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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번역/창작 [요우리코]동화 작가 공주님과 인어 선생님-1-
글쓴이
e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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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2213260
  • 2019-02-21 14:39:45
 


전에 쓰다 그만둔거 물장판 보고 물뽕 차서 완결 내고 싶어서 다시 이어 쓰기 시작함 ㅠ

원래 새로 쓴 내용만 올리려다 너무 예전 글이라 전편까지 그냥 합쳐서 한꺼번에 올림...

조금 가라 앉는 분위기니까 취향 안 맞으면 패스하면 좋을 듯 ㅋㅋ

재밌게 읽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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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가니 그곳은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되었다. 기차가 신호소에 멈춰 섰다. 가느다란 쇳소리를 내는 기차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짐을, 아이 들을 안고 내렸다. 하얗고 하얀 승강장 바닥에 발자국의 꽃들이 피어났다. 하늘에서 눈은 하염없이 쏟아져, 그런 발자국의 꽃들을 덮었다. 그렇게 눈 내리는 날이면 기차역에선 수 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리코는 한 손에는 짐가방, 그리고 다른 손에는 약간 길쭉하고 얇은 가방을 들고 걸었다. 짐 가방은 바퀴가 달려 있었지만, 들 수 밖에 없었다. 눈 덮인 기차역에서 가방에 달린 조그마한 바퀴는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곳에 허락 된 것은 발자국과 커다란 열차 바퀴 뿐 이었다. 눈은 그렇게 간단히, 자신에게 누군가가 새겨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코가 멀디 먼, 눈 내리는 홋카이도 온 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 였다. 지금 그녀는 동화 작가였다.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하얗게 눈이 쌓인, 눈의 세계를 보고 싶었다. 그 이유로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 리코를 향해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쿠라우치 선생님은, 역시 다르시군요.”

“작품을 위해 그 추운 곳까지 가시다니 대단하세요.”


하지만 리코는 눈치챘다. 그들의 눈빛은 그들이 내뱉는 말과는 정반대였다. 거 참 유별나네. 뭘 거기까지 가고 그래. 왜 아주 북극에 간다 그러지? 귀찮음, 한심, 혹은 조롱.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리코의 결정은 그만큼 충동적인 것이었으니까. 덕분에 예정되어 있던 사인회와 강연 들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민폐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리코의 심정은 마치 그때 처럼 궁지에 몰려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떠났던 바로 그때 처럼. 그래서 결국 도망쳤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오직 하얀 눈 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북쪽의 조그마한 마을로. 


리코는 역을 빠져 나와 역 앞의 택시로 다가갔다. 나이먹은 아주머니 택시 기사가 나와 가방들을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택시에 탄 리코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그곳에 적힌 주소를 읽어주었다. 택시 기사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택시는 곧 역 근처를 빠져나왔다. 쭉 뻗은 도로 양 옆으로는 하얀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리코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눈의 나라에 온 것 같아. 그런 리코를 향해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분이 이 촌구석 까진 무슨 일로 오셨대? 그것도 이런 날씨에.”

“아 저 그냥…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구만. 혹시 만난다는 사람이 와타 선생님?”


기사의 입에서 나온 예상 못한 말에 리코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며 기사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이 주소, 와타 선생님이 일하는 학교인걸. 나도 그 마을에 살고.”

“그렇군요…혹시 요우쨔…와타나베 씨를 아세요?”

“그럼, 당연히 알지우. 우리 애 선생님인걸. 거기다 와타 선생님, 이 근방에선 꽤 유명해.”

“그래요?”

“응. 젊고 예쁜 처자가 이런 시골까지 와서 선생님을 하고 있으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하고 다들 처음에 신기해 했다우. 혹시 손님분, 와타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 되시는가? 아이고 나도 참 주책이야. 이런 걸 물으면 실례인데.”


아주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는 사이…라. 왠지 조금 가슴이 아렸다. 리코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아주머니를 향해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렇구만…”


그렇게 짧은 대화가 오간 뒤, 택시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 리코에게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아주머니는 그 뒤로 별 말이 없었다. 그저 하얗기만 한 창 밖을 보며 리코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우쨩은 어째서 이 곳으로 온 걸까. 이렇게 마을 주민까지 신기해 할 정도의, 그런 선택을 하면서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작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마을만큼이나 작은 시골 학교 앞에서 멈췄다.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열어 리코에게 가방을 건내 주고 다시 차를 몰아 마을을 빠져 나갔다. 리코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가방을 들고 교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 오후의 학교에는 그 누구의 손길도 닿아 있지 않았다. 리코는 그 새하얀 운동장에 발자국을 새기며 걸어갔다. 조용한 운동장에서는 사박, 사박 하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왠지 조금 죄 짓는 기분인 걸.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리코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학교 건물 옆에 있는 조그마한 관사 건물 앞이었다. 관사 건물 명패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와타나베 요우’ 라고 쓰여 있었다. 리코는 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레 관사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주 작게 두드렸음에도, 조용한 교정은 문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잠시 후, 문 안에서 경쾌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저기 요우쨩. 나야…리코.”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요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까지 오는 약간 긴 회색 머리, 귀여운 티가 거의 사라진 성숙한 이목구비, 그리고 조금 마른 듯한 느낌의 뺨. 그 모습은 리코의 마지막 기억 속 요우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왠지 그것이 낯설어, 리코는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요우는 그런 리코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리코쨩? 진짜 리코쨩이야?”

