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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 페르소나 제 1장 (3)
글쓴이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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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4027343
  • 2021-05-03 03:29:32
							




내가 그녀와 또다시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던 날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이었다. 그것이 다분히 유혹적인 모양새를 띄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이 외박하시는 틈에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당연히 카스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오후 1시쯤에 그녀가 대문의 벨을 눌렀다. 딱 달라붙어 다리의 곡선을 드러내는 청바지 위로 검은 가죽 자켓이 10월의 햇빛에 번뜩이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원이 딸린 저택의 모습을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망상에서 빠져나와 거울을 보았을 때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자신이 꿈꾸는 순간의 일부를 생생히 맛보는 것만 같은 감동의 표정, 그러나 그것이 결코 구체화 될 수 없다는 것의 체념을 전제한, 그런 미묘한 표정이었다.


나의 방에서마저 그녀는 표정을 숨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곳의 사소한 특징 하나하나 전부 온전히 그녀의 기억에 담아두겠다는 의도마저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십자형의 고풍스러운 창문에서 책장과 책상, 거대한 침대, 그리고 벽면의 오드리의 사진까지 향했다가, 이윽고 나에게 도달함으로써 그 시선의 떨림을 멈추었다.


“내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집이네. 아니, 저택이라고 해야 하나.”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곳이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기는 해요.”


그녀는 창가 앞에 서서 한낮의 햇빛을 받으며, 정원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은 그녀에게 온기를 심어주지 못함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따스한 빛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그 싸늘함이 더해지도록 보이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뚝 위의 푸르른 정맥만이 창백함 속에서 두드러지게 보였다.


“일단 연극 연습부터 하자. 다른 것들보다 그게 우리에게는 급하니까.”


나는 무언으로 동의했다. 연극은 비록 12월이기는 하지만, 2개월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은 기간이다. 비록 나와 그녀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다고 해도, 연극의 다른 수 많은 부분들 중 어딘가에서 언제 문제가 눈치없이 튀어나올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2시간 정도 계속해서 연습하다가, 신체에 신선함을 불어넣고 장면의 배경을 살려보기 위해서 정원으로 나갔다. 완전히 진하게 물들어버린 나무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그 우울한 색들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꽃들은 꽤 오래전에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연못 위는 잎사귀들과 자그마한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너저분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강인한 부드러움에 다시금 무대 위로 돌아왔다.


“이렇게 같이 걷고 있어도 행복해 보이시질 않네요. 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소중히 음미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이제 질려 버리신 건 아니고요?”


“너무 좋아하니까 행복함을 지나 버린 거지.”


나에게 그녀의 대사는 전혀 연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대사의 형식을 빌린, 일종의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사랑 고백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침묵에 가득 싸인 주택가 한 가운데에서 퍼져나간 말이기에 더욱 뻔뻔하게 들린 걸지도 몰랐다.


한 장면이 끝나자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마치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는 듯, 그 잿빛 눈동자를 감싸던 허물이 벗겨져서 순수한 본연의 모습 그 자체가 힐끗 보인 것만 같았다. 하얗고 큰 손이 어느새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카스미가 나에게 쓰다듬을 받으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쓰다듬 받는 것, 즉 응석 부리는 것에는 부끄러움의 쾌락이 있었다. 부끄러움과 쾌락이라는,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어 보이는 그 두 단어의 관계는 부끄러움이 일방적으로 쾌락을 부름으로써 성립되었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치부를 가려보이기 위해서 쾌락이라는 변명을 대는, 그런 심술궂은 버릇을 떠올려보면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나의 감정을 이해하였다.


“저를 아직도 사랑하시나요?”


“사실대로 말하든, 이제와서 연기를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대로 말할게. 조금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 생애에서 너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보지 못했어.”


“그렇다면 제 어떤 부분이 그렇게나 좋은 건가요. 저는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그녀는 잠깐의 틈,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듯한 틈을 두었다. 어느샌가 날카로워진 눈동자를 통해 나의 내면이 완전한 나체로서 보여지고 있었다. 세심한 귀중품을 다루는 듯한, 그런 조심스러운 눈길에 나는 또 한 번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둘러댈 것만 같은데, 나의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따져보면 무수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 아름다움을 치장하고 있는 상냥한 연기 밑에, 불안하고 연약한 내면이 공존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나 연극 속의 인물 같아서 좋아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그 모습이 나한테는 일종의 이상으로 보였어. 단지 그것뿐이야.”


