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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창작 [SS] 리코 “시간의 그림자” -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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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31 13:20:01
눈을 감으면, 희멀건 무대 조명만이 보인다.
거대한 무대 아래에는 나와 내 앞의 그랜드 피아노 1대 뿐.
전투준비를 끝낸 군인처럼 스포트라이트에 올라, 건반이라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다.
달빛 아래에 외로이 남은 사람.
스스로를 책망하고 과거를 되씹으며 후회를 했다.
그의, 혹은 그녀의 내면이 느껴졌다.
얼마나 우울할까, 얼마나 한심할까!
그런 짓을 했던 나를 찢어버리고 싶은 걸.
몰래 가져왔었던 그대의 모습이 담긴 사진.
우리가 서로의 가장 소중한 시절이었을 무렵에 갔었던 바닷가.
아아, 떠올랐다. 찬란했던 추억, 짜릿한 감성들, 더없이 새로운 욕망들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구나.
바로 이게 내가 간직하고 싶었던, 그것이다.
한심한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였을까?
누구 때문인가?
헛소문을 퍼뜨려서 내가 사랑하는 이로부터 떨어뜨린 그 망할 인간이 누구였던가?
그 자식 때문이다.
그 자식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사죄를 받으리라.
최고의 치욕을 안겨 복수를 완성하리라!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휘이잉
정신이 팔린 사이에 바람에 놓쳐버린 사진.
간신히 낚아채고 뭔가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살피면서 다시 떠오른 것은 나는 뭘 하고 있었느냐는 반문이었다.
해야 할 때는 하지 않으면서 복수를 할 자격이나 있는가?
우습기 그지없는 것, 네 분수나 알려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이로군.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있기나 해라.
...뭐라 답할 길이 없다.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억울함과 슬픔, 분노만은 남았다.
그것을 하늘 위의 달빛에 쏟아냈다.
저 하늘 위에 있는, 달에게 쏟아냈다. 그럴 뿐이었다.
나의 눈이 뜨인다.
얼굴을 쳐든 나에겐 천장에 붙은 전등이 보인다.
건반에서 손을 내린다.
시선을 제자리로 돌리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박수갈채가 들린다.
내 연주로 감성이든 이야기든 뭔가를 전달한 모양이다.
들리던 소리는 점점 더 쏟아지기 시작한다!
...! !!... !!!....!
앙코르 소리가 들린다!
관객들이 내 이름을 연호한다!
내가 하던 연습은 헛되지 않다!
정말 오랜만에 친 것임에도 아직 나는 최고의 기량이다!
내가 이렇게 잘난 사람이다!
환호! 경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절정!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지금의 사쿠라우치 리코를 대변하는 것이다!!
.
.
.
기우뚱
“으헷, 으헤헤헤... 헉! 으악!”
퍽, 우당탕탕!
“악, 끄으으. 아파...”
뭐, 뭐야?
여기가 어디야?
뭔 일이야, 허리가 너무 아프잖아.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둘러보면 온갖 악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코앞에는 몇 주째 씨름 중인 피아노가 보인다.
엎어진 의자 옆에는 영상을 재생하다가 지쳐 멈춘 휴대폰이 있다.
휴대폰 속에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어떤 피아니스트가 감사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의자를 다시 세우고 앉았다.
아직 반도 채우지 못한 악보가, 새벽이 됐음을 알려오는 디지털시계가,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지루하고 침울하다.
“씨, 괜히 스스로 음 딴다고 했나. 말 그대로 개고생이잖아.”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작품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보겠다고 큰소리친 지 3주 째.
나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었던 패기는 식어서 나동그라졌고 축 처진 식물처럼 말라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도 방금 꿈처럼, 그리고 저 피아니스트처럼 미친 기량을 보일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나는 지금 기초조차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는구나.
선곡한 후 2주간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거였을까?
분명 뭔가를 하고는 있었으나 진전은 전혀 없는 상태다.
난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아이디어를 냈던 걸까?
내 자신이 돋보이게 하려고 했던 거였으나 지금은 나를 매몰시키고 있다.
이대론 안 되겠어.
가만히 있다간 죽을 거야.
L’estro armonico의 바이올린 악보를 찾았다.
다행히도 영상 설명의 링크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자존심은 몹시 구기겠지만, 완전히 노쇼를 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언제까지고 이런 고통만을 느낄 수는 없어, 고집대로 해서 언제 다 하려고?
