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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페르소나 제 2장 (1)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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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059924
  • 2021-05-16 07:37:35
 







바다에서의 일을 계기로 나는 카스미를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감정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쐐기를 박는 듯했고, 그렇다면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발전이 아닌 쇠퇴만을 향해 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쇠퇴의 과정, 예를 들면 나의 시원찮은 반응이나 부족한 애정 등에서 그녀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기에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다행히 11월쯤이 되어 연극 준비가 바빠지게 되었다는 상황이 나의 감정이 결백하다는 주장을 가까스로 증명해 주었다. 마침 동호회도 바빠졌으니 당분간은 서로의 일에 집중하자고 했고, 카스미는 언제나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그 따스한 표정이 싸늘함으로 돌변하는 두려운 순간을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막연하게 떠올리고는 했다.
 

내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어떻게든 숨기려 해도, 마침내는 그녀 앞에 자신이 만들어온 비극적인 서사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리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이후에 입히게 될 그녀의 상처가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어둠의 깊이를 억제하려는 안쓰러운 노력뿐이다. 애초에 이 관계에서 서로 단단히 이어진 빛은 어떠한 형태로도 탄생할 수 없는 것일까? 오직 한 순간만이라도.
 

연극부에서는 입맞춤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을 사물이나 각도를 활용하여 하는 척만 하고 넘어가기로 결정되었다. 그러한 결정은 단지 어떠한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특히 고려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부장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총애하는 후배에 대한 익애의 단념, 그 결심을 그녀는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마음에 대한 맺고 끊음이 그토록 간단하게 행해질 수 있도록 하는 부장의 성품을 나는 부러워했다. 맺어졌다고도 끊어졌다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의 성질 때문에 나는 항상 곤란했지만 그 둘 중 어느 쪽도 나의 우유부단함은 쉽사리 결정해내지 못하였다. 나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결정해버릴 수는 없는 문제였다. 나의 마음에 앞서 그것이 타인에게 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희미한 피아노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것은 학교 안의 어느 곳에서부터 내가 서 있는 연극부가 있는 복도 앞까지 미세한 물결처럼 자그마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퍼져오고 있었다. 나는 이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한때, 즉 방과후 텅 빈 복도까지 피아노 소리가 흘려 들어오고 있다는 그 상황 자체에 간단히 매료되었다. 그 소리를 따라가면 무언가 낭만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그런 막연한 예감이 그 순간 있었다.
 

점차 그 연주 가락의 구체적인 윤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악곡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쇼팽의 왈츠곡 중 하나라고 나는 음악실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떠올려냈다. 음악실에 드리워진 음영 속에서 어렴풋한 백색의 빛 조각이 번뜩였다.
 

내가 음악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도, 그 연주자는 나의 존재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듯이 순간의 박자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주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정말로 음악의 흐름에 몸을 온전히 맡긴 상태이기에 나를 인식할 능력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연주는 내가 듣기에도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풍부한 감정과 열의가 활기차게 넘쳐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실의 유리창 너머로 오다이바의 바다가 11월의 태양을 그 육중한 몸으로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도 바다는 그 천연의 아름다움으로 내가 느낀 낭만의 숨결을 더욱 더 짙어지게 만들어왔다. 나의 가슴 한구석이 그 낭만을 먹이 삼아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작지만 분명히 일종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의 감정을 판단하는 버릇이 확인해 주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으로부터 태어나는 마지막 음이 낙하했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이 순간을 이대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애절한 목소리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감정은 그 순간에 부딪혀 마치 깎아내린 바위에 닿은 파도처럼 허공으로 자유로이 솟구쳐 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타카사키 유우는,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최후의 낙하 직후 감미로운 여운을 느끼며 부드럽게 상승하는 것과 동시에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그때 나는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본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녀의 입꼬리는 어떠한 압력의 흔적 없이 자연스레 위를 향한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완전히 푼 모습은 저번에 힐끗 보았을 때의 느낌 이상으로 은은한 성숙함이 풍겨왔다. 내가 보아왔던 은근히 아이스러운 모습은 적어도 지금의 겉모습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배의 연주, 저번에 들었을 때보다 엄청 느신 것 같네요.”
 
“그래? 고마워. 시즈쿠쨩은 요즘 어때? 연기는 잘 되어가는 것 같아?”
 
