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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Spring Rain (1)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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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078599
  • 2021-05-31 14:21:49
							




시오세츠입니다.





(1)


투명한 하늘 아래로 이어진 교문을 지나 보이는 벚꽃이, 희미한 예감을 주며 봄바람에 떨고 있는 모습을 저는 머나먼 곳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났음에도 2시간 정도,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학기이고, 저는 이제 3학년이기 때문에 온전히 수험에만 집중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호회 활동도 3학년이 됨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아주 약간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고는 거짓말할 수 없지만, 지난 2년간 충분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왔으니까 이제는 조금 더 장래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차분히 떠올려보니 저의 그 결정에는 사실 당신도 동호회를 금세 그만두었다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의 희미한 말소리와 발소리가 뒤섞여 제가 있는 교실에까지 전해졌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졌습니다. 이쯤이면 아마 대부분의 부활동은 끝났을테고, 공부를 핑계로 교실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필요는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저는 교실을 나서서 서늘한 공기가 아직 남아있는 텅 빈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이윽고 학교의 외진 곳에 접어들어 학생회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마치 수상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처럼 확인한 뒤 학생회실 문을 짧게 두 번 두드렸습니다. “들어오세요.” 라는 당신의 언제나 그렇듯 매력적인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학생회실을 열고 들어가자, 당신의 모습에 앞서 기나긴 창문에 투영되는 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에 저는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늘 푸르던 오다이바의 바다는 해가 지기 시작할 이 무렵, 태양의 가장 진한 색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자신의 푸르름을 찬란한 황금빛 비단으로 치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당신은 오늘도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쯤에는 원래 학생회도 돌아가지만, 당신의 지나친 성실함이 저와 당신과의 개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성실함이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걸 지금 당신의 시선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함에 틀림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의 성실함을 저의 사적인 용무로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당신과 만날 구실을 대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의 등 뒤에 서서 찬찬히 당신의 모습을 지켜볼 찬스를 얻었습니다. ‘니지가사키 학원 부 예산안’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를 작고 하얀 손가락이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조각해둔 듯한 부드러운 귀 위쪽 머리에 자그마한 리본이 묶여있는 모양새를, 저는 이상하게도 너무나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의 예산안, 인가요. 저도 작년에 꽤 곤란했던 문제였는데, 괜찮으시다면 도와드릴게요.”


“아뇨, 그렇게까지 복잡할 건 없어 보이네요. 그리고 나나씨, 당신은 대학 입시 때문에 그렇게나 좋아하시던 동호회 활동도 그만두셨으면서 어째서 자신의 일도 아닌 것에 이렇게나 신경 쓰시는 건가요. 혹시나 학생회 활동에 미련이 남아 계신다면 저 나름대로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어디까지나 잘못된 방식으로 나나씨의 자리를 빼앗은 건 저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의 당신의 행동은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눈동자 안에서 작은 불꽃이 번뜩여, 저의 행동의 동기가 불투명하다는 점을 그 선명한 불빛으로 낱낱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왔습니다. 당신의 시선에서는 저의 행동이 아직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지만, 저는 당신의 그런 예리한 부분도 좋아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친구로서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고 당신도 그 때문에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특유의 성질이 저는 당신만의 유일무이한 ‘특별함’과도 같다고 느껴져서 유독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그런 특징을 오직 저만 좋아한다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한 주장을 저는 제 마음이 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운명적인 증표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시선으로 보았을 때 시오리코씨는 어딘가 도움을 주고 싶게만 보여서요. 저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단지 그냥 제가 보기엔 그렇다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주세요.”


“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을 일단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질투를 품고 있다고 멋대로 상상해버려서...... 그런 호의라면 기꺼이 받아들일게요. 나름 생각해보면 제가 무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저의 불투명한 동기를 품은 문장을, 당신은 제가 품은 진실과는 의도대로 틀리게 해석해주셨습니다. 당연히 당신의 시선이 저와 비슷해지기 전까지 저는 해석의 정확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전에 당신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같은 곳을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부와 동호회들의 예산과 관련된 서류를 저는 넘겨받았습니다. 각 부가 요청한 비용과 작년의 비용을 비교하거나, 비용의 사용처의 세부사항들을 확인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작년에 이미 해보았던 것이기도 하고 그다지 실수할 염려도 없으니 틈틈이 당신의 모습을 몇 번이고 제 시야에 새겨둘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에 드러나는 눈과 어우러지는 얼굴 표정의 우아함,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얼굴과 어울리는 자그마한 송곳니의 형태, 그리고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단아한 입술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몇 번 힐끗거리다가 문득 떠올린 것은, 제가 당신에게 정말로 친한 후배를 능가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면 불필요하게 당신 쪽을 쳐다볼 이유는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제가 명확하게 당신을 몇 번이나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 시선이 부자연스럽지는 않았을까, 너무 길게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너무 당신에게만 집중한 탓인지 그런 것을 생각해 둘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되새겨보니 저는 이전에도 분명히 이런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해 왔습니다. 인간관계에 둔감한 당신이라도 이미 충분히 저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저는 곧 당신의 특징 중 하나가 연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다른 이들이 미묘하게 꺼리는 그런 특징, 제가 좋아하는 그 특징이 저의 마음이 들키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의심을 한 번이라도 했었다면 분명히 금세 저에게 그에 관한 말을 걸어왔겠지요. 단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짝사랑을 받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저의 마음은 가까스로 숨겨졌습니다.