그녀는 나의 치부, 나의 가장 중대한 결점마저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방식은 오직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배타적인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나의 결점이 사랑받는 것은 그 결점의 소유자가 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일방적이고 이해 받을 수 없는 막연한 이상향과 나의 그림자가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나의 감정의 자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어느 때처럼 완벽하게 건조했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네요.”


그녀의 표정 또한 건조했다. 나는 메마른 세계가 쩍 하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았다. 막연한 피로감이 머리 안으로 강하게 엄습해왔다. 머릿결과 옷이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나무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음울한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다리의 유려함을 그 어두움으로 싸늘하게 뒤덮었다.


“그럼 너는 왜 고백을 받아들인거지? 말로는 연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너도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저는 제 감정에 대해서 절대로 오해는 하지 않아요. 그때의 제 선택은, 단지 그게 제가 연기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저에게 애정이 솟구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분명히, 저는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내 마음속 한편에 자리하던 무형의 구조물을 드디어 밖으로 꺼낸듯한, 그런 해방감에 빠져들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음울한 고백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지만 나의 행동과 인식 사이의 괴리감이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소되었다는 것은 나의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다. 해방의 순간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자 곧바로 싸늘한 공허의 파도가 덮쳐와 나의 뒤틀린 감정을 비참함으로 격렬히 젖어들게 하였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행위, 그것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어린 시절에는 일종의 낭만적인 행위라고 느껴졌던 반면, 지금은 어째선가 자신의 나약함과 우둔함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문장을 중얼거릴 때, 나의 마음속 한편 어딘가에 아주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러운 감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문장을 중얼거리면, 그것은 나의 마음 한편에 부자연스러운 통증을 명확하게 새기고 지나갔다. 이러한 내면의 감각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샌가 비애와 동정의 마음이 어려있어서 비참함이 나의 마음 속에 실존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떠미는 것만 같았다. 그 시선을 받는 것은 불쾌하면서도, 어딘가 따스함이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가을의 태양과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공기 아래에서 서로의 시선만이 불길하게 끊임없이 교차하다 이내 맥없이 끊어졌다. 그녀가 대문을 나가는 모습조차 확인하지 않고 나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



10월의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카스미와 연극을 보러갔다. 데이트의 일부라고 해두기는 했지만 단지 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에 아무 흥미도 없어 보이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원래 연극을 보러 가던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애인 관계라는 것은 내가 마음이 없어도 단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을 주장하고는 했던 것이다.


나는 동호회에 들고 난 이후로부터 종종 유우와 함께 연극을 보러 가고는 했다. 말 그대로 연극만을 보기 위한 만남이었다. 어째서 그런 이상한 관계를 가졌냐고 묻는다면 그저 친하다고 할 법한 사람 중에 연극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부 부장은 그때는 간략한 정보밖에는 알지 못하는 완전한 타인이었고, 막연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애초에 선택지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유우가 연극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우연히 도쿄의 어느 극장에서 만났을 때였다. 나는 어째서 연극을 보러 오느냐고 물어보았는데, 낭만적인 이야기에서 두근거림과 감동을 느낀다는, 그런 적당한 이유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연극에 대한 대화 상대를 항상 갈구하고 있었던 차였기에 가끔 극장에서 약속을 잡고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나는 이따금 그녀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이 같은 과장된 눈빛과 말들을 하는 것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연극에 대한 대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접촉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 연극 연습을 평가해달라고 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적당한 연기에도 눈을 반짝이며 칭찬해 줄 것만 같아서 그런 무의미한 짓은 피하기로 했다. 연기에 대해서는 부장에게 평가와 조언을 구하는 것이 자존심이 나름대로 상처입기는 하지만 분명히 유의미한 방법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 카스미는 자그마한 코를 빨갛게 물들여가며 훌쩍이고 있었다. 꽤 감동적인 내용의 연극이기는 했지만 나는 차마 견딜 수 없다거나 하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수 많은 작품들을 좋아해서 감상하면서도 나는 어째선가 단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하였다. 감정의 민감도, 그것이 나의 비애의 연기의 원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내가 자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반응할 정도로 민감했다면 지금의 상대방을 온전하고 순수하게 사랑해 줄 수 있었을테고, 연기에서 오는 괴리감은 상당히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자물쇠는 도저히 상대방의 열쇠에는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내부가 이미 심하게 녹슬어 버린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기라는 물감으로 그 자물쇠의 외부만이라도 아름답게 칠해 두었던 것이다.


