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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엎드린 채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얼굴을 베고 있던 팔이 저려왔다.
오늘도 그만 깜빡 잠에 들고 말았다. 평소에도 종종 낮잠을 자곤 했지만 요즘 들어 계속해서 이런다.
언니는 내가 이것저것 열심히 해서 피곤한 탓이라고 말했다.
리아쨩은 여름이라 날이 더워서 그렇다고 했다.
창틈 사이로 스며 들어온 석양을 보니 슬슬 리아쨩이 돌아갔을 시간이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로, 책장 사이에 놔두었던 휴대폰을 집어들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리아쨩이 우라노호시로 온 것은 이번 여름의 일이었다.
세이라씨가 떠나고 나서 수화기 너머로 내색하진 않지만 쓸쓸한 목소리를 짓는 리아쨩에게 방학 동안 여기에서 지내고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때마침 언니도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와 있어, 세이라씨 대신에 언니에게 마음껏 응석을 부리라고 한 것도 역시 나였다.
우리 집에 지내도 괜찮다고 했지만 리아쨩은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너무 실례라고 근처에 방을 빌렸다.
매일 점심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행위를 반복하니깐 그냥 우리 집에서 보내라고 계속해서 권유했다.
처음에는 지금도 충분히 루비쨩에게 많은 것을 받고 있어서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던 리아쨩도, 점점 나의 말에 넘어오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부터 리아쨩은 더 이상 그 애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말없이 넘겼다.
분명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한 즈음부터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리아쨩이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우리가 하는 일은 항상 똑같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하고 나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 방 안에서 TV를 보거나 수다를 나누고 있다 보면 손님 대접을 위해 언니가 마실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있다가 너무 늦어지기 전에 리아쨩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걷다가 돌아왔다.
내가 잠들게 된 이후로도 일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저녁을 먹고 잠든 나 대신에 언니가 리아쨩을 배웅하기 시작했다.
"...비. 루비."
"..."
"루비!"
"삐갸앗!"
"이제야 듣는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거야."
"어, 어라?"
"정말. 요즘 계속해서 멍하니 있고. 너 리틀데몬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해!"
"미, 미안. 요시코쨩..."
"요하네!"
생각났다. 요시코쨩이 잠시 쇼핑에 어울려 달라고 해서 시내로 나왔고, 지금 둘이서 케이크를 먹고 있던 도중이었다.
"정말이지. 괜찮은거야? 요즘 들어서 자주 멍한 것 같아. 전화를 할 때도 그렇고."
"응, 괜찮아! 미안해, 요시코쨩. 어서 케이크 먹자.
... 어라? 내 케이크는?"
"... 정말로 괜찮은거야, 루비? 너 아까까지 말없이 케이크만 먹고 있었잖아. 기억안나?"
케이크를 먹었다고? 내가? 방금까지 했던 행동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루비, 이건 그냥 내가 지레짐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잠시만 확인해볼게. 너 요즘 들어 계속 잠든다고 했지."
"응, 리아쨩이랑 놀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자버려."
"그리고 낮에도 멍하니 있을 때가 있고."
"음. 가끔씩 그런 것 같아."
"... 마지막으로 지금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거지?"
"저녁에 리아쨩이랑 했던 말들이 기억 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잠들어버려서..."
"아냐."
"요시코쨩?"
"잘 들어, 루비.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과잉반응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니 차라리 그런거면 좋겠지만. 니가 지금 말하고 있는 증상들은 말이야..."
방에서 나와 가정부에게 물어보자, '평소처럼' 언니가 리아쨩을 배웅해주러 갔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두 사람을 쫓아갔다.
전력으로 뛰면서 요시코쨩이랑 했던 대화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잘 들어, 루비. 그건 수면제 부작용 증상들이야.'
'수면제? 하지만 루비는 수면제 같은 거...'
거기까지 말하고 눈치챘다. 아무리 둔한 나더라도 요시코쨩이 하고 있는 말을 깨달았다.
'아냐, 요시코쨩. 아냐. 무슨 소리하는 거야. 리아쨩이랑 언니가 내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 그래, 내 지레짐작일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정말로 두 사람이 너한테 수면제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점원이 다가왔다.
'그럴리가 없다니깐. 자꾸 왜 그러는거야, 요시코쨩? 언니가 그렇게 싫어? 리아쨩이 그렇게 싫어? 아님 내가 싫은거야?'
'난 정말로 네가 걱정되서...'
'듣기 싫어. 이만 갈게, 요시코쨩.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
'루비! 루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지금까지 언니가 내게 나쁜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식 혼내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었다.
리아쨩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조금 무서웠지만, 서로 친해지고 나서는 한 번도 내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리아쨩과, 가장 좋아하는 언니가 나한테 그럴리가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생긴 어두컴컴한 구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피곤해서 잠에 들었던 것일까. 정말로 더위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갑자기 컵을 선물해주며 내 컵과 자기의 컵을 구분하기 시작한 리아쨩은, 언제부터인가 집 안에서도 화장을 하기 시작한 언니는, 정말로 관계가 없는 것일까.
전력으로 달리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향했다.
음성파일1. 언니가 들어오기 전에, 내가 잠이 들기 전에 휴대폰에 녹음 기능을 켜둔 채로 책장에 몰래 숨겨두었다.
이것을 들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리아쨩과 언니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 아니면 반대로 내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잠시 잡음이 들리다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루비는 잠들었나요?'
'응, 다이아. 평소처럼 푹 잠에 들었어. 정말, 루비가 둔감해서 다행이라니깐.'
'후훗. 겨우 둘만의 시간이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리아씨.'
이어폰을 잡아 당겼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거칠게 내쉬는 숨이, 힘껏 달린 탓인지 아니면 지금 느끼고 있는 분노 탓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온 몸에서 피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멈춰선 내 앞에 있는 것은 리아쨩의 방 앞. 그리고 이어폰을 잡고 있는 반대편 손에 쥐어 있는 것은 열쇠였다.
루비라면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고 내게 여벌 열쇠를 맡긴 리아쨩. 리아쨩이 언제든 괜찮다고 했다.
의식은 하지 않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관에 보이는 두 켤레의 신발.
내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