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번역/창작 [SS] 페르소나 제 1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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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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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3 03:29:24
나의 그 순간적인 선택으로 인해 나의 생활이 크게 뒤바뀌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스미는 타인 앞에서 나를 대할 때 이전과 별다를 것 없이 대했고, 나는 그 점에 있어서 그녀에게 감사했다. 혹시나 그녀가 타인 앞에서 나를 향한 노골적인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녀 앞에서만 연인을 연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될 터였다.
하지만 단 둘만의 순간일 때에는 나는 이런저런 연기를 무언으로 주문받고는 했다. 주위에 사람이 적은 것 같다 싶으면 잠깐 손을 잡거나, 밀실에 들어가게 되면 간단하게 입을 맞추는, 그런 정도였다. 정교(情交)는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요구하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너무 풋풋하지 않나 싶은, 그런 관계였기에 내 입장에서는 연기하기 수월했다.
혹시 내가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고는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애초에 그런 감정이 있었다면 그때 어떻게든, 연기라는 습관을 이겨내고서 거절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원래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평범하게 즐겁다고 느껴왔었다. 이것이 기만이 아니라고 나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관계에 있어서 항상 연기를 들이미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녀와 어울릴 듯한 연기를 하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호감만으로도 연인을 연기하기에는 분명 최소한의 열의조차 나의 내면엔 깃들어있지 않았다.
...새학기의 학교는 신학기 특유의 어수선하고 들뜬 느낌이 어째선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수면 아래서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들여다볼 방법을 찾지 못한, 그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동호회는 저번 학기에 1년 동안 예정해 두었던 활동을 압축해서 대부분 소진시켜 버렸다는 듯이 놀랍도록 여유로웠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연극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하기로 결정된 연극이 마침 마음에 들었음으로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고보니 카스미가 동호회의 부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동호회는 가능한 한 자유롭고 개방된 분위기에서 활동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직책의 존재는 의외로 큰 영향을 충분히 미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단지 직책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활동에 대한 열의와 경험 등이 풍부하니까 내부 회의에서 그녀가 가지는 영향력은 보기보다 클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 생각이 맞다면, 동호회의 일정이 널널하게 짜여진 상황은 그녀의 의견이 유의미한 힘을 발휘한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이번 연극에 집중하고 싶다고 지나가듯이 말했던 것을 신경 써주었던 것일까? 평소의 모습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세심한 배려였다.
...책의 검은 활자들을 창문으로부터 투과된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책으로부터 그 빛의 광택이 번져 글씨가 오히려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눈이 피로했다. 그러한 빛의 테두리를 텅 빈 교실의 그림자가 품고 있었다. 앞쪽의 살짝 열린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올라탄 머리카락의 보드라운 향기가 코를 행복하게 간질였다.
오늘은 연극부의 오디션이 예정되어 있었다. 방과후의 두 시간을 각각의 배역들을 지정해 잘게 시간을 나누어 두고, 특정 배역에 지원하고 싶은 부원이 그 시간에 맞춰 부실에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연 후가 주연의 차례였는데, 나는 당연히 주연을 지원할 생각이었고 하필 그 배역이 제일 마지막 시간대였기에 나는 벌써 한 시간이 넘게 빈 교실에 들어가 대본과 원작이 되는 소설을 비교해가며 연습하고 있었다.
앞자리에는, 일찍 동호회 활동을 마치고 온 카스미가 앉아서 내가 읽는 모습이 마치 중요한 광경이라도 된다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릴 때 드러나는 나의 우아한 속눈썹, 예리한 각도의 코, 오밀조밀한 귀의 생김새까지 모조리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집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오디션에서 연기해야 하는 각본의 원본 부분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책을 덮어버렸다. 표지 위에 ‘봄눈’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미안, 방해됐어?”
“마침 눈이 조금 피로한 것 같아서.”
“역시 교실 불 켜야 하지 않을까.”
“아니야, 이대로 내버려 둬. 잠깐 쉬어야겠어.”
나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는 얕게 눈을 감았다. 눈꺼풀 사이로 흰빛이 희미하게, 그러나 상당히 피로하게 아른거렸다. 혹시나 그녀가 입을 맞춰오지 않을까 상상했지만, 책상 위에 놓였던 책을 손이 집어드는 것 같은 소리만이 들렸다. 그때 나는 저번 여름밤 방에서 그녀가 내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떠올리고는, 그것과 지금의 소리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하던 습관을 봐두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초중반부를 이리저리 펼쳐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그녀에게 의미가 될 만한 부분을 발견했는지, 나에게 책을 들이밀며 이것 좀 봐보라고 말해왔다.
