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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SS번역] HANABI 제 2장 (2)
글쓴이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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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all.dcinside.com/sunshine/3791718
  • 2020-12-28 08: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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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머리, 어떻게 된거야?"


올 겨울은 성큼성큼 다가왔고, 아직 12월이 되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다채로운 코트로 가득했다. 도심 카페에서 만난 선배는 검은색 트렌치 코트에 붉은 머플러를 두르고, 속에는 회색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빈틈 없는 사람. 그 인상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연극부에 들어간 날과 똑같았다. 3년만에 재회한 그녀는 역시 머리카락에 대한 것을 지적해왔다. 긴 머리카락을 소중히 해왔던 것은 맞지만, 오사카 시즈쿠를 이야기하는 말이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하나뿐이라면 무대 배우로서 슬픈 일이었다.


"조금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서"


시즈쿠는 손끝으로 머리를 만졌다. 햄스터만한 작은 테일을 노란 리본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조금은 자라긴 했어도 여전히 조금이었다. 예전의 길이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이 길이가 홀가분하고 지내기 편해서 기르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즈쿠보다도 훨씬 짧은 흑발을 한 선배는 시즈쿠의 눈을, 눈 속에 있는 진실을 응시해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것을 간파당해 왔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생활 수준에서 의지할만한 상대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녀였다.


"이미지? 이미지라"

"죄송해요. 옛 동료에게 잘렸어요"


솔직하지만 간결하게 설명하자, 선배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시즈쿠를 배려해 줬다.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시며 천천히 여기까지 도달한 과정을 캐물으려다가도 시즈쿠가 대답하기 싫은 기색을 내비치면 이해하고 조심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다만, 그런 세심한 배려가 상냥함이 아닌 다른 계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즈쿠는 그녀에 대해 방심할 수 없었다.


"부장은 지금 뭘 하고 계시나요?"

"부장, 인가. '부장'은 그럭저럭 큰 회사라도 몇 명 없지. 사회를 조금 알아서 그런걸 알아버리면, 부장이라 불리는 것만으로도 뭔가 황송하네"

"죄송해요"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예전부터 너무 사과를 많이 해"


그녀는 시즈쿠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의 연극 부장이었다. 물론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동아리 안에서 지내고 있던 1년간 줄곧 다른 부원과 똑같이 '부장'이라고 불러왔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시즈쿠만이 그녀로부터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라고 허락받았다. 그러나, 시즈쿠는 본능적으로 불온한 것을 감지하고 한번도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 정도만 가지고 의지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도 빠르게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야만 했어서 겁쟁이로는 있을 수 없었다.


"연하장으로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만났으니까 직접 이야기할게. 출판사에서 내정되어 10월에 내정식을 마쳤긴 한데, 학점이 갖춰져 있어 시간이 있다면 인턴십이 아니라 연수 형태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받아서 잡지의 편집을 돕고 있어. 지면의 레이아웃을 생각하거나 취재를 돕거나 하면서, 간단히 말하면 잡일이지만 여러가지 경험을 하고 있어. 대학은 졸업논문 참석이나 세미나로 얼굴을 내미는 정도야"


추천으로 입학한 J대 문학부에 다니는 선배는 고등학교 때처럼 여유가 있었다. 능력의 7할 정도만으로도 인생을 완수해버릴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마실 것이 없어지자, 당연한 듯이 한턱 쏜 선배를 따라 시즈쿠는 새로운 맨션에 도착했다. 엘레베이터로 5층까지 올라가 1LDK의 방에 안내되었다. 최근까지 살고 있던 후우타의 방과 정반대로 필요한 것들만 적절히 밸런스 좋게 배치되어 있어 거주성과 기능성에 특화된 듯한 방이었다.


"가을부터 살고 있어. 물건이 적으니까 수납을 사용해도 돼"

"감사합니다. 이 방, 얼마나 하나요?"

"10만 정도였나.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님이 지불해 주셔. 졸업하고 나면 조금 힘들지만 그다지 취미도 없고, 방은 역시 넓고 쾌적한게 좋으니까"


침실에 큰 옷장이 있기 때문에 시즈쿠는 그 한 구석에 짐을 두기로 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캐리어 가방과 보스턴 백이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정리업자를 부를 필요도 없이 쉽게 이사했다. 후우타의 방에서 쫓겨난 계기는, 그에게 갑자기 고등학생 연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개인 전람회에 와준 여자아이인듯 하다. 25살이 17살과 교제하는 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방에 부르고 싶으니까 새로 살 곳을 찾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받아 버리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중간한 시기에 좋은 물건도 발견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의 주소록에서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은 것이었다.


선배는 어지간한 아가씨였던 후배가 살 곳조차 잃어버렸다는 것에 놀라워 했지만, 룸쉐어를 하는 것은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물론 그 흔쾌한 동의가 선의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시즈쿠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내면 되나요?"

"집세 얘기야? 애초에 부모님이 내셨으니까 받을 생각은 없는데?"

"명목은 뭐든 좋으니까 낼게요. 아르바이트 구할테니까"

"그럼, 생활비 명목으로 5000엔이네"


더 이상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아주 적은 액수로 결정해 버렸다. 선배의 방은 전에 살던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극단의 연습실은 다닐 수 있지만 카페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빠르게 주소가 정해지지 않은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시즈쿠는 돈을 모을 필요가 있었고, 한없이 식객에 가까운 위치로서 5000엔으로 끝나는 것은 솔직히 고마웠다. 짐을 풀고 재회를 반가워 하는 사이에 밤이 찾아와, 가벼운 저녁을 먹고난 뒤 새삼스레 물었다.