찾은 악보는 역시나... 더럽게 복잡했지만, 대강의 흐름은 보인다.
명확한 멜로디의 옥타브는 아주 쉽다.
다만 너저분한 아랫단은 대충대충 한 덩어리로 땡친다.
이렇게 하니 2주 동안 질질 끌던 작업은 30분 만에 끝났다.
“하... 하하. 이게 뭐야.”
이렇게나 쉬운 길이 있는데 내 노력은 뭐였던 걸까.
이 새벽까지 남아서 곡 갈무리 작업을 하는 나는 뭘까.
속이 갑갑해서 기분전환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동아리 건물을 나와서 무역학부가 있는 경상대 건물로 향해보았다.
기말시험이 끝난 강의실에는 뚝뚝 떨어진 책걸상들만 줄지어 정렬된 모습니다.
그 앞에 있는 칠판에는 시험 끝났다며 놀러가자는 둥 술 마시자는 둥 낙서들이 휘갈겨진 채였다.
“좋겠네.”
휴게실, 다른 이름으로는 무역학과방.
종강총회를 마치고 뒤풀이를 했는가보다, 술을 잔뜩 먹은 동기 후배들이 나뒹굴었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냄새, 귀를 찌르는 코골이와 이갈이에도 저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한 학기의 의무가 끝난 것을 즐길 뿐이다.
“부럽네.”
반면에 나는 휴학생.
그들과 같은 입장도 아니고 아예 다른 사람도 아닌 애매한 신분.
그들은 끝장을 봤지만 나는 다음 주 심포지엄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나도 저렇게 잘 놀 수 있는데.
나도 저렇게 술 마실 줄 아는데.
저들과 마찬가지로 방바닥에 뒹굴어도 괜찮은데.
이번학기를 같이 다녔다면 쟤네들한테 낄 수 있었을 텐데.
이번학기를 쭉 다녔다면... 휴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동아리 활동을 신경 쓴답시고 했던 휴학을 무를 수만 있다면.
괜히 음악동아리에 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휴학 안 하고 공부만 했을 텐데.
괜히 2학년 때 심심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이런 고통은 안 느끼지 않았을까.
이건 애초에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피아노로 뭔가를 해 보려고 했던 결심부터가 틀렸던 것일까.
내가 좋아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깨버릴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럼,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그리고 나는 뭘까.
잠깐 음악만을 파 보겠다는 내 결정에, 내가 괴로워하는 게 우습다.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거야?
후훗, 거짓말.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악보는 짜 놨으니 이제 손가락으로 외우는 일이 남았다.
전에는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익혔던 것, 오랜만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남은 시간을 빡세게 연습만 해야 한다.
이제 5일이 남은 건가, 너무도 멀구나.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10년이라는 시간의 뺨을 후릴 정도다.
돌아가자.
잠을 못자서 손이 굳으면 정말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어딘가 억울함이 솟구치지만, 딱 심포지엄 하나만 생각하자.
그거 하나만 끝내자.
자고 연습하고 밥, 자고 연습하고 밥.
그 때까지는 이 사이클만을 돌리는 거다.
그걸 위해서 지금은 정리하고 자자.
오로지 그것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뻗었다가 일어나보면 아침 10시.
체크무늬 셔츠, 넉넉한 청바지,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학교로 향한다.
오늘의 아침은 역시나 식빵 두 조각.
휴대폰에 넣어둔 피아노 시뮬레이터로 대략적인 멜로디를 익힌다.
지하철 승강장을 나와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맞이하는 심포지엄 포스터 한 개.
거기에 쓰인 이름들 중 나는 세 번째로 소개되었다.
내가 세 번째 공연이라... 11명 중에서 3등...
별 특별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는 이름들은 하나도 없고, 음악관련 대학원생들만 가득한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동방으로 향하기 전, 어제 새벽 들렀던 무역학과방을 다시 들러보았다.
환기를 지나치게 잘 한 건지 방이 썰렁하다.
강의실의 칠판은 깨끗하다.
아무리 놀아도 정리는 잘 하는 착한 친구들이구나...
하지만 방학이라 사람이 없는 탓에 썰렁한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건물을 올라 동방으로 왔을 때에는 이미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무역학과방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 이웃한 다른 동아리 사람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건물에는 오로지 나뿐인 것 같았다.
