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삑.
삑.
삑.
규칙적인 오실로스코프와 함께 울어대는 알림음.
똑.
똑.
똑.
한 방울씩 자신의 주인에게로 들어가기 위해 떨어지는 링거액. 그리고 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쿠로사와 루비 양. 내가 직책에 있던 시간만큼 익숙한 실력으로 설치한 전극과 링거 주사는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오후 4시. 제압탄에 맞은 시각이 12시 16분, 점심시간. 거의 4시간 가량이 흘러가지만 그녀는 아직도 잠들어있다. 빌어먹을 녀석이 말해준 제압탄에 대한 정보에 따르면 좀ㅂ... 아니지 감염자들을 30분 정도 무력화와 동시에 잠들게 한다는 것 같다. 감염자들과 인간과의 차이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2배 정도 차이가 날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마 지금 자고 있는 것은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겹쳐서 그냥 잠든 것이겠지. 아마도... 겠지만.
가슴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공허해서 병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한다. EVA 본부는 어처구니없이 큰 건물이어서 가는 길이 멀지만, 뭐 상관없다. 사고 위험성 때문에 잠겨진 옥상 문은 ID 카드를 이용한 인증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옥상으로 나오니 주변에 생활관 건물들이 널려있었고 본부와의 사이에 연결된 다리들도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깨끗한 아스팔트를 빌빌거리는 차량들과 헬기가 있었다. 저 멀리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보였고 담장 밖을 바라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옛날에 딸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여기에서 다시 시작했다. 내가 도쿄에서 탈출할 때 했던 짓을 잊을 수 없었기도 하고 홀로 살아있다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이기도 하다. 담배 한 개비를 든 채 휴대용 라이터를 들고 불을 지피려니, 너무 오랜만인지 잘 되지가 않는다. 그래도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에는 성공한다.
후우, 하고 한 모금을 뱉어낸다. 마키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빠, 의사라는 사람이 무슨 짓이야?!'라며 기겁했겠지. 슬슬 머리 속이 안개 속에 덮이는 느낌이 난다. 현재를 인식하는 것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더 수월하게 일어난다. 마키가 태어난 모습. 동화책을 읽어주는 나의 곁에서 잠든 모습. 산타로 치장한 나를 보고 기쁜 나머지 울어버리는 모습. 아내가 해 주는 저녁을 신나게 먹는 모습. 시험에서 제 딴에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죄송하다며 우는 모습.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 말다툼을 한 후 토라진 모습. 그리고 그 학교에서 행복하게 스쿨아이돌을 하는 모습. 졸업 후 의대로 향하고 나서 야자와 씨와 같이 지내는 모습. 교통사고 직후 하와이로 가겠다던 모습까지, 모두 소중한 기억들이다.
'여보, 미안해. 어서 가! 당신은 살아야 해! 당신이 살아야 나중에 뭐라도 할 수 있잖아!!' '브라이언 박사님, 슬픈 소식입니다. 따님이 있다고 하시던 하와이에 탐사팀을 보내봤지만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어떤 주파수로도 구조신호는 오지 않았습니다.' '브라이언 박사님, 이제 잊으세요! 앞으로 할 일이 더 중요하다구요! 언제까지 이렇게 초췌하게 지내고 계실 겁니까?!' -------------------------------------------------------------- 담뱃갑에 손을 집어넣어 다른 녀석을 찾는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손가락만이 휘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숨을 쉬고는 겉옷을 벗어 담배냄새를 털어낸다. 내 딸과 비슷한 그 아이라면 반드시 이 매캐한 냄새를 싫어할 테니까. 여기저기 서성이다보니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배에서는 허기가 느껴지지만 입에는 도저히 뭘 집어넣을 생각이 들질 않았다. 불쌍한 내 몸뚱이보다 그 아이를 위해 직접 만든 미음과 공동식당에서 얻어낸 반찬을 챙겨 병실로 향한다.
루비 양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사과를 했다. 마음 쓰게 해서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상담센터도 잘 다녀오겠다고 나에게 다짐했다.
마음이 찣어진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고 그저 밥을 먹자고 했다. 이 아이는 천천히 미음이 담긴 숟가락을 입에 넣었고 다시 울면서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마음이 시리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고 그녀를 품에 안으며 등을 두드려준다. 이 아이는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결국엔 마지막 숟가락까지 들었고 마침내 "잘 먹었습니다."를 선언했다.
아마도 며칠 동안 처음으로 내뱉은 것일 그 한마디는 다시금 내 마음을 적신다. 이번에는 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아마 지금이 표현할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을테니.
"쿠로사와 루비양, 자네와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지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당신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끼네. 며칠간 같이 지낸 게 마치 몇 년과 같이 느껴질 정도일세. 그래서 앞으로는 자네를 딸처럼 대하겠네. 자네를 그 어떠한 일로부터 보호해 줄 테니 자네도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해 주게. 나 역시 그대와 같은 사람으로서 받쳐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해."
덥석 "고마워요... 크흑... 고마...크흡...워요."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그토록 끔찍한 기억을 잊으라, 잊으라해도 언젠가는 다시 떠올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 모두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져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상담센터에서 이런 역할을 해야하지만, 내가 대신 맡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잃어버린 애비. 그리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버리려는 아이.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그녀는 큰 소리로 울었다.
쿠로사와 루비라는 한 사람이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는, 생애 두 번째 울음이었다. -------------------------------------------------------------- "박사님, 고마워요."
실컷 울어대니 목 상태는 엉망이었을지언정 푹 쉬었던 탓에 몸이 전보다 가벼웠다. 빨리빨리를 외치던 머리 속에서는 이제 더 이성적인 사고를 하자고 협상을 끝내놓았다는 듯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했다. 저녁도 먹어서 속도 든든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너무 오래 자서 잠이 안 온다는 점은 유일한 문제점이려나... 헤헤... 니시키노 박사님은 식사를 치우신 후 전극과 링거 주사를 정리하고 주무시고 계셨다. 조용히 움직이려고 하니 마치 집에서 나쁜 짓을 하려는 느낌이 나서 짜릿짜릿하다. 이불을 빠져나온 후 슬리퍼를 신는다. 그리고 두 시간 전에 써 좋은 종이를 들고 박사님께 향한다.
"박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 정말로 감사해요. 이제서야 저는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의무, 죄책감보다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스쿨아이돌에서 그렇게나 밝은 노래를 불렀으면서 이걸 이제서야 다시 깨닫다니 저도 참... 이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요. 박사님을 도우면서, 사람들을 구하면서 살게요. 그럼 잠깐 나갔다 돌아올게요."
-------------------------------------------------------------- 의료센터의 복도. 루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에 비친 맑은 달빛%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