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일반 [ss핫산] Fruit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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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a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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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24 13:00:41
치카리코 ‘가을’이란 단어는 원래 한 계절에서 제철의 식물이 가장 무르익는 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봄에도 가을이 있고, 여름과 겨울에도 가을, 물론 가을에도 가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새인가부터 일 년에서 가장 수확을 많이 하는 가을의 가을을 ‘가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수확이 한가득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예쁘구나. 피아노 잘 치는구나. 작곡도 잘 해. 부끄럼을 잘 타는 면도 귀여워. 리코쨩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얘기한다. 맞아! 그렇지? 정말 대단하지!
사람들이 리코쨩을 칭찬하면 스스로의 일인 것처럼 나는 으스댔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안에 이런 어두운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 누구도 아닌 리코쨩을, 아주 조금 남들보다 빨리 알았다는 것으로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인 듯 양 생각하며 독점하려 했던 것이다. 리코쨩이 팬들과 사진을 찍으려 할 때면 나도 그 사이에 억지를 부려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듯하게 거짓말해서 리코쨩을 그 속에서 빼낸 적도 있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이 감정의 정체도 이름도. 근사한 것. 덧없는 것. 아름다운 것. 애절한 것. 멋진 것.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미사여구가 이것을 표현했던가. 세상은 이 감정을 훌륭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가슴을 강하게 찌르거나 때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도 하는 등 순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둡고 아프고 격렬하며 뜨겁고 달콤하다. 자신조차도 익숙해지기가 어려운 예민한 존재들의 집합체. 그것이 이 감정의 정체이다. 인기가 넘쳐나는 리코쨩에게 나 같은 애가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리 없겠지만.
늦더위도 물러간 10월 상순. 시원해서 기분 좋은 바람이 뺨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하늘을 향해 빠져나갔다. 간지러움에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나의 허벅지를 스치고 있었다. “음악실도 괜찮을 것 같아. 오늘 날씨 좋잖아.. 그래, 치카쨩. 잠시 무릎 빌려줄래?” 옥상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내게 그렇게 말한 리코쨩은 지금 내 다리를 베개 삼아 낮잠을 자고 있다. 숨소리를 내며 편안하게 잠든 모습에 이끌려 나도 하품을 한 번. 살짝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연습의 피로가 몰려온다. 리코쨩은 여기에 피아노 콩쿨까지 있어서 더 힘들 것이다. 리코쨩은 다음 달 또 한 번 피아노 콩쿨이 있어 아주 많은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기초 체력 훈련이나 댄스, 노래 연습으로 해롱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꼭 옆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가사를 쓰며 배고프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나와는 정말로 다르다. 게다가 곧 있으면 할로윈 이벤트도 있어서 그에 대비해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 연습만으로도 힘들 텐데, 리코쨩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표는 안 나지만 역시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것이다. 요즘은 늘 즐거워 보이니까 깨닫지 못했다. 나와 같은 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어딘지 우아한 분위기마저도 흘러나오는 리코쨩. 무대 의상을 입고 춤추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여성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된다. 피아노를 칠 때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면서도 덧없고...... 그런 리코쨩이지만, 잠든 모습은 평소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 같았다. 무방비한 얼굴.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내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이니 기쁜 한 편, 나를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게 돼 버리니 말이다. 공부를 같이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요즘은 리코쨩이 우리 집으로 놀러오거나 내가 놀러가는 일이 많아져서 전보다 더 친해졌다. 마침 옆집이니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거나 아예 하룻밤 자고 가기도 한다. 리코쨩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단지 그 연장선일 뿐이다. 