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번역/창작 [반짝임] [SS] 이별을 위한 전주곡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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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u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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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8 08:19:15
소리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어떠한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소리를 아름다운 형태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자랑스러웠다. 연주할 때 잡생각을 하는 것은 원래는 스스로 금기시 하였던 것이지만, 현재는 그런 규칙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 때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참 빠르다고, 사쿠라우치 리코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감상하면서 생각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학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자신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우승과 3학년의 졸업, 그리고 폐교. 앞으로 얼마나 더 산다고 해도, 이 일들이 있었던 때는 자신에게 있어서 인생에서의 가장 의미가 큰 순간들로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체감은 아마도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3학년이 되고 다니던 학교가 바뀐 뒤에도 스쿨아이돌은 계속했지만, 그 전처럼 강렬하게 그것에 이끌려서 자신의 모든 신경을 쏟아 붓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한 번 우승하여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그런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이유이다. 물론 그것 자체의 재미는 있었지만, 다시금 최상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본래의 꿈인 피아노보다 더 우선시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스쿨 아이돌에 대한 어중간해진 태도가 그다지 부끄럽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아무도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단지 학창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일종의 도전이나 경험에 불과하다. 자신은 물론 그 경험을 아주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또 다시 그것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3학년이어도 항상 의지가 불타오르던 치카도, ‘스쿨 아이돌’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내가 피아노를 대놓고 우선시하여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옆쪽에서 드르륵 하고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의 빠르기이다.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아니면 좀 더 가까이서 듣고 싶은 걸까. 치던 곡을 차분하게 마저 연주하고 나도 베란다에 나갔다. 공기는 도쿄에 비하면 겨울임에도 상당히 따뜻한 편이라서, 얇은 옷을 입고 베란다에 나가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은 없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겨울 파자마를 입고, 좀 전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건지 머리가 완전히 풀어져 있는 소녀, 아니 여자가 있었다. 얼마 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람이기에 여자라고 칭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소녀 같은 분위기를 풍겨왔다.
“리코쨩의 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것 같아.”
“그래? 고마워.”
목표하는 예술대학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전에 막연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연습이 필요했었다. 2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칠 때는 주로 작곡을 위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시험에 요구되는 기본기는 자연스럽게 낮아져 있었다. 다시금 실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자주 연습을 빠질 때도, 모두들 그걸 묵인해 주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치카가 같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근처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같이 생활한다면 좀 덜 외롭고,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나가듯이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남아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 여관을 물려 받기도 어느샌가 결정한 모양이었다. 학문에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그녀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라면 언제든지 빛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졸업 후에도 아이돌, 적어도 그와 유사한 분야에 도전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던 적도 있지만,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학교와 사회는 다르다며 거절을 표했다.
“리코쨩은 대학교에 가면 애인 만들 거야?”
“아마 그렇지 않을까? 왜?”
“그러면 왜, 요우쨩의 고백은 거절한 거야? 솔직히 알아서 서로 해결할 줄 알았는데, 요우쨩이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도 쌓아두고 있다가 얼마 전에 나한테 말하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쪽한테 물어보는 수 밖에 없어.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난 예전부터 알고 있는걸. 나는 리코쨩한테 중요한 사연이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직접 가서 말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나한테는 털어 놓고 의지해 줘.”
이전에 분명 들어본 적 있는, 가능한 한 듣고 싶지 않았던 한 순간에 분위기를 뒤엎는 그런 싸늘함이다.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가, 말을 이으면서 다시금 부드러워지는, 그녀 특유의 억양이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작년 말의 고백을 자신도 마음이 분명히 있었지만 거절한 이유는 나와,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요우만이 알고 있었어야 했다. 이 사람이라면 알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그 후에 그녀가 할 말은, 분명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미안해. 나, 치카쨩이어도 말할 수 없어.”
“최소한 그럼 요우쨩한테는 말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대체 왜 요우쨩한테는 말 안하는 건데? 좀 있으면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 리코쨩도 알고 있잖아.”
“그 전에는 제대로 말할 거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 더는 꺼내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나는, 리코쨩이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라면, 분명 리코쨩은 해낼 수 있어.”
괜찮은 대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이곳을 떠나는 것은 자신이고 앞으로 더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될 것도 자신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그녀보다 더 어리석다고 느껴지는 걸까. 1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피아노 실력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춥다. 리코쨩도 들어가.”
