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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반 [물갤문학][소재글][노조마키]우산, 같이 쓰지 않을래?
글쓴이
e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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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주소
https://gall.dcinside.com/sunshine/1872608
  • 2018-06-26 11:39:58







소재글 다시 써옴


아무래도 앨리스 패러디로 때우기는 좀 찜찜해서;;; 제대로 다시 써옴 ㅠㅠ


비도 오고 해서 비 관련 소재로 한편 써봤음


살짝 우울하고 센티한 분위기 글이라 그거 감안 하고 읽으면 좋을 듯


암튼 재밌게들 읽어 줘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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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최악이야!”


짜악!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멀리 걸어가는 행인들이 놀라 뒤 돌아볼 정도로. 마키는 얼얼대는 뺨을 쓰다듬으며 뒤돌아서는 자신의 애인, 아니 ‘전’ 애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찬 건데, 어째서 내가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의미를 모르겠네.”


마키는 어린 시절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을 작게 읊조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저기 멀어져가는, 불과 1분 전만 해도 자신의 애인이었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불과 어제 까지만 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건만 마치 오래 전, 아니 애초부터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헤어진 연인을 달려가서 붙잡는 그런 장면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마키가 이런 식으로 애인과 헤어진 횟수는 벌써 열 손가락으로 세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하지만 결말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마키는 자신이 정말 상대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인지, 애초부터 상대를 좋아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헤어진다는 행위 자체에 습관이 들어 버린 것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툭, 투둑. 생각에 빠져 멍 하니 서 있던 마키는 무언가 작은 것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뺨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톡,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비…오네…우산 없는데 말야.”


보통 연인과 헤어지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 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보통 그런 경우 빗속을 달리거나, 오열하며 슬퍼하는 장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론 그저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될 뿐이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준다거나 하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산, 같이 쓸래?’


마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절대 들릴 리 없는,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길에는 가끔 우산을 쓴 사람들만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참 바보네. 아직도 난…그렇게 마키는 아주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마키는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 당시 마키의 집안은 한창 병원 사업이 커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밀려오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커지는 사업 규모로 인해 신경 쓸 거리가 정말 한두가지가 아니었기에, 마키의 부모님은 늘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그 시절 마키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물론 어린 마키도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거나 귀찮아 하지 않는 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일찍 어른스러워진 초등학생이라도,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텅 빈 집. 식은 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간식과 저녁 식사. 어린 마키가 늘 봐야 했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싫었던 건, 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오면, 늘 언제나 부모님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로 오곤 했었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아이들은 시무룩 해져 있다가도, 곧 신이 나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 가곤 했다. 그리고 마키는 언제나 그런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고 나면, 마키는 그제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에게 비 맞는 자신의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키가 점점 나이를 먹을 수록, 부모님의 병원 사업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마키는 비로소 비를 맞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식지 않은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어린 시절의 쓸쓸한 추억은 기억 저 편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 싫다’라는 그 감정은 여전히 가슴 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밀려오는 쓸쓸함과 외로움. 마키는 내리는 비를 볼 때마다 그런 감정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뮤즈의 신곡에 대해 고민하느냐 마키는 수업이 끝났음에도 음악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피아노를 뚱땅거리던 중, 마키는 문득 무언가 자잘한 것들이 음악실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비 오잖아…”


마키는 어느새 추적 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를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우산, 없는데 말야. 엄마한테 전화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마키는 곧 그녀의 어머니가 지금 지방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일기 예보를 보고 나오는 건데. 마키는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칠 지도 모르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생각하며, 마키는 다시 피아노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빗줄기는 더 거세지기만 했다. 이대로 라면 오히려 비를 더 많이 맞게 될 것 같았다. 그냥 결국 맞고 갈 수밖에 없겠네. 그나마 내일이 주말이라 교복이 젖어도 괜찮아 다행인가? 마키는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럼 이 곡, 한번만 더 쳐보고 일어나야 겠다.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음악실 문이 드륵, 하고 열리더니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마키쨩 아니가? 왜 아직 집에 안 가고 여기 있는기고?”

“…노조미?”


갑작스레 등장한 노조미의 모습에 마키는 조금 당황했다. 분명 노조미는 아까 에리랑 함께 집에 간다고 부실을 나섰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마키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노조미는 씨익 웃으며 마키를 향해 말했다.