“아…응…”

“리코쨩이 여긴 어쩐 일로…우와! 머리에 눈 좀 봐! 우산도 안 쓰고 뭐한 거야?”


요우는 손을 들어 리코 머리 위의 눈을 털어냈다. 그 부산스럽고 활기찬 모습에 리코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모습이 조금 바뀌어도 여전히 요우쨩은 요우쨩이구나. 리코는 약간 미소를 되찾은 얼굴로 요우를 향해 대답했다.


“아 양손으로 짐을 드느냐…거기다 내가 출발했던 곳은 눈이 내리지 않아서…깜빡하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거든.”

“어휴 정말…일단 어서 들어와. 감기 걸리겠다.”


요우는 리코가 대답하는 사이에도 리코의 옷이며 가방이며 온갖 곳의 눈을 손으로 털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살짝 몸을 비켜 리코가 들어올 만한 공간을 내어주었다. 리코는 가볍게 발을 굴려 신발의 눈을 턴 다음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응, 어서 들어와.”


관사 안은 꽤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 작은 석유 난로 위에서 작은 주전자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석유 냄새가 섞인, 약간 매캐한 공기. 리코는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그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올 줄 알았으면 미리 좀 청소라도 해 둘 걸 그랬네. 환기도 좀 시키고.”

“으응, 아니야. 나야 말로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

“미안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코쨩인데, 괜찮아 괜찮아. 그나저나 춥지? 따뜻한 차 한잔 마실래? 아님 커피?”

“음…그럼 차로 부탁할게.”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요우는 그렇게 말하고 방 구석에 있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리코는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약간 오래된 분위기가 느껴지는, 나무로 이루어진 방에선 톱밥 냄새가 났다. 왠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던 리코는 방 구석에 있는 유리로 된 장식장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장식장 안에는 작은 액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영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아이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이를 드러낸 채 환히 웃는 요우의 사진 등. 아마 여기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며 찍은 사진들인 모양이었다. 그 사진들 속 요우의 모습은 꽤나 행복해 보였다. 다행이야. 리코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사진들 밑으로는 좀 더 예전 모습의 사진들이 있었다. 대학 졸업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나, 사복 차림으로 리코 자신과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요우의 사진 등이 있었다. 당황한 표정의 자신을 보자 리코는 웃음이 나왔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요우가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혀버린 탓에 저런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사진들을 둘러보던 리코의 눈에, 구석 안 쪽에 잘 보이지 않는 액자 하나가 보였다. 약간 먼지가 쌓여 있는 작은 액자. 그 액자 속 사진을 확인한 순간 리코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 사진 속에선, 아쿠아의 모두가 교복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리코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진을 이렇게 둔 걸 보면 역시 요우쨩은…


“리코쨔앙- 뭐 봐?”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코는 서둘러 사진에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요우가 양 손에 컵을 든 채 서 있었다. 리코는 그 잔을 받아 들고 요우를 향해 대답했다.


“아, 그냥 좀. 사진이 있길래 구경 좀 했어. 이거 여기 학교 애들하고 찍은 사진이지?”

“응 맞아. 아하하…못 나온 사진이 대부분이라 좀 부끄러운데.”

“그래? 난 요우쨩 다운 것 같아서 마음에 드는 걸? 예쁘게 잘 나오기도 했고.”

“리코쨩도 참…리코쨩 같이 예쁜 사람한테 그런 말 들어봐야 부끄럽기만 하다구.”

“예쁘다니…요우쨩이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귀엽잖아. 인기도 훨씬 많고. 예전 아쿠아 활동을 할 때도…아.”


리코는 서둘러 말을 멈췄지만 이미 말은 밖으로 나와 버린 뒤였다. 약간 굳은 표정의 요우를 보며 리코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떡하지,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리코는 요우의 눈치를 살피며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요우가 애써 미소 짓는 표정으로 리코를 향해 물었다.


“저기 리코쨩.”

“응?”

“그…여기까진 어쩐 일로 온 거야? 솔직히 얼굴을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구. 처음에 목소리만들었을 땐 혹시 이거 찾아오는 보이스 피싱 사기인가, 라는 생각까지 했다니까.”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요우는 밝게 웃으며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리코는 그런 요우를 향해 마찬가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사실 나 이번에 겨울 바다에 관련된 동화를 하나 쓰고 있거든. 그런데 영 글이 잘 써지질 않더라구. 그래서 혹시나 눈이 잔뜩 쌓인 바닷가에 오면 생각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이 곳으로 온 거야. 마침 요우쨩 얼굴도 볼 겸 해서.”

“그렇구나…확실히 여기 겨울 바다는 예쁘긴 해. 나도 많이 좋아하고.”


리코의 대답에 요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리코의 목적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걸 지금 요우에게 이야기 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그저 필요한 얘기만을 해 주었다.


“그나저나 참 신기해. 난 리코쨩이 피아니스트나 작곡가가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갑자기 동화 작가로 유명해 지다니…처음엔 소식 듣고 설마 설마 했는데,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 영락없는 리코쨩이더라. 그래서 진짜구나 하고 믿게 됐지.”