그녀는 베란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곧 있으면 거의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쯤은, 자신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치카는 여기에, 나는 도쿄로, 그리고 요우는 바다로 향한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찾아오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과 그 이유를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니, 이 일은 늦기 전에 반드시 해두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신이라고 언제까지나 이 감정을 마음 속에 묵혀두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졸업하고도 이따금 만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때는 자신이든 그녀든, 서로를 만나는 것을 껄끄러워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는 미래가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후회를 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인간적인 소망에 사쿠라우치 리코는 이끌렸다.
적당한 장소를 고민하다가, 해 질녘의 뷰오 안에서 이야기 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이라면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에 꽤 적당한 분위기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아직도 그 사람과의 어떠한 분위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거부의 이유를 밝히기 위한다는 것이 만남의 명분임을 감안했을 때, 꽤 모순적인 발상이다. 새하얀 원피스를 걸치고 뷰오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늘하늘한 옷이지만 그다지 싸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공기는 따스하다고도, 선선하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그러한 상태였다. 습기는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온도는 말 그대로 미지근했다.
해가 저 수평선 끝자락에 걸려 주홍빛을 발산하기 시작했을 때, 뷰오의 끝자락에서 검은 계열의 옷을 입은 회색 머리의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건 마치 영화 속의 잘 연출 된 한 장면 같아서, 마음을 간질이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머리 속으로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일종의 부츠를 신고 있는 것인지, 투박하지만 듣기 좋은 발소리가 멈추고 자신의 옆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째서인지 눈을 마주할 자신이 나지 않아서, 시선을 돌려 주홍빛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리하였기 때문인지 상대방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다리를 꼬는 소리가 났다. 너무나도 어색하여서 빨리 태양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응, 더는 만날 수 없기 전에 말해 두고 싶어서.”
되새겨오던 생각을 끄집어 내려다가, 입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좀처럼 입을 벌릴 수 없었다. 마치 심문을 받는 충성스러운 포로처럼, 자신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분명 고심하다 다짐하고 이곳까지 왔는데 자신의 입은 그러한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은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이 이유가 상대방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라면, 자신은 그 천둥 뒤에 내릴 거센 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그냥 그대로 뭍어두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한 선택이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나는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그, 요우쨩은 아직도 날 좋아해? 연인으로서.”
“응.”
1년 전의 그녀라면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흐렸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분해서, 오히려 그런 점이 자신을 침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질문도 1년 전의 자신이었으면 절대로 꺼내지 못했을, 그런 질문이었지만 이런 말을 꺼낼 때의 마음의 느낌은 일상적인 대화와 고백 사이, 그러니까 학급에서의 발표 정도의 긴장감에 가까웠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만약 나를 계속해서 좋아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그저 친구로만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 요우쨩도 알잖아? 우리는 좀 있으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무의식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이끌었다. 누구라도 분명 그렇겠지만, 자신은 그 무의식의 영역을 통제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푸른 바다와 같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가냘픈, 그런 눈이다. 나는, 이제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거리를 두고 싶었는데. 어째서 너는 내가 한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 쫓아오는 것일까.
“응. 그게 다야.”
갑자기 해가 완전히 사라져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침묵을 말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뷰오의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빛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 길을 따라 단 한 발자국도 내밀 수 없었다. 자신의 이 감정을 만드는 것은 이 불빛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세계의 인지를 만드는 모든 불빛들, 최소한 이 뷰오의 불빛만이라도 꺼버리고 싶었다.
*
물기에 젖어 묵직해진 바다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자신에게 이 공기는 자신의 추억들의 배경을 넘어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이 공기, 익숙한 경사의 도로, 가게들과, 매일 만나지만 한번도 질린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경치. 그것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나는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꿈꾸는 항해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이 마음이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가 다가와서야 깨달았다. 아니, 어떤 일을 하고 싶던 간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순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했다. 단지 그러한 소중한 자신의 배경들 뿐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이 문제될 뿐이었다. 이따금 씩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마음 속의 끈적한 이물감을 제거해주지는 못하였다. 자신이 깨달아야지만 이 감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와타나베 요우는 막연히 이해하였지만, 그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에 닿을 수 있는지는 머리로든 감정으로든 조금의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약속한 뷰오에 도착할 때가 되자, 자신의 몸을 감싸는 붉은 빛에 어떠한 낭만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 감정이 단순히 황혼만이 이끄는 감정이면 맑은 기분이었을 텐데, 또 다른 이유가 이 감정을 이끈다는 것을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전에는 축복이었으나, 지금은 일종의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비슷한 감정인데,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다리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옷차림을 앞뒤로 살펴보고, 목을 가다듬은 뒤 무대 위에 올랐다.