“여기 적혀있는 유이가하마 해변이라는 곳, 저번에 시즈코가 말했던 곳 아니야?”
“그러게, 신기하다. 혹시 거기서 ‘사토코’라는 이름이 나오는지 봐줄래?”
그녀는 앞뒤 장면을 번갈아가며 살펴보는 듯하더니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없는 것 같아.”
“아쉽네, 만약 그 장면을 연기할 수 있다면 정말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을텐데.”
나는 약간 뜸을 들여 놀랐다. 단지 나의 말에 내포된 배경을 살펴보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당연히 맡게 될 것이라고 내가 순간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는, 그 오만이 나의 사고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그 오만함을 가져버린 자신의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연기는 나의 긍지였다. 그 행위는 나에게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명확한 행위이고 자신을 자신으로써 존재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차이였다. 그렇기에 연기에 있어서 나는 자그마한 오만의 씨앗조차도 허락하지 않아 왔었다. 그것이 자라나면 나의 긍지라는 가치를 훼손하고 말 것이라는, 그런 불길한 확신이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새 다가와서 연극부로 향했다. 복도는 낮에는 가득 찼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텅 비어있어서, 빈 복도 특유의 서늘함이 바닥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기에 그런 감각은 나름대로 상쾌했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 사이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말소리가 끼어드는 듯했다.
...이때만큼 부실 앞에 쓰여진 ‘연극부’라는 글자가 어렵게 느껴지는 때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간단히 상상에 빠져들었다. 나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는 습관이 있었음으로, 연기를 준비할 때에도 쉽게 그 배역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그것을 나의 신체로 더욱 더 구체화시켜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귀족가의 모임에서 연인과 만나기 위해 은밀하게 빠져나온, 명망있는 가문의 아가씨였다. 커다란 벚꽃 나무가 드리운 우아한 그늘이 나와 연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가 볼까 입술을 밀어냈다가, 이내 얼굴을 당겨와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입술을 뗀 후에는 상대방의 품 안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파묻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더니, 걱정이 스며든 눈빛이 나를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따금 카스미는 나를 향한 애정이라는 감정을 갖가지 방식을 통해 전해오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단 한 번도 나의 내면에 직접적으로 와닿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좀처럼 내면을 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계속된다고,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의 감정이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상황을 변호해왔었다.
“시즈코라면 분명히 이번에도 오디션에 붙을 거라고 믿으니까.”
“응, 꼭 붙어볼게.” 나는 간단한 미소로 답하고는 연극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극부실은 커다란 방 하나와 비품들을 넣어두는 자그마한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실의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거울이 덮어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부실 내부의 모습을 꼼꼼하게 투영해내고 있었다. 그것에서는 자그마한 실수 하나도 용납하고 싶지 않다는 냉정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부실 안에서는 부장만이 나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며 긴 책상 한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녀 외에는 이곳에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부실의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에 탄력적인 광택이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녀만큼 특이한 사람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머릿결은 지나치게 짧고 불규칙적으로 뻗어 있지만, 그것을 받치고 있는 희고 우아함이 넘쳐흐르는 얼굴과는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그런 연출된 듯한 생김새였다. 평소의 행동에서는 연기로는 결코 모방해낼 수 없는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유혹, 특히 후배들로 하여금 어리광을 부리고 기대고 싶게 만드는, 그런 탐욕스러운 유혹이었다. 내가 그 모습에서 고혹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까?
잿빛 눈. 어쩌면 내가 가장 매료되었던 것은 그것일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나름 상냥해 보이는 부드러운 눈이 어느 순간 예리하게 가늘어지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과 동시에 냉철한 관찰을 뽐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눈동자의 변모에서 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그 예리함이 나의 내면 깊숙이까지 파고들고, 연기로 치장된 외면을 그 내면으로부터 낱낱이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오디션을 진행하자고 말하면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까 내가 상상했던 그 장면은 상대역 기요아키가 필요했고, 그것은 마땅히 부장이 맡기로 되어있었다. 공기는 어느샌가 팽팽하게 당겨져 이곳 안의 모든 물체의 윤곽선과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연기할 때의 눈, 즉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는 눈으로 나의 눈동자 너머에 있는 존재마저 꿰뚫어보려는 듯 했다.