“그랬구나. 뭐 사실 나도 반쯤 취미삼아 쓴 동화가 그렇게 성공 할 줄은 몰랐지만 말야.”

“이야, 이게 바로 천재라는 건 가요? 작곡도 척척 해내고 글도 잘 쓰는 사쿠라우치 리코 님!”

“…왠지 놀리는 걸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아하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밝게 웃는 요우를 보며 리코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다 요우쨩, 기분이 나아진 것 같네.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 역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와중에도 리코는 마음 한편에서, 그 먼지 쌓인 액자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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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도 되는데. 교장 선생님께는 나중에 말씀 드려도 이해해 주실 거야.”

“으응. 아니야. 일단 나도 오늘 하루는 숙소를 예약 해 두었으니까. 적어도 오늘 하루는 거기서 자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럼 뭐 할 수 없지.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야 해. 그리고 지금 어차피 학교는 방학이니까…언제든지 놀러 와도 좋아.”

“알았어. 그럼 내일 또 연락할 게.”


리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사이 눈은 그쳐 있었다. 리코는 다시 눈 내린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 위로 눈이 좀 쌓여 있긴 했지만, 운동장 위에는 여전히 자신이 남겨 놓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교문에 다다랐을 때, 리코는 뒤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관사 현관에는, 여전히 요우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손을 흔들자 요우 역시 머리 위로 크게 팔을 붕붕 휘둘렀다. 리코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지은 다음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리코는 눈 덮인 마을 길을 걸어갔다. 마치 모든 소리들이 눈에 덮어 버린 듯, 마을 안은 정말 고요했다. 들리는 것은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와, 저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뿐이었다. 정말 동화 속 눈의 세계로 온 것 같아,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 넓은 마을에 마치 자기 혼자 만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어, 리코는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마을 변두리, 바닷가 바로 옆에 있었다. 리코는 나이 든 주인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방에 짐을 풀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경치 좋은 방이었다. 리코는 곧 바로 가방을 열어 펜과 원고지를 꺼냈다. 좀 전 동화 속 세계에 있던 것 같은, 그 감정 그대로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펜을 잡는 그 순간 리코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에 그 새하얀 마을 풍경과 바다가 남아 있음에도 글자 하나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왜야. 적어도, 적어도 이 곳에 오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정말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체 왜…? 리코는 펜을 잡은 채 속으로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렇게 리코는 저녁 늦게까지 펜을 잡고 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쓰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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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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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리코는 조금 일찍 일어나 바닷가 근처를 산책했다. 새하얗게 눈 덮인 백사장을 걸으며 이런 곳에 살면 정말 쓰기 싫어도 머릿속에서 글이 쏟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어제의 자신이 떠오르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운 빠진 채 한참 동안 백사장을 거닐던 리코는 요우가 일하는 학교로 향했다. ‘리코쨩, 같이 점심 먹자! 그리고 가방 가져가!’라는 요우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리코는 어제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그만 깜빡하고 작은 가방 하나를 요우네 집에 놓고 갔다. 가는 길에 눈치챌 법도 했다. 하지만 마을 풍경에 심취한 데다가 숙소에선 안 써지는 글 때문에 고민에 빠졌던 탓에, 결국 아침에 요우의 문자를 받고 나서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가방은 펜 만큼이나 리코에게 나름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메시지를 받자 마자 바로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 놓았다. 그렇게 학교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리코의 눈에 묘한 광경이 보였다.


“요우…쨩?”


학교 운동장에서는 요우와 여러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뭐라뭐라 소리 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뭔가 휙휙 날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애들은 그렇다 쳐도, 다 큰 요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눈밭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자 리코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요우쨩, 정말 가끔 강아지 같다니까.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요우와 아이들 쪽을 향해 걸어갔다.


“요우쨩, 나 왔어.”

“아, 리코쨩 왔…으악! 야! 말 할 때 던지는 건 반칙이라니까!”

“선생님도 아까 내가 말 할 때 던졌잖아! 에잇!”

“으앗! 도망가자!”


마구 눈덩이를 던지는 아이들을 피해 요우는 열심히 도망쳤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요우가 리코를 향해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눈덩이는 여전히 요우쨩을 향해 던져지고 있었고…


“꺄악, 자, 잠깐…! 우풉!!!”


리코는 고스란히 그 눈덩이들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리고 리코의 비명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요우까지 그 광경을 본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리코는 눈 투성이인 얼굴로 요우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우후, 우후후후후…요우쨩…?”

“아니 그…리코쨩…이건 그…일종의 사고로…애들 장난이니까…응?”

“맞아, 애들의 장난이지. 그러니까 애들한테는 화 안 났어.”

“아하하, 역시 리코쨩! 쿨한 어른…”


요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리코는 그런 요우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다.만.”

“으, 응?”

“애들의 잘못은, 보통 애들을 지도하는 어른이 책임지는 법이지? 그리고 지금 저 애들의 선생님은…요우쨩이고…?”

“아니 그건…”

“그리고 애초에 요우쨩이 이쪽으로 도망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그게…”

“문답무용!!!”


리코는 양 손 가득 눈을 쓸어 담고, 요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리코의 귀기어린 표정에 요우는 겁에 질린 채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리코쨩! 제발 진정해!”