주홍색으로 빛나는 하늘하늘한 흰 원피스, 그리고 와인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공기와 함께 가만히 정지해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시선이었다.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바깥의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분명히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마주보지는 않겠다는 느낌이다.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음 속의 이물감이 더 끈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이번에는 진실을 허락할 줄 알았는데. 말을 걸어보지 않고서도 그녀가 이번에도 진심을 털어놓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단순히 시선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쪽이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까, 나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유치한 발상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저 먼 곳에서 이글거리는 해가 아름답다. 눈이 살짝 찌푸려지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감상할만한 아름다움이라고 뜬금없이 생각했다. 조금 기다리다가 저쪽에서 먼저 말이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도 조급해져서 자신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 . .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그녀와 자신을 감싸는 것은 어둠과,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몇몇 불빛들 뿐이다. 이번에도 용기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었으면 분명 몇 번이고 되물었을텐데. 지금의 자신은 그럴만한 애정이 없다기 보다는, 단지 너무 지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되묻지 않는 것은, 그녀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억지로 되묻는다고 해서 진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내가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고, 너에게 그것을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진귀한 보물을 다루듯이 건내 주었던 몇 개월 전의 그 순간. 너는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좋아하지만 사귈 수 없다는 말을, 나의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정된 이별의 순간이 머지 않아 찾아온다는 것쯤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진심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만약 이별의 하루 전날에 그것을 깨우쳤다고 해도, 분명 자신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것이다. 오직 단 하루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그것을 확인하고 마주 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당연히 괴롭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일은 2년 전의 일 이후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의 작별을 고하고서 다시금 집으로 향했다. 꽤 어둑하기에, 가능한 한 같이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다지 그녀와 같이 있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속으로 조금 투덜거릴까 하다가 서늘한 밤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정화된다고 해야 할까.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바닷바람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떠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은 어떠한 언어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피부를 통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느낌을 줄 뿐이다. 그럼에도 바람은 분명히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했다.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던 찰나, 2년 전의 그 일의 장소가 이곳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분명 그때의 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미성숙한 질투를 표하고 있었고, 자신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은, 분명히 다름 아닌 그녀였다. 사고의 성숙함의 차이는 분명 그다지 존재하지 않을 때였는데도, 너는 분명히 내 마음과 향해야 할 길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이곳의 밤하늘에는 항상 아름다운 별들이 수놓아져 있다. 너무나도 맑은 공기 때문일 것이다. 한숨이라고 할 만한 그런 느낌으로 밤하늘을 향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조금 이해한 것 같다고, 너무나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어로 명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이해였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에 열쇠를 부드럽게 꽂아 넣었다.
*
꽤 커다란 강당에 수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다. 자신은 졸업장을 들고, 마지막이 될 교복의 착용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우라노호시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졸업식 참가는, 사람이 매우 적어서 그런지 상당히 각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자신이 졸업하는 것이지만, 마음에 무언가 슬픈 기운이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후배들은 나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듯 했다.
“리.. 리리. 나, 자주 찾아갈 테니까.”
“너도 이제 수험생이잖아? 그리고 나,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요시코쨩도 도쿄에 온다면 자주 만날 수 있을지도.”
졸업할 때가 되어도 리리라고 부르냐고 쏘아 붙이려다가, 울먹거리길래 그만두었다. 졸업을 해도 자주 자신을 찾아와 줄 후배가 있다는 것을, 속으로만 기뻐하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난 뒤에는 6명이서 마지막 모임을 가지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솔직히, 후배들하고만 함께 있는 것이라면 그다지 상관은 없었겠지만, 치카와 요우의 존재는 자신에게는 분명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길가의 나무들에는 자그마한 연초록빛 잎사귀가 조금 돋아나 있었다. 이제 곧 봄이고 새로운 시작이 찾아올 것이라고, 나무들은 온몸을 다해 외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에 도착하였다. 나는 다 같이 있을 만한 곳을 찾고자 했지만, 요시코는 나와 따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여전히 조금 막무가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런 곳이 이 주변에 있었나 싶은 느낌의 카페였다. 전체적인 조명이나 인테리어등은 꽤 어두웠지만 술을 팔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빈티지한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분위기를 예전이나 지금이나 꽤 즐기는 듯 했다. 금방 얼그레이 차 한잔과 상당히 달아 보이는 딸기 쉐이크가 나왔다. 그녀는 음료 같은 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은 듯, 내가 조심스럽게 홍차를 홀짝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졸업식 날에도 나를 따로 이렇게 데려올 정도면 꽤 중요한 이야기인가 봐.”
“중요한 이야기, 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리리를 독점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달까.”
