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번역/창작 [요하리리/창작ss] 어디로 가야 할지 - 1
- 글쓴이
- 땀드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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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gall.dcinside.com/sunshine/2204600
- 2019-02-16 07:57:48
“......돌아와야 해”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목덜미를 따라 갈 곳을 잃은 채 흐르는 땀방울, 헝클어진 머리, 빨갛게 상기된 얼굴. 나는 악몽을 꾸었다. 꿈이란 걸 인지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까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머리 맡에 놓은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르키고 있었고 다시 잠에 들려 누웠지만 쉽사리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무서웠다. 내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어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간만에 꾼 악몽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섬짓한 감각이 내 온몸을 차갑게 휘감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무서웠다.
찝찝한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무심코 문 옆에 걸려있는 교복 한 벌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엔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이 걸려있었다. 주름진 체크무늬 치마와 남색 블레이저 그리고 파란색 리본. 한눈에 봐도 다른 교복인걸 알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라서 몹시 지쳐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악몽을 꾼 시점으로부터 나의 모든 것은 달라졌다.
「요시코, 일어나야지 이제? 첫 학기부터 지각하면 다들 안좋게 생각할거야」
자욱하게 깔려있던 어둠은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이 창문너머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첫 학기? 첫 학기는 이미 시작한지 한참이나 되었다. 아직 잠에 취해서 잘 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꿈에서 덜 깬거야? 얼른 씻고 준비해야지.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시절처럼 네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단다?」
이상함을 느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의심했다. 동시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했다.
내 방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책상과 의자, 옷장, 침대와 이불, 방안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든 게 내 것이 아니었다. 새벽에 꾸었던 악몽에서 아직 깨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침대 위에 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OO년 O월 OO일
너무나 놀란나머지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확히 1년 하고도 6개월 전으로 시간이 되돌려져있었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방 한 구석에 걸려있는 교복. 그것은 의심할 여지 하나 없는 오토노키자카의 교복이다. 어째서 내 방에 걸려있는거지, 라고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들려오는 건 빨리 준비하라는 엄마의 말 소리 뿐.
영문도 모른 채 내 집이지만 내 집이 아닌 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첫 학기의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운 교복을 입고 새로운 식탁에 앉아 새로운 수저를 들고 새로운 집안의 모습을 보고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계단 위로 쭉 올라가면 되는 거 알지? 엄마는 바쁘니까 먼저 가도록 할께. 이상한 사고쳐서 또 집안에 하루종일 틀어박히지 말고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렴?」
그런 말 따위 전혀 머릿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애초에 누마즈에 있어야 할 내가 도쿄에 있다. 금방이라도 참고있던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마저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 좋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계단을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가던 중 익숙한 모습이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매끄럽게 떨어진 와인색의 머릿결과 따스한 봄 향기를 머금은 벚꽃색의 소녀.
반가운 마음에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세게 안았다.
「리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깨어나고 보니 이런 곳에 있어」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나를 이상한 세계에 어울리는 이상한 아이로 만들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며 나를 보고 있는 노란 색깔의 눈동자는 끝도 없이 깊어서 흔적도 없이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리코의 모습을 다시 보니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교복은 달랐다. 나와 똑같은 ‘오토노키자카’의 교복이었다. 리코는 죄송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란 말을 남기며 다시 갈 길을 갔다.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세계로 날라온 것일까. 나는 무엇때문에 이 세계에 존재할까. 여러가지 물음들이 사방에서 떠올랐다. 속이 매스꺼워졌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거북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빠르게 길을 걸었다.
학교 구조를 잘 몰랐던 나는 다른 학생들의 도움을 통해서 겨우겨우 내가 배정된 반으로 올 수 있었다. 반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간 듯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 나는 이런 취급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칠판에 적혀있는 임시 자리 배치도를 보고 자리를 찾아갔다. 앞에서 부터 자리를 차례대로 보던 중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움찔하자마자 동시에 그녀도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듯 했다. 곧 이어 어색한지 고개를 숙이며 간단히 인사를 하곤 시선을 피했다. 꽤 상처되는 행동이잖아..
리코의 왼쪽 뒷자리가 내가 앉을 자리였다. 이정도의 거리라면 눈이 마주칠 일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애써 지운 거북한 느낌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위장 속 깊은 곳에 끈적한 진흙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자연스러울까. 아니 애초에 말을 걸어도 되는 걸까.
나는 하루종일 자리에 앉아서 우선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 봤다.