“진정 할 거야! 요우쨩을 눈 투성이로 만든 다음에 말이지!”

“꺄악! 얘들아 선생님 좀 살려줘!”


요우는 애처롭게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상황 정도는 살필 수 있다. 귀기어린 표정의 리코와 도망 다니는 요우를 잠시 번갈아 보던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 잠시 눈짓을 보내고는, 이윽고 눈덩이를 손에 들고 외쳤다.


“선생님 친구를 도와! 선생님을 공격하자!”

“이, 이 배신자들~!”


결국 모두에게 추격 당하던 요우는 발이 꼬여 눈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직후 분노에 찬 리코의 눈 세례와 아이들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고 눈사람에 가까운 꼴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리코의 분노가 가라 앉았다고 한다.

.

.

.

“으와, 너무해. 축축하잖아…”

“흥. 자업자득이야.”


요우는 울상이 된 채 온 몸의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의 처량한 모습은 본체 만체 하며 아이들은 리코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 누나, 와타 선생님 친구야?”

“응? 응, 맞아. 나는 와타나베 선생님의 친구야.”


리코가 웃으며 대답하자, 아이들은 리코를 둘러싼 채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렇구나. 우와, 근데 언니 진짜 예쁘다.”

“뭐 하는 사람이야? 누나도 선생님이야?”

“혹시 공주님이야?”

“이 바보야! 세상에 공주님이 어딨어!”

“그치만 공주님처럼 예쁘잖아!”

“자자 그만 그만! 선생님 친구가 곤란해 하잖아? 다들 진정해.”


요우는 리코의 앞으로 나서서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살짝 리코를 향해 웃어 보인 다음, 아이들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주었다.


“자 소개해 줄게. 이 예쁜 사람은 선생님 친구야. 사쿠라우치 리코라는 이름이고…그리고…하는 일은 음… 너희들이 읽는 동화책을 쓰는 작가님이야.”

“우와, 작가님이래! 대단하다! 와타 선생님보다 훨씬 더 대단해!”

“이 녀석이?!”


그렇게 투닥투닥 싸우는 선생님과 남자 아이를 뒤로 하고, 한 여자아이가 리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리코를 올려다보며 초롱초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정말 사쿠라우치 작가님이에요?”

“응 맞아. 왜 그러니? 혹시 내 책을 읽어 봤어?”

“네! 저, 집에 사쿠라우치 작가님 책 잔뜩 있어요! 매일 자기 전에 읽어요!”

“그래? 우와…그거 정말 영광인 걸? 고마워.”


리코는 자신의 독자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인기 동화 작가가 되어 주변의관심을 받는 처지라도, 막상 자신의 독자를 만나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어린아이 팬은 더더욱.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소녀의 이야기는 리코를 당황케 했다.


“저는 그 책 중에 ‘귤 소녀’ 이야기를 제일 좋아해요!”


순간 리코는 물론이고, 남자 아이와 투닥거리던 요우까지 그 손을 멈칫했다. 이런, 하필 그 이야기를…리코는 요우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애써 어색함을 감춘 체 소녀에게 대답했다.


“그, 그러니?”

“네. 정말 그건 한 백 번도 더 읽은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그 책 마지막에서, 귤 소녀가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멀리 떠난 친구를 찾아 여행을 떠나 잖아요. 그 뒤 친구를 만나요? 행복하게 살아요? 너무 궁금 했거든요. 귤 소녀가 어떻게 됐는지요. 언니는 작가님이니까 알고 계시죠? 그쵸?”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보며, 리코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 대답, 쉽게 할 수 없는 건데 말야. 특히 요우쨩이 듣는 곳에서는. 하지만 리코는 이렇게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어린 아이를 실망시킬 자신이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녀에게 대답해주었다.


“음…그 뒤로, 귤 소녀는 행복하게 살았어. 정말이야.”

“정말요?”

“응. 정말이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쓴 사람인 걸?”

“에헤헤. 다행이다…”


리코는 웃는 아이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영 불편했다. 솔직히 이 이 이야기, 요우쨩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야. 리코는 그렇게 아이를 향해 웃어주면서도 곁눈질로 요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기에, 리코는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요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자, 쓸쓸하게 중얼거린 말을.


“행복하게…살았다…라.”

.

.

.

그 후 리코는 자신을 향한 계속되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요우가 나서 ‘너희들~ 집에 가서 점심 먹어야지. 안 그럼 엄마가 찾으러 오신다?’라는 말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 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휴우…정말 아이들의 호기심은 대단하구나…”

“그래도 리코쨩, 아이들 상대를 잘 하던걸? 역시 동화 작가라서 그런가?”

“그러는 요우쨩이야 말로 정말 대단하던데. 아까 아이들을 집에 돌려 보낼때도 그렇고, 보이지 않게 아이들을 잘 이끌어내던걸.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요우쨩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는게 느껴 졌어. 아이 같은 면이 있어서 그런가?”

“그거, 칭찬이야?”