“부탁받은 건 방금 막 끝마쳤는데, 혹시 더 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어차피 이것만 하면 끝나니까요. 먼저 가셔도 되고, 아니면 기다려주셔도 되고요.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그래서 저는 정말 편한 대로 당신의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집중하고 있는 눈에는 당신의 자그마한 몸짓이나 걸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것과 같은 절도 있는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문득 흰 광택이 촉촉이 어려있는 손가락 끝의 연분홍빛 손톱의 모습이 오늘 등굣길에서 보았던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해가 거의 다 짐으로써 바다는 어느새 본연의 어두운 빛을 내보였고, 당신 뒤에 비치고 있던 우아한 후광을 앗아갔습니다.


그때, 당신이 희미한 그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 저는 당신의 모습이 그 그림자보다도 더욱 깊고 진한 그림자를 표면에 품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타인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음울한 빛깔을 저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 안에 쌓아두고 있었던 어두운 감정들을 오직 저만 알아챈다는 상황이 제가 당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원인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은, 지금 당신에게 저의 밝은 빛을 주고 싶다는 애정이라는 이름의 마음으로까지 나아가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일을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상 왼쪽 바닥에 내려져 있는 가방을 열고 서류나 책 따위들을 집어넣을 때, 당신이 무의식중에 벌린 입의 작은 틈새 사이로 송곳니가 수줍은 듯이 그 모습을 슬쩍 흘리곤 지나갔습니다. 저의 시선은 그 반들반들한 송곳니로 달려가 꽂혔습니다. 그 송곳니를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런 기이한 부탁이라도 하면 당신은 저를 괴인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겠지만, 이따금 송곳니의 닿은 손가락의 미묘한 아픔이나 그 저항하는 듯한 딱딱함을 막연하게 상상해 왔던 것입니다.


“정말로 먼저 들어가셔도 괜찮았는데요. 이런 늦은 시간에.”


“저녁 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외롭잖아요.”


이미 상당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아직 4월 초이기에, 그렇게 당신과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벌써 선명한 암흑을 품기 시작한 하늘은 이별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운이 좋게도 집 방향이 당신과 어느 정도 비슷했기에, 학교를 나와서도 금세 헤어지지 않고 당신과 단둘이 걸을 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밖을 나서면 원래도 적은 화두가 거의 소멸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기쁨이 다가왔습니다......


시노노메역 부근을 지나, 다쓰미역을 향해있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제 막 저녁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인데도, 다리 너머에는 군청색으로 꼼꼼히 칠해둔 하늘을 바탕으로 거대한 건물들이 자그마하지만 무수한 불빛들을 가득 모아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깐 다리에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지만 당신의 나아가는 발걸음에 쫓기듯이 당신의 뒤를 따랐습니다. 4월의 서늘한 바람이 바다를 향해 불고 있었습니다.


“조금 쓸쓸하지 않나요?”


“그러면 손이라도 잡으실래요?”


“딱히 그런 뜻은 아니에요.”


......무자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만두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 부근에 접어들기 앞서 넓은 공원을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한창 벚꽃이 가득 필 시기라, 불빛이 들지 않는 들판 사이사이로 빽빽이 심어진 벚나무의 벚꽃들이 순백의 행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만약 낮에 왔었다면 주변의 꽃과 어우러진 풍부한 찬연함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가로등 불빛만이 벚꽃을 비추고 있어 그 모습 하나하나가 마치 달의 은은하고도 고독한 아름다움을 연상시켰습니다.