"이불, 없네요"

"세미더블이니까 옆에서 자도 상관없어"


시즈쿠의 형편을 무시하고 선배는 속마음을 떠보듯이 웃었다. 2인용 소파에 시즈쿠를 남기고 욕조에 물을 채우러 목욕탕에 갔다. 돌아왔을 때에는 눈동자에서 냉정함이 적잖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즈쿠의 옆에 앉아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에 손가락을 꿰고, 뺨에 손가락을 뻗었다. 그대로 힘을 가해 서로 마주보는 자세가 되게 했다.


"내 방에 시즈쿠가 있다니. 무척이나 신선해"

"그런가요?"

"살이 많이 빠졌네. 볼살 통통했었는데"

"생활이 불규칙해지면 먹을 생각이 잘 안나서"


선배는 아쉬운 듯 하더니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한 5000엔의 조건, 역시 없던 일로 하자. 일단 연내에는 집세 내지 않아도 괜찮고, 아르바이트도 찾지 않아도 괜찮아. 연초에 무대가 있다면 극단의 연극 생각만 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잖아? 하나하나의 본 공연이 스텝이라고 한다면, 개인 연습도 제대로 쌓아서 만반의 상태로 임해야 해"

"그런건 너무 죄송해요. 낼게요"

"고집 불통이야. 지금부터 아르바이트를 찾아 면접을 보고 새로운 일을 외워서 동료들 틈에 녹아들고, 그런 걸 하면서 무대에 집중할 수 있어? 자존심이라든가 상식이 방해를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애완 고양이라도 됐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후배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선배는 쿡쿡 하고 웃었다. 마주보는 시즈쿠의 시선을 붙잡은 채, 모은 손끝으로 턱의 윤곽을 천천히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귀를 만졌다. 그리고 정수리에 손바닥을 놓고 자비를 베풀듯이 쓰다듬었다.


"그럼 새롭게 이런 조건으로 하자. 돈은 필요 없으니까, 내가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는거야. 그것 뿐이라구? 그것만으로 좋아. '캣츠'의 배우처럼 움직임부터 모든 것까지 고양이가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간단하잖아?"

"그런 건......"


당황스러움과 굴욕이 단숨에 가슴부터 얼굴까지 수위를 올렸다. 감정적이 되기 시작해서, 시즈쿠는 저항하고 싶은 의지를 억눌렀다. 부장은, 선배는, 이 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쓸데없는 것을 생략하고 필요한 것 밖에 남기지 않는다. 말을 듣지 않는 식객 같은 건 아무리 고등학교 시절에 마음에 들어 했던 후배라고 해도 싹둑 잘라내 버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연말에 기댈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이미 우에하라 아유무의 습격으로 머리를 잘린 시점에서 자립해 착실히 힘내왔던 오사카 시즈쿠는 소멸한 것이다. 나머지는 단지, 미움받는 배역도 궂은 배역도, 고양이도 개도 연기해 매달려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못하겠어?"

"할게요"


선배의 손바닥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시즈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살 곳조차 없는 후배를 바보 취급하고 싶은 것도 경멸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총애하던 후배를 순수할 정도의 호기심과 욕구로  '기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냥"

"귀여워. 정말로"


선배는 빙긋 웃으며 코 끝을 마주대고, 그 다음에 입술을 포개왔다. 선배가 졸업할 때 거의 도둑맞듯이 키스를 당했기 때문에 경험치는 늘어나지 않았다. 그 날의 선배는 시즈쿠의 첫 키스를 빼앗은 기분이었지만, 당시의 시즈쿠는 이미 타카사키 유우와 농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해 버렸구나'란 생각을 할 뿐이고 키스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


"피곤한 것 같으니 먼저 씻어"

"선배의 방이니까 선배가 먼저 들어가세요"

"딱딱하네. 그럼 같이 들어갈지 먼저 들어갈지, 두 가지 중에 선택하라면?"

"그러면 먼저 들어가게 해주세요"


놀리던 선배는 깔깔 웃으며 "어서"라고 반복했다. 보스턴 백에서 속옷과 스웨트를 꺼내 도망치듯이 욕실로 향했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돈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선배의 지적대로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돼 연습에 소홀해지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애완 고양이를 연기하는 것으로 연극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기회라고 결론 짓기로 했다. 자존심이든 뭐든 딱 잘라내야만 한다. 독이라 해도 이용해야만 한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시즈쿠는 되뇌였다.



후우타의 방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 밤의 시즈쿠는 꽤나 깊게 잠들었다. 시즈쿠의 표정에 상당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지, 선배는 한 침대를 쓰며 '잘 자'라고 말했을 뿐 손을 대지조차 않았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라고 해도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시즈쿠가 위아래로 붙은 눈꺼풀을 떼자 선배의 시선이 있었다. 겉모습을 꾸미듯이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입을 움직이자, 입을 막듯이 키스를 받았다. 호기심과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있는 만큼 관계가 얕은 남자보다도 훨씬 탐욕스러웠다.


"영원히 잠들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잠든 얼굴이었어"

"너무 많이 자서. 죄송해요"

"왜 사과하는거야? 깨어있는 네가 필요하면 아무리 깊게 자고 있어도 깨울거야. 오늘은 대학도 일도 없으니까 늦잠 자도 괜찮아. 시즈쿠는?"

"저녁부터 극단의 연습실에 가는데요......"


선배가 날카로운 눈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시즈쿠의 머리에 놓고 머리카락의 매끄러움을 핥으며 맛보는 듯한 손놀림으로 쓰다듬었다. 생각나서 "냥"이라고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냈다. 고등학교 시절, 후배들에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은 선배의 얼굴이 풀어졌다. 세미더블의 이불에 싸인 채 덮쳐졌다. 선배에게 깔리면, 남자에게 깔리는 것과는 달랐다——마음을 지배받는 감각이 있었다. 후우타조차 5일 정도는 참았는데 선배는 시즈쿠의 피로가 풀리자마자 욕망을 드러냈다. 색기 없는 스웨트를 벗기자, 선배는 "하얀 속옷, 시즈쿠랑 어울려"라고 속삭이며 짙은 눈썹을 온화하게 했다.


