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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물갤문학) 아홉 벌의 의상으로 남은 아이돌
글쓴이
알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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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2764326
  • 2019-10-11 11:13:16
 






이른 아침이었다. 문간반 툇마루에 앉아서 타카미씨가 의상을 닦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가 솔로 먼지나 떠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바탕과 빛깔이 다르고 디자인이 다른 갖가지 의상를 대여섯 벌이나 툇마루에 늘어놓은 채 그는 떨고 바르고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거 팔 겁니까?”


아침 인사 겸 농담 삼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팔 거냐구요?”


갑자기 일손을 멈추더니 그는 내 몸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입고 있는 의상을 유심히 쏘아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내 치맛가랑이와 웃도리 앞섶을 타고 꼬물꼬물 기어올라오는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내 시선과 맞부딪치면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이거 실례했나 봅니다. 달리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의상이 하두 여러 벌이라서…… 전 그저 많다는 의미루다…… ”


입을 꾹 다물고는 타카미씨가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의사를 분명히 했으므로 내겐 아무 할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는 손질을 마친 의상를 자기 오른편에 얌전히 모시고는 왼편에서 다른 의상를 집어 무릎 새에 끼더니만 

헌 걸레로 마치 양치질하듯 신중하게 리본과 옷 틈에 묻은 먼지털을 제거하기 시작함으로써 

내게서 사과할 기회를 아주 앗아가 버렸다. 나는 주번교사를 맡아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하려던 것도 

까맣게 잊은 채로 타카미씨 앞에서 오래 밍기적거렸다. 그러나 타카미씨를 향한 그 찜찜한 마음 덕분에 

비로소 타카미씨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여러 날 함께 살면서도 피차 밖으로 나돌며 빡빡하게 지내다 보니 이사오던 그날 이후로 변변히 대면조차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중략)...



무슨 수를 써서든 이놈의 아이돌 동호회를 살리자고 카스밍에게 소리치던 그날 밤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줄담배질로 밤늦도록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야자와 니코와 니시키노 마키였다.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안 닿는 땅에서 동떨어진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이 갈마들이로 나를 깨어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같은 그룹에서 스쿨아이돌 생활을 보낸 점이 그렇고, 아이돌 활동을 통해서 빈민가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쏟은 점이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姓)이 각각이듯이 작품을 떠난 실생활에서의 그들은 성격이 딴판이었다 한다. 

니코이 가난한 집에서 누이를 돌보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동안 음악과 인간이 일치된 삶을 산 반면에, 

어린 나이에 금수저로 살면서 성장한 마키는 훗날 문명을 떨치고 

유족한 생활을 하게 되자 동전을 구걸하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지팡이로 쫓아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니코가 옳다면 마키가 그른 것이고 마키가 옳다면 니코가 그르게 된다. 가급적이면 나는 니코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마키의 궁둥이를 걷어찰 만큼 나는 떳떳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옳은 것으로 알았다. 저 친구는 휴머니스트라고 남들이 나를 불러 주는 건 결코 우정에 금이 가는 대접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정부가 베푸는 제반 시혜가 사회의 밑바닥에까지 고루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와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다방에서 또는 신문지상에서 이미 갈 데까지 다 가버린 막다른 인생을 만날 적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긁어모으느라고 지금쯤 빨갛게 돈독이 올라 있을 재벌들의 눈을 후벼파는 말들로써 

저들의 딱한 사정을 상쇄해 버리려 했다. 저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배운 우리들의 의무이자 과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마카롱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는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마카롱팔이 아이들을 물리치는 한 방법으로 주머니 속에 비상용 마카롱 한 두개를 휴대하고 다니기도 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공책이나 화분을 파는 아이들을 한목에 싸잡아 가짜 고학생이라고 간단히 단정해 버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랜드호텔에 머무면서 아와시마 호텔에 머물 날을 꿈꾸고 수십 통의 마카롱 값을 팁으로 던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면서 택시 합승을, 합승을 하면서는 자가용을 굴릴 날을 기약했다. 니코의 가슴을 배반하는 마키의 머리는 매우 완강한 것이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우리의 입과 손발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괴리는 우리로서는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도리어 나는 그날 밤새껏 니코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잠을 온전히 설치고 말았다.




(중략)...



“나가 버릴까 부다, 차라리 리더가 멀리 나가 버리고 말까 봐!”