아무래도 이 후배는 자신을 생각보다 애정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전부터 어디까지나 친한 후배이긴 하다만,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과 생각들을 품고 있는지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친한 선배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면, 생각보다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리리는 말이야, 내가 졸업하고 뭘 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 아직 나는 졸업하려면 1년이나 남았지만, 남은 1년을 어른이 됐을 때를 위해 최선을 다 할 생각이거든. 그런데 막상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요시코쨩이라면, 굳이 대학에 간다기 보다는 다른 쪽 일을 하는 게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친한 후배의 진로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1년 간 자신이 무척이나 여유가 없었던 탓을 댈 수도 있겠지만, 그녀라면 막연히 어느 순간에는 길을 찾을 것이라고 별다른 고민 없이 결론 내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전처럼 자신의 이름을 정정해오지 않았다.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자면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지 반년쯤은 된 것 같은데, 그녀가 분명히 그것에 관해서 조금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예를 들면 방송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나는 뭐랄까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의, 잘은 모르겠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걸 하고 싶어.”
“미안, 솔직히 나는 요시코쨩이 졸업 후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굳이 변명을 대자면, 너무 바빴다고나 할까.”
“아니야. 내 진로인데. 어디까지나 내가 결정해야지. 그나저나 리리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어?”
“도쿄에서 혼자 생활하는 거? 응. 그런 건 당연한 거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리리, 요우쨩 좋아 하는 거 아니야? 곧 있으면 거의 못 만날 텐데. 괜찮아?”
요우가 요시코에게 까지도 말했나 싶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기에는 상당히 평온한 느낌이라서 단지 그녀 스스로의 추측으로 말미암은 질문이라고 받아들였다. 아마도 요우라면, 그런 일은 치카 정도 되는 사이가 아니면 분명히 좀처럼 말하지 않을 사람이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대놓고 티가 나는걸? 1학년끼리 있을 때도 굳이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를 빼고도 누군가는 눈치채지 않았을까?”
“음, 아까의 괜찮냐는 말에 대답하자면, 당연히 괜찮지는 않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만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니까, 마음을 전해 봤자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더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쉐이크를 크게 들이키는 행위를 멈추었다. 얼떨결에 속마음을 조금 보여버렸지만, 그녀는 그다지 그것에 깊은 의미를 둔 반응을 표한다기보다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 표정이나 눈빛이 어딘가 연구원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한 상황은 아니네. 내가 리리였어도 한참 고민했을려나. 내가 하면 그다지 믿음직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덧붙이자면 좀 더 솔직해져도 되지 않아? 그녀라면 리리가 어떤 말을 해도 잘 받아들여 줄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지, 난 아직 잘 모르겠어. 과연 내가 이걸 말하고 차라리 말하지 말 걸 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
후배 앞이라고 해서 강한 척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자신에겐 가장 중요한 고민이니까, 누구든지 적절한 격려나 조언을 해줄 가능성이 있다면 불필요한 폼을 잡을 필요는 없다. 아니, 답이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후회밖에는 남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전한다면, 좀 더 괜찮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였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적어도 갓 성년이 된 사람에게는 마땅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고민 외에도 자신의 예정된 대학 생활에 대한 궁금증 등을 표해왔으나, 자신은 별다른 해줄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에 조금 솔직해지고 싶어하는, 그런 근질거림이 존재할 뿐이었다.
낮 동안의 시내에서의 시간 이후에는 치카의 여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저녁으로는 다 같이 전골 같은 음식을 먹고 잠깐 바닷바람을 쐬면서, 아니면 조금 일찍 여관에 이불을 펴두고서, 어디든 간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이야기를 할 장소는 자신이 정하고 싶었다. 누가 정해서 어디에서 이야기를 하건 딱히 신경 쓸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적어도 나는 좀 더 선호하는 장소가 있었다.
대부분은 아직 식사가 한창일 와중,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치고 ‘먼저 바다에 나가 있을게’ 라고 말해 두고는 먼저 여관을 나섰다. 밖에 나가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말해두면 분명 나와줄 것이다.
바깥의 공기는 조금 선선한 정도라서, 옷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나온 것이었지만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어둑어둑한 도로다. 그러나 밤 중에 이곳에 나오는 것이 가끔 있는 일은 아니니까, 무섭다기보다는 어딘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 산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끝없는 칠흑으로 가득 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를 찬 것도 아니고, 핸드폰을 꺼낸 것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10분 쯤 지나서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쿠로사와 루비가 ‘그래도 치카쨩은 아직 좀 더 볼 수 있겠네’ 라고 말하는 것이 얼핏 들렸다.
