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번역/창작 [SS] 페르소나 제 1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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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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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3 03:29:08
미완작이지만 일부분 먼저 올려봅니다. 5월 중에는 마칠 계획입니다.
*
푸른 밤이었다. 차창으로 한여름의 물기 어린 공기가 녹아들었다. 나는 앞머리가 천진난만하게 들추어지고 있다는 것을 바람이 이마의 축축한 부분을 어루만지는 순간 느꼈다. 바다 건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오다이바의 야경이 기나긴 빛의 물결을 이루어 넘실거리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그 화려한 풍경에 나는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조차 순간 잊어버렸다. 나는 그 풍경과 여름 공기와의 절묘한 조화에 감탄하면서도, 바람이 점점 날카롭게 눈을 간질임을 느끼고는 창문을 올렸다.
차창에는 아른거리는 불빛들을 배경으로 하여 건조한 표정의 얼굴이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어딘가 막연하게 침울해 보였다. 그 사람의 머리에 장식된 커다란 흰 리본은 밤의 그림자를 머금어 우울한 날의 탁한 하늘색을 그대로 옮겨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함을 우아하게 드러내면서도, 마치 물기에 젖은 듯한 광택이 희미하게 어려있었다. 그걸 보고 ‘오사카 시즈쿠’라는 음운에 정말 이토록 들어맞는 생김새는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나는 운전사에게 물었다.
“1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자택에 운전사가 있다는 것은 남들과 비교하였을 때 꽤 편리한 점이었다. 물론 납득할 수 있는 사유를 명확하게 부모님께 설명드려야 하기는 하지만, 여름방학에 한 번 정도는 갑작스럽게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올 수는 있는 법이다. 보통 계획에 없던 일인 경우 쉽사리 반대가 뒤따르지만, 오늘은 어째선가 간단히 허락이 내려졌다. 핸드폰에는 어딘가 성급한 듯한, 카스미가 보낸 어디냐고 묻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10분 뒤면 도착한다고 보냈다.
그녀가 이런 밤에 나를 부른 일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하더라도 보통은 전날에 약속을 잡고 다음 날 오전부터 넉넉하게 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외박하셔서 심심하다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밤에 멀리 사는 나를 불러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연기라고 확신했다. 능숙한 연기자일수록, 서툰 연기자의 연기는 너무 뻔해서 속아주기 위한 연기를 해야할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얄팍한 연기를 알아챈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었는데, 단지 그 행위의 그럴듯한 동기를 생각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관계에 있어서 능숙함을 자연스럽게 뽐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챘을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나에게 친구 관계란 것은 수많은 무대의 일종에 불과했다. 자신의 배역에는 몰입할 수는 있을지라도, 관객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을 때 다른 이의 배역을 깊게 사유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배역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겹다고 느꼈다. 나의 그런 배타적인 사고는 전적으로 의지가 아니라 능력과 결부된 것이었고, 그렇기에 타인에 대한 친애의 감정이 미약하다는 사실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비난받지 않아 왔었다.
주변 일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들뜬 분위기가 섞인 번화가에서, 고요함으로 적셔진 주택가로 창 밖의 분위기는 변모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번 지나쳐 보았던 익숙한 거리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8월 밤의 축축하고도 깊은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차가 검은 광택을 비추다 이내 사라지고 나자, 주위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조금 걸어가자 다다른 맨션 앞에서 카스미는 멍하니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귀의 부드러운 형태가 회색빛 머릿결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노란 잠옷 위에 흰 카디건을 걸치고, 슬리퍼 위에 튀어나온 발가락의 발톱 위에 칠해진 분홍빛 페디큐어를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번뜩이게 하고 있었다.
나는 아래쪽을 힐끗 내려다 보았다. 우아하게 뻗은 다리 위로 하늘색 스커트가 나풀거렸고, 흰 블라우스는 미세한 바람의 흐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맨 가죽 가방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윤곽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밤에 입기에는 조금 들떠 보였다.