부르짖음에 가까운 타카미씨의 비통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어린것의 귀에도 그 말만은 놀라운 효험을 보인 모양이었다. 

자지러지던 울음이 갑자기 뚝 그쳤다. 그래도 여전히 빨래줄마냥 뻗으려는 울음의 꼬리를 루비는 도막도막 잘라 숨돌릴 겨를 없이 삼키느라고 잦추 사레가 들렸다.

아침이 되어 보니 타마키씨는 또 의상을 닦고 있었다. 의상 닦기에 권씨는 여느 날보다도 유난히 더 열심이었다.


“간밤에 죄송했습니다”


권씨가 사복을 입은 내 몸을 상대로 정중히 사과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권씨의 새삼스러운 사과가 내 귀엔, 어쩐지 간밤의 내 솜씨가 과연 어떻더냐고 묻는 성싶게만 들려 두고두고 떨떠름했다.




(중략)...





밤이 꽤 늦어 타카미씨는 귀가했다. 

그는 문간방을 거치지 않은 채 내가 들어 있는 안방으로 직행해 와서 두 홉들이 

소주병 하나를 푹 꽂는 기세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미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이래봬도 나 아쿠아요!”


피곤에 짓눌렸던 몸뚱이가 이번엔 술에 흠씬 젖어 갱신 못할 지경인데도 목소리만은 제법 또렷했다.


“물론 잘 아시리라 믿지만 아쿠아 하면 어딜 가도 그렇게 괄신 안 받지요. 세인트스노우가 본이 해주던가요?”


내 의상이 자기 의상보다 항상 추저분하고 또 단벌임을 매번 확인하듯이 

아침에는 그룹으로써 일종의 길고 짧음을 대볼 작정인 듯했다.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웃으면서도 사람 좋게 보이려는 내 노력이 취중을 뚫고 그의 흔들리는 뇌수 깊이에까지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랐다.


“타카미선생, 많이 취하신 모양인데 얘긴 우리 나중에 하고 들어가서 쉬시죠”


팔짱을 낀 채 문지방 너머 마루에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서 있는 아유무를 흘끔흘끔 곁눈질하면서 

나는 타카미씨를 편히 쉬게 하려는 생각이 순전히 자발적이며 선의에 찬 것임을 행동으로 강조해 보였다. 

타카미씨가 내 선의를 홱 뿌리쳤다. 그는 반쯤 강제로 일으켜졌던 엉덩이를 도로 털썩 주저앉히더니 병뚜껑을 이빨로 물어 단숨에 깠다.


“중졸하고는 벗하기 싫다 이겁니까? 허지만 어림두 없어요. 오늘은 내 기필코 헐 말 다 허고 물러가리다”


“중졸이라구요?”


눈이 벌어진 입만큼이나 되어 가지고 거의 이성을 잃은 정도로 냉큼 뛰어들어왔으므로 

아유무의 음성은 자연히 깜짝 반기는 투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반기는 투가 아님이 다음 말로써 곧 분명해졌다.


“원 세상에, 세상에나! 방금 중졸이라구 하셨죠? 지끔 두 분이서 누구 얘길 하시는 거예요? 세상에, 세상에나…… ”


“아주머닌 모르고 계셨습니까? 호노카선생이 얘기하지 않던가요? 바루 제 얘깁니다. 

왜요, 제 눈빛이 어쩐지 이상해 보입니까? 아주머니 문짜대로 중졸허고 사람--그렇지, 사람이지--사람하고 이렇게 가차이 앉은 게 신기합니까?”


뛰어들 때와 똑같은 기세로 아내는 냉큼 몇 발짝 물러섰다. 

빤히 올려다보는 타카미씨 앞에서 아유무는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단박 고분고분해졌다. 타카미씨가 앉으라면 앉고 들으라면 듣는 자세를 취했다.


“우칫치 앞정갱이 하나 뿌지를 힘도 없는 놈입니다. 뭐 조금도 겁내실 거 없습니다. 편안한 맘으로 내외분이서 제 얘기 들어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적당히 권씨를 구슬러 문간방으로 돌려보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우칫치 앞정강이 부러뜨릴 힘도 없다는 고백이 나오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우칫치 앞정강이 하나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감히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뚝뚝 부러뜨린 그 불가사의가 다소 풀릴 것도 같았다.