“리리, 뭐하러 혼자 먼저 나가 있었어?”
“그냥 좀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자신과 동갑의 두 소꿉친구는, 둘이서 짠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자신에게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보통 대화의 주제를 꺼내는 것은 후배들이었고 졸업생들은 그다지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았다. 여러 후배들과 대화가 오가지는 하지만, 졸업생들끼리 서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마 요시코든 하나마루든 루비든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굳이 그것을 언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방관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이 끼어들어봤자 해결되지 않을만한 이야기라고 무언으로 정했다는 느낌이다.
밤바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나는 원래도 그다지 떠들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밤바다의 자그마한 파도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침착하게 만들어 고요함을 이끄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부터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리라.
루비가 졸리니까 먼저 잔다는 소리를 해서 하나마루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다. 루비니까, 눈치를 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피곤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시코는 낮의 대화로 인해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의도되지 않은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듯이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춥다는 핑계를 대고 들어갔다. 바람이 살짝 부니까, 조금 썰렁하기는 했다.
“역시 밤바다는 좋네.”
등 뒤쪽의 조금 위쪽에서 치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의 상냥하고 경쾌한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나도, 요우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답답하네. 마지막까지 이러기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집에서 잘 생각은 하지마. 먼저 들어갈게.”
“치카쨩?”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결국 또 다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진심을 보이는 것이 나의 운명인가 싶었다. 급하게 일어서 몸을 돌렸더니, 얼굴이 꽤 가까운 상태였다. 내 바로 뒤에 서 있었구나.
“결국은 우리 둘만 남아버렸네.”
“응, 그러게.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녀는 조금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분위기를, 그녀든 자신이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 자신도 꽤 풀어진 얼굴일 것이다. 요즈음에 서로 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분명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리코쨩. 2년 전의 일, 기억하고 있어?”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는데.”
“리코쨩이 피아노 콩쿨에 나가야 해서 라이브를 빠졌을 때 말이야.”
“잊어버릴 리가.”
“그때는 리코쨩이 내가 나아가도록 도와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야. 리코쨩이 어떤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든, 나는 그게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마치 잘 짜여진 퍼즐 조각처럼, 우리의 감정과 이해는 어느 순간 딱 맞아 떨어졌다. 마치 그게 정해진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이 해야하는 것은, 정해진 퍼즐 조각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뿐이다. 이미 예정된 일이라고 생각하면 주저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요우쨩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지금 갖고 있어?”
“아니, 지금부터 만들어야 해. 최소한 떠나기 전에는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야.”
“뭐랄까. 나는 감이 잘... 알 것 같기도 하고.”
“만드는 거, 도와줄래?”
“나, 음악 같은 건 잘 모르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옆에만 있어 줘도 충분해.”
“그래? 그럼 언제가 좋을까.”
“지금은 어때?”
“밤인데 괜찮은 거야?”
“오늘은 마침 집이 비었고, 주변에 사람이 그다지 모여 살지는 않는걸. 치카네한테는 들리겠지만, 별로 상관없지 않아?”
“그럼 괜찮을려나.”
집에는 아무도 없지만, ‘다녀왔습니다’ 라고 하며 들어갔다. 요우는 분명 내 집에 한 번 정도 온 적이 있었지만, 오늘의 방문은 꽤 비밀스러운 향기를 풍겼다.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고 바로 피아노에 앉아서 뚜껑을 살포시 열었다. 원래는 작곡을 할 때 악보를 두는 곳에 오선지와 펜을 올려두지만,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머리 안의 이 멜로디가 날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아름다운 선율이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한번 확인하고 연주할까 했더니 그녀의 시선은 나에게 향해있지 않았다. 벽 쪽에 있는 책상 위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순간 자신이 실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상 위를 치우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었다. 그녀는 나의 책상 위에 놓여진 아직 새하얀 편지지와 볼펜, 편지 봉투를 분명하게 인지하였다. 이러면 자신의 의도와는 조금 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들켰다는 사실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 마음 속의 멜로디를 조금씩 현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곡의 분위기보다는 막상 치면서 느껴보니 조금 밝지만 절제된 느낌이다. 만약 빠르기를 붙인다면 ‘매우 느리게’가 될 것이다. 목 부분에 느껴지는 어떠한 자극에, 무심코 연주를 멈추고 말았다.
“요우쨩.”
“고마워.”
따뜻하다. 자신의 목을 감싼 팔이, 그녀의 말이, 자신의 감정이. 한 마디밖에는 되지 않는 너무나도 짧은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지 그 말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려서, 이별이라던가 꿈이라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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