"고백하자면 말야, 고등학교 때 정말로 이렇게 하고 싶었어"

"저, 전혀 젖지 않아서 재미 없을텐데요?"


'나름대로 경험이 있다'는 의미를 담아 정보를 제공했지만, 선배의 성욕이나 호기심을 흔들지는 못했다. 부장은 솜씨 좋게 시즈쿠를 벗기곤, 시즈쿠와 침대를 같이 썼던 남자들과 비슷한 봉사를 해 왔다. 그것을 쓸데없는 발버둥이라고 부르는 것은 꽤나 냉혹했다. 하지만, 상대가 애써 시즈쿠를 느끼게 하려고 할 수록, 시즈쿠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결함'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는 시즈쿠를 발가벗긴 채 다리를 벌리고 자신이 고양이 같은 포즈가 되어 혀로 애무해 주었지만 무의미했다. 기분 나쁘다든가 불쾌하다든가 하는 나쁜 감상은 아니었지만, 성욕의 스위치가 부서진 듯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이네"

"죄송해요"

"체질이니까 사과할 일은 아니야. 단순히 내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나는 시즈쿠한테 흥분했으니까, 싫지 않다면 나를 느끼게 해줄래?"


시즈쿠는 "네"라고 대답하고 선배를 벗겼다. 손가락과 혀를 사용해 조심스레 자극을 가하자 선배는 늘 휘감고 다니던 냉정함을 잃고 흐트러졌다. 시즈쿠는 고양이가 된 것처럼 선배의 가랑이를 할짝할짝 계속 핥았다. 선배는 가끔 시즈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고, 시즈쿠는 그 때마다 얼굴을 들어 "냥"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슬슬 아침을 먹을까"


1시간 반 정도 이불에서 뜸을 들이고 옷을 입었다. 시즈쿠는 잠옷인 스웨트에서 실내복인 파카로 바꾸고 청바지를 입었다. 선배는 세탁기를 돌리고 시즈쿠와 자신의 브런치를 준비했다. 빵과 야채 샐러드와 수프. 음악을 들으며 그것들을 먹어 치우고, 설거지 정도는 할게요라고 말한 시즈쿠를 소파에 앉힌 뒤 선배는 묵묵히 설거지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다 된 빨래를 베란다에서 널었다. 시즈쿠의 속옷도 널었다. 그리고, 자기 전부터 정해둔 듯이 청소를 시작했다. 어쩌면 섹스 시간도 예정에 잡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시즈쿠는 생각했다.


"뭔가 돕게 해주세요"

"꼼꼼한 편이라 집안일은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야"


푹신푹신한 먼지떨이로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기를 솜씨 좋게 돌리곤, 선배는 이야기 초반의 신데렐라처럼 걸레질을 시작했다. 세면대에서 걸레를 짜고는 바닥에 엎드려 남김없이 바닥이나 가구를 닦아냈다. 욕실이나 화장실, 주방도 비슷하게 청소를 했기 때문에 선배가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 소파에 걸터 앉은 것은 정오에 가까워서였다.


"재밌어?"

"이렇게 섬세한 청소, 처음 봤어요"

"오늘은 조금 대충했어. 침실에서 대본이라도 읽고 있으면 좋았는데"

"선배를 일하게 두고 그럴 순 없어요"

"나는 내 방을 청소하고 있었을 뿐이야. 만약 내가 '일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시즈쿠의 일은 배우니까 연습을 하고 있어도 문제는 없잖아?"


논리정연한 말을 들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들라고 지시받고, 커피 맛이 나는 키스를 받았다. 그러더니 선배는 베란다로 나가, 문지방에 앉아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더니 꽤나 가느다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짓으로 불렀기에 옆에 앉았다. 극단의 회식에서는 여자들도 몇 명인가 담배를 피는 사람이 있었기에 혐오감은 없었다.


"담배 피우세요?"

"휴일의 조용한 아침 한 때 뿐이야. 시즈쿠도 피울래?"


목에 나쁘다며 거절하자, 선배는 "여전히 성실하네"라며 만족한 듯 했다. 시즈쿠는 성실한 듯 한데, 세계는 성실한 자신에 대해 그다지 보답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맛이 나는 키스 후 머리를 쓰다듬어져 "냥"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 인간적 고뇌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고,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구속할 생각은 없으니까 저녁까지 자유시간이야"

"노래방에 가서 연습하고 올게요"

"방에서 하면 되잖아. 밤중에는 곤란하지만"


후우타의 방에 있을 때처럼 노래방에 가려고 하자 선배는 이상한 듯한 얼굴을 하며 만류했다. 후우타 이야기를 조금 하자 선배는 가볍게 웃었다. 정체된 사이클 속에서 '아티스트'를 하고 있는 그를 얕보는 듯 했다. 어느쪽인지 말하자면 후우타 쪽에 가까운 시즈쿠는 굴욕을 느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초에 본 공연을 맞이하는 연극의 대본을 꺼내자 부장이었던 선배는 흥미를 보여 왔다.


"어떤 책? 140자 이내로 설명해줘"

"'혼노지의 변' 전날로 타임 슬립한 여자아이의 이야기에요"

"너무 짧다"


선배는 웃으며 시즈쿠의 손에서 대본을 빼냈다. 포스트잇과 글로 가득찬 대본을 그리운 듯 바라보다가 소파에 기대어 완전히 돌변하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가 있는 편이 좋지"라며 함께 연습하자고 제안했다. 시즈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서서 낮은 테이블의 가장자리로 이동하자, 다다미 10장* 정도의 거실은 충분히 넓은 연습실이 됐다. 시즈쿠는 대사를 외우고 있었기에 대본을 선배에게 건넸다.