“아아, 난 집에 돌아 가려다가 갑자기 깜빡하고 미뤄 둔 학생회 일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온 거데이. 그리고 일을 끝내고 다시 돌아 가려는데 갑자기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와 본 거데이.”

“그랬구나. 에리는? 학생회 일이면 에리도 같이 오지 않았어?”

“아아, 에리치는 아리사쨩한테 갔데이. 아리사쨩이 우산을 안 챙겨온 모양이라더라. 딱 돌아가려는타이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제. 그래서 에리치는 먼저 보냈데이. 어차피 금방 끝날 일이라 두 사람이나 필요하지 않기도 하고.”

“그랬구나…”


노조미의 설명에 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조미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키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마키쨩은 왜 아직도 안 돌아가고 여기 있는 기고?”

“이번에 새로 만든 신곡에 대해 좀 생각해 볼 게 있어서.”

“그랬구마…”


노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아노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에 마키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집에 안 가?”

“신곡, 칠거제? 내도 한번 듣고 싶어서 말이다. 왜? 안되나?”

“…뭐, 안될 건 없지.”

“그럼 좀 듣고 갈랜다. 괜찮제?”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노조미에게 마키는 대답 대신 한숨을 한번 쉬어 보이고는, 건반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리가 음악실 안을 가득 메웠다. 단순히 기분 탓일 지도 모르지만 마키는 왠지 비 오는 날, 살짝 젖은 공기 속에서 음악을 듣다 보면 왠지 음악이 공기중의 물기를 머금고 귀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빗줄기에 옷이 젖는 것처럼. 마키는 그렇게 귀로 스며드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노조미, 잘 듣고 있으려나? 마키는 슬쩍 눈을 들어 노조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 모습에 마키는 뭔가 가볍게 자신의 가슴을 콩, 하고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만 치려고 했던 건반의 바로 옆 건반을 누르고 말았다. 


마키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여기서 연주를 멈추면, 노조미가 눈을 떠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키는 그 것이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저런 노조미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그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마키의 머릿속에는 그런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결국 원래 써 두었던 악보와 다르게, 그 음에서 이어지는 즉흥적인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신곡이니까 이렇게 즉흥적으로 쳐도 눈치 채지 못 할 거란 생각도 있었다.


마키는 다시 슬쩍 눈을 들어 노조미를 바라보았다. 노조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이야, 알아채지 못 한 모양이네. 마키는 그렇게 안심하며 이제는 즉흥곡이 되어 버린 곡의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윽고 노조미가 눈을 떴다.


“오…좋은 곡이데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마키는 내심 기뻤지만, 일부러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노조미가 갑작스레 씨익,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왜 그렇게 웃어?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고…마키쨩, 연주하다 중간에 한번 실수했제?”

“…어떻게 알았어?”


노조미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뜻. 그런 노조미를 이겨낼 자신은 없었기에 마키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마키의 물음에 노조미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간단하데이. 살짝 음이 어색하다 싶어서 슬쩍 마키쨩 얼굴을 살폈는데…마키쨩, 그때 눈을 감고 있었데이. 그리고 다시 뜨더마. 보통 마키쨩, 피아노 치다 실수하면 눈을 감고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면서 눈을 뜨는 습관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알아챈거데이.”

“…나, 그런 습관이 있었어? 전혀 몰랐는데.”

“보통 그런 습관은 오히려 본인보다 주위 사람이 더 잘 알아 채는 법이다. 왜 드라마나 영화 보면 나오는 거 있다 아니가. ‘당신, 거짓말할 때 손등 긁는 거 모르지?’라고 하는 상황 같은 거 말이데이.”


노조미의 설명에 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노조미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그런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을 들키기 싫어 마키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별 수 있나, 맞고 가야지. 마키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게?”

“응. 가야지. 시간도 늦었고.”

“그렇구마. 그럼 내도 가야겠다. 그런데 마키쨩?”

“응? 왜?”

“왜 우산이 없는 기고? 설마, 우산 안 가져왔나?”


노조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새 마키의 우산이 없는 것을 눈치 채다니, 역시 눈치 빠른 노조미 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좀 전 실수와 달리, 마키는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없다고 하면 노조미는 무조건 ‘그럼 내 우산을 같이 쓰고 돌아가제이!’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마키쨩, 왜 대답을 안 하나?”

