌감으로 끊임없이 전이되어 다채로워지고 전신에서 흘러넘쳐 감정의 한계를 이미 넘어서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러움. 사랑의 달콤함이 충만한 부드러움...... 첫 키스를 제멋대로 저질러 버렸다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빗소리가 자아내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왼쪽 아래의 심장이 평소에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던 위치를 드러내며 곧 터져버릴 기세로 뛰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어떤 소녀의 형상이 보여서 순간 놀랐으나, 곧 그것이 저의 형상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빗방울에 뭉개지고 있는 자그마한 물웅덩이에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가 한 명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어째선가, 뜨거운 무대 위에 서 있던 모습보다도 피가 심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사랑의 힘,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첫 키스를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방이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을 용서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정말로 그것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이상 과거로 되돌아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입맞춤을 나누기 전의 당신과 저는, 분명히 입맞춤을 나눈 후의 당신과 저와는 다른 존재이겠지요.


도저히 당신의 표정을 보아두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가까스로 용기를 내 돌아보았더니, 당신은 좀 전의 저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그러나 무척이나 선명한 맑은 시선으로 저와 눈을 마주쳐 왔습니다. 순간 그 눈빛에 드러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읽음을 고백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단지 그러한 해석은 착각일 뿐이고, 어떻게든 변명하자고 생각해서 입을 벌렸으나 물기 어린 공기가 스며들 뿐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습니다. 무방비하게 벌려둔 입술 사이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촉이 또 한 번 다가왔습니다. 마치 연기라도 하듯, 서로를 조금도 침범하려 하지 않고 그저 표면만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잔혹한 키스를 당신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에도 행복은 쓰러지지 않고 제 앞에 서있었습니다......


“이걸로 없던 일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요, 이미 더는 그 전의 저희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저는 나나씨와 지금처럼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요.”


“저는 시오리코씨와 이런 관계로는 더는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고, 더 머나먼 곳까지 함께 나아가고 싶다고 예전부터 다짐해왔던걸요.”


마침내 감추어두던 감정을 온전히 쏟아냈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질까 괴로워하기 앞서 기쁨의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부당해도 상관 없다고 말했던 당신의 말이 옳았습니다. 정말로 저는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차가운 거절의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고여 썩어가던 저의 감정은 이 한순간 정화되었고, 남은 것은 정화 후의 잔잔한 여운을 느끼는 일뿐이었습니다.


“제가 나나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단지 제 감정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에요. 확실한 건 아유무씨를 대할 때의 감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나나씨가 저에게 품는 감정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하게 해주세요! 더 이상은 이전과도 같은 마음은 가지고 싶지 않아요. 시오리코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 마음이 얼마나 괴롭게 다가오는가를...... 그러니 저를 위해서, 기꺼이 거절해주세요.”


당신의 눈동자에는,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담긴 슬픔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더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전부 이해했다’고 말하는 듯해, 당장이라도 품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저를 향한 사랑으로 변모할 수 있게 도와줄 결정적인 계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는 어느샌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어서, 비가 만들어준 아늑한 그늘 안에 서로 붙어있을 이유는 곧 있으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의 이해가 통한 기적적인 순간은, 구름 사이로 마침내 나온 찬란한 햇빛 앞에 사르르 녹아 황금빛 이슬을 떨어트리며 아스러지겠지요......


당신의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두려워져서, “이제 비가 거의 그쳤으니 바로 저의 집으로 가서 씻죠. 갈아입을 옷도 드릴게요.” 라고 말했더니, 당신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잠자코 따라왔습니다. 저는 겉잡을 수 없이 나른해지는 몸을 느꼈습니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극심한 피로는 어떻게 된 걸까요? 당장이라도 물웅덩이 위에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꿈은 충족된 것이 아닐까, 하고요. 포기나 체념을 돌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당신과의 교제를 꿈꾸고, 현실에서는 입맞춤까지 행했으니, 저는 이미 과거에 당신과의 사랑을 낱낱이 경험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아쉬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사랑이 가상에서의 사랑보다 덜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이런 도피를 가져오는 것일지도 몰랐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해의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평선 위 어딘가에서, 두껍고 견고히 쌓인 잿빛 구름 사이로, 마치 세상을 찢어놓듯이 석양이 그 거대한 빛을 내뿜었습니다. 수많은 물웅덩이, 나뭇잎에 맺힌 투명한 이슬 하나하나가 모조리 황금빛으로 가득 채워져서, 석양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 눈이 부셔서 그만 당신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표정에서, 언젠가 제가 당신 앞에서 무심코 드러냈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입술이, 이제 막 피어오르려는 붉은 장미의 꽃봉오리처럼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完)








*


마지막에 결국 어떻게 되었을지는 각자가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정말로 그 다음에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가정하지 않았으니까 원하는 결말을 상상해줘.


가능한 한 봄에 올리고 싶었는데 질질 끌다가 여름에 올릴 뻔했네. 만약 이걸 읽고 다음작도 기대하고 싶은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굳이 첨언하자면, 6월에는 개인적으로 바빠져서 하나도 못 올릴 듯 해. 그럼에도 기대해준다면 고마울 따름이고.

게릴라뮤즈 2021.05.31 15: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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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4909 일반 와 오늘 ANN 놓쳤네 ㅂㄷㅂㄷ... 그래도 념글에 있어서다행 ㅠㅠ 4 호마다치 2021-06-25 0
4104908 일반 ANN 캐스트 출석표(~21.06.25) 4 바닷빛 2021-06-2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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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4906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 맥주 빨고 하는거 아님? Windrunner 2021-06-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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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4903 일반 채널) 카린 엄청 따라잡혔는데 8 킷카와미즈키 2021-06-25 0
4104902 일반 띠드 술먹었냐? 1 ㅁㅅㅌㄱ 2021-06-25 0
4104901 일반 띠드 건방져짐ㅋㅋㅋ yoha 2021-06-25 0
4104900 일반 좃망겜 버그 근황 ㅊㅇㅂ 2021-06-25 0
4104899 일반 오케이 이맛에 슼타하지 4 Nako 2021-06-25 0
4104898 일반 이거 오류냐 3 강서구 2021-06-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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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4896 일반 아슬하게 이겼어ㅋㅋ 스콜피온 2021-06-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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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4894 일반 근데 진짜 30일 방송을 기대를 안할수가 없게 하네 ㅇㅇ 2021-06-25 0
4104893 일반 띠드눈나 킬따일때 반응이 제일 재밌음 ㅋㅋㅋㅋㅋㅋ 우리슦 2021-06-25 0
4104892 일반 치즈쨩 몬스터 따는 소리가... 스콜피온 2021-06-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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