“칭찬이야.”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요우를 향해 리코는 살짝 혀를 내밀며 웃었다. 요우는 그런 리코를 향해 자신도 살짝 웃어 보이고는 이내 살짝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많이 고생 했어. 아이들은 말을 안 듣지, 부모님들은 영 못 미덥다는 눈치지…적응하느냐 꽤 힘들었다구. 뭐, 확실히 내가 너무 젊은데다 여기가 첫 부임이다 보니 다들 불안해 할 만도 했지만 말야.”

“요우쨩도 고생이 많았구나. 뭐, 하지만 이젠 무려 ‘인어 선생님’이 되셨으니 다행이지만.”

“리코쨩 나 자꾸 놀리지 마~! 사람을 눈에 파묻질 않나, 어린애라고 하질 않나, 인어라고 하질 않나. 정말…”

“어머? 눈에 파묻힌 건 엄연히 요우쨩의 자업자득이잖아? 그 전에 난 이미 눈 투성이가 됐다구? 그리고 애 같다는 것도, 인어라는 것도 내가 말 한게 아니라 아까 그 아이들이 말 한 거잖아.”


난로 옆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옷을 톡톡 두드리며 리코는 요우를 향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아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리코는 아이들에게 ‘와타나베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이야?’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와타 선생님이랑 있으면 친구랑 노는 것 같아서 좋아.”

“나보다도 더 장난이 심해.”

“…가끔 남자애들하고 노는 걸 보면 누가 애고 어른인지 좀 헷갈려요…”


라는 반응이 나와, 리코로 하여금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응징을 가하는 요우를 보고 리코는 ‘그러니까 그런 소릴 듣지.’라고 말했고, 결국 두 사람은 아이들 앞에서 눈 속을 뒹굴며 또 다시 흥미진진한 난투극을 벌였다. 눈을 번뜩이는 요우를 향해 아이들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와타 선생님, 가끔 수영 가르쳐 줄 땐 정말 멋져.”

“맞아 맞아. 바다에서 수영 하는 거 보면 정말 책에 나오는 인어 같아.”

“정말 예쁜 인어 같긴 해요. 아, 물론 물에서 나오자 마자 바로 다른 사람이 되긴 하지만...”


이어진 아이들의 말에 결국 요우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졌고, 리코는 그런 요우를 보며 헤실헤실 웃어 댔다. 또 다시 대 접전이 펼쳐졌고, 두 사람은 거대한 눈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리코는 요우네 집에서 옷을 빌려 입고 자신의 젖은 옷을 난로에 말려야만 했다.


“나 참…그 애들도 무슨. 인어가 뭐야 인어가. 부끄럽게시리. 그리고 인어 하면 내가 아니고 리코쨩이잖아.”

“어째서?”

“왜냐니? 기억 안 나? 쓰리 머메이드…”

“…다시 눈 속에 파묻히고 싶어?”

“그,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그리고 먼저 시작한 건 리코쨩이라구?!”


그렇게 두 사람은 난로 앞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이렇게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는데, 왜 그동안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피해야만 했던 걸까. 리코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련한 표정으로 요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요우를 보며, 리코는 어쩌면 요우도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리코를 향해 요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리코쨩.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뭔데?”

“그 아까 이야기 말야…귤 소녀.”


순간 요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리코는 흠칫했다. 역시 요우, 아까 그 이야기 확실히 들었던 거구나. 그녀는 조용히 요우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거, 치카쨩 이야기 맞지?”

“…응.”

“그렇구나…”


리코의 대답에 요우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채 멍하니 타오르는 난로의 불꽃만을 바라보았다. 리코는 안타까운 눈길로 요우를 바라보았다. 설마 요우의 입에서 먼저 치카쨩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서 치카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귤 소녀 이야기가 나왔을 때, 리코는 요우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요우가 살짝 손을 들어 방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곳엔 어제 리코가 두고 간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요우는 그 가방을 보며 리코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코쨩, 사실 나 저 가방 열어 봤었어.”

“그래?”

“응.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뭔가 안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너무 궁금해서 한번 살짝 열어 봤거든. 그런데 의외의 물건이 들어있더라구.”


요우는 그렇게 말하며 방 구석에 있던 가방을 가져와 리코에게 내밀었다. 리코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든 다음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작은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코는 그 바이올린을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요우를 향해 물었다.


“의외…라.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응? 아, 그야…리코쨩은 피아노를 연주 했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바이올린이라니, 아무래도 좀…이상하지.”


요우의 대답에 리코는 아무 말 없이 바이올린만 쓰다듬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우는 조심스레 리코를 향해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말하지 않아도 돼.”

“…바이올린은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없으니까.”  

“응?”

“피아노는 치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잖아. 그게 싫었어. 노래를 부르기 위한 작곡도, 연주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자꾸 무심결에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구. 그런데 바이올린은 그냥 연주만 하면 되니까…그래서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됐어.”


물론 너무 늦게 시작한 터라 결국 그냥 취미 수준이지만. 리코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요우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리코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안타까움, 미안함, 후회, 쓸쓸함, 미련 등등. 그런 수많은 감정들이 요우의 얼굴에서 묻어나와 리코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리코는 어째서 요우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그랬구나…리코쨩도, 리코쨩 나름대로…그랬던 거구나…”


요우는 고개를 숙인 체 작게 중얼거렸다. 리코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리듯이 아주 작고 힘없이.


“그래…어쩌면 다른 모두도…그런데도 나는 모두에게….”