그 동작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그녀의 몸 앞에 붙어 어느샌가 애달픈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비스듬히 올려다 보았다. 그 접촉은 어째선가 너무나도 위험하면서도 따스하게 느껴져서, 그녀라는 존재 안에 자신이 포함된 것만 같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이 실리는 것을 신호로 하여 유혹적인 속눈썹의 파도가 밀고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움직임을 무언으로 거절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방심하도록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턱에 가볍게 손을 대고는 입술을 가볍게 얹어 두었다... 이 행위의 마음가짐에 연극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배경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전의 나였다면 하는 척만 하고 넘어갔겠지만, 경험에서 촉발된 나의 심리의 변화 이후로부터 나는 이따금 씩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왔던 것이다. 그것에 어떠한 애정이라는 형태의 이유가 포함되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그런 도취에 나는 흠뻑 젖어 들었다.
고개를 숙여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나의 연기는 끝났다. 남은 것은 그녀로부터 어떠한 반응, 즉 총애하는 후배가 연기를 기회로 삼아 키스를 해왔을 때의 그 심정을 보고자 하는 생각이다. 내가 비록 타인에 감정에 서툴다고는 했으나, 내가 연극부에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를 향하던 그 애욕의 냄새가 풍기는 대우를 알아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의 매력을 먹이로 삼아 끊임없이 태어나는 지저분한 욕망의 파도를 견뎌내고 있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이런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내가 연극부에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 나는 학기 말에 하는 연극에서 조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비록 주연을 맡고 있던 다른 3학년 선배보다 내가 더 주연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부원들도 생각했겠지만, 선배니까 마땅히 주연을 맡아야 한다는 그 자만심을 내가 건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주연을 맡았다. 배역이 정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주연 자리를 포기한 것은, 거스르기 어려운 압력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부장의 애욕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 순간이었다. 신입생 후배가 나름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맡은 주역을 뺏어줄리는 없지 않은가? 나는 전적으로 사랑을 받는 위치에만 존재할 수 있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좀처럼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설명될 터였다.
“진짜로 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연인이라도 생긴 건가?”
“뭐든지 간에 경험하고 나면 연기하기 쉬워지지 않나요.”
애정하는 후배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뺏겨버렸다는 사실에서 촉발되는, 그런 격렬한 종류의 감정이 그녀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욕망의 충족을 이루어오던 이에게 지금의 일은 어떠한 충동의 도화선이 발화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기에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부도덕한 상상까지 쉽게 허락해버리고 마는 그런 번뜩이는 위험한 충동...
“오디션은 이걸로 됐어. 그 역은 역시 너 아니면 할 수 없어.”
“저기, 다른 분들은 오디션 보러 오지 않았나요?”
눈의 윤곽선이 부드러워지나 싶더니 이내 불길하게 예리해졌다. 그것이 나의 실수를 증명하였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애초에 남녀 둘이 사랑을 한다는 배경의 연극 주연 둘을 부 안에서 뽑는다고 하면 나하고 너 말고 대체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말이야. 물론 네가 그 배역에 상당히 잘 맞는다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 누가 기꺼이 도전하려 할까?”
“저는 그래도 그 자리가 경쟁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봐요.”
“그런 예의마저도 내 앞에서는 연기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실은 시즈쿠도 속으로는 확신하고 있잖아? 어차피 너 말고는 아무도 그 배역을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 표정은 뭐지? 들켜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맞아. 이제와서 말하기는 불필요한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당연히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그녀의 말로부터 사로잡힌 것은 일종의 희열이었다. 자신의 은밀한 내면이 까발려졌다는 치욕감과 동시에 찾아오는 알 수 없는 해방감, 그것이 나의 희열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상대의 처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그것이 자비로울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나를 향한 그녀의 욕망은 이미 허무한 상태로 치달아버리고 말았는데, 욕망의 맛에 익숙한 자가 나에게 쉽게 부정을 품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네가 평소에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미워하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너를 마음에 들어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건 오직 나하고만 함께 있을 때는 연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이었다. ‘연기하지 말아야 하는’ 조건이 부여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타인을 대할 때 무의식적으로 연기하고는 했음으로, 이제와서 연기를 하지 말라고 해봐야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나의 몸은 안타깝게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자연스러움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연기하지 않는 본모습’을 대체 어떻게 하면 연기할 수 있을까. 탁한 빛깔의 감정이 어느 때처럼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거울 안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앞머리가 눈에 닿을락 말락 하는 찰나의 모습이 보였다. 손으로 걷어내자 드러난 씻어낸 듯 맑은 눈에는 불안한 파문이 눈동자의 아름다움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자칫하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너무나도 얇은 유리 조각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어째선가 눈동자가 흔들릴 때가 올곧게 멈춰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내가 앞서 그녀에게 충동을 느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길 바란다. 연인이 있다고는 하나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이며, 그런 불안정한 관계에서 나는 어떠한 책임감이나 소중함 따위를 도무지 느끼지 못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런 감정은 애초에 태어날 일이 없지 않은가. 만약 들켰다면 그때와서 감정을 연기하면 된다고, 나의 뒤틀린 내면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마음껏 외쳐대고 있었다.