복잡한 기분으로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높다..” 신기루를 닮은 두꺼운 구름은 여름이 지나자 모습을 감췄고, 가을 특유의 투명한 하늘에 엷은 구름이 떠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떠돌아다니는 구름은 물 위로 떠오르는 나뭇잎 같이 흔들린다. 오늘은 하늘도 느긋한 날이다. 하늘을 잠시 멍하게 쳐다봤다. “할로윈이라..”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코쨩은 박쥐를 모티브로 한 의상을 입는다. 검은색 할로윈 의상에서 부분부분 엿보이는 순결하고 하얀 피부. 그 조합은 무척이나 눈부시면서도 굉장히 어울렸다. 나도 모르게 요우쨩에게 박수갈채로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요시코쨩이랑 마리 씨가 부럽다. 나도 박쥐 의상 입고 싶었다. 나는 마법사 복장이었다. 귀엽기는 했지만 역시, 같은 걸 입고 싶었다. “아..” 의상을 입고 기쁘게 웃는 리코쨩의 모습을 휴대폰을 들고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피아노 콩쿨에 아이돌. 우리보다 무대에 설 일이 많은 리코쨩은 예쁜 외모까지 어우러져서 팬이 많다. 피아니스트 사쿠라우치 리코의 팬. 아이돌 사쿠라우치 리코의 팬. 물론 양 쪽 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속에는 나보다 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런 애랑 팬레터나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어쩌면 그런 단계를 거치고 친밀해진 어떤 사람과 이미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이가 됐을 가능성도...... 혹시 그렇다면 이제 와서 내가 들어갈 틈 따위는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부끄러워하면서도 팬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리코쨩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아이의 마음에는 누가 있을까.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비정하게도 지금 상황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혹시 이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내게 보여주는 자는 얼굴도,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보여줬던 웃는 얼굴도, 그 이외의 얼굴도...... 전부 보여주겠지. 머릿속을 휘감는 부정적인 망상들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이 아이의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대며......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리코쨩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더 불어왔는지, 아까보다 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만졌더니 햇볕을 반사하는 파도처럼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리코쨩의 예쁜 머리카락. 이 머리카락을 다른 사람이...... 어쩐지 분해져서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주는 겸, 살짝 가지고 놀았다. 나쁜 짓이 아닌걸, 하고 마음속으로 어린애 같은 변명을 하면서. 이렇게 만지면 장난치지 마라며 화를 낼까. ......아, 맞아. 장난하니까 떠올랐다. 올해도 이 계절이 온 것이다. 미리 기분만 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리코쨩~ 트릭 오어 트릿~” 잠든 리코쨩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과자 안 주면 장난친다~? 흐흐흐” 말랑말랑. 그 아이의 뺨을 손가락을 찔렀다. ......부드럽다. 이 뺨을 부풀리면서 부끄럼을 타는 모습은 무척이나 귀엽다.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장난치는 일도 있다. 한 번 더. 말랑말랑 “으응...”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신이 났나 보다. “아......” 닫혀있었던 리코쨩의 입술이 아주 조금 열렸다. 빈틈투성이 리코쨩. 숨겨왔던 나의 마음. 할로윈 장난.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무언가가 서서히 느껴졌다. “저, 정말로 장난친다..?” 뺨을 쓰다듬으려다 말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과자 안 줬으니까, 네, 네 잘못이야 할로윈 규칙이니까.”
면죄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충고했어..” 이름도 모르는 팬이나 있는지도 모를 애인을 향한 질투심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딱 한 번만. 체념, 포기를 닮은 어떠한 감정에 무책임하게도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 아이의 머리 아래로 서서히 손을 가져갔다. 혹여나 깨지 않게, 살며시. 마치 몸 전체가 하나의 심장이 된 것 같았다. 큰 북처럼 쿵쿵, 맥박이 온 몸에서 울렸다. 손바닥을 통해 리코쨩에게도 들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것은 강하고 빨랐다. 단 몇 센치 간격만을 남겨두고서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나의 머리가 리코쨩에게 점점 기대고 있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천천히. 깨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변명할 수 없는 자세를 하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다. 리코쨩의 가지런한 눈썹과 작은 코와 부드러운 뺨과, 연분홍색......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다. 