“…요우쨩?”

“사실 말야 난…도망친 거야.”


요우는 리코를 향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솔직히 오랫동안 배를 타다 다시 누마즈에 돌아왔을 때 말야, 치카쨩이 갑자기…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릴 듣고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리고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한테 화를 내고 있더라구.”

“…그 얘긴 나도 들었어.”


어른이 된 요우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상선사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를 얻고 먼 바다로 떠났다. 무려 2년 이라는 긴 시간. 그 긴 시간동안 친구들을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떠났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그녀가 받은 첫번째 소식은, 자신의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인 치카가 아주 멀리 떠나버렸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볼 수도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그런 아주 먼 길을. 그리고 요우의 마음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그때, 나 모두에게 실망했다고 하며 화를 냈어. 어째서 다들 치카쨩을 지켜주지 못 했냐고. 치카쨩이 그렇게 가 버렸는데, 어떻게 다들 이렇게 멀쩡히 살아갈 수 있냐고. 치카쨩은 너희들에게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냐고. 그렇게 말하며 마구 화를 냈어.”

“요우쨩…”

“하지만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 다들 내 마음을 이해 해 준 건지, 아니면 그냥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하며 무시 한 건지는 모르지만 말야. 그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며칠을 지내고 나니 문득 생각 나더라고. 가장 너무한건 나라고. 치카쨩이 가장 힘들 때 결국 곁에 없던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였다고. 치카쨩이 날 필요로 할 때, 나는 내 꿈을 이룬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있어주지 않았다고.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한테 화를 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잖아.”

“그건…”

“그래서 깨달았어. 아, 나는 진짜 최악이구나. 나는 치카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그 후회와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 남들 핑계를 댔을 뿐이구나. 정작, 정작 가장 잘못된 건 나인데. 미움 받고 원망 받아 마땅한 건 나 뿐인데, 그저 난 도망쳤을 뿐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결국 난…도망쳤어. 나의 죄로부터. 그리고 나의 후회와 미련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친 거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도망친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어. 대학 시절 심심풀이로 교직 이수를 해뒀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야. 뭐, 어차피 배는 두 번 다시 탈 생각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잘 된 일이었지.”

”요우…쨩…”


리코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요우의 이름을 불렀다. 하필 저 때 저 자리에 없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치카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가피한 공연 스케쥴 때문에 결국 외국으로 잠시 떠나야만 했었다. 그리고 그때 요우가 고향으로 돌아왔었고…요우의 소식을 들은 리코는 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귀국했지만, 그땐 이미 요우가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난 이후였다. 결국 리코는 한참을 혼자 힘들어하다, 결국 수소문 끝에 이렇게 요우를 찾아왔던 것이다.


“리코쨩, 한 가지만 물어 볼게.”

“…뭔데?”

“치카쨩은, 정말 행복해 했어? 아까 네가 얘기 했던 귤 소녀처럼, 그렇게 행복해 했어? 힘들어 하거나, 괴로워하진 않았어?”

“…응.”

“그렇구나…”


리코의 대답에 요우는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달관한 듯한, 그런 아주 힘없고 희미한 미소였다.


“그럼…된거야. 응. 그걸로…됐어.”

.

.

.

리코는 홀로 방에 앉아 멍하니 창문 밖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지만, 종이는 단 한글자도 쓰이지 않은 깨끗한 백지였다. 리코는 한숨을 폭 내쉬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리코쨩, 미안해. 오늘은…그냥 돌아가 줘.’


어떻게든 요우와 더 이야기를 해 보려 했지만, 요우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저렇게 말해오는 통에 결국 리코는 속절없이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요우쨩…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솔직히 리코가 수소문 끝에 요우가 북쪽 마을 어딘가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꽤 예전이었다. 하지만 찾아가도 괜찮을 지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한데다가, 요우에게 나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만한 시간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서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찾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고 나니 그건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겉으론 밝아 보였고, 속내를 말할 때도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듯 담담한 말투로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리코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요우가 가진 마음 속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전혀 치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 졌다는 것을. 이미 요우의 마음 속 깊숙하게 후회와 죄책감이 자리잡아서,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바로 요우가 있는 곳을 알아 내 찾아왔다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죄책감이 자리 잡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 없는 일이었다.


“어떡하지…어떡해야 하는거야…”


오히려 괜히 자기가 와서 요우의 마음을 들쑤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결국 리코는 펜을 내려 놓았다. 어차피 잡고 있어봐야 머릿속에선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상태론 잠도 오지 않는다. 결국 리코는 답답한 마음도 달랠 겸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밤의 바닷가는 생각보다 밝았다.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보자, 리코는 아주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조용한 바닷가에서는 파도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 넓은 백사장을 혼자 거닐고 있으니 왠지 이득 본 기분이었다. 누마즈에 돌아온 것 같네, 눈 만 아니라면 말이지.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백사장을 혼자 거닐었다.