“아니 그…음…”

“딱 보니까 마키쨩, 우산 없구마. 그럼 나랑 같이 쓰고 가재이.”


하지만 마키는 노조미와 한 우산을 쓰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아이아이가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노조미와 딱 달라붙어서 함께 우산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마키의 심장에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 어느새 조금씩 노조미를 동경하게 된 자신의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마음을 숨기고 ‘부끄럽다’라는 말만 전한다 해도 노조미는 외려 더 재밌다는 듯 어떻게든 마키에게 우산을 씌우려 들 것이 뻔했다. 마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간신히, 그럴 듯한 핑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야 노조미. 그럴 필요 없어. 우산은 노조미 혼자 쓰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응? 어째서?”

“그게 그…노조미의 우산은 작은 3단 우산이잖아. 비가 조금 오면 몰라도, 저렇게 많이 오는 상황에서 두 명이 함께 쓰는건 무리라고 봐. 둘다 젖어 버리고 말 거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 명은 확실하게 비를 안 맞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 우산을 안 들고 온 건 나인데, 괜히 노조미까지 비를 맞을 필요는 없으니까 말야.”


마키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그럴 듯한 핑계를 생각해 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하지만 마키는 노조미가 뮤즈 최고의 능구렁이 여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노조미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씨익 웃고는 마키를 향해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키는 날 생각해서 그렇게 해줬다 이거제?”

“응 뭐…그렇지…”

“근데 말이다, 내가 마키쨩이 비를 쫄딱 맞을 걸 알면서도 혼자 속 편히 우산 쓰고 집에 돌아 갈 거라고 생각 했던 거가? 내를 그런 사람으로 본 기가?”

“어…어? 아니 그게 아니고…”


예상 밖의 반응에 마키는 당황했다. 하지만 마키가 채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노조미는 마키를 몰아붙였다.


“같이 쓰고 돌아 가자. 안 그러면, 나도 그냥 이 우산 저~따가 집어 던지고 비 맞고 집에 갈 거데이.”

“어, 어? 그, 그런 게 어딨어!”

“여깄데이. 자, 선택해라. 같이 우산 써서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을래, 아님 둘 다 화끈하게 비를 쫄딱 맞고 생쥐 꼴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 갈래?”


마키는 싱글싱글 웃는 노조미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이 도망칠 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양 손을 살짝 들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알았어, 같이 쓰고 가면 되잖아, 같이 쓰면!”

“아하하. 알겠데이. 그럼 어서 짐 챙기그라.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에 가는 게 좋겠데이.”


두 사람은 그렇게 음악실을 나서 복도로 향했다. 현관에 다다랐을 때 즈음, 마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산을 씌워 주는 건 노조미인데 어째서 내가 선심 쓰듯이 말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세상 일이 그렇제.”


마키의 투덜거림에 노조미는 싱긋 웃으며 마키를 달래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키는 아까 당한 일을 복수도 겸 해서, 일부러 심술궂은 말투로 노조미에게 말했다.


“노조미는 할머니야?”

“그러면 반대로 마키쨩은 초등학생 어린애겠구마. 솔직하게 자기 마음도 말 못하고. 그제?


노조미는 외려 더 짓궂은 말로 마키를 놀렸다. 그 말에 마키는 화 보다는 가슴이 철렁 하는 느낌이 들었다. 노조미가 말한 솔직함이란, 아마 우산이나 아까의 실수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키는 지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조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엿보인 것 같아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흐, 흥! 솔직하지 못한 건 노조미도 마찬가지잖아? 러브송 때의 일이라던가…”

“응…그건 맞다. 그래서 항상 내 마음을 알아주는 마키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데이.”


노조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키에게 대답했다. 그 표정은 반칙이잖아…마키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는, 애써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알면 됐어.”

“쿠쿡. 자, 그럼 이제 가제이. 어여 들어오그라.”


노조미는 우산을 펴고 마키를 향해 손짓했다. 마키는 못이기는 척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노조미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마키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마키는 애써 자신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알싸한, 뭔가 기분 좋은, 노노조미부터 나오는 향기에 마키는 더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러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노조미에게 까지 들리는 게 아닐까. 마키는 결국 비에 젖는 것을 감수하고 살짝 노조미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런 마키의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노조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키? 왜 그리 오른쪽으로 가는 거고?”

