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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반 (소설 번역) 훗날의 두사람에게 보내는 약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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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그와데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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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2421641
  • 2019-05-02 17:06:59
 

 "가겠......습니다.


  입을 열어 뱉은 말에 상사는 만족한 미소를 띄고 "그럼 출석에 체크해 둘께!"라며 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뒷모습을 떠나보내며 다시 한번 인쇄물에 눈을 떨궜습니다. 순간의 기분따라 말한 대답이지만 바꿀수는 없으니 어찌 됐든 마리씨에겐 말하지 않으면 안될테죠 분명 그건 어쩔수 없네 라고 말해줄겁니다.

  문제는 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되요 마리씨를 위해서라도 저를 위해서라도... 그러니 이걸로 된겁니다. 이걸로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을꺼야......그렇게 믿고 인쇄물을 치웠습니다.


"건배!!"


  쨍 하고 기분좋은 소리와 함께 여러 잔들이 부딫혔습니다. 제 앞에도 여러 잔들이 놓여져있어서 주위를 따라 제걸 부딫혔습니다.


 "먹어봐 쿠로사와씨, 굴이 맛있다고!"

 "먹어 먹어"

 "가, 감사합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성 동료가 웃으며 접시를 제 앞에 가져다주길래 감사함의 인사를 하고선 술을 확 넘겼습니다.


 "오 왠지 평소보다 더 잘 마시는게 보기 좋네"


  딱 소리를 내며 잔을 테이블에 두었더니 어디선가 제 옆으로 오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길래 봤더니 거기 있었던건 절 망년회에 오라고 했던 상사였습니다. 자리에 앉자 마자 제 앞에 놓여 있던 올리브오일에 절인 굴을 젓가락으로 하나 집었습니다. 

  ......왠지 요새 특히 망년회에 참가한다고 말한 뒤로 부터 자주 근처에 있단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게 있어 오늘의 본 목표는 올해의 노고를 잊는것도 아니고 이런 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온것도 아닙니다. 노고를 잊는다 라는 점에선 뜻이 통할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올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니까요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시간으로부터 마리씨에 대한 감정을 깨끗히 보내버리기 위해, 벗겨내거나 자르는거 만으로는 안될만큼 깊고 깊게 박혀버린 절 괴롭하는 이 독 같은 감정을 더이상 썩히지 않고 뽑아내기 위해 

  분명히 '날아간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그 뜻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마리씨를 따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반드시 떠나가는 사람만 준비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인 제게도 해당되는 부분이 있어요. '길을 떠남'라는 말속에는 '죽음을 완곡히 말함' 이란 의미도 의미도 있듯이 마리씨를 향한 마음을 죽이고 새롭게 기분을 바꾸려는것 같이요


 "쿠로사와씨 말야, 오늘 2차 갈래?"


  갑자기 누가 말을 걸어 옆을 봤더니 상사가 여길 본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그 웃는 얼굴에 '어 그게'라고 머뭇거리니 갑자기 어제 집에서 마리씨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어요



──내일 망년회 어디서 해?

──네?

──돌아오는거 마중나갈테니까

──괘,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요...... 

──음...... 그럼 타협안이야. 꽤나 늦을거 같으면 연락해줘?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찌푸린 마리씨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화내고 있는거 같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던 얼굴,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단거에 다소 죄악감을 느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않았죠

  1차는 9시경에 끝나 그대로 2차에 간다면 집에 가는건 확실히 내일 아침이 되겠네요 딱맞춰 막차를 탈수도 있지만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언제나 회식이 있을땐 1차에서 도망나왔습니다. 아무리 치안이 좋단 곳에서 살더라도 늦게까지 밖에 나와 걷는 거 자체가 꺼림칙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오늘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마리씨가 있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 2개월동안 품은 감정은 저도 놀랄 정도였지만 마음이 결별해야 한다고 하는 슬픔에 옅게 미소를 띄웠습니다.


 "그러네요.... 오늘은 참가하겠습니다"

 "어 난 절대로 안된다고 할 줄 알았어"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눈앞의 사람에게 살짝 쓴웃음을 보내고 다시 한잔 마셨습니다.