- 나는 지금 오토노키자카 여학교에 있다.
- 나는 지금 1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 나는 지금 리코와 동급생으로 있다.
- 하지만 리코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다.
대충 이렇게 정리를 했다. 일단 이 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리코와 어떻게든 친해질 수 밖에 없다는 예감이 확실하게 들었다.
하지만 리코에게는 나의 첫 인상이 좋지않게 시작된 것 같아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과 1년 전이라 해도 수수한 얼굴에 눈가엔 어딘가 갸냘픈 느낌이 서려있었고 정말 누군가 건드리면 툭하고 부서질 듯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신비한 모습의 아이었다.
그런 아이를 대상으로 아침에 갑자기 울면서 껴안으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로써 처음보다 더 다가가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모든 건 바뀔 수 없다. 나는 수업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리코에게 다시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리코?」
평소답지 않은 딱딱한 말투로 리코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가방을 챙기던 리코는 내 부름에 응하듯 천천히 뒤를 돌아서 내게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왜 그러시는가요? 라며 내게 되물었다.
순간 할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시적인 정적. 나는 숨막히는 침묵을 깨고 다시 말을 걸었다.
「나야 나. 츠시마 요시코라구? 혹시 기억 안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라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모든게 다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콩쿠르」
「네?」
「리코 피아노 치잖아. 상도 많이 받았었고」
「그런...건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리코는 진심으로 놀란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 리코쨩 그게 말이야 사실은, 내가 악몽을 꾸고 일어나니 과거로 돌아와있었고 거기에다가 리코와 같이 오토노키자카 교복을 입고 있어. 또 거기에다 우리는 동급생이야. 이제 알겠지? 라는 대답 따윈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그럴싸한 대답을 찾다가 아무말이나 막 뱉어버렸다.
「패, 팬이에요 사쿠라우치 리코씨...」
「...네?」
「그게 사실은 어릴 적 콩쿠르 대회에서 사쿠라우치씨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그 뒤로 동경하게 되어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내가 한 변명치고는 아주 완벽했다. 단지 너무 당황해버려서 리코가 아닌 사쿠라우치씨라고 말해버렸지만...
「아... 그러시구나.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조금 쑥스럽네요」
아까보단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예의바르게 고개 숙이며 인사한다. 처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니 조금 장난을 치고싶단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다니요? 사쿠라우치씨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항상 동경해왔어요.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게 너무 기뻐요. 그리고 눈부실정도로 예뻐요」
그 말을 듣자, 벚꽃색의 도톰한 입술은 무슨 모양을 해야할지 모른채 우물쭈물 거렸고 새하얀 피부는 금새 붉어지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되었다.
위험하다.. 단순히 장난 칠 생각으로 한 말인데 이렇게나 귀엽게 반응 할 줄이야. 앞으로 이런 장난응 쳤다간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와와... 거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리코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자꾸만 기분이 좋고 가슴이 답답하고 리코를 꼭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다.
「저기 괜찮다면 같이 돌아가지 않으실래요?」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내왔다. 이렇게나 활짝 웃는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계속 두근두근 거리고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내 얼굴은 부끄러움에 물들어서 빨갛게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리코에게 좋다고 대답한 뒤 같이 학교 밖으로 나갔다.
「...츠시마씨는 언제부터 제 연주를 들으셨나요?」
서로 어색해서 한참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리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 저 그게, 음... 어릴 적 엄마를 따라서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되어서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안나네요...」
「그렇구나. 어머님이 피아노 연주쪽으로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하하...」
어색해하며 대답을 하자 리코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새하얀 뺨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내 마음도 똑같이 따라서 리코로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마음이 자꾸만 이상해져 갔다.
「츠시마씨, 괜찮으면 편하게 불러도 괜찮을까?」
「앗, 응 당연하지 편하게 불러도 돼!」
「고마워. 요시코쨩은 참 상냥하구나」
살짝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은 노을 빛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따라서 활짝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대화하다가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리코집 앞에 도착했다. 서로 이야기 한다고 정신이 없던 터라 리코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리코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혹시 괜찮다면 연락처 알 수 있을까 요시코쨩..?」
누마즈에서 학교를 다닐 땐 절대로 없던 상황이라 당황했다. 이런 것이 리얼충으로 가는 단계일까 라고 생각했다. 좋아, 라고 대답하고 리코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리코는 다시 웃으면서,
「고마워 요시코쨩! 자주 연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며 손을 흔든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집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건 이 세계가 아니라 내가 이상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고 즐거워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 집은 어디로 가야하지...?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목덜미를 따라 갈 곳을 잃은 채 흐르는 땀방울, 헝클어진 머리, 빨갛게 상기된 얼굴. 나는 악몽을 꾸었다. 꿈이란 걸 인지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까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머리 맡에 놓은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르키고 있었고 다시 잠에 들려 누웠지만 쉽사리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무서웠다. 내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어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간만에 꾼 악몽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섬짓한 감각이 내 온몸을 차갑게 휘감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무서웠다.