“아, 아니 그…노조미 쪽이 좀 좁아 보여서 말야…”


마키는 어물거리면서 핑계를 댔다. 하지만 노조미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키에개 대답했다.


“아니다. 내 하나도 안 좁다. 오히려 마키쨩 쪽이 좁아 보이는데. 그러다 어깨 다 젖는데이. 가까이 오그라.”

“아니 난 그…꺄악?!”


노조미는 마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마키의 팔짱을 끼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마키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노조미와 단단히 붙은 채 팔짱을 끼게 되고 말았다. 이젠 심장이 뛰다 못해 아주 터질 것 같은 상황. 자신의 팔로 전해져 오는 노조미의 부드러운 팔 감촉, 거기에 은은하게 풍겨오는 노조미의 샴푸 냄새까지 더불어 마키를 그야말로 궁지에 몰아 놓고 있었다.


“이제 괜찮제? 이러면 된다 아니가. 둘다 덜 맞을 수 있데이.”

“으…응…”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거든?! 마키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살짝 돌아보자, 노조미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예쁘긴 예쁘네. 남은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은데 혼자 속 편하게 말야. 마키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조미는 정말 나랑 이렇게 붙어도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는 걸까? 서슴없이 나랑 팔짱을 끼고, 바짝 달라붙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그런 거 아닐까? 마키는 조금 우울해졌다. 뛰던 심장도 어느샌가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때 노조미가 마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산, 같이 쓰는 것도 나쁘지 않구마. 그제?”

“으…으응.”


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노조미가 마키를 향해 빙긋 웃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키쨩. 앞으로도 내랑 같이 우산 쓰지 않을래?”

“나 참, 그럼 날더러 맨날 우산을 놓고 오라는 소리야?”


정말,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런 때까지 장난이야. 마키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노조미가 진지해진 얼굴로 마키를 향해 대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이다. 내는 우산이 두개 있더라도, 마키쨩과 한 우산을 쓰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거다.”

“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장난 치지 마.”


마키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노조미,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무슨…마키는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서 노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 치는 거 아니다. 내도 많이 생각해보고 말 하는 거데이. 마키쨩이라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거라고 생각한데이.”

“노조미…”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된다. 싫다고 해도, 나는 괜찮데이. 조금 슬프긴 하겠지만, 늘 해왔던 것 처럼 마키쨩을 대할 기다. 마키쨩이 비를 맞고 있으면, 언제나 달려 가서 우산을 씌워 줄 거라 약속한데이.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다른 걱정도 하지 말고 정말 마키쨩이 하고 싶은 대답을 해 주면 된다.”


노조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키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설령정말 싫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마키는 약간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노조미를 바라보았다.


“치사해…”

“그렇나?”

“응. 하지만…괜찮아. 나도 치사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키는 노조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쪽 어깨가 잔뜩 젖어버렸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미와 맞닿은 한쪽 어깨가 너무도 따뜻해서, 마키는 그저 행복한 기분만이 들 뿐이었다.


처음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 그리고 그 뒤로 계속해서 내리는 수많은 빗방울들. 그런 빗방울들을 맞으며, 젖어버린 마음. 노조미는 그렇게 조금씩 마키의 마음을 적셔왔다. 마치, 내리는 빗줄기처럼.

.

.

.

결국 마키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아까 생각했던 것 처럼, 헤어졌다고 해서 비를 맞는 건 그저 궁상일 뿐이니까. 인생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키는 편의점 문을 나서며 우산을 펼쳤다. 이제 비는 기세 좋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런데 우산을 썼음에도, 왠지 한쪽 어깨가 자꾸 젖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대체 왜? 그러던 중마키는 무심결에 한쪽으로 기울여 우산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 참, 이게 대체 무슨 궁상이야. 이제 와서.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산을 똑바로 썼다. 하지만 이미 축축해진 어깨는 무척 기분 나쁜 느낌이 들 뿐이었다.


이미 비에 젖어 버린 옷의 느낌은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옷이 말라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특유의 형연 할 수 없는 꿉꿉한 냄새와 느낌은 옷을 빨기 전 까진 언제 까지고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여전히 노조미를…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마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구. 왠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어서 집에 가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어 졌다. 밀려오는 졸음에, 마키는 눈두덩이를 꾸욱, 하고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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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쨩, 졸리제?”