  방금전까지는 요새 좀 너무 근처에 있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지금은 마리씨를 생각나지 않게 해준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죠, 적당히 맞장구는 쳐주지만 사람 말이 머리엔 안들어오네요 지금은 그저 이 잔에 담긴 걸 없애는거만 생각하자, 그런 제 자신이 조금은 ...... 엄청 싫어지려 할때


──위잉


  스커트 주머니에 넣어놨던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려서 메세지가 왔단걸 알았습니다. 갑작스러워 어깨를 떤 절보더니 상사가 재밌단 듯이 웃고 있길래, 실례합니다 라고 양해를 구한 뒤 주머니에서 꺼내 화면을 봤더니 알람에 눈이 갔습니다. 그때 그러고보니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부턴 누구에게 연락이 왔는지 확인해 본적이 없단게 생각났습니다.

  쌓여있는 어플 알람은 신경도 안쓰고 지나치고 그 중에서 최신 메세지가 있는 위치에 있는 알람을 보니 손이 멈춰버렸습니다. 최근, 그니까 방금 전에 울렸던 진동꺼요


 오하라 마리: 몇 시쯤 돌아올거 같아?


  수신시간은 '지금'에서 '1분 전'으로 바뀌고 답장을 할까 말까, 화면을 누르려 했던 엄지가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멈췄습니다. 그걸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정면에 앉아있는 동료가 "무슨일 있어?"라고 말을 걸길래 정신을 차렸습니다. 결별하자며 그러기로 했잖아

  급히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고선 안본척하기로 결심했기에 쓰린 가슴을 안고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습니다. 



  1차도 끝나고 조금 사람이 줄은 2차 장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1차와는 완전히 다른 스스럼없는 분위기에 노래방의 분위기가 세상 끝날 듯이 달아오르는걸 보고 있었죠, 그 소리에 끌리듯이 또 한 잔을 받고 나니 점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도대체 몇 잔을 마신건지 평소라면 회식에 갔을 때도 이정도로 마시진 않는데요

  회사사람들이 몇번이고 "한곡 뽑아줘!"라고 부탁했지만 어쩐지 제가 거절하기도 전에 동료가 "안되요 전 스쿨아이돌이 노래하고 나면 다음 사람은 어떻게 해요!"라며 마이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웃어버렸지만 솔직히 고마웠습니다. 아마 이런 상태라면 노래가 노래가 아닐꺼에요


 "쿠로사와씨 괜찮아?"

 "네?"

 "너무 마신거아냐?"


  유명한 광고에 쓰인 곡을 듀엣으로 부르고 있던 동료가 걱정된단 얼굴로 보고 있어서 뭐라 말하려 했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잔은 어느샌가 비워져있네요


 "괜찮은거야? 상태 안좋지?"


  보다못한 모습의 그 남자가 거의 반대편의 자리에서 일부러 여기로 걸어왔습니다. 상사로써 두고 볼 수 없는 처지의 부하직원이 걱정됐었나 봐요


 "안좋지 않아요"

 "아니야. 엄청 취했어"

 "안취했......."

 "하아... 나 잠깐 쿠로사와씨 좀 보내고 올께"


  뭐, 라며 그자리에 있던 전원의 시선이 여길 향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은건 아마 저와 그사람 뿐일꺼에요


 "정신차려 돌아가자"


  빠르게 짐을 챙기더니 제 팔을 끌고 나갔습니다. 뒤에서 술렁리는 분위기를 느꼈지만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몸으로 움직이는데 필사적이었던 저는 그 의미도 알아차리지 못한채 조용히 끌려가 노래방을 나왔습니다. ──그때 눈에 스쳐지나간 시계를 보니 몹시 마음이 동요해 생각지도 않게 그의 손을 떨쳐냈습니다.


 "무슨일이야"


  갑작스런 저항에 놀란 그는 진심 걱정된단 얼굴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시간은 아직 23시 반을 조금 넘었죠 이대로라면 막차를 타버리게 돼... 그 방에 돌아가게 돼... 그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을꺼야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아파 가슴이 삐걱거려요


"돌아가고 싶지......않아요"


 말하고 보니, 정말 이런 말을 남자에게 하는게 맞는건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해보니 옛날부터 올바르게 살아온 제가 할말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네요 하지만 지금 상태의 저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으니까 저나 마리씨를 위해서라도 바뀌지 않으면 안되니까…


 "......무슨일 있었어?"