이것으로 나는 내면의 욕구를 그녀의 요구대로 드러내 보임과 동시에, 그녀에게 필연적인 선택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내면 또한 나처럼 타인에게 확인되어야만 했다. 연기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은 떠올려보면 그녀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나의 일부이기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연기가 탐욕스럽게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려들고 본심과 연기가 섞이어 자신이라는 존재가 희미해지는 그 불안감을......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뒷목과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혀서, 철저히 유린당하는 것만 같은 입맞춤을 당했다. 마음의 구조물의 균형은 그것만으로도 흔들리고 있었다. 외부의 껍질을 뚫고 전해져오는 강한 애욕의 충돌을 견뎌내기에는 너무나도 연하고 부드러운 내면이었다. 나는 그 나약함을 자각함으로써 마음이 어떤 곳으로 분명하고 순수하게 치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기쁘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까. 그 감정의 형태는 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다시 힐끗 바라본 거울 속의 세계에서, 나의 시선은 머리카락 사이를 창백한 얼굴이 탐욕스러운 몸짓으로 파고드는, 피학적으로 연출된 장면 같은 상황을 뚜렷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광경에서 나는 어째선가 어떤 소설의 줄거리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극상의 향을 탐미해서 아리따운 아가씨를 죽여 머리카락을 벗겨내 향을 채취하는, 그런 이야기를.
그것이 어떠한 ‘만족’의 표현인지, 그녀는 우아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한 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입술이 민감한 귓불 언저리를 스쳤다가 이내 빠져나왔다. 날카로운 눈매는 평소의 모습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띠기 시작하나 싶더니 다시 가늘어졌다.
“설마 연인 관계마저도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나를 배반했다. 온전히 나의 감정의 증인이 되어 나의 버팀목으로서 설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욕망 어린 감정에 도취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그것으로 내가 소중하게 쥐고 있던 기회는 산산조각 났으며, 나는 어떠한 타인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으리란, 그런 어두운 감정의 형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 형상이 어느새 나를 짓눌러 오기 시작하여 나는 차마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내뱉듯이 말했다.
“연기하고 있지 않았으면 애초에 오디션 때 키스하지도 않았어요.”
부장의 모습은 평소 부실에서 연기할 때 보여주는 형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예리한 눈썹과 단아하게 닫힌 얇은 입술, 미세한 떨림조차 허락하지 않는 눈동자와 신체의 올곧은 정지...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러한 잔잔함 밑에 나를 향한 모멸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애 관계마저 연기한다는 비정상성을 나는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을까.
“시즈쿠는 그럼 앞으로도 하고 싶은 데로 연기하면 돼. 연기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나한테도 연인을 연기해 달라는, 그런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게.”
그녀의 목소리는 연기하지 않을 때의 얄팍한 부드러움이 어린, 그런 간지러움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학교 밖에서 가끔이라도 따로 널 만나게 해줘.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연극 연습이라도 하시게요?” 나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물론 우리는 주연이니까 따로 시간을 내서 하긴 해야겠지?”
나는 그녀의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교문을 나서니 선명한 석양빛이 드리워진 드넓은 길가에 카스미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위태롭게 보이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밝은 마음씨를 돋보이며 나에게 부드러운 동작으로 다가왔다.
“오디션 어땠어?”
“미안,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붙었다, 그 한마디면 될텐데. 나는 자신의 안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털어놓고 싶어하는 그 욕구를 차마 이기지 못할 것만 같아 그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느새 해가 저 땅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세상은 하늘의 어두운 빛깔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표정에도 충분히 스며들어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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