10월의 태양 빛을 받아 더욱 더 붉게 타오르던 그녀의 콧등은, 어느새 나무 그늘 밑으로 숨어 들어가 그 모습을 감추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방 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 수 있도록 해주었다. 팽, 하는 소리가 선선한 하늘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렇게나 좋았어?”


“응, 연극은 태어나서 처음이고, 솔직히 별로 관심 없었지만 시즈코가 원하니까 그냥 본 거 였는데, 왜 시즈코가 연극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나의 내면에 도사리는 탁한 빛의 감정들은 그녀의 상냥함이 그곳에 침범해오면 도무지 견뎌낼 수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상냥함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나타난 일종의 양심적인 행위였다. 평소의 짓궂은 포장 아래 놓여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지는 상냥함의 윤곽을 나는 도무지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한 상냥함을 또 다른 따스함으로 덮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나의 뒤틀린 내면의 흐름은 그녀가 건네준 양의 감정을 곧바로 음의 감정으로 변모시키기 일쑤였고, 그런 감정이 나에게 부여되는 것은 그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에 내가 또 보러 가자고 하면 따라와 줄래?”


그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앞으로 유우가 연극을 보자고 하면 뭐라고 둘러댈까 싶었다. 카스미와 사귀는 건 동호회에는 알리지 않았으니 그녀와 본다고 하면 그다지 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극부의 부장과 같이 보러 다니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날 나는 계획해두었던 데이트 코스를 조금 틀어,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점차 나에게 연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고난 부드러움의 빛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평소의 얕은 관계에서는 드러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점차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 빛의 세기가 나의 그림자의 농도에 맞춰 변해간다는 것을 알아챌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솟아오르는 감격을 느꼈던가. 나는 그 감정을 맛보게 해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유이가하마 해변은 가마쿠라역에서 두 정거장 지난 유이가하마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위치였지만, 아무래도 도쿄에서 가려다 보니 꽤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다를 본다고 하여도 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터였다. 역에서 내린 후 보이는 씻어낸 듯이 깨끗한 하늘 한구석에는 투명한 달이 10월의 싸늘함을 한층 더해가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희미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변에 들어가기 앞서 모여있는 자그마한 선박들 사이로 드디어 그 거대한 바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늘진 모래사장 건너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로 경계를 분간할 수 없는 수평선이 주홍빛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이미 꽤 쌀쌀해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해안은 차분한 분위기로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는 바닷물에 젖어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부드러운 모랫길을 따라 걸었다. 자그마한 파도가 어떻게든 우리의 발을 그 냉기로 적시고 말겠다는 듯이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파도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뻗어져 나온 얇고 투명한 물결 한 조각이 마침내 우리의 발을 스치려는 순간, 이윽고 그것은 타오르는 노을빛을 받아 마지막으로 한 번 아름다운 색을 투영해 보이고는 이내 흰 거품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그런 광경이 우아한 곡선을 품은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기나긴 해안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자그마한 언덕 같은 지형이 부드럽게 해안을 감싸는 듯한 모양새로 놓여 있고, 그 시커먼 언덕 위에는 어둡게 타오르는 석양이 세계를 낭만으로 덮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양 빛을 배경으로 하여, 그녀의 미소는 노을보다도 더욱더 진한 장밋빛으로 물들어 무엇보다도 순수한 아름다움의 환희로 나에게 살며시 다가왔다.


그 미소의 시작과 끝까지 나는 온전히 나의 기억에 담아둘 마음이었다. 자그마한 파도가 몇 번이나 태어나고 그때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미소는 오랜 시간, 오직 나만을 위하여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놀랍도록 그 어떠한 감정조차 나의 내면으로부터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미소가 희미해지기 시작한 순간은, 해가 마침내 보이지 않도록 저 언덕 너머로 사라져버린,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또 다시 무언으로 사랑을 연기할 것을 강요하는 듯한, 그런 잔혹한 표정이 남았다. 희미한 미소의 자취를 여전히 남겨둔 그녀의 얼굴은 나에게 자신의 감정이 전해졌는지 그 확인을 요구해왔다. 나는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감정의 어떠한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그마한 미소를 지음으로써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바람은 어느새 불길한 기운을 가득 담아오고 있었다. 냉기가 옷의 틈새 사이로 불쾌하게 스며들고 있어서 나는 몸을 움츠러들었다. 수평선은 우울한 빛의 푸르름으로 나의 선택을 재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수평선으로부터 이어진, 잔잔하게 빛나던 바다의 광택은 서서히 바다 본연의 심연의 빛깔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기껏 멀리까지 왔는데, 보라는 바다는 보지 않고 나만 보기에는 바다가 아깝지 않아?”