 "그런게...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

 "돌아가면... 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뺨에 한줄기 뜨거운 액체가 흘러 겨울의 찬 공기에 닿아 차게 변해 술기운에서 깨버렸습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


  말을 잘 이어갈 수 없었어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말려들게 하는건 잘못된 일이란걸 알고는 있지만 머리속에 아른거리는 정말 좋아하는 웃는 얼굴이 사라지질 않아요 잊자고 생각했는데... 길을 떠나자고 정했는데... 말하지 못한 마음은 술과 함께 삼켜버려서 이젠 밖에 나올 수 없을 텐데

  눈물이 흘러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건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아버리는게 싫어요 마리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아... 이런 마음을 버려버리고 싶어...


 "......일단 역으로 가자"

 "......"

 "상사의 명령이야"


  반대하려고 해도 용납하지 않을게 분명하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상하관계를 내세우면 아무말도 할 수 없잖아요 앞에서 걷기 시작한 그의 뒤를 부모님에게 혼난 아이 마냥 터벅터벅 걷는 한심한 모습이 높은 건물의 유리에 비쳤습니다.


  ──완전 글러먹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끼어들게 하고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강제로 마음을 꺾으려 하다니. 이런 건 길을 떠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자신이 변할 용기가 없으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 일시적인 일탈일 뿐

  사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이런... 이런 짓을 해봐야 사랑하는 마음을 잘라내는건 그저 하룻밤뿐이란걸 알고 있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데도 하려했어요

  절 위해서도 마리씨를 위해서라고 몇 번이고 변명을 덮어봐도 결국은 상처받을 미래로부터 도망가려 했습니다.


 "가야할 역이 어디야?"


  역의 매표기 앞에서 서있는 상사가 어깨를 돌려 물어보길래 작게 "혼고마고메에요" 라고 죄악감에 물든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전광판을 보니 00시 오기쿠보행 도쿄 메트로를 타고 요츠야역에서 갈아타 혼고마고메에 도착하면 반쯤 되겠네요

  개찰구를 지나니 답답해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결국 마리씨에게 답장하지 않았으니 지금쯤이면 뭘하고 있을까요 답장도 안해준다고 화내며 자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 내일 아침부터 화낼테니 긴장감 속에 다다음날을 맞이하겠어요

  긴장이 풀어지고 보니 온통 마리씨 생각뿐이에요 이게 제 답이란걸 이미 알고있지만서도...


 "방금 한말 말야"

 "......네"

 "여자가 쉽게 그런말을 하면 안된다고"

 "죄송... 합니다"


  아냐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용서해주니 다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난 쿠로사와씨가 처음 입사했을때부터 쭉 봐왔지만 연애같은거에 흥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네?"

 "연애와 관련된거지? 고민하는거 말야"


  곤란한듯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말려들게 한 주제에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건 못할 짓이라고, 이젠 늦었다고 생각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니 "역시나"라며 왠지 즐거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부럽네 이렇게 이쁜얘가 좋아해주고"

 ".........."

 "싸우기라도 한거야?"

 "싸움은...... 항상하고있어요"

 "하하, 뭐 싸울수록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잖아"


──저기 다이아~ 필요한 물건이랬는데 뭘 사러 가는 거야?

──옷이라던가 조금은 있는게 낫잖아요?

──뭐~? 다이아껄로 괜찮잖......아 그러네 다이아 옷이면 좀 끼겠네, 가슴이라던가 가슴이 

──......평생 속옷 차림으로 지내는건 어떤가요?

──가슴사이즈 다르니까 무리라고! 후크 부숴먹어도 괜찮아?

──시비 걸고 계신건가요!?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It's joke!


  왔던 그날부터 시끌벅적했는데 그 원인은 분명히 언제나 마리씨였죠 절 놀리며 즐거워하는 옆모습에 소리를 지르는게 순서였습니다. 거의 일상대화처럼 주고받은 말싸움은 몇 번을 다시해도 전혀 물려하지 않는 마리씨에게 제가 어쩔수 없단듯이 어울려 준다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저도 그런 대화를 즐거워했습니다. 그것도 이젠 2일뒤면 끝나버리겠네요

  지하철을 타고


 "가끔은 싸우는것도 필요한거야"


──잠시만요 어째서 제 침대에 옮겨와서 자고 있는 건가요?

──뭐? 같이 자고 싶다고 다이아 얼굴에 써져있다고?

