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드리려 합니다.
당시 PC방 알바였던 저는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꾀죄죄하고 담배냄새가 풍기는 사람이 구석진 자리에서 컴퓨터로 대체 무엇을 하는지 연신 마우스 스크롤을 드르륵 내리며 무엇인가 중얼거리더군요
조금 이상한 사람이다 싶었고 솔직히 그의 인상은 음침한 면이 있어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가 들어온지 몇 시간 지났을까요.. 그가 담배를 피러나간 사이 그의 자리에 사람들이 마구 모여들어 웅성웅성 떠들고 있더군요
무엇인가 보니... 오토플레이로 놔두고 돌리고 있던 스쿠스타였습니다
"와 미쳤다 뉴로세 상쁠을 오토로 s클 했어"
"아니 이정도면 덱파워 3만 넘는거 아님? 저번에 동숙이도 3만은 못간다고 그랬잖아"
이렇게 떠드는 사이 구경꾼들 사이로 담배를 다 태운 그가 유유히 걸어 오더군요
그리고 어느새 제 앞에 선 그가, "거기, 내 자리." 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부터였습니다 제 가슴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것은.
그 후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커피에 포스트잇을 붙여 제 마음을 전했고,
그 날 바로는.. 아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음을 연 그가 제 고백을 받아 주었습니다.
"딱히 마음에 든 건 아니라고" 라면서 말이죠
사귄지 백 일이 다 되어갈 즈음, PC방에서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먼저 자기 집에서 라면 먹고 가자고 하더군요.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구, 저도 이 때다 싶어 흔쾌히 따라 가줬습니다.
오빠의 집은 허름한 월셋집이었지만 방안 가득 오빠의 체취가 나는 것이 영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부엌에서 그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저는 라면 받침을 찾고 있었는데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길래 책장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습니다.
책장 맨 윗칸 잘 보이는 곳에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이 있더군요
'이 책이 딱 좋네'
오빠가 라면을 책 위에 올리고는 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수저를 놓던 우리의 손이 맞닿았고 어색하지만 뜨거운 공기가 이 작은 방 안을 메웠습니다
라면끓이는 일이 힘들었는지 땀을 흘리는 오빠가 뜨겁게 내쉬는 숨에 섞인 입냄새마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 감정을 숨기려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오빠 얼른 먹자 불겠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준표야 아부지 왔는데 휘딱휘딱 나오지 않고 뭣하능가?"
"아, 아부지 연락도 없이 우짠 일이여?"
"워매 이 처자는 누군겨? 참말로 반갑구마잉 준표애비되는 사람이여"
"내 여친이구만요"
"아,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
"왐마, 잉 씩씩한기 솔찬구마잉"
"추웅께 빨리 들어오소"
갑자기 들어오신 사람은 준표 오빠네 아버지셨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느 집에 홍어 떨어졌담서, 그것 땀세 여까지 허벌나게 달려왔구마잉"
"마침 라면도 먹고 있었구만" 하면서 아이스박스를 열어 홍어를 한가득 꺼내셨습니다. 찐한 홍어 냄새가 퍼지자 미간이 찡그려 졌습니다
"아참, 처자는 못 먹능가?"
"하하, 아닙니다.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고향은 광주라서 먹을 줄은 알아요"
" 아하하 아따 이제 보니 동향 사람이었구만? 어쩐지 대굴빡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
준표오빠 아버지는 제게 너무 친절히 대해 주셨고, 전라도에서 나오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따 아부지도 참... 이제 볼일 다 봤으면 얼릉 가시요"
"뭐여? 이눔이~"
"가기 전에, 전에 줬던 책은 다 읽었으까?"
"그람, 들고 온 날 다 읽어부랏제"
"그게 뭔가요?"
"우리 슨상님이 쓴 책이여. 뭔지 알긋제?"
슨상님..? 그게 누구지?
"아따 아부지 클났소 분명 내가 저기 꽂아 두었는데 어디로 가버렸으까?"
"뭣이? 그 책 털 끝이라도 상했으면 무사하지 못할거여"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아부지 여기 있는디..!"
제가 라면냄비 밑에 놔두었던 책이 바로 그 책, '김대중자서전'이었습니다.
"스, 슨 슨상님!!! 와따 마 이건 참말로 민주화운동하다 일찍 간 준표애미가 지하에서 탄식할 일이구만...!
너... 왐마.. 지금 김대중 자서전을 그 밑에 느은기여? "
"아부지.. 이건 내가 한게 아니고 저년이 했으야..!"
"그랴.. 저년이 했갓제 우리 슨상님 얼굴에 라면국물을 묻히다니...
이건 지금 우덜과 슨,..슨상님뿐 아니라 전라도 전체를 무시하고 짓밟은기여"
준표오빠 아버지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저는 위기에 순간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습니다
"저도 동향사람인지라.. 성님! 한번만 봐주시라!"
"아니여... 너는 동향사람이 아니여.. 후..우덜식으로 처리하야갔제" 하면서
주머니에서 화염병을 꺼내 던지려던 순간...!
.
.
.
타다다다타당!!!
"꺄악!!"
누군가 총을 쐈고 그 총에 맞은 준표애비는 즉사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복면을 쓴 히어로가 총을 거두고 제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이제 안전합니다"
"당신은 누구죠?"
"전 전...엔두입니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