“바쁘긴 하지만 다행히 잘 되어가고 있어요.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바로 보여드릴 수 있을 정도로요.”
 
“정말? 그럼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있을까? 요즘 좀처럼 연극을 볼 일이 없었으니까 보고 싶었거든.”
 
“제가 하는 연기는 주로 상대역이... 아, 아니에요. 역시 조금 부끄럽네요.”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은 선배에게 연기를 보여주겠답시고 키스를, 그저 하는 척이긴 해도 연기할 대담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들킬 경우 연극 연습이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어줄까?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은 절대로 안돼요.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요.”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끄러움의 쾌락이 엄습해왔다. 유우의 가느다란 팔로부터 이어진 섬세한 손가락이 나의 머리 위를 어루만지고 있었기에, 나는 부장에게 받았던 것과 비슷한 쾌감을, 그러나 좀 더 청결한 쾌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 쾌감으로부터 어쩐지 그녀 또한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자만심 가득한 추측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망상은 이번에는 곧 사그라들었다. 유우가 동호회의 다른 누구라도 줄곧 쓰다듬거나 쓰다듬을 받던 모습들을 나는 떠올렸다. 그녀의 상냥함은 온전히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었고, 어떠한 대상에 따른 차별이 없었다는 점에서 오직 나만을 향하던 카스미의 상냥함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에는 내가 사랑받지 못하리라고 확신하였고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서글픈 기쁨을 느꼈다.
 

“유우 선배는, 요즘에는 뭘 주로 연습하고 계신가요? 아까 들어보니까 쇼팽의 왈츠인 것 같긴 하던데.”
 
“시즈쿠쨩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맞아. 원래는 보통 기본기 연습이나 작곡을 하긴 하는데, 내년의 대학의 입시를 생각해서 미리 연습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왈츠 하니까 떠오른 건데, 그러고 보니까 요즘 좀처럼 춤출 일이 없었네요. 어디까지나 아이돌보다는 연극이 저한테는 우선이니까요.”
 
“그러게, 나 시즈쿠쨩의 춤 좋아했는데.”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칭찬받는 것에 약했다. 그것은 내가 연기의 길로 향하는데 큰 동기를 제공해 주었고, 시간이 지난 후의 나는 자신의 연기를 자주 미워해 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칭찬을 받으면 항상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어쩐지 쓰다듬 받는 것과 비슷한 종류, 즉 미묘한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으로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왠지 춤추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렇다면 지금 잠깐이라도 괜찮지 않아?”
 
“네? 물론 오랜만에 그러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당장 하기에는 조금...”
 
“그럼 나랑 같이 추자. 얼마 전에 봐둔 게 있었거든. 시즈쿠쨩은 그냥 따라와주기만 하면 돼.”
 

유우는 잠시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아까 그녀가 연주했던 그 왈츠곡을 틀어두었다. 나는 어째선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즉흥극이라도 하려는 듯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연기를 해야 한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고, 일상 속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사건에 마냥 기쁠 뿐이었다.
 

유우의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이 나의 양손을 가볍게 가로챘다. 그녀의 손은 그것으로 나의 손을 상냥하게 이끌고, 마치 부끄러워서 손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듯이 손가락들만이 가볍게 입을 맞추도록 했다. 그리곤 미세한 각도를 찾아 탄력적이고 매력적인 힘을 나에게 불어넣었다.
 

나는 몸의 흐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였다. 서로 간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팔의 적당한 힘과 발의 눈치 빠른 걸음들. 마치 연극의 짜여진 한 순간처럼 손가락에 정확하게 느껴진 힘의 신호에 그 접촉을 유지한 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나의 몸......
 

유우의 손길 안에서 마침내 그 춤을 끝마쳤을 때, 나는 격렬하고도 감미로운 희열에 사로잡혔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없었던 장밋빛 심장이 지금 분명하게 뛰고 있다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사실을 나의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희열의 근원이었다.
 

나는 변명했다. 심장 박동이 거세고 숨이 가파른 건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는, 그런 무감정한 신체의 원리에 따른 것이 아닌가.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나는 절대로 행하지 않을 터였다. 방금의 행위에서 내가 행복했고, 그것을 기꺼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서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와의 춤이지 그녀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님에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그 행위를 약간의 양심의 가책, 순간의 자그마한 망설임도 없이 요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하실래요?”
 