(중략)...




“모든 게 무리였지요. 우선 나 같은 인간이 태어난 그 자체가 무리였고, 장질부사나 복막염 같은 걸로 죽을 기회 다 놓치고는 

아둥바둥 살아나서 처자식까지 거느린 게 무리였고, 우라노호시에다 스쿨아이돌부를 마련한 게 무리였고, 이래저래 무리 아닌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스쿨아이돌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특히 없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 채 퍼지고 있었다. 꼭 그걸 믿어서가 아니었다. 

외려 그는 처음부터 낙원이란 게 별게 아님을 믿는 편이었다. 다만 차제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혹의 손에 덜미를 잡혀 

학교를 살릴 수 있다는 그 이점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과오는 인정하지 않은 바 아니다. 

결국 그는 당시 형편으로는 거금에 해당하는 20만원을 변통해서 호텔방 마리를 통하여 스쿨아이돌부의 입주권리를 손에 넣었다.


“난생 처음 이십 평짜리 땅덩어리가 내 소유로 떨어진 겁니다. 내 차지가 된 그 이십 평이 너무도 대견해서 

아침저녁으로 한뼘 한뼘 애무하다시피 재고 밟고 하느라고 나는 사실은 나 이상으로 불행한 

어느 철거민의 소유였어야 할 그것이 협잡으로 나한테 굴러 떨어진 줄을 전혀 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나한테 굴러 떨어진 줄을 전혀 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나한테는 이 세상 전체가 끽해야 이십 평에서 그렇게 많이 벗어나게 커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엎친 데 덮쳐 이즈시에서는 토지취득세부과통지서를 발부했다. 관할과 소속이 각기 다른 잊즈시와 누마즈시가 이렇게 

쌍나발을 부는 바람에 주민들은 거의 초주검 꼴이 되었다. 

누마즈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라는 유례 없이 긴 이름의 임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대책위원회는 곧 투쟁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속에 식자깨나 든 것으로 알려져 그는 같은 배를 탄 전매입주자들에 의해서 

대책위원과 투쟁위원을 고루 역임하게 되었다.


“그게 만약 감투 축에 든다면, 나한테 정말 분에 넘치는 감투였어요”





(중략)...




“아하, 투쟁위원님이 타구 계셨군요. 단신으로 서울까지 쳐들어가서 투쟁하시긴 아무래도 무립니다. 어서 내리십쇼”


웬 청년이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실하고 빙싯빙싯 웃으며 친절히 말했다. 

청년은 용케도 그를 알아보는 모양이나 이쪽에서는 상대방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잠시 그가 어물쩍거리자 곁에 있던 다른 청년이 잡담 제하고 몽둥이를 휘둘러 단박에 차창을 박살내 버렸다.


“개새끼들아, 늬들 목숨만 목숨이냐?”


“다른 사람들은 몇 끼씩 굶고 악을 쓰는 판인데 택시나 타고 앉았다니, 늘어진 개팔자로군”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어도 같이 살잔 말야!”


각목이나 자전거 체인 따위를 코앞에 들이대면서 청년들이 가뜩이나 쉰 목청을 한껏 드높이고 있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차에 탔던 승객들은 차창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 밖으로 뛰어나와 이미 절반쯤은 죽어 있었다.


“타카미선생님, 저쪽으로 가실까요”


처음 알은체하던 예의 그 청년이 그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가 가장 두렵게 느끼는 건 몽둥이가 아니었다. 친절이었다. 

청년은 웃음으로 그를 묶어 도로변 잡초더미까지 손쉽게 연행해 갔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일장의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 이라고 말끝마다 전제하면서 청년은 주로, 지금 이 시간에도 먹고 마시고 춤추고 

침대에서 딩굴고 있을 도쿄의 유한계급과 우라노호시 안의 처참한 생활상을 침이 마르도록 대비시킴으로써 

아직도 잠자고 있는 그의 사회적 지각을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벌떡 일어나게 하려는 수작인 줄은 짐작이 되는데,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면 이런 판국에서도 저토록 친절할 수 있을까만을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설교가 웬만큼 먹혀들었다고 판단했던지 청년은 그를 이끌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질러 누마즈 중심부로 들어갔다.