“이런 밤에 불러내는 건 좀 별일이네.”
“미안, 문득 외로워졌다고나 해야 하나. 왠지 이런 때면 시즈코가 있어줬으면 해서.”
“탓하려는 건 아닌데, 리나씨나 시오리코씨가 더 가깝지 않아?”
“시즈코가 편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션의 8층으로 향했다. 집은 평범하게 깨끗했지만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에어컨 소리만이 정적을 부자연스럽게 깨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공주님’ 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법한 방이었다. 책상이나 의자, 서랍 따위는 모두 파스텔톤의 분홍빛이 맴돌았고, 커튼마저 짙은 분홍색이었다. 책상 위에는 각종 화장품들과 거울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시오리코가 본다면 ‘평소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하고 은근히 말해둘 것만 같았다. 어딘가 싸구려 같은 인형들이 무질서하게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내 방으로 하기에는 좀 어수선하다 싶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평소에 풍기는 분위기의 표상으로는 적합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잡다한 과자들이 놓여 있었다. 뭘 마실 거냐고 물어서 커피를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했다. 적당한 주스면 된다고 답해두었다. 붙어 앉아서 그녀가 이런저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꺼내면, 나는 나름대로 바람직할 것만 같은 반응을 해주었다. 타인을 대충 대하는 버릇없는 태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식으로 상대에 맞춰서 연기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시즈코는 다음 학기 때는 어떤 라이브를 하고 싶어? 나는 유닛이라던가 짜면 좋을 것 같은데.”
“나랑 같이하고 싶은 거야?”
“에,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해서...”
“정말 카스미씨는 솔직하지 못하네.”
“억측이야.”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가져다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가 보통 장난기 어린 말투로 이야기하면 내가 그것에 맞춰서 약간 투덜거리는 답을 대는 것이 나의 연기와 그녀의 성격이 어우러진 평소의 대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째선가 그녀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고, 나는 그러한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번에는 이쪽에서 먼저 장난스럽게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약간 대화에 탄력이 붙는 것만 같았다. 평소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보이는 듯 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나의 농담조의 말을 흘려내고는 어느새 저번에 놀러 갔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여놓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희미한 둔탁함이 끼어들어 있었다.
“시즈코네 주변에는 어디 놀만한데 없을까?”
“음, 이따금 씩 가던 바다가 있기는 한데, 그것 말고는 우리가 놀기에는 지루할 것 같아.”
“그래도 가끔은 해수욕이라던가 하고 싶어지지 않아? 얼마 뒤면 여름도 곧 끝나버리니까. 거기 이름이 뭐야?”
“유이가하마(由比ガ浜) 해변.”
나는 해안선의 부드러운 곡선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한적한 분위기를 떠올렸다. 파도가 휩쓸고 난 축축한 모래가 태양의 찬란함으로 반짝이는 것과, 그런 빛이 해안부터 저 먼 바다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눈부신 광경. 대양의 거선 위에 달린 돛처럼 거침없이 나부끼던 나의 치맛자락... 아무래도 조금 외진 곳에 있으니까 여름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집에서 그리 먼 거리도 아니였기에 나는 그곳에서 종종 기분을 전환하고는 했었다.
“다음에 나도 데려가줄래?”
“좋아.”
사실 나는 그녀와 함께 바다에 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성향이 맞고 안맞고를 떠나서, 그녀를 대할 때면 연기해야 하는 행동의 가짓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에 피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의미 없고 사소한 말들이나 엉뚱한 장난을 치는 심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연기를 무언으로 요구받는 것처럼 느꼈다.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의 내면의 사고가 습관화된 연기에 따르도록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이상한 이유가 있을 뿐이다.
