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하루를 마치고 침대로 뛰어든다. 아아, 오늘은 정말 힘들었어.
아침부터 느닷없는 쪽지시험 러시가 오지를 않나. 한 시름 놓나 싶었더니 점심시간에는 까먹고 있었던 Aqours 회의. 게다가 6교시 발표에서는 질문공세까지. 모든 진을 다 빼고 집으로 가니까 갑자기 홍보영상에 느낌이 꽂혀서 마음 가는대로 만들어냈다.
그런데 왜 새벽 2시에 끝났냐고?
뭐, 그야... 게임 좀 하다가 보면 한 판이 1시간이 되고... 파티에 들어가면 2시간이 될 수도 있지, 뭘.
동영상 변환이 완료된 파일을 예약전송을 눌러놓은 후 정리도 끝낸 것이 5분 전.
휴대폰을 열고 등록한 영상을 보면 ‘조회 수 1’이 썰렁하게 찍혀있었다.
“후후후, 역시 타천사의 시간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군...”
썰렁함을 달래보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이었지만 꽤 괜찮은데? 나중에 <타천사의 고독> 구절로 추가해야겠어.
양치질은 한 지 이미 오래고 경단도 무장해제.
오케이. 그럼 이제 자 볼까?
안녕히 주무세요~
. . .
라고 마음을 먹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쳇, 커피를 괜히 마셨나.”
사실 마리가 커피 몇 회 분량을 선물로 줬었거든.
마리가 마시는 커피는 어떨까...싶어서 이번에 한 번 마셔봤는데, 비율이 영 맞지 않은 것 같다.
이걸 어쩐다, 잠은 안 오고. 그런데 심심한데다가 할 것은 없고.
나와는 달리 깊은 잠에 빠진 컴퓨터를 다시 깨울까? 아냐, 방금 전까지 모니터는 질리게 봤어.
그럼 책 보는 건 어때? 싫음. 다음.
그럼 휴대폰은? 휴대폰? 뭐 볼 것이 있던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켠다.
알림 없음. 아, 역시 새벽에는 다들 잘 시간이지. 그럼 어쩌냐, 진짜 할 만한 것 없나?
...흠
지금까지 너무 방 안에서만 생각한 걸까? 마침 공기도 조금 더워지는 것 같고, 창문을 열면 좋겠다.
그리고 새벽의 하늘을 열었다.
하늘은 높고 어두우면서 밝았다. 무슨 모순된 말이냐고? 리틀데몬들이라면 다 알아듣겠지, 뭐!
시원한 공기를 맞이하며 꽤나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 신체의 감각을 채웠다면 이젠 내 영혼의 감각을 채울 차례였다.
“좋았어. 편의점에서 사이다나 사오자.”
그래서 별안간 시내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열어야 몰래 나가는 의미가 있는 거겠지? 조용히, 조용히.
몸이 문 밖으로 빠져나온 뒤에도 긴장을 놓치면 절대 안 된다. 거의 다 나왔는데 문 닫는 소리 때문에 들켜버리면 많이 섭섭하잖아.
문 사이에 손을 끼워 넣어 조용하게 닫자.....이얏!
(달칵)
YES!
소리를 지를 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외친다.
이제부터는 비교적 안정권. 엘리베이터 역시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꽤 크니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가만, 편의점이 한...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사이다 한 캔을 사자고 이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거야? 아 몰라! 새벽 운동이라고 치자.
가로등 불빛 아래 나 혼자만이 걸어갔다.
조용한 덕분에 내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비닐 재질의 바람막이가 마찰하면서 내는 쌕쌕 소리도 구별할 수 있다. 저 먼 곳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나온 거긴 한데, 충동적인 것 치고는 괜찮네.”
하곤 괜히 혼잣말을 해 보았다.
걷던 중 유리에 비치는 나를 발견했다.
역시! 거울에 비친 2차원의 모습조차 완벽하다니!
“욥”하고 엉덩이를 내밀어 보았다. 그랬더니 반대편의 나도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를 같은 편으로 내밀었다.
“홋”하고 허리를 반대로 제쳤다. 그러자 반대쪽도 가볍게 따라했다.
“역시, 역시나였어. 너를 내 리틀데몬 0호로...!”
거울 속 나를 칭찬해주기 위해 거울로 다가갔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빛이 가려졌고 리틀데몬 0호는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뒤에 있는 가로등이 있어야 나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였으니까.
또 다른 나를 만져보려고 했었던 내 오른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랬더니 다시 나타나는 리틀데몬 0호가 있었다.
“거리가 멀면 보이고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다니, 좀 모순되네...”
나 자신을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보인다...? 이것은 진짜 생각해볼만한 소재일까? 조금만 있다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바로 앞에 편의점이거든.
문을 열고 늘 즐겨마시던 사이다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아! 시원해. 역시 이 느낌이다.
삑. “1200원입니다.”
지폐 하나와 동전 두 개를 점원에게 건넨다. 조심스레 손에 받혀진 그것들은 곧바로 포스기로 짤그락, 짤그락.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이다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이 녀석이 12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럼 나는 이 사이다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심심풀이? 오 좋아, 말 되네. 단 음식에 대한 욕구 해소. 내가 단 것을 좀 좋아하긴 하지, 음음.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더는 없는 것 같은데.
한 모금 들이키면서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가치...
가치..
가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로 생각해볼까.
나는 Aqours에서 영상편집을 맡고 있지. 아무도 못하겠지! 후하하하하하!! 어, 그리고 타천사 콘셉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공부? 뭐, 그냥저냥 하고... 요리? 사실 썩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닌 것 같고. 우, 운동? 그래, 인정. 최하위권이야.
그럼 나는 완전 방에 박혀 있는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다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 같던데, 왠지 나 혼자만 거꾸로 사는 느낌이야.
힝, 괜히 시무룩해져서 어느 새 빈 캔을 들고 걸었다.
그러던 중 아까 그 유리창에서 리틀데몬 0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걸어가면서 기분이 좋지 않은지 허리가 앞으로 꽤나 숙여진 채였다.
“너도... 그런 거야?”
내가 섭섭하다고 해서 저 녀석까지 섭섭해 한다니. 조금 안쓰러워졌다. 저 녀석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먼저 당당해지자. 허리를 쭉 하고 펴니 저 녀석도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다.
어이! 나 어때? 나처럼 좀 멋있게 살라고! 하는 마음으로 멋진 미소를 만들어주었다. 그랬더니 반대편에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래, 그거야. 이제 앞으로 가자.”
따라 해보라는 것처럼 앞을 향해 걸었다. 이젠 저 쪽도 갈 곳이 있는 모양인지 발을 바쁘게 움직인다.
“그렇지. 그렇게 균형을 맞추면서 가는거야! 네가 다른 사람과의 균형을 맞추는거야!”
밖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안에서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지. 리틀데몬 0호를 끝까지 바라본 후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뭐였을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기분이었다.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가끔씩은 충동에 몸을 맡기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열었더니 동영상에 댓글이 달려있었다. 벌써??
마리 : 새벽에 알람 울려서 깜짝 놀랐다고! 그래도 고생했고 잘 만들었으니 용서해 줄게♡
마리도 정말...
그래, 이것들의 총합을 나의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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