“저것 좀 보라고 청년이 갑자기 소리칩니다. 그렇잖아도 난 이미 보고 있었는데요.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마카롱에 미캉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청년은 그것이 마치 자기 조홧속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되는 것같이 기고만장입디다만, 

솔직히 얘기해서 난 비에 젖은 사람들이 똑같이 비에 젖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그 장면에 그렇게 감동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이 친구가 여기까지 끌고 와서 끝내 날 어쩔 작정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뀌져 버립니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 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마카롱이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니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마카롱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니다. 

한 차분이나 되는 마카롱 눈깜짝할 새 동이나 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먹는 거예요. 

먹는 그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못 되었어요. 

다만 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 줏어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 옵디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 나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맑은 정신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그가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할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비로소 그에게 말을 걸 기회를 얻었다.


“그 뒤 타마키선생이 어떻게 되셨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읍니까?”


“벌써 물어 놓고는 뭘 양해를 구하십니까? 사흘 후에 형사가 우라노호시로 찾아와서 수갑을 채우드군요. 

경찰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사진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진 속에서 난 하코다테 꼭대기에도 올라가 있고 

귤박스를 들고 있고 백덤블링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어느 것이나 내 얼굴이 분명하긴 한데 나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들이었으니까”




(중략)...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가 내 귀에 속삭였다.


“타카미씨 그 사람 꼴로 볼 게 아니네요.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여간내기 아녜요.”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당신 꼼짝없이 당하더구만”


“아이 분해라!”


불을 끈 다음에 아내가 다시 소곤거려 왔다.


“당신두 보셨죠? 오늘사 말고 하나마루씨 배가 유난히 더 불러 보였어요. 

혹시 쌍둥이가 아닌가 싶어서 남의 일 같잖아요. 여덟 달밖에 안된 배가 그렇게 만삭이니 원……”


“당신더러 대신 낳으라고 떠맽기진 않을 거야. 그리고 그냥 놋포빵을 많이 먹은거야. 걱정 마”


나는 그날 밤 마키와 니코의 궁둥이를 번갈아 걷어차는 꿈을 꾸었다. 내가 타카미씨의 궁둥이를 걷어차고 타카미씨가 내 궁둥이를 걷어차는 꿈을 꾸었다.




(중략)...




“당신이 한번 권씰 설득해 보세요. 제가 서너 번 얘길 했는데두 무슨 센터가 실실 웃기만 하믄서 그저 염려 없다구만 그러네요”


폐교 얘기였다.


“타카미씨가 거절하는 게 아니고 돈이 거절하는 거겠지”


아내는 진즉부터 폐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더러는 흉보고 또 더러는 우려해 왔었다.





(중략)...




“아나타선생, 이래봬도 나 러브라이브 우승한 사람이오”



그것뿐이었다. 

내 호주머니에 촌지를 밀어넣던 어느 학부형같이 그는 수줍게 그 말만 건네고는 언덕을 내려갔다. 

별로 휘청거릴 것도 없는 작달막한 체구를 연방 휘청거리면서 내딛는 한 걸음마다 땅을 저주하고 

하늘을 저주하는 동작으로 내 눈에 그는 비쳤다. 

산고팽이를 돌아 그의 모습이 벌거벗은 황토의 언덕 저쪽으로 사라지는 찰나, 나는 뛰어가서 그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돌팔매질을 하다 말고 뒤집혀진 삼륜차로 달려들어 아귀아귀 마카롱을 깨물어먹는 군중을 목격했을 당시의 타카미씨처럼, 

이건 완전히 나체구나 하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암만의 빚을 지고 있음을 퍼뜩 깨달았다. 

전셋돈도 일종의 빚이라면 빚이었다. 왜 더 좀 일찍이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른다.







(중략)...





우리 집에 강도가 든 것은 공교롭게도 그날 밤이었다. 난생 처음 당해 보는 강도였다. 

자꾸만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귀찮다고 뿌리쳐도 잠자코 계속 흔들었다. 

나를 깨우려는 손의 감촉이 내 식구의 그것이 아님을 퍼뜩 깨닫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빨간 꼬마전구 불빛 속에서 복면의 아이돌을 보았다. 

그리고 똑바로 내 멱을 겨누고 있는 식칼의 서슬도 보았다. 귤냄새가 확 풍겼다. 

조명 빛깔을 감안해서 주황 빛을 띤 검정 계통의 보자기일 복면 위로 드러난 코의 일부와 눈동자가 나우 취해 있음을 나는 재빨리 간파했다.