그 날도 마키는 음악실에서 신곡을 들려준다는 핑계로, 노조미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노조미의 말에 마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마키쨩, 졸리거나 피곤할 때는 늘 그렇게 눈을 누른 데이. 몰랐나?”

“전혀 몰랐어…노조미, 혹시 내 스토커야?”


마키는 노조미를 살짝 흘겨보았다. 노조미는 놀란 듯, 조금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마키를 향해 대답했다.


“와, 들킨 기가? 이거 큰일 났네. 마키쨩만 조용히 해 주면 어떻게 넘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어떠려나? 나,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라서. 이제 곧 무서운 경찰들이 노조미를 잡으러 올 지도 모르겠네.”


마키는 그렇게 노조미를 놀렸다. 그러자 노조미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그건 안된데이. 내가 없으면, 마키쨩 잉잉 울어 버릴 것 아니가?”

“아, 안 울거든!”


마키는 노조미를 향해 볼멘 소리로 항의했다. 그러자 노조미는 깔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키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난 잡혀 가고 싶지 않구마. 할 수 없지, 마키쨩의 입을 막는 수밖에 없겠구마.”

“어떻게 할 건데?”

“이렇게 할 기다.”


노조미는 그렇게 말 하고는, 빙긋 웃으며 마키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다가오는 노조미의 얼굴을 보며 마키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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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는 우산을 쓴 채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런 마키의 곁을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마키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자신이 들고 있는 우산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쓰기엔 작았던, 차가운 세상 속 섬 같았던 우산. 작게만 느껴졌던 그 우산은 이제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 한쪽 어깨. 하지만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다른 어깨에서 느껴지던 따스한 어깨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비가 오는 날이면 늘 그때의 그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됐는데. 이젠 슬프기 보다는, 외려 쓴웃음이 먼저 올라오는 그런 기억들. 이게 익숙해진다는 건가. 이런 것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말야. 마키는 밀려오는 기억들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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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간다고?”

“…응.”

“그런기가…”


노조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노조미를 보자, 마키는 슬픔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런 말을 꺼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외국 유학을 포기하지 못 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마키, 넌 노조미를 좋아 하잖아. 그런데도 왜? 마키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학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조미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간 덕분에, 그 뒤로도 둘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키 자신이 지금 노조미와 멀어진다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마키는 슬픈 표정으로 노조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노조미의 입이 서서히 다시 열렸다.


“뭐, 마키쨩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오히려 축하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데이. 유학 가는 거,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만큼 마키쨩이 똑똑하다는 소리겠제.”


노조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일부러, 마키를 안심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게 마키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마키는 왠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서, 노조미를 향해 쏘듯이 말을 내뱉었다.


“노조미, 노조미는 날 지금 욕 해도 된다고. 울며 화내도 돼. 난 지금 연인을 내버려두고, 저 멀리 외국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 가 버린다는 거라구. 그런데 축하한다고? 노조미는 정말 날 좋아하는 게 맞는 거야?”


마키는 말을 꺼내자 마자 후회했다. 나,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화 내야 할 건 노조미라구. 근데 왜 내가 짜증을 내고 있지? 마키, 너 정말 최악이야. 마키는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비난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함과 슬픔이 어우러진 노조미의 얼굴을 보자 마키는 정말 이대로 따귀라도 한 대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노조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미소 짓는 얼굴로 마키를 향해 말을 꺼냈다.


“마키쨩.”

“…응.”


마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조미는 마키에게 다가와 마키를 꼭 안아 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데이. 마키쨩이 멀리 가더라도, 보기 힘들어 지더라도, 난 마키쨩을 사랑한데이.”

“…나도.”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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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화 안 받았어?”

[좀 바빴구마. 미안하데이.]

“미안하면 다야?”


마키는 전화기 너머의 노조미를 향해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마키가 멀리 유학을 온 이후로, 점점 더 연락하기 힘들어 졌다. 시차도 시차이고, 서로가 너무 바빴기도 했다. 거기다 종종 고향으로 돌아가도 노조미 역시 바쁜 탓에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것은 마키를 더 힘들게 했다. 마키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되었다.


[사실, 내 할 말이 있다.]

“…뭔데?”