* 약 5평 (16 제곱미터)


'무슨 소리야!? 저기, 우리들끼리 역사를 바꾸자고, 란군들을 돕자고 결정했지!? 어째서 불타고 있어!? 어째서 전부 죽어버린거야!? 사키!? 너 혹시 멋대로 뭔가 한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방관자로 끝나버리잖아!? 알고 있지!? 웃기지마! 죽고 싶어!? 아니 죽여버리겠어! 이런 큰 사건 다음날에 이상한 모습을 한 여자가 한 명쯤 죽어있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시즈쿠의 목소리가 멈췄다. 멈춰졌다. 선배는 대본에서 시선을 뗐다. 아름답고 태연한 얼굴로 "사키의 차례야"라고, 고등학교 시절처럼 시즈쿠를 연기하는 배역명으로 불렀다.


"선배는, 부장은 대학에서 전혀 연기한 적이 없나요?"

"연극? 한 적 없는데? 나, 라크로스 부라서"


실내복인데, 자기 방의 거실인데, 단 몇 줄의 대사인데, 이쪽은 졸업하고 나서도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데, 한순간에 대학 시절 아무것도 연습하지 않은 인간에게 압도당했다. 그 충격은 시즈쿠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 질투는 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즈쿠는 선배의 재능을 아쉬워 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기로 했다.


"부장은 왜 연극을 그만뒀나요?"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모든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서야. 진부한 표현을 하자면 '사회라는 무대에 서기 위한 무대 담력을 기르고 있었다'라는 걸까나. 마음이 맞는 것도 아닌 동료들과 협력하는 것, 입에 담아야 할 대사를 외워 적절한 장면에서 순조롭게 말하는 것, 연극의 분위기에 맞춰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 생판 타인인 관객에게 자신의 '일'을 선물하는 것. 그것들이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다른 걸 하려고 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어째서 라크로스 같은 걸......"

"체육계를 경험해보면 취업에서 다소 유리한 것. 거의 모두가 초보자 스타트니까 역량 차이가 적은 것.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기쁨. 이상 3개네. 실제로 시작해보니 기대보다 훨씬 즐거웠고, 뭐, 의외성이야말로 인생의 매력이지만"


"그런가요......"

"연극을 인생에 끌어다 쓰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너랑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것을 간파당하고 있었다. 시즈쿠는 졸업 후 선택의 잘못을 차갑게 지적받은 기분이 들어 분노와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순간 울컥할 뻔 했다. 우에하라 아유무에게 습격당한 후처럼 호흡이 가빠져서 지금의 감정인 채로 선배를 보지 않기 위해 카펫을 노려보았다. 선배는 대본을 소파에 내려놓고 다가왔다. 한 손을 시즈쿠의 어깨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시즈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거칠게 날뛰던 어두운 감정을 가라앉히듯이 쓰다듬었다.


"냥"

"착하지. 오늘은 게으름 피울까?"


고양이가 되어 울었더니 폭풍같은 격정이 돌연 잠잠해졌다. 잔잔해지자 아무래도 좋아졌다. 다시 키스 받았다. 시즈쿠의 감정이 변덕스러운 고양이처럼 오르내리면 선배는 그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시즈쿠는 "냥"하고 울었다. 겨울의 햇살이 충분히 비치는 카펫에 둘이서 누워, 그대로 1시간 정도 고양이가 되어 키스를 계속했다.



'미안 시즈쿠. 오늘은 2차를 우리 집에서 하게 됐어'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이었다. 12월이었으니까 해는 진작에 떨어져 어두워져 있었다. 시즈쿠는 극단의 연습실에서 본 공연을 위한 라스트 스퍼트를 마친 직후였다. 선배는 원래 직장 회식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없는 멤버들끼리 실컷 마시는 이벤트인 듯 했고, 연수하는 입장이니까 거절할 수 없다고 선배는 어쩔 수 없는 듯 이야기했지만, 참가 멤버 중에 선배가 '취향'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시즈쿠는 과거에 나눴던 회화로부터 추측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최적해를 고르는 것 뿐이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후배가 살고 있는 방에 직장의 멤버를 밀려들게 하는 사태 정도는 간단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오늘 밤만 다른데서 묵고 와주었으면 해. 본가도 괜찮고, 본가에 돌아가는게 싫다면 비즈니스 호텔도 괜찮아. 나중에 낼 테니까 신용카드로 계산해 둬'


연습실 근처 역의 개찰구에서 그 문자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신용카드 같은건 갖고 있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18살에 부모와 싸우고 뛰쳐 나왔으니까 신용카드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한파가 예정대로 도착해 있어 온 동네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시즈쿠도 베이지색 더플 코트에 하얀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외톨이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면 방금 전까지 극단의 멤버와 나눴었지만, 오늘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 사람은 역시 없는 듯 했다.


(누가 재워주지 않으려나)


본가에 돌아간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어서, 시즈쿠는 방금전까지 연습을 같이 했던 멤버를 만나볼까 하고 생각했다. 비교적 사이 좋은 두 사람이 '오늘은 외톨이 크리스마스인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연인과 보낼 예정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실제로 문자를 해보자 예정이 있다며 싱겁게 거절당해, 여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낙담했다. 남자에게 재워달라 해도 괜찮지만, 괜히 의식해서 본 공연 전에 예민해 지는건 싫었다.