선천적으로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내면적인 나는, 어렸을 때 자주 연극과 영화 등의 수단을 통해 나에게 결여된 외향성을 무의식중에 학습하고는 했다. 그리고 어린애라면 마땅히 그렇듯 ‘이때는 이렇게 말하는 게 좋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면, 나는 내가 배워온 ‘연기’된 상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연기하려고 노력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연기에 어떠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습관으로서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체화되어서, 나는 연기하지 않으면 남을 어떻게 대할지 아주 조금도 떠올려 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당히 내뱉었다.
남들은 그것을 최소한의 배려라고 표현하겠지만, 나의 언어로는 타인과 같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위한 시도였다. 평범한 친애의 관계라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이따금 씩 그런 관계를 요구받거나, 아니면 내가 외롭다고 느껴서 어떻게든 그것을 해소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나는 적합한 상황을 떠올려서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그 연기하는 습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타인에게 솟아오르는 것을 막아서고는 했다. 특히, 내가 애정이라는 감정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항상 그 의미는 나에겐 점점 희미해져 붙잡았다고 느낀 순간에는 이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 감정의 윤곽이 손에서 아스러진 이후에 남은 것은 연극의 대본과도 같은 정해진 대사와 행동과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느낄까, 나는 타인을 대할 때면 습관적으로 그것만을 상기시키곤 했다. ‘연기’는 이미 내 본질적인 영역에까지 불안한 기운을 드리워 나의 내면에 비애의 싹을 심었다. 연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것에서 불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우울한 영향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가는 것이었다.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사랑과도 같은 감정이 아니라 그런 우수(憂愁)였다.
나는 방 안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대는 각본에 없는 방향으로, 아니면 각본에는 있지만 배우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는데, 이미 텅 비어버린 잔을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선의 미묘한 떨림으로부터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타인의 사고를 상상하는 데는 꽤 둔한 부분이 있었다.
“저기, 안에만 있는 것도 답답한데, 잠깐 산책이라도 하러 갈까?”
“괜찮으면 먼저 나가 있어도 될까? 천천히 갈아입고 나와도 돼.” 나는 상대의 의도에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금방 나갈게.”
나는 맨션을 나와 이미 상당히 눅눅해진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11시였다. 거리는 아까보다 더욱 더, 기이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침묵에 젖어 있었다. 주위에는 차 한 대도, 사람 한 명도 지나다니지 않아서, 몇 블록 건너에서 나는 이야기 소리 정도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 했다.
기다리기 시작한 지 15분이 좀 넘었을까, 지루하다고 느끼려는 참에 카스미가 맨션 입구에서 나왔다. 그녀의 차림새를 본 나의 심정은, 언젠가 연극에서 상대 배우가 실수를 하였을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원피스는, 마치 벚꽃이 상냥한 바람에 찬란한 물결을 만들어 내듯 한밤중의 미풍에 우아하게 팔랑이고 있었다. 머리 한 쪽에서는 달 모양의 금빛 머리핀이 가로등 아래에서 햇볕을 받은 거울처럼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탐스러운 앵두를 연상시키는 광택이 도는 입술이었다.
“난 이 주변은 잘 모르니까 카스미씨가 안내해줘.”
“공원은 어때? 그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좋아.”
고요한 거리에서 사람 한 둘만이 우리를 눈에 띈다는 듯이 힐끗거리곤 지나갔다. 어느새 끈적한 습기를 머금은 목덜미 주위를 자그마한 바람이 시원치 못하게 간질였다. 나는 목에 달라붙으려고 하는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정리할 때 카스미의 단정치 못한, 마치 욕구를 숨겨두고 있는 것만 같은 미묘한 시선을 받았다. 그녀는 내가 시선을 보내면 그제서야 눈길을 돌리는 형편 없는 연기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공원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떨어진 가로등 불빛 근처의 나무에 짙은 녹음이 길게 줄지어져 있었다. 배가 다닐 수는 없음에 분명한, 육지 사이에 낀 자그마한 바다 위에 상아처럼 구부러진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다리 건너편에는 내가 이곳에 오면서 스쳐 지나갔던 황홀한 빛의 물결 중 일부일지 모르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경이 화사하면서도 도시 특유의 지저분한 소음과는 떨어져 있으니 꽤 좋은 분위기였다.