“일어나, 얼른 일어나라니까”


나 외엔 더 깨우고 싶지 않은지 강도의 목소리는 무척 낮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멱을 겨눈 식칼이 덜덜덜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만약 강도가 내 목통이라도 찌르게 된다면 그것은 고의에서가 아니라 지나친 떨림으로 인한 

우발적인 상해일 것이었다. 무척 모자라는 강도였다. 나는 복면 위의 눈을 보는 순간에 상대가 그 방면의 전문가가 못 됨을 금방 알아차렸던 것이다. 

딴에 진탕 먹은 귤로 한껏 용기를 돋웠을 텐데도 보기 좋을 만큼 큰 눈이 착하게만 타고난 제 정신을 어쩌지 못한 채 나를 퍽 두려워하고 있었다. 

귤로 간을 키우지 않고는 남의 집 담을 못 넘을 정도라면 강력 범행을 도모하는 사람으로서는 처음부터 미역국이었다.


“일어날 테니가 칼을 약간만 뒤로 물러 주시오”


강도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내놔, 얼른 내노라니까”


내가 다 일어나 앉기를 기다려 강도가 속삭였다.


“하라는 대로 하죠. 허지만 당신도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일이 수월할 거요”


잔뜩 의심을 품고 쏘아보는 강도를 향해 나는 덧붙여 말했다.


“집안에 현금은 변변찮소. 화장대 위에 돼지 저금통하고 장롱 서랍 속에 아마 아유무가 쓰다 남은 돈이 약간 있을 거요. 그 밖에 돈이 될 만한 건 당신이 알아서 챙겨 가시오”


강도가 더욱 의심을 두고 경거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시험삼아 조금 신경질을 부려 보았다.



“아유무가 깨서 한바탕 소동을 벌려야만 시원하겠소? 난처해지기 전에 나를 믿고 일러주는 대로 하는 게 당신한테 이로울 거요”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뽑은 다음 강도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이부자리를 돌아 화장대 쪽으로 향했다. 

얌전히 의상까지 벗고 운동복차림으로 들어온 강도의 옷을 나는 그때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염려를 했는데도 강도는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를 옮기다가 그만 부주의하게 카나타의 발을 밟은 모양이었다. 

카나타가 갑자기 칭얼거리자 그는 질겁을 하고 엎드리더니 녀석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이었다. 

녀석이 도로 잠들기를 기다려 그는 복면 위로 칙칙하게 땀이 밴 얼굴을 들고 일어나서 내 위치를 힐끗 확인한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강도의 애교스런 행각을 시종 주목하고 있던 나는 

살그머니 상체를 움직여 카나타 잠재울 때 이부자리 위에 떨어뜨린 식칼을 집어들었다.


“연장을 이렇게 함부로 굴리는 걸 보니 당신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만합니다”


내가 내미는 칼을 보고 그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면서 칼을 받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겁에 질려 잠시 망설이다가 내 재촉을 받고 후닥닥 달려들어 칼자루를 낚아채 가지고 다시 내 멱을 겨누었다. 

그가 고의로 사람을 찌를 만한 위인이 못 되는 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에 나는 칼을 되돌려준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식칼을 옆구리 쪽 허리띠에 차더니만 몹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 되었다.


“도둑맞을 물건 하나 제대로 없는 주제에 이죽거리긴!”


“그래서 경험 많은 친구들은 우리 집을 거들떠도 안 보고 그냥 지나치죠”


“누군 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나? 피치 못할 사정 땜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강도를 안심시켜 편안한 맘으로 돌아가게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대개 그렇습니다. 가령 학교가 망한다던가 빚에 몰려서……”


그 순간 강도의 눈이 의심의 빛으로 가득 찼다. 분개한 나머지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면서 그는 대청마루를 향해 나갔다. 

내 옆을 지나쳐 갈 때 그의 몸에서는 역겨울 만큼 귤냄새가 확 풍겼다. 

그가 허둥지둥 끌어안고 나가는 건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한 줌의 자존심일 것이었다. 

애당초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내 방법이 결국 그를 편안케 하긴커녕 외려 더욱더 낭패케 만들었음을 깨닫고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어렵다고 꼭 외로우란 법은 없어요. 혹 누가 압니까,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아끼는 어떤 이웃이 당신의 어려움을 덜어 주었을지?”