코를 부딪히지 않게 고개를 기울이고 아슬아슬, 자칫하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고 그대로 등받이까지 몸을 뺐다. 멈췄던 숨을 내뱉으며 심호흡을 한다. “이건 아니지” 역시 이런 건 하면 안 된다. 선을 넘지 않은 자신을 달래주기 위해 그렇게 중얼거려봤지만, 죄책감이 느껴져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이길 수 없다니, 이건 승부가 아니다. 애초에 리코쨩과 더 친밀해지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비겁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애인한테 질투하고 시시한 망상이나 하면서 초조해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리코쨩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아니, 키스라는 단어를 쓸 수조차 없다. 내가 하려했던 짓은 단순한 폭력이며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일방적 행위이다. 게다가 잠든 상태에서 범하려 든 것이다. 나란 인간은.. “하아..” 나도 참.. 뭘 하고 있는 걸까. 정처 없이 하늘을 또 한 번 올려다봤다. 여전히 구름은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하지 않은 것은, 남은 것은, 하려다 만 행동과 버릴 수 없는 자기혐오뿐이었다. “저기”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내 비명 소리가 푸른 하늘로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정중하게도 멀리 있던 산이 메아리로 답을 해줬다. “너무 깜짝 놀라는 거 아니야..?” 리코쨩은 작게 하품을 한 번 했다. “깨, 깼어? 잘 자더라. 자는 동안 안 추웠어?” “응. 괜찮았어. 고마워, 덕분에 잘 잤어” 아직 조금 졸린 듯 입이 반쯤 벌어져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입을 억지로 빼앗으려 했다는 것이 생각나 죄책감이 들었다. 만약에 정말로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있잖아. 치카쨩” “왜 하다가 멈췄어?” “뭐...?” 입 안이 한 번에 바싹 말라버리는 느낌이었다. 증발한 침이 목에 달라붙어서 숨이 막혔다. 차라리 저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 하려고 했잖아” 깨있었다. 들켰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잠수를 할 때처럼 시야가 뿌옇고 입을 열어도 산소가 폐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멈췄어?” 리코쨩은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했다. 그러나 키스하려 했던 이유도, 하려다 그만 둔 이유도 답할 수 있을 리 없었기에 나는 그저 눈을 피했다. “치카쨩. 이쪽 봐” 그게.. 저기.. 어어..처럼, 말을 흐리고 있을 뿐인 나를 리코쨩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뭐?” “언제부터 깼어......?” “언제부터?...... 치카쨩이 깨웠잖아. 뺨 찌르면서” 일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허벅지에 리코쨩이 누워있어서 일어날 수조차도 없었다. 아마 리코쨩도 그 점을 알고서 계속 누워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왜 멈췄는데?” 단호한 말이 나를 몰고 갔다. 궁지에 몰린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자, 장난. 장난이었어! 할로윈이잖아? 그러니까 딱히 멈춘 게 아니라..” “장난? 자는 사람한테?” “윽” 멈추고 자시고, 처음에는 할 생각도 없었는데..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리코쨩에게 한심한 변명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있잖아. 치카쨩” 리코쨩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계속해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나, 매력 없는 편이야?” 그런 질문을 했다. “절대 아니야! 네가 매력이 없을 리 없잖아!” “근데 하려다가 말았잖아. 왜 그랬어?” “왜라니, 그야...... 역시 내 맘대로 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 아, 아니야, 그러니까 안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어라? 미, 미안! 내가 했던 말 전부 잊어줘!” “그럼 뭔데? 허락이 있으면 할래?” “뭐?” “해도 돼” “엣” “너라면 해도 된다고” “뭐, 뭐..” “얼른 정해. 할래, 말래?” “하, 할게” 말하기 무섭게 리코쨩의 두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아까는 서서히 다가갔는데, 이번에는 순식간에 그 아이의 얼굴이 눈앞으로 와버렸다. “눈 감아줘” “으..응”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꾹 “농담이야” 눈을 뜨니 윙크를 하고 있는 리코쨩이 보였다. 닿은 부분은 이마였다. “깜짝 놀랐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는 나를 보며, 리코쨩은 장난이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웃었다. “무릎 빌려줘서 고마워”
리코쨩은 몸을 일으키며 상쾌하게 기지개를 한 번 한 뒤 눈을 감고 시원한 공기로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치,카,쨩~” “으악” 혼이 되돌아왔다. 리코쨩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큭큭.. 목소리 재미있어” 내 반응 하나하나가 다 우스웠는지 리코쨩은 즐겁게 웃었다. “치카쨩. 장난은... 뭐 이제 됐는데, 트릭 오어 트릿이라고 말은 했어?”
말했지만 리코쨩은 그 때 자고 있었지. “너도 참...... 잠든 사람을 덮치려 하지 않나. 미수로 끝났으니까 아까 걸로 용서해줄게. 리액션 재미있었어...... 첫 키스인데 뺏겼으면 이걸로 안 끝났겠지만 말야” ‘이걸로’ 이 부분을 강조하며 리코쨩은 주의할 점을 확실하게 내게 말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내 옆에 앉아주었다.