.
.
.
다음날, 리코는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에 자명종 없이도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왜 이렇게 밝지? 조용히 창가로 다가간 리코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얗게 쌓인 눈들이 내리쬐는 겨울 햇빛을 한가득 머금었다 다시 내뿜으며 그야 말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누마즈나 도쿄는 눈이 오더라도 이렇게 쌓이진 않으니까…햇빛을 반사하는 눈이 이렇게까지 밝을 줄은 몰랐는 걸. 어째 영 익숙하지 않네.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하고 리코는 가벼운 차림으로 여관을 나섰다. 요우와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어제 일로 자신은 물론이고 아마 요우 역시 마음이 꽤 복잡할 것이 뻔했다. 좀 더 시간을 가지는게 좋겠지. 조용히 산책이나 좀 하면서 마음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여전히 구름이 좀 껴 있긴 했지만, 구름 사이사이로 햇빛이 새어 나와 밖은 아주 환했다.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빛이 거대한 몇 갈래의 빛줄기를 이루며 겨울 바다 위로 비치는 광경은 신비로움을 자아 내고 있었다. 저걸 천국의 계단이라고 부르던가? 리코는 그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며 백사장을 걸었다. 그때 저 멀리, 아이들 여러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애들은 참 기운도 좋지, 어제보다 날이 좀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추운데 말야.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점점 걸어갈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노는 것 치곤…조금 이상한데?”


리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더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 아이들이 바다 쪽을 바라보며 뭔가 소리치거나 손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리코는 무언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이 뭔가 떠 있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전속력으로 아이들 쪽을 향해 달려갔다.


“얘들아! 저기 지금 들어 가 있는 거 설마…!”

“아, 와타 선생님 친구!”

“언니! 도와줘요!”


아이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울먹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분명…


“저기, 유키쨩이! 유키쨩이 바다에!”


그래, 유키! 리코는 어제 자신의 책을 읽었다고 이야기했던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얌전해 보이는 아이였는데…절대 겨울 바다에 뛰어들거나 할 정도로 장난기가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이 겨울에 바다에는 왜 들어간 거야?!”


리코는 당황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4월 바다에 빠져도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직접 체험해 봤기에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물며 이 한겨울의 바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유키쨩, 목도리를 하고 나왔는데 그게 갑자기 바람에 날려서 바다 쪽으로 날아갔거든요…”

“열심히 말렸는데, 소중한 목도리라면서 찾아야 한다고…”


아이들의 말이 사실인지, 리코의 눈에도 유키의 손에 주황색의 긴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소중한 물건이라도 그렇지, 대체 이런 위험한 일을…! 하지만 일단 그걸 따지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유키는 지금도 당장 완전히 물에 빠질 듯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리코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알았어! 일단 너희들은 어서 마을로 가서 요우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을 불러와! 빨리!”

“네, 네!”


리코의 말에 아이들 두세명이 급히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한 상황. 그 아이들이 구해줄 만한 사람들 데리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긴 아무래도 불안했다. 당장 금새 숨 넘어갈 듯이 허우적 거리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순간, 자신의 책을 정말 좋아한다며, 수줍은 표정으로 웃어 보이던 아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리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는…


“꺄악! 언니!”

“자, 잠깐! 위험해요 누나!”


리코는 그대로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또 무력하게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 생각만이 리코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치우라에 살며 어느 정도 바다에 익숙해져 있었고, 스쿨 아이돌을 하며 단련된 체력이 아직은 좀 남아있는 터라 리코는 어렵잖게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갔다. 곧 유키와 손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나갈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 조금만 더!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힘을 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같은 바다라도 이 북부의 바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리고 너무 다급한 나머지 윗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든 상황. 차가운 바다와 젖어서 무거워진 옷은 순식간에 리코의 체력을 앗아갔다. 일단 아이의 곁으로 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만한 기운은 리코에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이런. 어떡하지. 이대로는 둘 다…’


리코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유키만은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결국 리코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살짝 아래로 들어가 아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힘이 빠진 아이를, 그것도 물 속에서 받쳐 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상황에서 리코는 전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리코는 점점 힘이 빠지며 정신이 흐려져 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대로 나…죽는 거야?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이나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 보다는 오히려 몸이 점점 더 편안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대로 있으면…


‘치카쨩을…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리코는 이제 마지막 남은 의식의 가닥 하나마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려는 순간, 리코는 손 하나가 나타나 자신의 팔을 잡고 거칠게 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느끼며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회색 머리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코쨩! 리코쨩! 정신차려!”

“콜록! 콜록콜록! 요, 요우쨩?!”


요우는 당황해 하며 대답하는 리코를 향해 단호한 표정으로 외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부터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갈 거야! 헤엄 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정신만 차리고 있어, 알았지?”

“그, 그치만 난 힘이 다 빠졌는걸…일단 유키부터 먼저 데리고 나가는 게…”


아무리 요우라도, 힘이 다 빠진 두 사람을 데리고 수영 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리코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리코는 전에 본 적 없이 요우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몸을 흠칫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요우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둘 다 데리고 갈 거야! 입 다물고 내 손이나 잡아!”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우는 힘찬 동작으로 해변 방향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런 요우의 손에 이끌려 가며 리코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와중에도 감탄했다. 수영을 잘 하고 체력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 뒷모습을 보며, 리코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요우쨩의 뒷모습…멋있는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모두 모래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우는 유키를 조심스럽게 모래 위에 앉혔다. 리코는 무사히 땅을 디뎠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온 몸에 힘이 빠져 그 옆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요우는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리코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리코쨩!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미…미안해…”

“이 날씨에 바다에 들어가면 큰일난다고!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건 리코쨩도 잘 알잖아?!”