“개수작 마! 그 따위 이웃은 없다는 걸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


그는 현관에 벗어 놓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 의상을 보기 위해 전등을 켜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었으나 나는 꾹 눌러 참았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선 다음 부주의하게도 그는 식칼을 들고 왔던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엉겁결에 동호회 부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의 실수를 지적하는 일은 훗날을 위해 나로서는 부득이한 조처였다.


“대문은 저쪽입니다”


동호회 부실 앞에서 한동안 망연해 있다가 이윽고 그는 대문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대문에 다다르자 그는 상체를 뒤틀어 이쪽을 보았다.


“이래봬도 나 러브라이브까지 우승한 사람이오”


누가 뭐라고 그랬나. 느닷없이 그는 자기 경력을 밝히더니만 대문을 열고는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자진해서 삼켜져 버렸다.


나는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냥 지쳐 놓기만 하고 들어오면서 문간방에 들러 타카미씨가 아직도 귀가하지 않았음과 

깜깜한 방안에서 리더 없이 나머지만이 새우잠을 자고 있음을 아울러 확인하고 나왔다. 아내는 잠옷 바람으로 팔짱을 끼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중략)...




아유무가 학교를 다니러 가는 편에 아이들을 죄다 딸려보낸 다음 나는 동호회 부실을 샅샅이 뒤졌다. 

방을 내준 후로 밝은 낮에 내부를 둘러보긴 처음인 셈이었다. 

이사올 때 본 그대로 세간이라곤 깔고 덮는 데 쓰이는 것과 리나쨩 보드를 수리하는 도구들이 전부였다. 

별다른 이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구태여 꼭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을 찾자면 그것은 의상일 것이었다. 

가장 값나가는 세간의 자격으로 장롱 따위가 자리잡고 있을 

꼭 그런 자리에 아홉 벌이나 되는 의상들이 사열받는 병정들 모양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정갈하게 닦인 것이 여섯 벌, 그리고 먼지를 덮어쓴 게 세 벌이었다. 모두 해서 열 벌 가운데 

마음에 드는 일곱 벌를 골라 한꺼번에 손질을 해서 매일매일 갈아 입을 한 주일의 소용에 당해 온 모양이었다. 

잘 닦아진 일곱 중에서 비어 있는 하나를 생각하던 중 나는 한 벌의 그 의상이 그렇게 쉽사리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딸딸하게 깨달았다.


타카미씨의 행방불명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될 때였다. 

내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기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되도록 침착해지려 노력하면서 내게 이웃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누차 장담한 바 있는 호노카를 전화로 불렀다. 

삐기 정성추 2019.10.11 11:14:09
LieeN 어떻게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썼는데 글이 나오는거지 2019.10.11 11:15:23
직관 원본이 머냐 2019.10.11 11:15:51
소셜서비스에이전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2019.10.11 11:18:46
소셜서비스에이전트 중간에 권씨는 오타인가요 2019.10.11 11:18:53
소셜서비스에이전트 타마키라고 쓴 부분 있습니다 센세 2019.10.11 11:19:16
요시마루퍄퍄 한국고전이 원본같은데 직접쓴거면 진짜대단한거임 - dc App 2019.10.11 11:19:21
완도폭격기 원본없는거야? ㄹㅇ 의식의 흐름임?그건그대로 놀라운데 - dc App 2019.10.11 11:19:40
요시마루퍄퍄 아 있구나 - dc App 2019.10.11 11:19:42
LieeN ㄴㄴ 저거 문학작품 중에 있음 2019.10.11 11:21:23
LieeN 존심세우다가 꼬여서 개판나는 뭐 그런 내용의 작품 2019.10.11 11:21:53
Suwawa 약...맛이난다 2019.10.11 11:22:37
キセキヒカル 마루 놋포빵ㅋㅋㅋㅋㅋㅋㅋ - dc App 起こそうキセキを! 2019.10.11 11:23:47
피랑 후속편 직선과 곡선 언제 나옵니까 2019.10.11 11:23:54
알아미타불 니코와 노조미 같은 제목이군요 2019.10.11 11:29:17
피랑 2019.10.11 11:30:51
소셜서비스에이전트 너는 진짜 2019.10.11 11:31:22
킷카와미즈키 2019.10.11 11: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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