어디든 문이 잠긴 것을 보아하니 진짜로 그렇겠지.
연습실의 문을 닫으면 이곳은 나만의 세상.
그리고 3일 만에 손을 익혀야 하는 굳은 수련실.
정신과 시간의 방... 까지는 너무 갔나.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시간을 뼈저리게 느끼며 손을 띄운다.
다가오는 금요일을 위하여.
“이거 왜 옷이... 안 들어가냐?”
“...;;”
“이거 더 큰 거는 없어?”
“치마는 없어요. 바지라도 입어보실래요?”
“아 진짜... 여기까지 와서 바지를 입어야 한다니.”
무대의 뒤편.
일상복을 벗고 정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모두들 요란법석이다.
아니, 말을 고치자. 내 주변만 요란법석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름 제 몸에 맞는 옷을 골랐지만 나는 모든 치마가 맞지 않았다.
치마를 가지러 뛰어다니던 후배에게 묵념.
2개월 만에 더 불어버린 허리가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바지 입어보니 어때요?”
“어. 괜찮네. 그냥 바지 입고 나갈래.”
“입혀드리니 또 라인이 괜찮네... 배에다가 힘줘볼래요?”
“응? 흡.”
“아뇨, 배에다가.”
“흐읍...!”
“숨 참지 말고 배에다가 힘주라니까요. 여기! 여기!”
“흐, 으악! 악!”
답답했던 것인지 갑작스런 손바닥이 내 배를 덮친다.
막기 위해서 배에 힘을 주었다.
아, 배가 처진 거에다가 힘을 주라고?
의도를 알아서 속이 시원하긴 하지만, 뱃살을 알아차렸다니 수치스러워...
“오오, 굿.”
“이 정도면 대충 추해보이지는 않겠지.”
“추하긴 누가 추해요? 차라리 여장남자라는 소리를 더 들을지도...”
“야!!”
“흐아, 죄송...”
[두 번째 무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 후보자를 소개해볼까요?]
“헉! 언니 나갈 차례!”
“어디였지?? 저기?”
“저기 선 앞에 섰다가 부르면 나가시면 돼요. 배랑 등에 힘주고!”
“나, 나, 간다?! 나 진짜 간다!”
“잘 하고 와요!”
[이번 후보자는 굉장히 독특한 이력이 있네요. 눈에 띄어서 소개해드리고 싶어져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했다가 포기했는데, 이 이후로 음악 공포증까지 가졌다고 하네요. 그런데 다음 해에 친구들이 권유해준 스쿨아이돌에 참가했다가... 다시 돌아와 우승! 정말 드라마 같은 극복을 해냈군요.]
[그렇죠, 슬럼프에 빠지면 정말 극복하기가 힘듭니다. 저도 그랬고요, 이 앞에 계신 예술대학 학과장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저기에 있는 음향감독님도... 네? 아하하하, 감독님은 아직 없다고 하시네요.]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제출해주신 분을 더 기다릴 순 없겠죠? 큰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드디어 내 차례다.
고개를 들자.
나를 자랑하는 거다.
내가 이렇게나 잘난 사람이라고 뽐내는 거다.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ㅇ
삐끗!
“우하아아?!”
[어엇!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오...”
[긴장을 너무 하신 것 같아요. 저를 따라서 기지개 펼까요?]
[관객 여러분들도 다같이, 쭉~]
...
갑자기 준비운동 시간이 됐냐, 왜...
뭔가,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만 할 듯하네.
[쭈우욱~ 자, 이제 좀 긴장이 풀리셨나요? 관객 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음악동아리에서 활동 중인 무역학부 3학년 사쿠라우치 리코입니다.”
[반가워요, 사쿠라우치 씨. 무역학에 음악이라니, 복수전공인가요? 아니면 취미로 하시는 건가요?]
“취미...쪽이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오오, 그럼 심포지엄을 신청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제가 몸담았던 곳이고 지금은 어떤지 궁금해서요.”
사실은 교수님께서 시켰지만 말이다.
아, 부원들도 죄다 나를 추천했다고 그랬지, 나쁜 것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번에 준비한 곡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무슨 곡인가요?]
“안토니오 비발디가 작곡한 L’estro armonico라는 곡입니다.”