저의 발걸음은 어느 벚나무 밑에서 갑작스럽게 멈추어 섰습니다. 당신은 저보다 두 걸음 더 앞서가 뒤늦게 발걸음을 거뒀습니다. 당신의 눈동자 위로 희미한 벚꽃의 그늘이 드리워져 당신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애처로운 유혹을 품은 듯이 보였습니다. 턱의 예리한 윤곽선이 벚꽃의 둥그스름한 그림자와 대비되어 유려한 곡선을 과시하는 듯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조금 바쁘지만 시간을 내려고 하면 충분히 낼 수 있기는 합니다만, 혹시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같이 서점에나 들러보면 어떨까 해서요. 저나 시오리코씨나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나름 바쁜 학업 생활에서의 기분 전환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것이 제가 떠올려낸 당신과 사적인 만남을 가질 유일한 명분이었습니다. 서로의 독서 취향이 다르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런 차이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도 기꺼이 환영입니다만, 아직 이번 달 용돈을 받지 못해 돈이 드는 외출은 그전까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자그마한 좌절을 곧바로 훌륭한 기회로 치환해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호의를 베풀 기회를 은근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저에게는 비밀스러운 유혹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렇다면 한 권 정도는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이번 달은 제가 사기로 예정해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마음만은 감사합니다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친구 관계에 금전적인 요소가 얽히면 좋지 않다고 들어와서요.”


“나중에 어떤 식으로도 되돌려주시지 않아도 저는 정말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걸요. 만약 그렇게나 부담스러우시다면, 작년에 저희가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 지나가 버렸던 당신의 생일 선물을 늦게 받는다고 생각하셔도 돼요.”


저는 당신이 이것으로 적당히 받아들여 주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이 이상으로 제가 호의를 들이민다면,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부자연스러운 의도를 손쉽게 눈치챌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과의 관계에서 항상 염두에 두었던 건 저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보이느냐의 여부였습니다. 비록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방식으로는 여태까지 다른 그 누구도 좋아한 적 없었기에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어느 순간 제가 축적해왔던 간접적인 경험들이 저의 좋아함을 그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이 바로 자연스러움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네, 좋아요.”


저의 마음은 당신의 그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당신의 표정을 본 바로 그 순간 끝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그 미소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그 희귀한 아름다움이 저에게만 가까스로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가벼운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봄 저녁의 미풍에 하롱하롱 떨어지는 벚꽃을 배경으로한 그 자그마한 미소는, 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쾌감과도 같은 아픔을 남기며 무엇보다 선명히 새겨졌습니다.




*




저는 도쿄의 어느 서점 앞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날씨는 다행히도 맑아 정오의 태양이 아직 공기 중에 스며들어있는 미세한 서늘함을 따뜻함으로 착실하게 지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주변 거리의 풍경은 나름대로 한산했는데, 그중에서도 당신의 모습은 유독 하얘서 눈에 띄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꽤 심혈을 기울여서 고민하고 차려입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오늘의 순간을 꼼꼼하게 기획하다 사고가 막연히 옷차림에까지 닿았을 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인의 옷차림들을 떠올리고는 제가 과거 당신 앞에서 드러내 보였던 허접한 복장들이 부끄러워져서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조차 당신에 걸맞도록 조정해두지 않았던 것이 자신이 믿어왔던, 좋아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다짐을 약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로 좋네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눈에는, 정말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사람과도 같은 신선한 기쁨의 빛이 차올라 있었습니다. 아마도 좀처럼 주말에는 밖에 나올 일이 없었던 것이겠지요. 저는 당신과 외출, 아니 데이트를 하기로 결정한 것을 참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단어로는 친한 학교 선배와의 외출이자 약속이겠지만, 저의 단어로는 데이트였습니다.


서점 내부는 꽤 커다랗지만 한산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눈길과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하고, 제가 사려고 해두었던 만화책을 빨리 해당 코너에 가서 골라온 뒤 다시 당신에게로 향했습니다. 저는 좀 더 당신의 모습을, 그러니까 단순히 책을 찾는 모습이라도 가만히 감상하고 싶었지만, 당신은 이미 이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이 있었던 것인지 금세 책을 하나 꺼내 들고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당신을 타인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지금과도 같은 별것 아닌, 그런 자그마한 웃음을 언젠가 보았던 때 같습니다. 처음에 제가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았을 때, 그때는 아마 학생회장 선거 때였고, 당신이 처음으로 저에게 일종의 수치를 알게 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막연히 당신에게 혼탁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감정은 학생회에서의 교류나 동호회에서의 만남을 통해 천천히 다른 동료들과 같은 종류의 감정으로 자연스레 변해갔습니다.