──이상한 말하지 마시고 내려가세요 당신 이불은 여기에요

──뭐~! 마뤼도 다이아랑 같이 자고싶은데!

──'도'라니 무슨 소린가요 됐으니까 혼자 주무세요!


  우리의 경우에는 '가끔'정도가 아니었지만 같이 있을 수록 말수도 많아졌습니다.

  요츠야 역에서 갈아탄 뒤에


"쿠로사와씨 말야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았으면해"


──저기 다이아, 봄이 되면 다시 오지 않을래?

──네?

──나 수양벚꽃도 진달래도 직접 보고 싶어졌어

──맘에 드신거 같으니 참 다행이네요

──응 그러니까.... 어때?


  그 날 마리씨가 말한 훗날의 약속에는 아직까지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할 수가 없어요

  혼고마고메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난 여기서 돌아갈테니까 ......아니면 집까지 바래다주는 편이 나을까?"


  상사의 상냥한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더 이상 민폐에 민폐를 더할 순 없으니까요 그 상냥함을 제 가벼운 언사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한번 더 사과하고 이번엔 허리를 숙였습니다


 "아니"

 "정말...... 어떻게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아냐 신경쓰지마"

 "...죄송합니다"


  어느샌가 술이 깨서 냉정하진 머리로 몇번이고 몇번이고 사죄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상사는 곤란하단듯이 웃을 뿐이었지만 사죄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화제와 목소리를 바꿔서 말을 걸어줬습니다.


 "쿠로사와씨가 이렇게 될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매우 좋은 사람이겠네"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응? 그래?"

 "옛날부터 언제나 제멋대로 절 휘두르고 놀리길 좋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라 입만 열만 싸웠거든요"

 "그렇구나"


  네, 라고 고개를 끄덕이니 왠지 의외의 답변이 나와서인지 둘이서 밤길에 웃음을 흘려보냈습니다. 분명히 집에 돌아가 내일이 돼도 마리씨와 싸울테죠 메세지에 답장하지 않은걸 화낼테니까요 그러다 보면 평소때처럼 또 투닥투닥 하겠죠 언제나 제가 마리씨를 화나게 할일을 해도 마지막에는 서로 장난치는 걸로 끝납니다 그런 마리씨의 상냥함을 좋아했어요

  학생 때부터 우리들의 관계는 바뀌지 않은거에요 소꿉친구이자 친구로 그것뿐


"전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말때문에 처음으로 모양을 갖췄다고 느끼는 바람에 마치 잘익은 과일을 으깨 듯이 눈물이 넘쳐 흘렀어요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화내는 얼굴도 슬퍼하는 얼굴도 전부 좋아했습니다. 한번도 전한적은 없지만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 갔을때, 대학을 이탈리아로 갔을때, 일 떄문에 세계를 돌아다닌단 걸 들었을때도, 언제나 응원하고 언제나 좋아했습니다.

  변하지 않았어요, 아니 변할 수가 없었어요.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해보고, 술도 마셔보고, 착한 상사를 이용하려 해보고, 날이 바뀌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상사를 감싼 분위기가 바뀐걸 느껴 숙였던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응 그 사람 혹시 금발이야?"

 "네? 마, 맞아요"

 "금색 눈동자에 눈이쳐져있고?"

 "그, 그래요"

 "화내면 무서워?"

 "네,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 그것도 정확하게 마리씨의 특징을 집어 말해서 동요했습니다. 잘보니 상사의 눈길이 절 보고 있다하기에는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네요 좀 더 멀리 보고있는거 같은......?


 "지금 당장이라도 패러 올 것만 같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어"


   슥하고 등뒤를 가리키는걸 보니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설마 설마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조금 떨어진 전신주 옆에 익숙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둠 속 에서도 잘못 볼리가 없는 ―― 마리씨였어요


 "아......"

 "뭐 내 역할은 이제 끝난거 같으니 돌아가 볼 텐데 말야"


  어둠을 타고 마리씨가 있는 곳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끔 목소리를 낮춘 소리에 이끌려 한번 더 얼굴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조금 얼굴 생김새가 변한 상사 ── 남성의 모습,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당황해버린 제 머리에 툭 하고 남자의 큰 손이 올려졌습니다.