“아, 알고 있어…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유키를 구해야 했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는 상황. 리코는 그저 면목 없는 표정으로 사과하며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요우는 잠시 씩씩거리며 리코를 내려다보다, 이내 유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유키쨩도 마찬가지야!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거야?! 겨울 바다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 했잖아! 선생님이 항상 옆에 있어 줄 수는 없다구!”

“그, 그치만 목도리가…”

“목도리가 중요한 게 아냐! 하마터면 유키쨩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못 할 뻔했다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다신 못 보게 되어도 괜찮아?!”

“흐…흐엥…선생님…”


요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유키를 향해 화를 냈다. 리코는 요우가 왜 화를 내는지는 이해가 갔지만 어린 아이를, 그것도 지금 막 무서운 경험을 한 아이를 상대로 저 말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부들 부들 떨면서도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유키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자, 잠깐 요우쨩! 지금 그렇게 화 낼 필요는 없잖아?! 일단 잘못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무사하니까…”

“무사하니까, 가 아니야! 잘못하면 두 사람 다 위험해질 뻔 했다고! 리코쨩, 그렇게 수영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턱대고 뛰어들면 어떡해! 일단 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야 됐을 거 아냐! 정말 그러고도 리코쨩이 어른이야?!”


순간 리코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이지만,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다른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상황이 다급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리코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요우에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애초에 그런 생각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리고 당장 유키가 위험한데 곁에 없던 건 요우쨩이잖아!”

“……”

“아…”


순간 리코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지만, 이미 말은 나와 버린 뒤였다. 이, 이 말만은 요우쨩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이었는데…이 바보! 멍청이! 리코는 그렇게 경솔한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것은 파도 소리와 울먹이는 유키의 울음 소리 뿐이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요우의 입에서 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그러게…곁에 없던 건 나인데…오히려 위험한 걸 알고도 뛰어든 리코쨩인데…괜한 화풀이를 해 버렸네…”

“아니 그…요우쨩…”

“…미안.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그대로 있으면 둘 다 감기 걸릴 거야.”


요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힘없이 뒤돌아섰다. 멀어져가는 요우의 뒷모습을 보며 리코는 일단 유키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유키. 일단 선생님네 집으로 가서 목욕하고 옷부터 갈아입자. 응? 그만 뚝 하고. 알았지?”

“응…저기 언니, 구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사실 구해준 건 요우쨩인걸. 일단 걸을 수 있겠니?”


유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요우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천천히 따라 걸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리코와 요우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조용히 뒤에서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요우의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키는 좀처럼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그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마 아까 요우에게 혼난 것 때문에 무서운 거겠지. 그리고 그때 요우가 살짝 쓴웃음을 짓더니 조심스레 유키의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저기, 아까 선생님이 화내서 미안해. 이제 화 안 났으니까…어서 들어가서 목욕 하자. 응?”

“아니야. 선생님은 나쁘지 않아. 멋대로 바다에 들어간 거 잘못했어요…”


유키의 대답에 요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유키를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채우며, 요우는 리코를 향해 말했다.


“물이 채워지면 리코쨩도 같이 들어가. 난 나중에 따로 씻을 테니까. 어른 세 명이 들어가긴 좀 좁거든.”

“…알았어.”

.

.

.

목욕이 끝나고, 리코는 요우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요우가 미리 펴 둔 이부자리에 유키를 눕혔다. 유키는 지쳤는지 금새 잠들어 버렸다. 리코는 미소 지으며 잠든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어서…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한참 동안 자는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든 순간, 욕실에서 나오던 요우와 눈이 마주쳤다. 요우는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리코의 곁으로 다가와 앉고는 조용히 자는 유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광경을 보며 리코는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하긴 좀 전 까지만 해도 정말 말 그대로 죽을 뻔하다 살아났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어서는 곤란했다. 요우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리코는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요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저기…”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내 핫! 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리코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이, 이런 벽쾅 동인지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거였어?!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리코는 속으로 고민했다. 어쩌지, 이대로 그냥 있을 수도 없고… 그러던 중 문득 리코는 좀 전 바닷가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좋아, 아까도 요우쨩이 먼저 입을 열게 만들었지. 그럼 이번엔 내가…리코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요우쨩…미안해.”

“응? 리코쨩이 왜 사과를…”

“그야 수영도 잘 못하면서 무턱대고 바다에 들어가서 요우쨩을 걱정시켰으니까.”


리코의 말에 요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따지고 보면…먼저 리코쨩을 그렇게 몰아붙이고 심하게 화를 냈으니까. 내 잘못이 더 큰걸.”


요우의 말에 리코는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충분히 요우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요우가 대체 왜 그랬을까? 결국 리코는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 요우쨩…한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아?”

“응? 뭔데?”

“아까…왜 그렇게 화를 냈던 거야?”


-계속-



citelg 2019.02.21 14:41:11
사다하루 첫 문단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이 왜 나오나 했네 2019.02.21 14:42:13
통피맨 2019.02.21 14:58:00
ellin 눈내리는 마을 배경 도입구로는 설국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인용... 2019.02.21 14: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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