그 친애가 어느새 지금과도 같은 뜨거운 연정으로 변모했던 순간을 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 변모의 결과를 늦어서야 알아차렸을 때, 저는 첫사랑이라는 인식에 설레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날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날은 어제와도 같이 당신을 위해 일과를 끝내고 학생회실에 갔었습니다. 여기서 당신을 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친애로서, 그리고 과거 제가 학생회장이었던 것의 일종의 책임으로서 제가 함께 결정해두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이 끝나고 당신이 앞서 제가 말했던 음울함을 얼굴에 슬쩍 드러내었을 때, 저는 당신에게 무언가 고민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별일 없다고, 만약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겠다고, 물어봐 주어서 고맙다고 하고는 이내 얼굴 위의 작은 그림자를 작은 빛으로 지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 가슴 한편에 파문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 것은. 그 감각은 저의 꿈을 배신하는 것처럼 슬며시 다가와 있었습니다. 제가 막연하게 꿈꿔왔던 저의 첫사랑은, 물론 여러 가지 매체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낭만적으로 연출된 무대에서의 절묘하고도 격렬한 순간을 전제로 하는 공상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했던 저의 첫사랑이, 벚꽃을 볼 때 느끼는 잔잔한 아름다움과도 같은 형태로 전해져 온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것을 저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에 대한 마음은 지금도 잔잔하지만 바다처럼 너무나도 거대하고 방대합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서 좋아했고 사랑했던 아이돌 활동, 그것을 바빠서 그만두었는데도 당신에 대한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내는 것을 보니 이 잔잔함의 크기는 격렬한 불꽃보다도 훨씬 큰가 봅니다.


“벌써 다 고르셨나요?”


“네, 이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이 있어서요. 그런데 정말로 사주셔도 괜찮은 건가요? 그렇게까지 비싼 책은 아니긴 합니다만.”


“정말로 괜찮으니까요. 잠깐 이리 주세요. 계산해야 하니까.”


저는 당신으로부터 건네받은 책을 슬쩍 보았습니다. ‘마음’이라는 표제였습니다. 나름 유명한 작품이라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읽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저와 당신은 서점을 나와 카페로 향했습니다. 가서 책을 읽고 적당히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산한 거리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길가 양 옆에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은, 상냥한 봄바람조차도 차마 견뎌낼 수 없다는 듯 새하얗고 부드러운 비를 무수히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벚꽃의 죽음의 순간들 사이로 고운 머릿결의 윤기를 과시하듯 스쳐 지나가는 당신의 모습은, 오직 저만 알아챌 수 있는 찰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 순간 당신이 희미하게 웃어 보인 것이 저에게는 얼마나 깊은 환희를 주었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그마한 미소에도 저의 내면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는 사실이 저의 등을 살짝 밀어주어 발걸음을 경쾌하게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흰색이 조화된 장소였고, 젊은 청년들이 활발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손쉽게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희는 4월의 엷은 햇빛을 내리쬐고 있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창밖에 심어진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이 희미하게 떨리며 그림자를 창 안으로 뻗었습니다.


당신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시켰습니다. 저는 늘 마시듯이 단 음료를 시킬까 하다가 당신과 같은 것을 시켰습니다. 당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나 싶었더니 어느새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무언의 거부를 당한듯한 저는 제 앞에 놓인 낯선 음료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한 모금을 마시고 설탕을 가져오려다가, 그때 마침 힐끗 지나가는 당신의 의도 없는 시선을 느끼고는 하체에 주어지던 힘을 풀었습니다.


저는 사두었던 만화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 다 읽었을 때, 저는 여전히 책 속에 깊숙이 시선을 파고들어 둔 듯한 당신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고대했는데, 막상 상황이 오니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할지 그 발화부터가 저에게는 까다로운 난관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의 모습을 낱낱이 세부적으로 감상해서 마음속의 욕망을 나름대로 채워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당신은 피부가 의외로 하얬습니다. 분명 작년에 동호회 활동을 할 때와 비교해보면 햇빛에 노출될 일이 적어서 그런지 특히나 손가락은 창백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가늘고 색이 흐려져서, 그 손을 제 손으로 꼭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습니다. 저의 시선은 손가락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책을 넘기는 것에까지 닿았다가, 순간 당신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따라 당신에게서 느껴지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느낌을 저는 지금에서야 보았습니다. 기품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교복 차림에서는 얻어낼 수 없었던 일종의 어색한 성숙함이 지금의 당신에게는 있었습니다. 당신의 매력을 적어둔 저만의 으슥한 빛깔의 종이에 한 줄을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당신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심심하게 해드렸네요. 제가 혼자 나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선물까지 받았는데도 집중하느라 그만 나나씨를 잊어버렸습니다.”