 "이건 내가 주는 보너스인데 ......쿠로사와씨, 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잘해줘야 해, 힘내라고"


  툭툭,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그대로 제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뒷모습을 보였습니다.

  상냥한 상사의 마음에 용기가 흘러 들어옵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후회의 파도가 밀려왔어요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깨끗한 사람에게 전 뭘 하려...... 까지 생각이 미치니 말이 눈물로 변했습니다. 끝도없이 흘러내려 멈출수가 없어요


 "......다이아"


  가까워지던 기분 나쁘단 소리가 조금 거리를 두고 멈춰섰습니다. 눈을 쓱쓱 세게 비비고 돌아보니 거기엔 상사가 말한데로 '지금 당장이라도 패러 올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마리씨가 있었어요


 "저사람 누구야?"

 "회... 사의 상사에요"


  똑똑 흐르고 있는 눈물에 마리씨도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꼈는지 조금은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습니다.


 "......회식때 싫은 일이이라도 있었어?"

 "그런 셈...이죠"


  적당히 얼버무리니 거짓말이란걸 알아챈 마리씨가 '그래'라고 말을 하고 한걸음 더 다가왔습니다.


 "어째서 연락하지 않았던거야"

 "죄송...해요"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

 "죄송해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긴 하냐고"


──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잘해줘야 해


  방금 들은 말이 뇌내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눈꼬리를 올리고 있는 마리씨는 여기와서 본적이 없을 정도로 화내고 있어서 그렇게 만든게 저라고 생각하니 맘이 아팠습니다. 마리씨는 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저만큼은 아닐지라도 특별하다고는 생각해 주는 걸까요?


"너무 걱정하게 하지마"


  꽉하고 왼손을 잡는 오른손이 떨리고 있단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매우 차가워졌단 것도… 생각해보니 겨울이잖아요 그것도 해가 바뀔때니까 도대체 몇시간이나 밖에 있었길래 이렇게 차가워진 건가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파와요


 "손.... 차갑네요"

 "......그게 몇 시에 역에 왔는지 기억도 안나니까"

 "계속... 밖에 있던건가요"

 "......응"


  속삭이는 대화에 다시 눈물이 흘러 넘쳐 잡고 있던 손을 들고 두 팔로 껴안았더니 마리씨의 얼굴이 괴로워 보였습니다.


 "무슨일이야 다이아? 뭐가 있었던거야?" 

 "흑...!"


   오열이 새나가지 않게끔 이를 악물었습니다. 차갑게된 손에 체온을 옮기듯 꼭꼭 쥐고 있으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둘의 손위에 떨어졌습니다. 


  아아── 어째서 이렇게 좋아하게 되버린걸까요

  초등학교때 마리씨가 전학와서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당황하면서도 눈물과 함께 맞서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잘 이어나가지 못했던 말도 언제부터 인가 엄청 배워와서 자기의 감정을 전할 수 있게 됐죠

  호텔방에서 데리고 나오면 나올수록 금색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걸 보는게 기뻤어요 세상에는 많은 색이 있단걸 알려준 것이 자랑스러웠고 같은 풍경에도 저나 카난씨보다 더 흥분하는 옆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졌죠

  그게 중학생이 되니 바뀌었습니다. 마리씨는 스스로 밖을 날아가, 집안일에 매여 있는 시간이 늘어난 제 손을 잡고 여러 곳에 데려다 주었어요 카난씨와 같이 세명일 때가 많았지만 때로는 둘이서 색이 없는 세상을 뛰쳐나오곤 했습니다.

  그때 알아채 버렸습니다. 전에는 색이 가득한 세계를 제가 보여줬지만 이젠 마리씨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색이 없는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단 걸 말이에요

  알아채니 절망에 가까운 감정에 매인 절 다른 곳에 두고 마리씨는 제 앞을 걸어가서 도중에 만난 계단을 달려 올라간거에요 몇 발자국 앞이자 더 위를 향해서, 그럼에도 절 마리씨가 보는 풍경을 옆에서 보게 해줬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지금'은 이렇게나 아름다운걸"

   

  라고 말하는 옆모습을 보고 확신해버렸어요 저보다 앞서나가는 마리씨에겐 이제 더이상 손이 닿지 않는다고, 중학생이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은 이제 더이상 따라갈수 없단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쯤엔 마리씨가 제 키보다 커졌죠


 "다이아...... 어째서 울고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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