나는 문득 카스미가 이 야경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의 방향은 분명 강 건너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존재하고 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원래 그 눈에 채워져야만 하는 것, 즉 그녀의 의식은 내면을 향한 완전한 집중을 보내고 있었다. 눈동자 안에는 생명의 빛 대신 인공적인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그 순간, 그 눈이 슬퍼 보였던 건 어째서였을까?
이윽고 그 눈에는 환한 광택이 맴돌았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빠져나와, 어느샌가 나의 건조한 시선과 뚜렷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이때에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기만일 것이다. 그 탐스럽게 익은 앵두와도 같은 입술에 나타난 자그마한 간격과 눈동자 안의 미세한 떨림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너무나도 순수하고 풋풋한 애정의 표시에 대해 나는 질투하고 있었다...
“시즈코.”
“응?”
“이런 밤에 불러낸 이유, 알고 있어?”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놀란 것은 나름대로 빠르게 간격을 좁히며 다가오는 그녀의 말에 있다기보다는 나의 참을 수 없는 태도에 있었다. 어쩜 이리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기쁘다는 듯이 말꼬리를 올리고 있는 걸까? 나는 이때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사를 가다듬을 짧은 틈새조차 쉽사리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자가 고백의 첫마디를 고르는 순간은, 치장하려는 듯한 모양새를 띰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가장 순수한 장소에 온전히 직면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욕망과의 완전한 접촉, 투명한 욕망 그 자체가 잔인한 빛을 발하는 순간... 나는 상대방에게는 괴롭게 다가오는 그 행위를 알고 있었음에도 기꺼이 마주해 보았다.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시즈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연인이 되어 주었으면 좋을 정도로 시즈쿠를 좋아하고 있어.”
내가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나의 ‘연기’가 그것에 앞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나도 좋아하고 있었어.”라는 말을 이상야릇한 표정과 함께 표현해 버렸다. 한번 그것에게 나의 본심이 꺾이고 나자, 나는 연기의 주장이 실은 타당한 것이었고 연기해서 다행이라는 이중적인 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내가 이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였음에 틀림없었다. 비록 나는 앞으로 사랑을 연기하여야 하지만 적어도 그녀와의 관계와 그녀의 감정은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깨닫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열렬한 고백을 통해 자신의 내면 속에 숨어 있던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깨닫게 된다는, 언젠가 읽어 보았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아주 미약한 감정의 불씨가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의 감정에 대한 배반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감정의 본질을 착각하는, 그런 행복한 실수는 나에게는 도무지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감정의 성질과 농도를 항상 정확하게 판단하는, 그런 안타까운 능력을 나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에게서 잘라낼 수는 없었다. 항상 연기하는 주제에 감정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의 내면의 감정만큼은 조금도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의 변화는 어느새 비극의 결(結)을 희극의 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바꾸어 두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것으로 나는 무대에서의 나의 역할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확신했다. 이것으로 무대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을 수 있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놀란 것은 어느새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입술에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려서 입술의 광택이 더해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아무래도 인간의 애정이라는 감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분해서 울어보았던 적은 있지만, 기뻐서 운다는, 그런 모순적인 행위는 나에게는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의 흐름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조심스레 끌어안고 머리를 차분하게 쓰다듬어 주었더니, 이내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달려온 오필리아를 잠들도록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았다. 잿빛 머리카락이 물기 어린 목덜미에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도무지 그 형태의 경계를 파악할 수 없는 그림자가 불길하게 흔들렸다...
“지금 얼굴 보면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나는 그래도 충분히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치사해.”