“참고로 과자는 받아왔어. 너도 먹어” 리코쨩은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니 안에 쿠키가 들어있었다. 리코쨩은 이미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정말!” 안도감에, 동결상태였던 뇌가 겨우겨우 재 기동을 시작했다. 리코쨩의 반응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변함없는 태도로 대해줘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아줘서 정말로 다행이다.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아니 멈췄어! 아직도 두근두근거려..” “네가 할 말이니? 나도 엄청 두근거렸어” “그래도 리코쨩...... 뭔가 익숙해보였는데?” “뭐!? 그, 그랬나? 기분 탓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보낸 시선을 리코쨩이 피한다. 혹시 리코쨩 집에 있었던, 그 여러 가지 시츄에이션만 모은 책의 영향인가..? 책상 위에 있던 걸 전에 펼쳐서 봤다. 본 건 비밀로 해야겠다. “아” 편해졌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리코쨩은 휴대폰을 꺼내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 나와 대화하는 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방금 일어난 사건을 블로그에라도 적어서 올리려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까. 작게 들려오는 콧노래와 바쁘게 움직이는 리코쨩의 손가락. 이따금 생각에 빠져서 진지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무척 밝은 얼굴이었다. 역시 그건가. 점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닐지도 모르는데, 떨쳐내지 못했던 망상이 또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점점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였다. 이 멜로디를 어떤 사람과 함께 부르고 있는 걸까. 망상이 나를 둘러싸고 보고 싶지도 않은 그림을 계속 보여줬다. 이번에도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리코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아차 싶어 숨을 멈추는 나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깜짝 경직하는 리코쨩. 쭈뼛쭈뼛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들었어......?” 들었냐고? ‘봤다’가 아니라? “조금 들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였지. “으윽.. 집중하고 있어서 방심했어......” 리코쨩은 잠시 머리를 감쌌다. “뭐, 감출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니까.. 말해줄게” “으,응” 결심한 듯 내게 고백했다.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떠오르면 안 잊어버리게 메모해. 이렇게” 리코쨩이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는 오선지 위에 음표와 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메모라기에 도레미파솔라시, 라도 기록하는 건가 생각했던 나는 놀랐다. 화면 안 악보에는 박쥐 날개 같은 것이 달려있는 음표, 또 다른 모양의 음표, 기호가 있었다. 리코쨩의 집에서 보았던 악보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만져도 괜찮아” 리코쨩의 그 말에 음표를 터치해보았다. 그랬더니 의도한 곳으로 그것을 옮길 수가 있었다. 리코쨩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짧고 조그마한 악보에서 쓸 만한 부분을 골라 수정하거나, 비교해보거나, 편곡하거나, 새 파일에 더해보거나,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반복해서 작곡을 완성한다고. 손가락으로 악보를 만드는 그 작업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마치 끝도 없이 넓은 세계로 이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온 몸이 소리로 둘러싸인 그런 세계 같았다. “대단하다......” 음악의 세계와 바다가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을 리코쨩에게 전하자, “작사담당이라 그런지 표현력이 남다르네” 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어줬다. 그렇게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더니 어떤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넘버 사백구십...... 사백!? 이 숫자 혹시..” “응. 곡.. 아니, 메모한 파일 숫자야. 뭐, 한 소절만 쓴 파일이 대부분이니까 수는 별로 의미가 없어. 결국 안 쓰고 버리는 것도 많고. 관리하는 것도 힘들어. 매일 쌓이는 파일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니까. 아, 소절이 뭐냐면......”
리코쨩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걸 만들었어?” “응? 언제부터였지.. 아마 오래되지는 않았을 거야. 처음에는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는데 그럼 불편할 때가 많잖아? 종이가 있어도 마침 펜이 없을 때라든지” “알아 알아! 괜찮은 가사가 생각났을 때만 없지!” 종이와 펜을 찾으면 이미 그 가사들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이다. 기억을 쥐어짜서 적어보면, 분명 방금 전에는 느낌이 왔었는데 흔해빠진 가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리코쨩도 거기에 공감을 표했다. “맞아, 바로 그거. 근데 휴대폰은 항상 가지고 다니잖아? 일일이 오선을 안 그려도 되고 켜기만 하면 바로 메모할 수 있으니까 편하지” “그럼, 맨날 휴대폰 만지작거렸던 게 메모 때문에..?” “뭐!? 다 보고 있었어!?” “어.. 응. 보고는 있었는데.. 하하......” 쑥스러움에 고개를 갸웃했다. 봤던 건 사실이지만 왜 보고 있었는지는 고백할 수 없다...... 리코쨩은 또다시 머리를 감쌌다. 부끄러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다음번엔 치카쨩이 가사 쓰고 있을 때 보여줘야 해? 알았지!”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리코쨩의 압박에 져서 우리는 이상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숨어서 적는 것도 아니니까 보여줘도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굳이 우리 집까지 와서 봐야겠다고 선언하는 리코쨩. 많이 부끄러웠나보다. 리코쨩과 이야기를 하면 어떤 가사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 즐거운 약속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차, 갑자기 어떤 것을 깨달았다. 