[레스트로 아모니코... 이탈리아나 어딘가 유럽지역의 언어 같네요. 무슨 뜻인가요?]
“스페인어로 ‘조화로운 영감’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비발디는 현악기 위주의 곡을 썼습니다만, 이번에 제가 피아노로 변주해 본 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조화로운 영감...!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거기에 스스로 변주까지 하셨다니... 원래 변주라는 것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절대로 흔하지 않거든요.]
[이제 시간이... 됐네요. 사쿠라우치 씨, 준비되셨나요?]
“네.”
[기다리시던 세 번째 무대, 사쿠라우치 씨의 L’estro armonico입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3달의 노력을 여기다 쏟아 부을 차례다.
건반이라는 방아쇠에 손을 올리고, 음표를 하나씩 쏴 맞출 시간이다.
처음부터 강한 멜로디가 쇄도한다.
피아노의 파워를 보강하기 위한 이중화음이 쏟아진다.
두 개의 손가락이 그려내는 마루와 골에 짙은 열정을 담아야 한다.
더 세게! 삼중화음이 도처에 튀어나오고, 오른쪽의 손가락 어느 하나 쉴 새가 없다.
왼손 역시도 배경을 깔아주랴, 오른손 쫓아가랴 찢어질 지경이다.
찢어질 거라면 오늘만 넘기고 찢어져.
파워는 조금 낮추지만, 이번에는 훨씬 섬세하게.
음표 성분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한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빈틈이 있어서도 안 된다.
꽉꽉 채우고 메우기 위해서 미친 분량의 노트를 처리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이중화음 쇄도.
약간 다르긴 하다. 오른손은 이중화음-멜로디 처리, 왼손은 보조 멜로디 처리.
약간의 산을 넘으면, 한 번 더 힘을 끌어올리면 1악장은 끝난다.
2장은 1장의 알레그로에서 훨씬 느려지는 라르고.
이제야 손이 좀 쉰다.
하지만 표현할 음이 적기에 오히려 틀리면 안 된다.
힘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부드럽게만 멜로디를 탄다.
그 이후 일정한 리듬에 맞춰 산을 타는 오른손, 오른손을 대신해 배경을 끊이지 않게 하는 왼손.
오른손이 마지막 건반을 두 번 누르면 휴식은 끝난다.
최고 빠르기 프레스토, 그리고 최고로 세게.
단 2분의 러시만 막으면 된다.
필요한 파워답게 오른손은 이중화음으로 꽉 차다가 못해 넘칠 지경이다.
오른손으로 갈기듯 연주하는 주요 멜로디는 정신없이 뒷받침하는 왼손으로 중화된다.
폭발하던 음표는 슬슬 내리막을 타기 시작하고, 섬세함을 다시 강조한다.
섬세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그리고 빠르게.
마치 목 언저리에서 넘실거리는 온천물처럼!
아, 이건 아닌가?
한 번 더 폭발시켰다가, 저 아래에서 다시 진동시켰다가.
위 진동, 그 아래 진동, 또 그 아래 진동, 언덕 올랐다가 다시 골로 빠진다.
단순하게, 그 뒤로 다시 메아리 반복.
페이크 엔딩 넣었다가, 점점 내려, 내려, 내려서 연착륙을 해낸다.
끝냈다.
꿈처럼은 아니었지만 제법 박수소리가 들린다.
꿈처럼은 아니었지만 그냥저냥 만족스럽다.
크게 업적을 세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적당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쿠라우치 씨가 연주한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RV356 가단조 잘 들었습니다...]
?????????????????????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이거 제목은 조화로운 뭐시기 아니었어?
왜 RV356?? 뭐야 그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야?
...지금 뭔가 당하고 있는 건가??
요상한 제목을 이야기한 사회자를 바라봤다.
그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한 마디를 나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L’estro armonico는 협주곡을 연주한 오케스트라 그룹의 이름이네요. RV550을 비롯한 여러 곡들을 공연했다고 해요.]
아
아,
그럼 난 대체 뭘 알고 이걸 연습한 거지.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말아요. 음악에서 제목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감성을 나누면 되는 건데요!]
감사합니다, 사회자님...
근데 그 수준의 위로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요.
거기다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아줌마는 막 노려보고 계시고.
이게 뭐야!!
[사쿠라우치 씨의 연주에 대해서 질문, 첨삭하실 분은 손 번쩍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
아 주여, 제발.