그녀는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울음이 흉하지 않을 것만 같은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니까, 적어도 이건 연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연인이니까 해준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어째서 나를 연인으로 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것일까. 동성에게 고백받은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동성의 매력을 부러워했는데 이것이 연모의 감정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적당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만약 나의 꾸며낸 가면에 이끌렸다고 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고, 가면 속의 것에 끌렸다고 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은 나의 연기에 매혹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슬슬 돌아가자, 카스미씨. 업어줬으면 좋겠어?”
“아니야, 가자.”
나는 볼에 느껴지는 오묘한 감각에 소스라쳤다. 돌아와서 샤워를 하려고 거울을 마주 보았을 때, 선명한 장밋빛 자국이 앙증맞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에서 어떠한 주저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붉게 타오르는 상처 부위의 선명한 통증처럼 다가왔다. 내가 연기로는 결코 모방해낼 수 없는 애정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그토록 충실히 대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이 자국만큼이나 달아올랐지만 나의 우아한 얼굴은 어째서 밤공기의 서늘함 밖에는 담아내지 못했던 걸까... 나는 그 자국을 샤워하면서 지워냈다.
방에는 이미 어둠이 존재의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파고들어 등을 돌렸다. 적어도 이 이상의 접촉만은 삼가 주었으면 했다. 단지 키스신이나 그 이상의 것을 연기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경험을 해보면 연기가 더 자연스럽고 쉬워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고백은 받아 보았지만 온전히 애욕이 스며든 행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첫키스라는 단어에 대한 막연한 낭만을 무의식중에 품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자그마한 동물이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 존재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 나를 뚜렷하게, 마치 순수한 욕구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렇다면 나의 무대의 상연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듯 했다. 이제껏 요구 받은 적 없는 연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나의 내면을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파고들기 시작해서 나는 잠이 들 수 있는 순간의 기회를 어느새 빼앗기고 말았다.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에는 사나운 어둠으로부터 마구잡이로 덧칠을 당한 것만 같은 불길한 윤곽이 흐릿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그나마 친근감을 느낀 것은 은은하게 퍼져 날아오는 달콤한 향기뿐이었다. 나는 그 향기로부터 연약한 팔이 뻗어나와 내 턱을 붙잡고, 나는 그것에 어떠한 저항조차 하지 않고 담담히 첫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사실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애욕의 표현이 나에게 자그마한 불씨를 불어 넣어줄 가능성을, 그리고 그것을 내가 꺼트리지 않고 거대한 불길로 만들어나가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감정을 맛볼 수 있게 될 가능성을.
나는 어둠 속에 파뭍혔던 형체가 이내 그 오밀조밀한 윤곽선을 뚜렷하게 하며 거침없이 전진해 오는 것을 보았다. 은근히 예리한 구석이 있는 콧날에서 부서지기 쉬운 꽃잎 같은 입술로 나의 시선은 날카롭게 꽂혔다. 나는 그 입술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인식한 나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적으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입술, 그저 입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느새 입술은 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있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무미건조한 접촉에 불과했다는 것보다, 그녀가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몸을 반대로 돌려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치도 부끄럽지 않았다. 만약 부끄러웠다면 그 이유는 내가 그런 무의미한 행위에서 무언가 찾아내려고 애썼다는 나약한 마음에 있었다. 그것에 찰나의 순간이라도 전적으로 기대려고 했던 마음은 나에게 싸늘한 모멸의 시선을 받아 그 그림자의 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사랑을 연기한다는 비정상성에서 사랑이라는 정상성을 찾고자 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기 짝이 없을까.
얼마 뒤 옆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고, 나는 등 밑이 끊임없이 불쾌하게 달라붙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무지 이 상태로는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테라스를 열고 다시 외부의 풍경을 마주하였다. 무시무시한 침묵만이 그곳에서 공허함을 끝없이 더해가고 있었다.
ㅇㅇ | 2021.05.03 03:31:51 | |
ㅇㅇ | 2021.05.03 03:32:52 | |
센터는시즈쿠 | 새벽에 읽어야징 | 2021.05.03 03:3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