“그냥, 보고 싶어서.”


나는 이유 없다고 막연하게 여겨지는 것에도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서 붙이고 마는 버릇이 있었다. 모든 것은 인과로 이어져 있으니, 사소한 감정과 자그마한 몸짓 하나하나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가 그 이유를 찾고 싶어 참을 수 없는 감정은, 그녀의 나를 향한 온전히 순수한 빛깔의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는 이유 없이 내가 사랑 받는다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에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필연적이면서도 강렬한 동기가 전제되어야만 했다.


“카스미씨는 왜 나를 그토록 좋아하는 거야? 예전부터 쭉 궁금했어.”


볼은 붉어지지 않았다. 우울한 잿빛 하늘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무엇보다 차분했고, 마치 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건조했다. 평소의 표정이 밝은 만큼 지금의 표정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다고 느껴졌다. 나의 거짓된 연인 연기를 까발려버릴 것만 같은, 그런 자비없는 냉정함......


“언제나 상냥했으니까.”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장막을 들추어 봄으로써, 결국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던, 무엇보다도 명확하고 뻔하기 짝이 없는 진실로 어리석게 도달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연기였다. 탁하고 불안한 색의 내면위을 연기라는 물감으로 칠해 만든, 그런 우아한 가면이 그녀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속여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 애정 관계에 나는 깃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나의 가면과 그녀와의 사랑이다.


‘부정해줘. 아니,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한가지 이유라도 더 붙여줘. 평범하게 예쁘니까 라던가, 그런 평범한 이유여도 상관없어. 나는 상냥하지 않아. 그러니까, 어떤 다른 이유라도 상관없으니까, 오직 한 번만 더 무엇이든 간에 말해줘...‘


끝내 그 입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나의 감정의 원인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순수한 이유이다, 라고 그 자그마한 입은 침묵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못할 만큼이나 정확하게 내려진 답이라는 것은 그녀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떠올려보니, 언제나 그녀에게 상냥했다고 보여질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나도 반대로 물어도 돼? 왜 시즈코가 나를 받아준 건지.”


나는 더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거짓된 사랑 연기를 모두 고백하고,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그 따스한 빛들을 모두 다시 돌려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나는 어떠한 자그마한 빛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좋았다. 독방에 갇힌 사람이 감옥의 창틀 밖에 쏟아지는 그 찬란한 햇빛을 그저 보고만 있을 때의 괴로움을,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매 순간마다 느껴왔던 것이다.


하지만 연기하지 않을 용기가 나에게 있을까? 자신의 추악함, 그녀의 감정을 내가 유린해왔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고, 그것에 따르는 상대의 모멸감을 과연 자신이 견뎌낼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연기를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왔단 말인가. 그것에는 타인에게서 조금이라도 미움받고 싶지않아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 애초부터 깃들어 있었다고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카스미씨는, 이런 소극적인 나에게도 항상 먼저 다가와주고, 친해질수록 더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그러니까 좋은 거야.”


나는 연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인간적인 호감을 품는 이유를 나는 어떠한 꾸밈없이 그대로 내보인 것이다. ‘좋다’가 가지는 의미, 바다처럼 끝없이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있는 그 수 많은 의미들 중에서 어떤 의미로 이해할지는 오직 그녀에게만 달린 일이다. 그 이해에 나의 책임은 없다. 그것을 그녀는 자신과 같은 사랑으로 이해할 것임에 틀림없었고, 우리의 관계는 이 상태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거짓으로 사랑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연못 위에 던져진 돌이 긴 파장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의 연기가 지금까지도 멈출 수 없는 파장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끝없는, 연못의 물이 마르기 전까지는 도무지 멈출 기색이 없는 기이한 파장을...


그녀는 자신만의 해석에 흡족한 듯 보였다. 또 다시 지어보이는 미소에는, 자신이 얻어낸 그 의미를 바탕으로 맑게 투영해둔 감정이 따스하게 어려있었다. 나는 그 따스함과 서늘함의 경계에서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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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0009 일반 음악과 교복 너무 밋밋하다 챠르노 2021-07-11 0
4130008 일반 과마다 옷 다르구나 ATM 2021-07-11 0
4130007 일반 라이벌의상이 브라질쌈바인줄 콩민영 2021-07-11 0
4130006 일반 평범과 ㅋㅋ 시니아퍼시피카 2021-07-11 0
4130005 일반 아 그런거였나 챠엥 2021-07-11 0
4130004 일반 이노이노이노ㅋㅋ Saint-Snow 2021-07-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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