아진짜저이렇게나고생했는데한번만봐주시면안될까요저지금다리완전힘빠져서금방이라도쓰러질것같은데
저, 저저, 저 아줌마 결국엔 손들었어, 저거저거!!
하여간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질 않니?!
[저~기 뒤에 있는 학생들부터 해 볼까요? 거기 오른쪽 학생분.]
- 예뻐요!!
원초적이구나.
그래도 감사합니다.
멘탈 회복할 여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네. 감사합니다.”
[단호한 사쿠라우치 씨,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흐흐. 다음, 그 왼쪽 분?]
- 역시 음악동아리의 자랑거리!!
...
“감...사합니다.”
[어헛... 네. 인기가 많으시네요. 학생은 이제 없는 것 같으니, 교수님들? 아 K 교수님.]
아씨, 그 아줌마야!
교수였어?! 아 쫌!
“예술대학 피아노과의 K 교수입니다. 연주해 주신 곡, 잘 들었습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원래는 이게 바이올린 곡인데 스스로 변주를 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취미 수준으로 하는데 이렇게나 공을 들이시는 것을 보면 저희 학과로 초대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다만... 이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아파.
“기교적인 부분은 콩쿠르 우승하셨던 분답게 상위권입니다만,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닌 음표를 때려 맞춘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다면 더 감정을 싣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화살로 마음을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음악을 한 것은 아니었다니...
[K 교수님 말고는 더 없으신가요? 아, Y 교수님.]
“음악통합과 Y입니다. 저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다만, 어떤 이미지를 그리면서 치신건지 알고 싶습니다.”
“이미지?? 어떤 이미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각각의 노래에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진혼곡에는 사별이나 영웅의 이야기라던가, 사계는 악장마다 느껴지는 분위기라거나. 이번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없었나요?”
“어... 없었어요.”
“좀 더 깊은 음악을 하시려면 이런 이미지를 충분히 그리시는 게 좋아요. 훨씬 좋아질 거예요. 이상입니다.”
[다음... 대학원생이군요. 네, 가운데 분.]
“쇼팽 전공생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해서 영혼이 없네요. 세게 치고 약하게 치는 임팩트는 몸이 기억하는 것 같다만 금방 물렸어요.”
“...”
[질문은 이걸로 끝인 것 같네요. 사실 굉장히 험담만을 하신 거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만 채운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말이에요. 수고하셨어요, 사쿠라우치 씨. 모두 고생했다는 의미로 박수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홀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모두들 그 놈의 미친 기량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고, 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자타공인 내 연주가 꽝이라고 말해오는 것 같았다.
우리 교수님은 저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들 나는 상관없이 알아서 잘 즐기고 있었다.
나만 낙동강 오리알처럼 근본 없는 도전자였다.
행사가 제법 진행되고 마지막 사람이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 의상은 진작 갈아입었겠다, 조용히 밖으로 건물 밖으로 학교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학이라 아무도 없는 길가가, 뜸하게 바람소리를 남기는 차도가,
의미 없이 반짝이고 있는 신호등이 내 마음에 스친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길, 나 혼자 가는 길.
모두들 각자의 악기에 최적화된 곡을 가지고 영혼을 담는 것에 애쓴다.
반면 나는 바이올린을 피아노로 흉내 냈을 뿐이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길, 나 혼자 가는 길.
가는 길에 보이는 상경대 건물은 한밤의 늦은 시각임에도 빛과 말소리가 만연하다.
나는 수업에 지쳐 쓰러져서 휴학으로 도망쳤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길, 나 혼자 가는 길.
지하철 입구에 도착했다.
평소에 다니던 대로 한다면 금방 집에 도착하겠지.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휴대폰으로 노선 검색을 한다면 어떻게든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 걷기를 택했다, 집까지 쭉 말이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길, 나 혼자 가는 길.
뒤에 있던 가로등 2개가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나는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그림자가 자라났다.
그리고 나랑 가장 가까운 곳에는... 가장 어두운 칠흑이 영글었다.
어딜 가더라도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역학을 뜻하는 왼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전문 음악을 뜻하는 오른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과거가 켜켜이 쌓인 나는 그림자를 안고 갈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은,
그 길은 아무도 없는 그림자, 나 혼자의 그림자.
Inserted, ending theme - Violin Concerto in A minor RV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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