“금방 해가 져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러면서도 유우는 다시금 손을 붙잡아왔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음악은 꺼져있었다. 나는 자신의 신체가 한층 더 부드럽고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과, 창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늘진 창문에 얼핏 비친 나의 모습이 웃고 있었다는 것들을 갖가지 감각을 통해 온전히 받아들여 나의 세계 깊숙한 곳까지 들여보냈다......
 

-그 순간 나는 소리를 들었다. 텅 빈 복도 위에 울려 퍼지는 자그마한 발소리나 우아한 피아노의 음색, 옷자락이 스치는 그런 섬세한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난폭한 소리를...... 그것은 문이 열릴 때 나는 평범하게 일상적인 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몸에 큰 면적으로 달라붙은 유우의 따뜻한 체온이 가져다주는 고혹을 느꼈다.
 

우에하라 아유무였다. 내가 그 표정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가슴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순수한 차가움이 그녀의 얼굴에 빈틈없이 드러나 그것 자체로도 무언의 위협을 가하려는 듯이 보였다. 평소에는 살짝 웃는 상이니까 지금의 표정은 그와는 대비되어 지나칠 정도로 냉랭했다.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없었음에도 지금의 무대가 지나치게 그러한 상상을 허락하도록 연출되고 있었기에, 나는 마치 불륜 현장의 불륜 상대가 된 것처럼 황급히 몸을 떨어트렸다.
 

“이제 하교할 때가 되었는데도 어디 있나 했더니...” 그녀는 나를 순간적으로 힐끗거렸다. “...뭐하고 있었어?”
 
“시즈쿠쨩를 요즘 좀처럼 동호회에서 보지 못했으니까, 오랜만에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돌아가자, 이미 꽤 늦었으니까.”
 
“응.”
 

텅 빈 음악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공기가 서서히 차가워짐을 느꼈다. 유우는 어째서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나와 춤을 추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그녀의 미세한 표정의 모양새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힘이 나에게는 작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밀처럼 느껴졌다. 이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자는 나와 그녀밖에 없는, 그런 낭만적인 비밀이 나와 유우 사이를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내 타인에 대한 둔한 사고 속에서도 얼핏 보인 모습은, 유우와 아유무가 표면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위험한 공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몽상으로 치부하기에는 현실 세계의 윤곽과 많은 부분들이 상당히 잘 끼워 맞춰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행위는 일종의 위험한 배덕으로써 유우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나는 아찔한 상상을 이어나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특이점’에 도달해있지 않을까 싶은 날도, 곧 공연이 다가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의 내면 속에서 서서히 빛을 감추어갔다. 그러나 이따금 그 순간의 것들이 되살아나는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자신의 손가락을 무심코 바라볼 때였다. 단지 바라본 것만으로도 손가락에서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던 이상하게도 자극적인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그 순간 연기하기를 잊어버렸던 것일까? 내가 그때 어떤 식으로 느끼고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떠올려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형태가 희미해지고 다른 감정들과 뒤섞여 희미한 기억의 저편으로 떠내려갔다. 그런 현상이 내가 막연히 사로잡혔던 그 행위에 대한 익애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내가 카스미와 다시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연극 연습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내가 너무 소홀히 그녀를 대했던 것만 같았고, 친밀한 생활을 같이하면서 나름대로 정이 생겼을지도 몰랐기에 나는 은근히 그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연기를 요구받는다는 느낌 자체는 어느 순간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내가 그녀의 상냥함에 계속해서 노출됨에 따라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일요일이었다. 오다이바의 어느 다리 위에 카스미가 강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연갈색 코트는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11월 말이니까 나름 우울하다면 우울한 계절이지 않을까. 요즘이 그러한 우울한 사색에 잠길만한 여유가 있는 때는 아니지만, 어쩐지 카스미의 모습을 보니 희미한 우울을 품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지만 붉은 코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어와 나를 자연스레 움츠리게 했다.
 

“카스미씨?”
 

그녀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미소와 언제나 그렇듯 맑은 눈빛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때, 그 눈동자 안에서 깨끗이 씻어둔 듯한 푸르고 투명한 하늘이 얼핏 스치듯이 보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평범하지만 따스한 눈동자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가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바다에서의 순간처럼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 보이는 때가 있었다. 이것이 만약 나에게만 주어지는 느낌이라면 기꺼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내게 그것을 증명해낼 방법이나 의향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늘은 뭘 하고 싶어? 카스미씨는 평소에는 자주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고, 요즘 좀처럼 만나지 못했으니까 오늘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주었으면 하는데.”
 