마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마키를 놀라게 할 만한 말이 들려왔다.


[나도, 유학 가기로 했다. 유럽으로 말이다.]

“…뭐? 그게 정말이야?”

[응. 그렇게 됐데이.]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학? 노조미가? 그럼…앞으로 고향에 돌아 가도, 노조미를 만날 수 없는 거야? 갑자기 커다란 불안감이 마키의 마음속을 엄습했다. 마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노조미를 향해 말했다.


“있잖아…노조미.”

[응?]

“나…그냥 불안해. 노조미가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야…”


작은 하소연. 너무나도 여린, 하지만 마키의 불안함이 잔뜩 담긴 말 한마디. 마키는 그 말을 하면서도 정말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저 불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키와 달리 노조미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노조미의 말에 마키는 순간 전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어쩔 수 없다고? 노조미는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와 멀어져도? 마키는 너무 큰 충격에 대답조차 하지 못 하고 그저 멍 하니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그때 다시 노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키쨩, 우리 그때 같이 우산 쓰고…비 맞던 거 기억 하나?]

“…응.”

[그거랑 마찬가지인 기다. 비가 쏟아지면, 아무리 젖지 않으려 해도 결국 젖기 마련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가 없는 거제.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고, 이렇게 살다 보면 다 그렇게 되는 기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쏟아지는 비는 절대 피할 수 없는 법 아니겠나.]


여전히 다정하지만, 어딘가 힘이 빠진, 그리고 조금의 체념이 담긴 것 같은 노조미의 말. 하지만 마키는 그런 노조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힘든 만큼, 노조미도 정말 힘들 거니까. 그리고 저런 말을 하는 노조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얼마나 심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지 알았으니까. 마키는 약간 젖은 목소리로 노조미에게 물었다.


“노조미는…정말 그걸로 괜찮아?”

[마키쨩.]

“…응.”

[내는 마키쨩을 사랑한데이. 그리고, 마키쨩도 내를 사랑하고. 일단 그 감정만 남아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 거 아니겠나? 조금 달라져도, 멀어지는 것 같아도, 서로 좋아한다는 그 감정만 남아 있다면 그걸로 된다고 생각한데이.]

“…맞아.”


하지만 마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건 단순히, 서로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이미 두 사람 다 지쳤다는 것을, 서로를 향한 감정이 식고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더 잘 이해해주게 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냥 포기했을 뿐. 그리고 이렇게 하나 하나 포기하다 보면…마키는 차마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떠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마키는 어두운 방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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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마키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 10시네. 마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무심결에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잘 지내? 요새 뭐 해? 하지만 마키는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받는 사람의 메일 주소를 입력하지 않은 채 다시 뒤로 가기를 눌렀다. [발신 메시지를 저장하시겠습니까?] 마키는 ‘예’를 누르고, 임시 저장 메시지 목록을 확인했다.


[오늘 뭐했어? 난 오늘 일 하느라 너무 바빴는데.]

[밥은 먹었어?]

[비 많이 오네. 거긴 어때? 오늘 따라 보고 싶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 곳에는 보내지지 않은, 메일 주소가 적혀 있지 않은 수많은 임시 저장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 동안 몇 번이나 휴대폰을 바꾸면서도, 마키는 주소록을 비롯한 저 메시지 기록들 역시 빠짐없이 다 옮겨서 저장하곤 했다. 차마 저 것들을 지울 자신이 없었다. 그 메시지들을 보며 마키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한심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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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미 바빠…? 요새 연락도 잘 없고,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마키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하지만 보내기 직전, 다시 뒤로 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끄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바쁠 지도 모르고, 자고 있을 지도 몰라. 괜히 자주 연락하면 노조미가 더 피곤해할 지도 모르니까.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이렇게 연락을 하려다가도 다시 그만둔 것이 벌써 수십 번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노조미와 오가는 연락은 점점 줄어 가고 있었다. 애초에 정말 바빴다. 해야 할 공부는 많았고, 이 곳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지내는 것만 해도 정말 몸이 남아 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까. 이렇게 노조미를 떠올리며 연락을 할 틈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연락할 상황이 되어도, 결국 보내길 주저하다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조미…보고 싶어.”


마키는 그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마키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방 안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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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애써 털어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들이었다.


