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일반 ss) 01. Birth
- 글쓴이
- 월동자
- 추천
- 16
- 댓글
- 1
- 원본 글 주소
- https://gall.dcinside.com/sunshine/2433956
- 2019-05-07 01:48:53
내가 주인공이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깨졌을 때의 기분이란, 평생 한 번이면 충분할 정도로 비참해서. 내가 꿈을 포기한 이유는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졸업은 우리 학년까진가……”
“쉿, 회장님 지나가셔.”
“어쩐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데……”
“그 소식 못 들었어? 이번에 사쿠라우치 씨가 전학 갔잖아.”
학생들은 흔히 학생회장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만큼 무력한 자리도 없다는 것은 경험자만이 알 것이다. 학생회장은
학교를 지지할 뿐, 학교를 구하지는 못한다. 내게는 잘 어울리는
자리일지도 몰라. 나는 주인공이 못되니까.
콕콕.
누군가의 집요한 손가락이 어깨를 찌르며 상념을 뒤흔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왜, 노조미.”
“에리치가 무선 얼굴로
돌아다닌다고 좀 말려달라 하는 아가 한둘이 아니래이.”
“내 얼굴이 뭐 어때서?”
“다 이쁜데, 요 눈썹이 무섭데이. 힘 풀어라,
주름진다카이.”
미간을 콕 찌르며 싱글싱글 웃는 저 얼굴을 보면 화를 낼 수가
없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홰홰 젓자 노조미도 손을 뗐다.
“주름 좀 지면 어때서. 오늘 회의도 없는데 노조미는 집에 안 가?”
“내는 후배가 불러서, 잠깐 보러 간다. 오래 걸릴 거 같으니 에리치 먼저 가.”
“노조미, 사투리 틀렸어.”
“들켰나?” 속 좋게 웃는 얼굴로 손을 홰홰 흔들며 노조미는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거울을 지나치자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 얼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아.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폰을 꺼내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손님이 올
듯하니 아게만쥬 좀 사 와 줄래? 돈은 넣어줄게.>
“호노카는 귀가했으려나……”
어머니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하고, 호노카에게 찾아가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교문을 나섰다.
오랜만에 온 아키하바라는 평소보다도 붐비었다. 무언가 행사라도 있는 걸까?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보니 얼추 감이
왔다.
<화제의 신인 아이돌! 유키
세츠나 게스트>
잘 들어보니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행사장이 그리 멀지 않은 모양이다.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저 멀리에서 한 소녀가 시선을 잡았다.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들고 한 손에는 폰을 꼭 쥐고 방방 뛰는
붉은 머리와 자그마한 체격의 소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였지만 그 눈빛은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보았더라, 저런
눈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아이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 다음 게스트는 드디어 기다리신 화제의 신인! 니지가사키 학원의 유키
세츠나입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은 순수한 기쁨과 호의의 외침이었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왜인지 불편했다. 시선을 둘 곳은
무대밖에 없었다. 스테이지 위에는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관객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를 봐 달라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소중한 마음을 마치 배신하듯이 지나쳐 온
어제와는 이제 작별인사 하고
반복했던 리스크와 후회
변명만 찾아서 멋대로 정해버렸어.
휘둘리는 건 그만둬.
그 순간 이 세상에
오직 나와 그 소녀만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에게 혼나는 어린 꼬마아이가 된 것처럼 전신이 얼어붙었다. 나는 왜 하필 여기 왔을까.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기분에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누군가와 부딪치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정도로, 나는 마비되어 있었다.
“삐긱!”
“아, 죄송합니다. 저……”
시선을 내리자
아까 그 붉은 머리의 자그마한 소녀가 넘어져 있었다. 나 오늘 왜 이러지.
“저기,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아앗!”
주변을 둘러보니
소녀가 들고 있던 종이 봉투를 놓치며 엎은 모양이었다. 사방으로 잡지가 흩어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금방 주울게요.”
“아뇨, 루비도 앞을 안 봐서…….”
다 주워놓고 보니
잡지는 조금 구겨진 것 외에는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소녀에게 건네 주려다 문득 잡지 표지를 보니
무대 위의 그 흑발의 소녀가 보였다. 흑발 소녀와 8명의
다른 소녀가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나는 무심결에 말했다.
“아이돌,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 네! 좋아해요!”
소녀는 정말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 표정, 아리사가 나를 보던 그 표정이었구나.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리자 소녀는 아직도 노래하고 있었다.