“에, 진짜?”
 
“응? 그럼.”
 
“그럼 집에 와주었으면 좋겠어. 딱히 밖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직감했다. 지금이 내가 막연하게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해오던 그 순간이고 나는 마침내 중대한 선택 앞에 놓여져 있게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러한 감각이 그 사건의 세부적인 윤곽마저 나에게 생생히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의 차분하고도 깊게 내려앉은 어조를 통해 단지 몸으로써 그 진동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 개운하지 못한 느낌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 관계의 심화와 절단, 이 둘 중 하나로 나아가는 갈림길에 해당하는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후자보다는 전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 그늘진 카스미의 방 안에서, 코트를 벗은 상체 위의 흰 스웨터가 그늘과 대비되어 유독 두드러지게 보였다. 나는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야릇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의자 위에 코트를 벗어 두었다.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미묘하게 꼼지락거렸다. 나는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내리깐 그녀의 시선을 확인하였다.
 

둔탁한 시계 소리만이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5초가 지났다. 10초가 지났다. 마침내 30초나 괴로운 침묵이 이어지자, 오히려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쪽은 내가 되어버렸다. 마치 방치된 애완견 같은 꼴이다. 육욕은 조금도 일지 않았지만 하고 싶어하는 이상한 심리에는 아직까지도 마음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의도가 남아있었을까?
 

일단 말로 먼저 분위기를 서서히 만들어나가야 할까. 그러나 도저히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미경험이라는 당연한 이유가 나의 신체를 단단히 옭아매고 행동과 눈빛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만들어왔다. 아니면 키스부터 해야 할까? 그것으로 나의 결백한 감정을 증명하고, 마침내 깊은 물 속까지 발을 내딛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 그것으로 나의 카스미에 대한 감정의 흔들림, 즉 친구와 연인 사이의 버릇없는 줄타기가 마침내 끝날까?
 

자그마한 손 위에 나의 손을 겹쳐두자 잿빛 머리카락이 조금 들썩였다. 눈동자는 조금 흐릿했고,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워 보여서, 그것이 애처로워서 나는 차마 볼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얹어 두었다. 암흑으로 가득 찬 시야 아래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나의 등을 격렬한 충동으로 망설임 없이 떠밀었다. 나는 입술을 떼고 안쓰러울 정도로 자그마한 어깨를 밀어붙여 쓰러뜨렸다.
 

그녀의 보드라운 볼 위로 아름다운 이슬이 슬쩍 흘렀다.
 

“미, 미안해 카스미씨.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해서...”
 
“아니, 그런게,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니까. 괜찮으니까 계속해줘.”
 

주도하는 사람이 먼저 옷을 벗어야 된다고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서 빠르게 속옷 차림을 내보였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피부가 부끄러움과 긴장으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그것이 손쉽게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 탄력적인 피부에 나의 정직하지 못한 손길이 닿는 것을 허락했다. 한밤중에 가득 내려 아직 더럽혀지기 전의 아침 눈과 같은 새하얀 윤기가 흐르는 고운 살결이 드러났다.
 

나의 몸짓들로 그 눈은 녹아내려 어느새 축축한 습기를 표면 가득 머금고 있었다. 나 자신을 연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정열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카스미는 나의 작은 열기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듯 녹아내렸다. 피부든 표정이든. 나는 한밤중에 가득 내린 눈을 아침이 되어 어디서부터 밟아보아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서투르지만 열심히, 그녀 또한 자신에게 그대로 해주기를 바라며 눈을 녹였다......
 

한 시간 뒤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의 피부는 카스미에 앞서 나 자신조차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고 서늘했다. 메마르고 차가운 피부 위를 나는 안타까움에 가득 차 쓰다듬었다.
 

“미안해. 이런 거 처음이라 서툴러서...”
 
“아니야. 그냥 내가, 내가 이상한 것뿐이니까.”
 

이미 식어버리기 시작한 숨결이 가슴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카스미를 품 안에 힘껏 끌어안았다. 만약 어떤 창작물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면 주인공은 깊은 체념의 눈물을 흘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눈 또한 피부처럼 완전히 건조했다. 자비 없는 결함이다.
 