시즈쿠는 마을을 떠나 도심에서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금요일 밤의 불행인지,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호텔은 싱글이라도 1만엔 가까이 했다. 좀 더 제대로 찾아야만 한다고 초조해졌을 때, 시즈쿠의 의식은 이브의 혼잡함에 어그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오사카 시즈쿠'를 발견했다. 시즈쿠는 스마트폰을 닫아버리고 술 대신 외로움에 취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송으로 가득했지만, 그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 슬픔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화점의 쇼 윈도에는 고급 브랜드의 가방이나 옷이 디스플레이 되어 여배우처럼 빛을 받고 있었다. 시즈쿠는 멈춰서서 그걸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즈쿠를 비추는 빛은 없고, 고등학교 때부터 사용하고 있는 지갑에는 3000엔 정도 들어 있었다. 내일이 되면 월급이 들어오지만 오늘 밤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포장도로의 벤치에 앉아 입김을 토했다. 점심을 먹고서 계속 연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뭔가 먹어야 한단 생각에 일어서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들떠있는 군중에게 기력을 빼앗겼다. 눈이 내릴 것 같은 차가운 밤이었다. 시즈쿠는 더플 후드를 뒤집어 쓰고 얼어붙을 듯한 귀나 뺨을 뎁히기로 했다. 음악과 세계가 조금 멀어졌다. 백화점에 들어간다면 따뜻해질 수 있을텐데 오사카 시즈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차가운 하늘 아래, 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아, 성냥의 불이 도움이 될 지도 몰라. 여자아이는 얼어붙은 손끝으로 성냥을 꺼냈습니다. 슉하고 긋자 성냥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무척이나 신기한 불이었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불이었습니다. 마치 커다란 난로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건 눈 앞에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다리와 뚜껑이 달린 난로가 있던 것입니다! 여자아이는 손을 뻗어 따뜻해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성냥의 불은 꺼지고, 눈 앞에는 타다 남은 흔적만 있던 것입니다"


시즈쿠는 눈을 감고, 어릴 적 울면서 읽었던 이야기를 엮었다. 누구든지 망설임 없이 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할 장면인데도 시즈쿠는 '오늘만큼 여자 아이의 기분을 이해할 때가 없었어'라고, 자신은 희한한 무대에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상상 속에서 성냥을 계속 그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린 시즈쿠는 울었지만, 자신이 여자아이가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저 희망과 절망 같은 것들이 빚어내는 빛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시즈쿠가 마침내 남은 성냥을 전부 태우려 할 때, 코트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성대한 음을 울리며 시즈쿠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시즈코, 살아있어?'


확인하지도 않고 귀에 대자,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카스 카스미의 평소와 같은 순수하고 밝은 목소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문인지 유난히 활기차고 귀에 거슬리게 울렸다. 그게 현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있는 장소는 어디인걸까 하고 자문해 봤다. 나카스 카스미가 있는 장소와 자신이 있는 장소가 같은 대지에 있는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엄청 갑작스럽긴 해도 말야, 지금부터 서클의 크리스마스 파티 가지 않을래? 오늘 여자애중에 결원이 생겨서 말야, 딱히 선물 같은거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안 가"


망설임 없이 거부했다. 서클. 파티. 선물. 의미 불명의 단어는 고막에서 튕겨나갔다. 평소라면 미래를 향해 상상력이 작용했을 텐데, 그것마저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면 즐거울지, 이런 모습으로 가면 바보 취급 당하지 않을지, 그런 어려운 것을 마음에 그리는 것 보다 그저 춥고 차가워서 움직이는 것 조차 귀찮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웅크렸다. 그런데도 통화를 끝내지는 않았다.


'시즈코, 어디 있는거야? 밖?'

"어디일까? 밖일지도?"


카스미의 목소리가 미심쩍다는 듯 불안해졌다. '안 가'라고 대답하면 다른 곳에 연락하려고 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걱정하는 듯한 울림을 내며 질문을 계속해 왔다.


'시즈코, 저기, 지금 뭐 하고 있어?'

"성냥팔이 소녀"

'시즈코!? 잠깐!? 시즈코!?'

"내가 소중하다면 둘이서 파티하자?"


어째서? 라고 물어와서, 설정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다. 소중하다고 얘기했으니까,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유 같은건 상관 없이 달려와야만 한다고 거만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카스미의 자기 자랑에 자주 어울려 줬으니까, 가끔은 자신 쪽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마저 용서해주지 않는 절친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애초에, 절친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있는 곳만 대충 전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코트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 집에 있었을 거란 확신은 없지만, 카스미의 집에서 여기까지 1시간 정도였다. 1시간 안에 카스미가 오지 않는다면, 누구든 좋으니까 처음 말을 걸어준 인간을 따라가기로 했다. 이게 이야기라면 가련한 성냥팔이 소녀는 죽어버리므로, 몸과 맞바꿔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얼어버린 손끝을 녹이면서, 방금 전 한 번에 그어 버리려 했던 성냥을 하나씩 그어 나갔다. 성냥은 10개 있었으니까 5분에 하나씩 그어 나가기로 했다. 시즈쿠는 마음 속에서 성냥을 그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지만 마구 고개를 흔들어 쫓아냈다. 하나를 다 태우고 나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새로운 하나에 불을 붙였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많은 것들을 회상했다. 시즈쿠의 회상은 모두 행복과 온기로 가득했다. 가족끼리 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어머니가 오븐으로 닭고기를 구웠다. 아침이 되면 산타의 선물이 머리맡에 있었다. 언니는 최신 게임 소프트를 바랐지만, 시즈쿠는 단행본이나 오래된 영화 DVD를 원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지막 성냥을 긋고 있었다. 시즈쿠는 멍하니 혼잡을 응시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분명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고, 시시한 밤이 되겠지. 시시한 아침이 되겠지. 그래, 내팽개쳐진 것이다, 그 때.


"시즈코! 시즈코!"


검은 색과 감색 코트의 인파를 뚫고 레몬 색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가 소리치며 다가왔다. 나카스 카스미는, 부끄러움이라든가 체면을 전부 내던지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대충 알고 있는 정보만을 믿고 달려 왔다. 힐의 딱딱한 발걸음 소리가 눈 앞에서 멈췄다. 시즈쿠가 얼굴을 들자, 카스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보가 넘쳐나서 곤란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정보가 너무 전해지지 않아서, 무엇부터 알아야 좋을지조차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도, 이름 없는 격정은 작은 몸을 재촉해 움직이게 했다.