노력과 지속 잠들 수 없는 밤이라도
「미소가 보고 싶어」 그래, 모두가 있다면
나도 한때 저렇게
무대 위 사람이었다. 무대가 아닌 관객석에 있는 나 자신이 너무도 낯설어서,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왜…… 좋아해요?”
“네?”
소녀는 깜찍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아이야말로 아이돌을 하면 어울리겠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웃음이 나왔다. 소녀는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곧 환한 미소로 말했다.
“언니가 스쿨 아이돌을 하거든요. 아이돌이 되어서 학교를 구하겠다, 라면서 노래하는 그 모습이 반짝반짝 해서, 좋아하게 됐어요.”
“학교를 구해요?”
소녀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졌다.
“루비가 입학할 학교는, 시골 한적한 곳에 있어서……. 버스로도 한참을 들어가야 있어요. 그래서 점점 학생들이 줄어들어서, 아마 올해를 마지막으로 폐교하게 된다는 거 같아요. 그래서 언니는, 1학년 때부터 학교의 이름을 알리겠다고 아이돌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제작년에도, 작년에도 성적이 잘 안 나와서, 올해가 마지막
기회라고 힘들어하고 있어서, 루비도 함께 하고 싶다고…….”
목구멍을 조여
왔다. 저 멀리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소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무모한 도전을 선택했다. 아이돌이
되어 학교를 구한다니, 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가.
“무모하죠?”
머릿속을 읽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루비도 알아요. 아마 언니도 알았을 거에요. 무모한 도전이라고. 그래도, 루비
말은 잘 못 하겠지만……. 무모하니까 빛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저 너머에서는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달려나갔어! 마음은 강하게 먹는 거야
고민한다면 네
손을 잡을게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참지 않아도 돼
꿈은 언젠가 봐봐, 빛나기 시작해!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얘기만…… 언니는 저희 언니랑 조금 닮은 거 같아서. 그래서
문득…….”
그 말이 왜인지
위안이 되었다. “아니에요, 저도 딱 그쪽 만한 여동생이
있어서. 자, 여기요.”
잡지들을 소녀에게
넘기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저기!”
배시시 웃는 소녀가
몸을 돌리려 하자 문득 말이 튀어나왔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이름이?”
“루비, 쿠로사와 루비에요. 언니는요?”
“아야세 에리. 그럼 쿠로사와 씨,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 인사해요.”
“네, 아야세 씨!”
루비는 무대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두근대는 심장을 자각했다.
무모하니까 빛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소중한 마음을
마치 배신하듯이 지나쳐 온 어제와는 이제 작별인사 하고.
휘둘리는 건 그만둬.
학생회장은 힘이 없다고, 다시는
무대에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실패하기 싫다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런 핑계를 대며 도망 다니던 2년 동안 어딘가에서는
학교를 위해 몇 번이고 무대에 올랐던 소녀가 있었다. 그런 소녀를 보며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갈 각오를
한 동생이 있었다. 학교를 위해 불가능에 몸을 던진 멋진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소녀와 내가 조금은 닮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쁘면서도 마음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도망가자. 나를
위해, 학교를 위해, 이 무모한 순례 길에 발을 디뎌 보자. 고개를 숙인 채 슬픈 결말을 기다리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잖아. 나로
돌아가자.
학생회를 설득하고, 영입할
학생들을 고민할 생각에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의 인지도를 올렸던 선례는 없을까? 신입생 중에 음악에 능한 학생은 없을까? 학교에 이미 아이돌 관련
부서가 있던데, 부원은 몇 명이나 있지? 팀 이름은 뭐가
좋을까?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유리창 속에서 낯익은 소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당당히 고개를 들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무대의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오랜만에 보는 뜨거운 눈이 흡족했다. 소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기서 나를 지켜봐 줘. 내가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변함없는 눈빛으로 감시해 줘.
핸드폰이 울리자 상념이 깨졌다.
폰을 꺼내 보니 호노카였다. 문득 호노카도 노래를 꽤 잘 했던 것이 생각났다. 얼굴도 예쁜 편이고……
“여보세요?”
“에리 쨩? 아게만쥬 하나 빼 뒀는데 언제쯤 도착해?”
“아, 지금 가고 있어. 그보다 호노카,
오늘 시간 괜찮아?”
두리번거리기 | 캬 이것이 스쿠스타 희망편인가 - dc App | 2019.05.07 02: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