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일반 [물갤문학] [우미마키] 바다의 공주 - 3
- 글쓴이
- 임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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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6 12:01:03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막연한 말이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갑작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절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이 이야기를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이유요? 그렇군요. 그렇지요. 타당한 이유가 필요한 거로군요. 그러겠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오랜만이기도 하고 원체 사람을 대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니 양해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해드리는 이유는 조금 전 제 물음으로 답할 수 있겠네요. 그 멜로디를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데 알고 계시니까요. 아니, 들을 수 없으신데 알고 계시니까요. 예? 목욕하시다가? 이건 정말··· 이런 말 정말 싫어하지만, 이쯤이면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네. 전 운명이란 단어가 싫습니다. 그녀가 나약해지는 유일한 단어였고, 그녀가 답하긴 난해한 물음을 얼버무리며 끝맺을 때 늘 입에 올리는 단어였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그녀가 바로 이 집의 주인이었죠. 절 끔찍이 아껴주고 위해주던 사람입니다. 친구, 자매, 가족― 그 정도. 그 정도가 되어야 그녀를 표현할 수 있겠군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운동신경, 지적능력, 예술적 재능 모두 뛰어났죠. 그중 음악에 특히나 뛰어났던 그녀는 꽤나 유명한 작곡가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냐 물어보시면 글쎄요. 아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애당초 정해진 길이 있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꿈이었고 부모님도 바라지 마지않았고 최고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뇌신경외과의. 그녀는 자신이 걸어온 로열로드를 등졌습니다. 고통과 노력으로 쟁취한, 최고로 향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에서 이탈하곤 음악의 문을 열었습니다. 맞습니다. 저 때문입니다. 저라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언제나 빛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유치해지기도 하고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늘 다정했고 사랑스러웠죠. 정말 공주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죠. 이름이요? ······. 마키. 그녀의 이름은 니시키노 마키(西木野 真姫)였습니다. ** 그녀와 처음 만났던 오토노키자카 여학원 시절의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자신이 잘난 걸 알고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감을 얻고 그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죠. ”이 정도야 가뿐··· 으윽! 하···! 다구우우우웃!“ ”그렇게 찡그린 얼굴로 말하면 설득력 제로다냐.“ ”시, 시끄러워!“ ”시끄러운 건 너니까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니코?“ ”그, 그러는··· 니, 니코오옷!“ ”니콧치, 아직 버틸만한가 보구마? 오케이. 오늘부턴 스트레칭 강도 업이데이♡“ ”사람살려어어!“ ”조용히 하라니까, 떠올랐던 악상이 다 날아가잖아!“ 학교의 지원이라곤 전혀 없는 동아리 활동. 불결한 옥상 바닥. 난생처음 겪은 혹독한 강도의 운동과 스트레칭. 낯선 경험이 주는 스트레스. 그로 인해 인상이 잔뜩 일그러진 채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며 기세등등이 쏘아대는 그녀의 모습은 자존심 강한 철부지 공주님, 혹은 가시를 세운 채 잔뜩 웅크린 고슴도치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이 유치하고 어리다 느꼈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가장 컸습니다. 전 그런 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요. 언제나 남에게 의지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친구들 뒤에 숨어서 소심하게 그들을 응원하지 밖에 못 하는 나약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친구들은 제가 주관이 또렷하고 남을 생각하는 배려심이 깊다며 이야기해줬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관이 또렷하다는 건 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보고 이르는 말이며 배려심이 깊다는 건 제가 겁이 많고 자존심이나 주관이 없다시피 하니 하는 말이었습니다. 겁이 많고 소심하니 늘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낭떠러지 앞에 다다라서야 떼를 쓰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요. 남들과 부딪치며 마찰을 일으키긴 무섭지만 끝이라곤 없이 어둠만이 존재하는 천인단애나 그 끝에 존재할 죽음이란 개념은 그보다 더 무서우니까요. 저는 날 때부터 한없이 두려움에 떨며 웅크린 고슴도치에 불과했습니다. 가시를 세울 생각도 못 한 채 주변 다른 고슴도치를 보며 선망하는 그런 덜떨어진 존재.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처지에 슬슬 지쳐갈 때쯤에 한 고슴도치가 슬며시 가시를 죽이고 다가왔습니다. 아니, 남들에겐 여전히 따가운 가시가 제게만 전혀 부드러운 털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아. 우미는 대단하네. 어떻게 그런 레슨을 받고서도 그렇게 쌩쌩하게 다닐 수 있는 거야? 가끔은 너무 오글거려서 내 손발이 오므라들 때도 있지만 작사 실력도 준수하고.“ 수많은 시련에 초췌해졌으나 공주님은 여전히, 아니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생각하던 철부지 공주님은 어느새 성장해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밝고, 미칠 것처럼 황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마키.“ 그리고 그 빛과 마주한 순간 생각했습니다. 눈이 멀어버릴지언정 언제나 그 빛을 응시하고 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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