"지금 어디 살고 있는거야!? 이런데서 뭐 하고 있던거야!? 이런 건 묻지 않는게 다정한 친구일지도 모르지만! 카스밍은 그럴 수 없으니까! 시즈코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건 무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전부 얘기해줘! 카스밍에게도 이해할 수 있게 얘기해주세요!"

"성냥을 말야, 팔았어"


시즈쿠는 후드 안에서 바라보았다. 예정대로의 전개 같은건 바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드라마의 결말에 필요한 것은 깊은 체념이었다. 그러니까, 감사나 기쁨 같은, 그런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건 전혀 할 수 없었다.


"성냥이라니, 무슨 뜻이야?"

"남은 성냥을 그었더니, 할머니 품에 갈 수 있었다구?"


분하고 억울한 듯이 무력하게 짓눌려 있는 카스미와 시선이 교차했다. 카스미는 고등학교 때처럼 순수하게 화를 내지 않았다. 무대 여배우를 꿈꾸는 아가씨—— 그런 절친이 어째서 이브의 밤에 이렇게 됐는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전혀 상상할 수 없어서 화내기에는 이유가 너무 부족했다. 그런데도 못 본척 하지 않고,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시즈쿠의 손을 쥐었다. 장갑도 끼지 않았는데 따뜻한 손이 시즈쿠의 얼어있던 손끝을 순식간에 녹여갔다.


"뭐라도, 따뜻한 거 마시자"

"카스미양, 파티는?"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카스밍을 따라와 주세요!"


카스미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목이 쉬고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시즈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시즈쿠도 손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 모이려고 하는 사람, 사람으로 넘쳐나는 번화가까지 말 없이 걸어 가까스로 카페의 테이블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생각나서 후드를 벗은 시즈쿠는, 눈 앞의 세계가 너무나도 색이 선명해 숨을 삼켰다. 카스미는 후드에서 나타난 시즈쿠의 머리카락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거기에 우선하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다.


"시즈코, 잔뜩 물어봐도 돼?"

"잘 곳을 준비해 준다면 괜찮아"

"부모님한테 문자할테니까! 우리 집에서 묵고 가면 되지!?"

"'둘이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카스미양은 이렇게나 너덜너덜하고 가난한 여자아이를 반짝반짝하는 집에 데려갈거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 애한테는 집이 없어요'라고 소개할거야? 가까운 호텔은 안될까? 돈이 없는걸까? 리치하지 않았던 거야? 러브 호텔은 안될까? 카스미양은 퓨어하니까 안되는걸까?"


정보를 제공하기는 커녕 조건만 들이댔다. 시즈쿠는 연기를 했다. 달려가서까지 구할 가치가 없는 제멋대로인 여자를 연기했다. 카스미에게 버림받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더 바르게 말하자면, 카스미에게 응석부리다 내쳐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될 바에는 스스로 절망에 빠지고 싶었고, 행복으로 가득한 밤은 그걸 이뤄줄 것 같았다. 유키 세츠나가 자살했듯이, 자신도 여배우 지망생인 오사카 시즈쿠를 말살해, 가마쿠라의 웬만한 자산가의 둘째 딸인 오사카 시즈쿠로, 책이라도 읽으면서 지루하게 보낼 수 밖에 없는 인생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즈쿠의 이 무대는 끝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카스밍도 갈 수 있어! 러브 호텔 정도는 갈 수 있으니까!"


일어선 카스미가 협연자임을 호소했을 때, 계속해 협연해 나갈 것을 소리 높여 선언했을 때, 이브의 시작을 마음 풍요롭게 맞이하고 있던 손님 전부가 이쪽에 시선을 향해 왔다. 카스미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깨문 채 시즈쿠의 손을 난폭하게 잡았다. 한 손으로 트레이를 가지고 한 손으로 시즈쿠를 끌어 당겼다. 그러니까, 시즈쿠는 반대 손으로 트레이를 지탱하고, 둘이서 뒤얽히듯이 반환구까지 걸어갔다.


번화가에서 환락가로 빠르게 빠져나갔을 때,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틀어박히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불이 켜진 모던한 호텔이, 멀어진 마음을 끌어당겨야 할 두 사람을 이해하듯 맞아들였다.



"뭐야 여기? 왜 안내 데스크가 없어?"

"불이 들어와있는 방이 비어 있는 거니까, 하나 선택해서 버튼 눌러"


카스미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사라져 있었다. 시즈쿠는 가장 싼 방을 골랐는데도 크리스마스 가격인지 숙박이 18,000엔이었다. 22시까지는 프리 타임이라 쓰여 있으므로 거기에 수천엔이 추가될 것이다. 카스미에게 확인하자 신용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부모와 싸우고 집을 나온 시즈쿠와 달리, 착한 아이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세계로부터 신용이라는 것이 선물된 듯 했다.


"시즈코, 이런데서 자본적 있어?"

"2번"

"누구랑? 이라고, 물어봐도 돼?"

"극단 동료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의 친구였나"


카스미는 시선을 이곳 저곳으로 돌리며 겁내고 있었다. 이 상황이 아니라, 절친이 러브 호텔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과 그것을 자신이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다. 엘레베이터로 3층에 올라가 한 방에 들어갔다. 메인 룸은 선배 방의 거실 정도 넓이에 침대와 소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줄곧 겨울의 공기 속에 잠겨 있던 것을 떠올린 듯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잔뜩' 질문을 받는 사이에 감기에 걸리게 될 것 같았다. 옷걸이에 코트를 걸자, 시즈쿠는 어쨌든 목욕을 하고 싶어서 욕조에 물을 부었다.