찝찝한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무심코 문 옆에 걸려있는 교복 한 벌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엔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이 걸려있었다. 주름진 체크무늬 치마와 남색 블레이저 그리고 파란색 리본. 한눈에 봐도 다른 교복인걸 알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라서 몹시 지쳐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악몽을 꾼 시점으로부터 나의 모든 것은 달라졌다.
「요시코, 일어나야지 이제? 첫 학기부터 지각하면 다들 안좋게 생각할거야」
자욱하게 깔려있던 어둠은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이 창문너머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첫 학기? 첫 학기는 이미 시작한지 한참이나 되었다. 아직 잠에 취해서 잘 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꿈에서 덜 깬거야? 얼른 씻고 준비해야지.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시절처럼 네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단다?」
이상함을 느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의심했다. 동시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했다.
내 방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책상과 의자, 옷장, 침대와 이불, 방안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든 게 내 것이 아니었다. 새벽에 꾸었던 악몽에서 아직 깨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침대 위에 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OO년 O월 OO일
너무나 놀란나머지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확히 1년 하고도 6개월 전으로 시간이 되돌려져있었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방 한 구석에 걸려있는 교복. 그것은 의심할 여지 하나 없는 오토노키자카의 교복이다. 어째서 내 방에 걸려있는거지, 라고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들려오는 건 빨리 준비하라는 엄마의 말 소리 뿐.
영문도 모른 채 내 집이지만 내 집이 아닌 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첫 학기의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운 교복을 입고 새로운 식탁에 앉아 새로운 수저를 들고 새로운 집안의 모습을 보고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계단 위로 쭉 올라가면 되는 거 알지? 엄마는 바쁘니까 먼저 가도록 할께. 이상한 사고쳐서 또 집안에 하루종일 틀어박히지 말고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렴?」
그런 말 따위 전혀 머릿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애초에 누마즈에 있어야 할 내가 도쿄에 있다. 금방이라도 참고있던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마저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 좋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계단을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가던 중 익숙한 모습이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매끄럽게 떨어진 와인색의 머릿결과 따스한 봄 향기를 머금은 벚꽃색의 소녀.
반가운 마음에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세게 안았다.
「리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깨어나고 보니 이런 곳에 있어」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나를 이상한 세계에 어울리는 이상한 아이로 만들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며 나를 보고 있는 노란 색깔의 눈동자는 끝도 없이 깊어서 흔적도 없이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리코의 모습을 다시 보니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교복은 달랐다. 나와 똑같은 ‘오토노키자카’의 교복이었다. 리코는 죄송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란 말을 남기며 다시 갈 길을 갔다.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세계로 날라온 것일까. 나는 무엇때문에 이 세계에 존재할까. 여러가지 물음들이 사방에서 떠올랐다. 속이 매스꺼워졌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거북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빠르게 길을 걸었다.
학교 구조를 잘 몰랐던 나는 다른 학생들의 도움을 통해서 겨우겨우 내가 배정된 반으로 올 수 있었다. 반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간 듯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 나는 이런 취급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칠판에 적혀있는 임시 자리 배치도를 보고 자리를 찾아갔다. 앞에서 부터 자리를 차례대로 보던 중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움찔하자마자 동시에 그녀도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듯 했다. 곧 이어 어색한지 고개를 숙이며 간단히 인사를 하곤 시선을 피했다. 꽤 상처되는 행동이잖아..
리코의 왼쪽 뒷자리가 내가 앉을 자리였다. 이정도의 거리라면 눈이 마주칠 일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애써 지운 거북한 느낌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위장 속 깊은 곳에 끈적한 진흙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자연스러울까. 아니 애초에 말을 걸어도 되는 걸까.
나는 하루종일 자리에 앉아서 우선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 봤다.
- 나는 지금 오토노키자카 여학교에 있다.