“괜찮아요. 좀 전에 막 다 읽은 참이라서.”


당신의 모습을 열심히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심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당신과 이야기 하는 것이 저를 향한 올곧은 목소리와 저를 향한 표정에 스며든 밝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마음 한편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책, 지금 처음 읽는 게 아니에요. 중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은 걸 마침 다시 읽고 싶었는데 니지가사키에는 없더라고요.”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저도 잘 알죠. 저도 몇 번이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다시 보는걸요.”


“나나씨는 읽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뇨, 딱히 관심은 없어서요.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지만요.”


“제목이나 작가만 보면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닐 것 같지만, 의외로 삼각관계가 나오는 소설이에요.”


당신이 저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했던 그 말, 그것은 분명 저의 사고에 어떠한 환영을 불어 넣는데 성공했지만, 그 환영은 막연한 순간의 파편들이 아닌 깨끗하고 선명한, 그 관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이름마저도 당장 떠올릴 수 있는 ‘현실’ 이었음을 당신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나름 진부한 소재이진 않을까 하지만, 들어가기만 하면 웬만해서는 재밌어지는 관계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태연한 척 연기한다던가, 그런 장면이 나오면 좀처럼 집중하지 않을 수 없어지잖아요.”


그런 사람이 바로 저라고,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저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은, 마치 투명한 벽에 튕겨 나온 듯 당신에게 충분한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 듯했습니다.


“나나씨는, 일부러 누군가의 앞에서 밝은 척 연기를 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자각은 없지만, 아마 몇 번쯤은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지금과 평소의 모습인 나카가와 나나와, 과거 동호회에서의 유키 세츠나 중 어느 쪽이 연기이고 어느 쪽이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 다 저이지 않을까요. 딱히 일부러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을 추구한다던가, 그런 생각은 없어요.”


어째서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건지 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두 가지 모습 중 그 어느 것도 연기하지 않은 저의 모습임에는 틀림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에게는 연기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단지 상황에 맞게 저의 바람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 그것이 당신의 눈에는 연기로만 비추어지는 것일까요. 그렇게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시선은 기울어진 것일까요.


“그렇지만 요즘 들어 이렇게 나나씨를 마주하고 있으면 자주 이렇게 느낍니다. 사실 무언가 저 앞에서만 꾸며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무례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제가 과거 동호회에서 보아왔던 모습이나 학생회에서의 모습과는 어딘가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애욕을 순수한 호의와 우정으로 위장한, 그런 가면으로 당신을 대해왔음을 알았습니다. 짝사랑이라는 것은 기필코 의식적인 연기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투명한 마음은 기회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설령 지금의 감정이 당신과 결부된 애정으로 변모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요.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으니까, 시오리코씨가 모르는 사이에 제가 어딘가 바뀌었다고 해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럴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당신의 얼굴에, 여전히 미심쩍은 듯한 흐릿한 눈빛이 드러나는 것을 저는 톡톡히 보았습니다. 당신의 수긍한 척이 어떠한 인식도 없는 순수한 연기였다는 점이 저에게 자그마한 연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평소에 연기하고 있는 건 자주 부담감을 떠안아오는 당신이 아닐까, 하고요.


”시오리코씨야말로 연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실은 바쁘고 괴로우면서도, 이전부터 절대로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시잖아요.“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동호회도, 학생회장도, 학업도 모두 제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들이니까 조금이라도 불평할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해서 책임을 지는 건, 저나 당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의 기댐을 받고 싶다는 저의 소망은, 당신의 말에 감히 그 모습을 보이지조차 못하고 슬쩍 자취를 감췄습니다.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언젠가, 당신이 저녁 노을이 드는 텅 빈 부실에서 ‘그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을 보고는 막연한 질투를 품었습니다. 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자리, 허락되지 않은 온기, 허락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그분은 필요로 하지도 않으면서도 어째서 그렇게나 간단히 유혹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분의 어떤 점이, 저와는 다른 어떤 점이 당신의 기품을 위태롭게 흔들리도록 하는 건가요?


”그런게 아니라, 단지 저는 시오리코씨가 무리하지 않고 가끔은 저에게 기대줬으면, 하는 거에요.“


”기대고 싶은 사람은 저에게는 오직......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도록 하죠......“


그날 밤, 이 습관이 정확히 언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받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몸짓마저도 결부된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저의 이 공상은 습관적으로, 돌발적으로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점점 더 선명해지고 강렬해져서 언젠가는 실제로 그 순간이 찾아오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몸은 뜨거워지고, 새벽에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을 설치지만 어떻게든 잠이 들면 그곳에서도 당신은 사랑을 주고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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