주소가 없는, 보내질 리 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닿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력하는 메시지. 단지 그것은 습관이었다. 저 멀리 기억 속에 묻혀 있는,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행위. 상대가 읽어주거나 답장을 보내주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보내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키는 노조미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과, 곁에 노조미가 없다는 외로움을 달래곤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더 멀어졌다. 딱히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런 식으로 ‘헤어짐’이라는 것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련하게 익숙해져 갔다.  


아무리 우산을 써도 쏟아지는 빗줄기 밑에선 젖어 버리는 것 처럼, 흐르는 시간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금씩 옅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옅어지는 사랑을 잡기 위해 집착하고, 매달리고, 화내고,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서 비를 피해 뛰어다녔던, 발버둥치던 자신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땐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만약 눈에 띌 정도로 급작스럽게 멀어 지는, 그런 이별은 그 당시엔 겪기 싫었으니까. 자신의 입으로 헤어짐을 말 하는 것도, 노조미의 입에서 ‘헤어지자’라는 말을 듣는 것도, 그 어느 것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말했으면, 아니면 노조미에게서 들었다면,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이런 감정들에 짓눌려 있진 않을 텐데. 끊어 내지 못 한 탓에 마치 보이지 않는, 아주 얇고 긴 끈에 아직도 매여 있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은…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마키는 우산을 접고 가볍게 탁탁 털고는 맨션 입구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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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어제 비가 쏟아진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날씨는 아주 맑고 화창했다. 그런 날씨를 보면서,마키는 과거의 기억으로 우울해졌던 어젯밤의 일들이 마치 몇 년 전 일 처럼 아주 멀게 느껴졌다. 그때 마키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을 알아챘다. 음? 전혀 모르는 번호인데? 마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마키쨩, 잘 지냈어? 나 코토리야.]


그리고 그 전화는 놀랍게도, 지금 유학을 가 있는 코토리에게서 온 전화였다. 마키는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 코토리쨩? 왠일이야? 나야 잘 지냈지. 코토리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응. 이제 공부도 어느 정도 다 끝났고, 이제 완전히 일본으로 돌아 갈 생각이야.]

“그래? 잘 됐네. 일본에 오면 꼭 연락해 줘.”

[응. 꼭 그럴게. 아 참, 그런데 말야…혹시 소식 들었어?]

“소식? 어떤?”

[그게 있지…노조미쨩, 지금 독일에 와 있는 건 알지?]


갑자기 나온 노조미의 이름에 마키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코토리가 전하고자 하는 말, 절대 자신이 기뻐할 만한 소식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마키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응…알아.”

[얼마 전에 잠깐 만났거든. 그리고 들었는데, 그…이번에 여기서 결혼하는 모양이야.]


코토리의 말. 그것은 마키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마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작은 목소리로 코토리를 향해 대답했다.


“그렇구나…”

[…괜찮아? 사실 말 할지 말지 굉장히 고민했는데, 왠지 마키쨩한테는 말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전화 한 거거든.]


코토리는 목소리와 말에는 미안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마키는 코토리에게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괜찮아. 오히려 알려 줘서 고마워.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그랬구나…]

“나 참. 왜 코토리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야.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으응…]


그 뒤로 마키는 코토리와 몇 마디 서로의 근황에 대해 더 대화를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노조미, 결혼한다고? 그렇구나…마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좀 충격을 받긴 했다. 노조미의 결혼이라니, 전혀 생각도 하지 못 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슬프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키의 얼굴에는 슬픔이 아니라, 아주 작고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잘 됐네, 노조미. 이젠 정말…행복하면 좋겠어. 마키는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 대체 어째서…? 마키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윽고 깨달았다.


사실 마키는 노조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키가 그리워한 것은 노조미를 좋아하던 시절의 자신, 순수했던 그 시절의 감정. 바로 그것이었다. 노조미를 좋아하던, 노조미를 바라보던, 노조미의 손을 잡던,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자신을, 그때의 그 추억을, 그런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 비에 젖은 옷은 세탁해야 한다. 비에 젖은 흔적이 그립다고 해서, 그것을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비 내리던 그 날의 추억은,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빨지 않고 놔 둬 봐야, 그저 찝찝함을 남길 뿐이다. 흔적에 매달리지 말고, 깨끗하게 다 세탁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키는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저 보내주고 놓아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마키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힘차게.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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