- 나는 지금 1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 나는 지금 리코와 동급생으로 있다.
- 하지만 리코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다.
대충 이렇게 정리를 했다. 일단 이 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리코와 어떻게든 친해질 수 밖에 없다는 예감이 확실하게 들었다.
하지만 리코에게는 나의 첫 인상이 좋지않게 시작된 것 같아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과 1년 전이라 해도 수수한 얼굴에 눈가엔 어딘가 갸냘픈 느낌이 서려있었고 정말 누군가 건드리면 툭하고 부서질 듯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신비한 모습의 아이었다.
그런 아이를 대상으로 아침에 갑자기 울면서 껴안으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로써 처음보다 더 다가가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모든 건 바뀔 수 없다. 나는 수업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리코에게 다시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리코?」
평소답지 않은 딱딱한 말투로 리코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가방을 챙기던 리코는 내 부름에 응하듯 천천히 뒤를 돌아서 내게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왜 그러시는가요? 라며 내게 되물었다.
순간 할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시적인 정적. 나는 숨막히는 침묵을 깨고 다시 말을 걸었다.
「나야 나. 츠시마 요시코라구? 혹시 기억 안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라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모든게 다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콩쿠르」
「네?」
「리코 피아노 치잖아. 상도 많이 받았었고」
「그런...건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리코는 진심으로 놀란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 리코쨩 그게 말이야 사실은, 내가 악몽을 꾸고 일어나니 과거로 돌아와있었고 거기에다가 리코와 같이 오토노키자카 교복을 입고 있어. 또 거기에다 우리는 동급생이야. 이제 알겠지? 라는 대답 따윈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그럴싸한 대답을 찾다가 아무말이나 막 뱉어버렸다.
「패, 팬이에요 사쿠라우치 리코씨...」
「...네?」
「그게 사실은 어릴 적 콩쿠르 대회에서 사쿠라우치씨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그 뒤로 동경하게 되어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내가 한 변명치고는 아주 완벽했다. 단지 너무 당황해버려서 리코가 아닌 사쿠라우치씨라고 말해버렸지만...
「아... 그러시구나.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조금 쑥스럽네요」
아까보단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예의바르게 고개 숙이며 인사한다. 처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니 조금 장난을 치고싶단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다니요? 사쿠라우치씨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항상 동경해왔어요.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게 너무 기뻐요. 그리고 눈부실정도로 예뻐요」
그 말을 듣자, 벚꽃색의 도톰한 입술은 무슨 모양을 해야할지 모른채 우물쭈물 거렸고 새하얀 피부는 금새 붉어지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되었다.
위험하다.. 단순히 장난 칠 생각으로 한 말인데 이렇게나 귀엽게 반응 할 줄이야. 앞으로 이런 장난응 쳤다간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와와... 거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리코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자꾸만 기분이 좋고 가슴이 답답하고 리코를 꼭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다.
「저기 괜찮다면 같이 돌아가지 않으실래요?」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내왔다. 이렇게나 활짝 웃는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계속 두근두근 거리고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내 얼굴은 부끄러움에 물들어서 빨갛게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리코에게 좋다고 대답한 뒤 같이 학교 밖으로 나갔다.
「...츠시마씨는 언제부터 제 연주를 들으셨나요?」
서로 어색해서 한참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리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 저 그게, 음... 어릴 적 엄마를 따라서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되어서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안나네요...」
「그렇구나. 어머님이 피아노 연주쪽으로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하하...」
어색해하며 대답을 하자 리코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새하얀 뺨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내 마음도 똑같이 따라서 리코로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마음이 자꾸만 이상해져 갔다.
「츠시마씨, 괜찮으면 편하게 불러도 괜찮을까?」
「앗, 응 당연하지 편하게 불러도 돼!」
「고마워. 요시코쨩은 참 상냥하구나」
살짝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은 노을 빛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따라서 활짝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대화하다가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리코집 앞에 도착했다. 서로 이야기 한다고 정신이 없던 터라 리코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리코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혹시 괜찮다면 연락처 알 수 있을까 요시코쨩..?」
누마즈에서 학교를 다닐 땐 절대로 없던 상황이라 당황했다. 이런 것이 리얼충으로 가는 단계일까 라고 생각했다. 좋아, 라고 대답하고 리코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리코는 다시 웃으면서,
「고마워 요시코쨩! 자주 연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며 손을 흔든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집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건 이 세계가 아니라 내가 이상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고 즐거워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 집은 어디로 가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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