욕실에서 돌아오자 카스미는 아직 당황해 있었다. 카스미를 무시하고 배가 고픈 것도 생각나서 메뉴를 펼쳤다. 샌드위치와 햄버거와 쥬스를 주문했다. 선배로부터 '묵을 곳 찾았어?'라는 메시지가 와 있어서, '러브 호텔에 있어요'라고만 답장하고 기내 모드로 했다. 집에 길든 고양이를 내쫓아서는 안되는 거라고 강하게 생각했다. 물이 차서 카스미에게 룸서비스의 수령을 부탁하고 자기만 욕조에 몸을 담갔다. 손발 끝까지 온기가 퍼져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자, 소파의 카스미는 자신이 내는 것인데도 '기다려' 소리를 들은 개 같았다. 둘 중 좋아하는 쪽을 먹으라고 지시하자, 카스미는 콧페빵으로 만든 샌드위치와 오렌지 쥬스를 골랐다. 정말 좋아하는 콧페빵을 다람쥐처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시즈쿠는 햄버거를 우롱차로 흘려 넘겼다. 그렇게까지 해서야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의 지평에 선 기분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높은 산이나 푸른 하늘에서 각자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 해주세요. 카스밍에게도"


천천히, 고등학교 시절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천천히 샌드위치를 먹은 카스미가, 빠른 말을 잇따라 쏟아내던 일이 많은 카스미가, 한 문자씩 모조리 목에 걸린 듯이, 말이 가루가 되어버린 듯이 고통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먼저 씻고 오는건?"

"싫어. 시즈코가 없어진다면 싫어"


여기에서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일까. 시즈쿠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아, 카스미는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온도차를 메우고 싶어 안달복달 하는구나 하고 납득했다. 뭐든 질문해도 된다며 거만해지자, 카스미는 비참한 벌칙밖에 들어있지 않은 뽑기 상자에 손을 넣는 버라이어티 예능인처럼 비참한 얼굴로 물어 왔다. 실제로, 그 말 대로였다.


"어디에. 살고 있어?"

"고등학교 때의 연극부 선배가 있는 곳에. 나, 살 쪘지?"

"으응. 돌아왔어"

"선배한테 길러지고 있으니까 손수 만든 요리를 많이 먹게 해줘. 집세도 필요 없어. 그 대신에 있지, 머리를 쓰다듬어지면 '냥' 하고 울어. 같이 침대에서 자고 있긴 한데, 시간이 있을 때엔 알몸이 돼서 선배의 그곳을 계속 할짝할짝 핥아줘. 1시간 정도 말이지. 그러면 기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냥'하고 울어"


카스미는 둘 곳 없는 분노를 소파에 쏟아내고 있었다. 인조 가죽 소파의 두꺼운 팔걸이를 작은 손으로 쥐곤 너무나 큰 감정을 눌러 죽이고 있었다. 앳된 얼굴을 잡아당기듯이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시즈쿠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절친에게 좀 더 자신을 알리고 싶어졌다. 내키는대로 마음을 풀어놓고 살았을 나카스 카스미라는 밝은 여자 아이에게 '내면으로 흘러드는 음침한 격정'이라는 녀석을 심장이 썩을때까지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 전엔 있지, 아는 사람의 그림 그리는 방에 있었어. 헛간 같이 물건이 가득한 방에 이불을 깔고 잤었어. 집세는 내지 않아도 좋았어. 그 사람은 몇 번이나 나한테 삽입을 하려 했지만 아파서 무리였으니까, 그곳을 손으로 훑거나 핥거나 하며 기분 좋게 만들어 줬어. 그렇게 해주면 10분 정도만에 사정해서 대충 만족해 주는데, 결국, 뭔가 여고생인 여자친구가 생겼다든가 해서 쫓겨났어"


카스미가 머리를 숙이며 다짜고짜 머리를 흔들었다. 애쉬 그레이 단발머리가 흔들리며 상쾌한 냄새가 났다. 그런 건 상상하기 싫다는 연기였지만, 너무나도 평범해서 동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카스미가 좀 더 상상해줬으면 했다. '오사카 시즈쿠'라는 딱한 여자아이가 겪고 있는 '연극'의 전체 모습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형편 좋은 장면만 협연해 주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전에 살던 방을 나오게 된건 말야. 습격 당해서 머리를 잘렸으니까"

"누구에게, 누구에게 말인가요!?"

"비밀. 카스미양도 아는 사람"


냉담하게 감추자 카스미는 뚝뚝 작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무력함과 절망으로 우는 걸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상상하고, 시즈쿠는 아주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카스미는 오열을 하며, 소파 옆에 뒀던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얇은 손바닥만한 상자를, 포장해 선물로 준비한 상자를 꺼냈다. 그 태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이거. 파티의 선물 교환용으로 샀는데. 크리스마스니까. 있지. 카스밍 산타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생각해줘"

"나, 카스미양에게 줄 선물, 없는데?"

"괜찮아. 괜찮으니까. 받아줘. 받아 주세요"


카스미의 억지는 시즈쿠의 방황을 몰랐던 것에 대한 속죄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시즈쿠는 받아서 열지 않은 채 자신의 토트백에 넣었다. 카스미는 울고 있었지만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시즈쿠는 그런 기특한 절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몸 하나로 헤메고 있는 시즈쿠에게 줄만한 것은 없었다. 적어도, 무언가 작은 추억만이라도 공유하자고 생각해서 가느다란 어깨를 끌어안아 보았다.


"카스미양, 키스해도 돼?"

"안 돼"

"불결하니까? 더러워지니까?"

"아냐! 그런게 아냐!"

"아닌거야?"

"카스밍의 첫 키스는 소중한 사람에게 바칠거니까"

"나를 소중하다고 하지 않았어?"