나와 카스미는 약간 몸을 추스르고 난 뒤, 벌써 해가 져버린 이른 저녁 길을 걸었다. 그녀의 한 손을 끌어다가 나의 붉은 코트 안에서 단단히 쥐어 늦가을의 쓸쓸함을 이겨내고자 했다.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이 이따금 발에 치여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샌가 발걸음은 내가 그녀에게 고백을 받았던,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일어났던 그 공원에 닿아있었다. 여름 동안 푸르른 잎들로 가득 뒤덮여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앙상한 가지들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보였다. 그 뒤로는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어버릴 듯한 차가운 바다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신선한 샴푸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왠지 그때가 생각나네. 갑자기 늦은 밤에 불러내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때 정말로 몰랐어?”
 
“갑자기 차려입고 나온 걸 보기 전까지는.”
 
“시즈코는, 내 생각보다도 더 사람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그다지 변명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추궁이 옳았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변명하거나 반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선명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와 그 귀여운 얼굴에 우울한 빛이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인식이 곧 내가 과거에 연기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나의 옹졸한 양심이 그녀가 진실을 깨닫고 나를 경멸해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둔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 밤에 굳이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 둔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까지 흘러온 게 아닐까?”
 
“듣고 보면 그럴지도.”
 

나는 얼떨결에 넌지시 고백을 해버렸다. 나의 어리석음이 나의 연약함이 깨닫기도 전에 멋대로 저질러버린 것이다. 둔하지 않았으면 굳이 찾아가지는 않았다는 말, 그것은 애초에 그렇게나 보고 싶어할 만큼 카스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백으로부터 그렇게 간단히 감정이 촉발될 리가 없다는 감정의 원리는 그녀조차도 충분히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시즈쿠?”
 

칙칙한 회색 코트를 걸친 부장이 5미터쯤 뒤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이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부장? 여기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내 볼일 보러 가다가 후배가 있으니까 말을 걸었을 뿐이야.”
 

자신의 죄의 증거들이 버젓이 전시된 듯한 기분이었다. 희미한 물기가 뭍은 나의 머리와 카스미의 머리에서 신선한 샴푸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타고 풍겨오는 것과, 묽은 적색으로 칠해진 카스미의 얼굴이 나의 행위, 나의 잘못의 단서를 그녀에게 차고 넘치도록 제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부장의 얼굴은 어떤 못된 장난을 치려는 아이처럼 희미한 입꼬리의 움직임을 보였다.

 
“데이트?”
 
“아마 그렇다고 해야겠죠.”

 
차가워진 공기가 조만간 살의 부드러움을 찢어놓으려는 듯 팽팽하게 당겨지고 사나워지는 것을 느꼈다. 부장의 입가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씰룩거리는 모습이 불쾌할 정도로 음흉해 보였다. 나는 순간 달아나는 상상까지 했다.

 
“그쪽은, 카스미씨였나? 시즈쿠는 저렇게 보여도 은근히 나쁜 버릇이 있으니까 주의하는 게 좋아.”
 
“부장?”
 

나는 뻔뻔하게 카스미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 그것으로 그녀가 나의 과거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들의 본질을 이미 그녀 나름대로는 막연하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강한 죄책감이 나의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끓어올라 말더듬이처럼 입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머뭇거리도록 만들었다.
 

카스미가 나에게 어떠한 추궁을 하거나 미묘한 눈초리를 던지지 않았다는 것으로부터 그녀 내부의 믿음의 깊이를 실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단 한 문장만으로도 고통스럽게 뜯어낼 수 있는 나의 마음을 자책했다. 믿음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쉽게 배신당하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 걸까?
 

카스미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없자 부장은 양쪽을 한번 흘겨보고는 검은 부츠로 낙엽을 경쾌히 뭉개며 갈 길을 떠났다. 무방비로 냉기에 노출되어 있던 귓가가 붉게 물들고 조금씩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추워지는데, 카스미씨도 들어가 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연극용 가면을 쓰고 대사를 내뱉는 듯하다. 언젠가 진실을 고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의 목소리가 얼마나 침착함을 잃고 떨리고 있을지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순간, 그녀의 눈은 여름날의 그 고백 직전의 순간처럼 슬프게, 그러나 늘 그렇듯 아름답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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