나를 휘감고 있었던 기분 나쁜 망상들이 어느 새인가 사라지고 얼굴을 알 수 없는 그 사람도 점점 투명해지는 것이다. “하아..” 나도 참 단순한 인간이다. 참 많이도 헛돌았다. 망상 속 애인은 망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슬슬 점심시간 끝나겠다. 돌아갈까?”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리코쨩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평소보다 걸음이 느린 이유는 내게 맞춰주고 있기 때문일까. 발소리는 계속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치, 리코쨩의 주위에서 음표가 태어나서 두둥실 떠가는 것 같았다. “읏챠” 계단을 한 칸 오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폭주했던 그때, 그대로 리코쨩에게 키스를 했다면 이런 편안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리코쨩이 음악에 얼마나 진지한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음악의 세계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망상 속 애인에게는 계속 질투심을 품었을 것이고 집에서 가사를 같이 적자는 약속 또한 당연이 없었겠지. 그래.. 역시 안 하길 잘했다.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다. 어라? 멈춰 섰다.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마을 전체가 울리는 것처럼, 강한 소리가 온 몸을 두드렸다. “있잖아” 말을 걸었다. “응?” 리코쨩이 한 바퀴 돌자 그 아이의 머리카락 색이 반짝이는 빛을 받아 푸른 하늘에 다리가 하나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다리는 리코쨩의 등에서 점점 사라졌다. “왜?” 순진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 “치카쨩?” “방금 전에.. 리코쨩 깨있었지?” “그래. 덕분에” “왜?” 쉰 목소리가 났다. 긴장과 동요와, 희미한 빛이 보였다. “왜 그때 도망치지 않았어?” “뭐?” “그때 말이야. 내가 마음먹었다면 리코쨩에게 키스해버렸을 거야” “그, 그건” “하지만 넌 도망치지 않았어” 리코쨩은 눈을 피했다. “왜 도망가지 않았어?”
그런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서 나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려다가 멈추기는 했지만 그때 나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그때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 “......” 혈관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아까도 말 했잖아......” 조용했던 그 아이의 입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연약한 목소리였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너라면, 치카쨩이라면 해도 된다고 아까 말했잖아!” 조용하게 떨어지던 물방울이 갑자기 거세지듯, 리코쨩이 외쳤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물으려 했지만, 이미 마음은 답을 알고 있었다. “나도 몰라! 둔감하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리코쨩은 내게서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두 번 말하는 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알아..?” 사라질 것 같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귀와 뺨이 그 아이의 머리색처럼 발그레했다. 가슴께에 꼭 쥔 손을 가져간 채로 조금씩 어깨를 떠는 그 모습이 겁을 먹은 것 같이 보여서 내 가슴이 괴로워졌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뒤에서 껴안았다.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역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리코쨩을 좋아한다. 벌써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들려도 상관없다. 아니다. 전하고 싶다. 지금 내 가슴이 이렇게 뛰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 머리에서 떠오른 방법에 소나기가 더욱 거세졌다. 소나기가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폭풍이었다. 나는 얼굴을 귓가에 기대어서 어떤 말을 속삭였다. 리코쨩의 부드럽고 따스한 향기가 내 코에 닿았다. 분명 나의 얼굴도 리코쨩의 색일 것이다. “......트릭, 오어 트릿.........” “......과자.. 없어......” 이번에는 답을 제대로 해주었다. 작은 목소리였고 고개는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나는 확실하게 들었다. 안았던 팔을 풀고 그 아이의 앞으로 갔다. 리코쨩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마를 맞댔다. “읏......” 리코쨩이 몸을 한 번 떨어서 서로의 코가 스쳤다. 새끼 고양이가 조그만 혀로 핥는 느낌으로, 나는 일부러 한 번 더 코를 스쳤다. “치......” 리코쨩은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조용히, 똑바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부드럽게 눈꺼풀을 닫아주었다. 이야기는 나중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방과 후, 하굣길, 집에 돌아가서도.. 언제라도. 생각해냈던 말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라지는 말 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이, 가사처럼 선율처럼, 나중에는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 작가 金色센세 http://www.pixiv.net/novel/show.php?id=7425946 좋은 가을 보내라 |
うっちー♡ | 추천 못주는게 아쉬울 정도로 달달하니 최고다야 | 2017.10.24 13:03:41 |
코코아쓰나미 | 역쉬 치카리코 | 2017.10.24 13:13:21 |
개이니 | 시럽에 빠진 느낌 | 2017.10.24 14:26:35 |
홍대새우튀김 | 첫문단보소 글쓴이 말 되게 곱상하게 하네 멋짐 | 2017.10.24 17:08:13 |
ㅇㅇ | 원래부터 한국인이 쓴건줄 알 정도로 부드럽게 읽혔어. 번역 되게 잘했다. 121.142.*.* | 2017.10.25 00:54:48 |
ㅇㅇ | 번역 고마워. 121.142.*.* | 2017.10.25 00:55:06 |
거북잉 | 좋다 | 2017.10.25 05:45:44 |
요시코오 | ㄷㄷㄷ | 2017.10.26 14:3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