"달라. 지금의 시즈코는, 시즈코는, 시즈코가 아니니까"


카스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시즈쿠에게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자신답지 않다는 뜻이라면, 카스미가 아는 '시즈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애초에 당시의 자신을 잊고 있었다. 카스미가 얼굴을 들었다. 연민하는 얼굴이나 동정하는 얼굴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카스미의 얼굴은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진지했다. 적어도 시즈쿠에게는 그렇게 비춰졌다. 끌어 안았던 손을 풀었더니, 카스미는 거리를 좁힌 채 시즈쿠를 바라봤다.


"시즈쿠"

"시즈쿠? 왜?"

"끈질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부탁이니까 말하게 해줘. 이제 본가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학교에 들어가도 되고, 아르바이트만 해도 좋으니까. 돌아가기 힘들다면 나도 같이 갈테니까. 같이 시즈쿠의 부모님에게 사과할테니까. 그렇지만, 시즈쿠랑 러브 호텔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거, 나는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카스미의 성실함은 메마른 모래 언덕의 깊은 곳에 있는 시즈쿠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카스미의 필사적인 모습은 시즈쿠에게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비치고 있었다. 빗나간 연기를 하는 삐에로 같았다.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내친 김에 해 두고 싶은 말도 하려 했다. 시즈쿠는 카스미의 뺨에 손을 댔다.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상처는 모를것 같은 눈동자였다. 시즈쿠는 카스미의 순수함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있지, 나, 카스미양 따위한테 걱정 받고 싶지 않아. 카스미양 같은 축복받은 사람에게, 어떤 환경에 놓여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인간에게 둘러싸여도 요령 좋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듣고 훈계받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는 연극을 그만두지 않을거니까"


하고 싶던 말을 할 만큼 하고, 카스미의 얼굴에 절망이 떠오른 것을 확인했다. 졸리니까 자겠다고 선언하고 시즈쿠는 카스미를 두고 침대에 누웠다. 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옆으로 누워 잠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카스미도 이불에 들어와 시즈쿠와 등을 맞대고 있었다. 닿을만한 거리였지만 마음의 거리는 한없이 멀었다. 시즈쿠는 그것에 대해 안심하기까지 했다.


"카스미양"


조금 시간이 지나고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방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무딘 오렌지 색이었다. 반 정도만 돌아 누워서 카스미는 몸을 젖힌 채로 자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코와 입술을 뾰로통하게 허공에 내밀고 있었다.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노란색의 코트만 벗은 차림이었다. 작게 숨소리를 낼 때마다 블라우스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시즈쿠는, 아이돌 연구 동호회에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공주 취급을 받던 카스미를 떠올렸다. 거무튀튀한 것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


"키스도 아직인거야?"


시즈쿠는 웃기 시작했다. 바쳐지듯 내밀어진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고 작아서 마치 입에 닿는 느낌이 없는 꽃잎 같았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모두 쪼곤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억지 호출에 응해 달려온 절친의 첫 키스를 훔친 것은 양심을 거세게 불태웠고, 죄악감을 성대하게 타오르게 했다. 카스미는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 주었는데, 자신은 그녀의 우정을 더럽힐 뿐이었다. 시즈쿠는 자신 안의 '백'과 '흑'을 다룰 수 없는 무력함을 몹시 한탄했다.


(카스미양,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러브 호텔의 이불 냄새는 쌀쌀했고, 시즈쿠는 가랑비 소리로 사죄를 계속했다. 잠들지 못한 채로 날이 밝고, 둘은 호텔을 나와 헤어졌다. 카스미는 신용 카드로 전부 계산했다. 잘 잤는데도 몹시 지친 얼굴로 '또 봐'라며 손을 흔들었다. 시즈쿠는 근처에 있던 체인 카페로 들어갔다. 스마트폰을 켜 선배에게 '이제 돌아가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읽었다는 표시가 뜨고 '미안해. 기다릴게'라고 답장이 왔다. 이 사람의 인생극장 캐스트가 되는 건 이제 싫다, 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서부터 했다.


커피를 블랙으로 홀짝거렸다. 생각나서 카스미가 준 상자를 열기로 했다. 오타쿠 서클의 크리스마스 모임에 가져갈 선물이었으니까 별 건 아닐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대로 트레이에 올려 살짝 반환구에 두고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얇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심플한 포토프레임과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시즈쿠는, 카스미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사진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연극제에서 주역을 맡았던 자신과, 관객이었던 카스미, 둘만 찍혀 있었다. 시즈쿠는 무대 의상 그대로, 카스미는 니지가사키의 교복 차림이었다. 카스미의 협력으로 시즈쿠의 연극이 성공했던 것도 있어서, 둘이서 달성감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의 뒤에는, 가느다란 매직펜으로 기억에 짙게 남은 카스미의 문자가 써 있었다.


'이 프레임에 시즈쿠의 미소가 많이 담기길'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울어선 안돼. 절대 울어선 안돼. 울지마. 이를 악물고 눈꺼풀을 누르고, 시즈쿠는 토요일 아침 카페 한 구석에서 조금씩 등을 떨었다. 울면 안돼. 울면 더 이상 자신의 추함을 견딜 수 없어. 어젯밤 카스미에게 잘난 듯이 내뱉은 말과 숨겨왔던 유치한 폭거, 양쪽에 대한 죄악감을 참을 수 없어.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억울해. 울지 않아도 돼. 나쁘지 않아. 아무것도 나쁘지 않아. 울어선 안돼. 울지 마. 


"울지마. 부탁이야. 시즈쿠. 울지마. 아아. 울지말아줘"


죄어드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즈쿠는 카페 안인데도 코트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 조용히 얼굴만 가리고 도시의 무관심에 섞이려고 했다. 더 이상 카스미와 만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결단코 만나선 안된다고 확신했다. 영원히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카스미와 시즈쿠의 사이에 있던 온도차의,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 자신 쪽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려, 부끄럽고 분하고, 무엇보다 기분 나쁠 정도로 기뻐서, 구역질 섞인 오열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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