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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마츠우라 카난! 앉으십시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피고인이라면 저기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란 머리 성추행 상습범이 있잖아.
조금 전에 벤치에서 마리와는 언젠가 법정에서 볼 것 같다고 생각했더니만, 설마 내가 재판을 받는 쪽일 줄이야...
상황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리코에 관한 심리라고 말했으니까, 뭔가 리코랑 관련된 일로 날 재판하는 거구나.
리코와는 여러 가지 일이 생각나긴 하지만 내가 죄인 취급받을 것까진 없는 것 같은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잔뜩 무게를 잡고 있는 다이아가 우스워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앉아있는걸?] [닥치도록 하세요! 발언하려거든 재판장인 저 쿠로사와 다이아의 허가를 구하시길.]
[예에~]
다이아, 기운 넘치네. 요즘 법정 드라마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나.
[뭘 바람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웃고 있는 겁니까? 훗, 여유 넘치는 것도 지금뿐이라구요? 그럼...음...]
다이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법정 드라마의 효과는 여기 까진가 보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쓰이는 게, 리코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멤버들이 부른다길래 기대하고 왔더니, 이상한 재판이나 하고...
물어볼까.
[다이아, 리코는 어디 있어? 아까 리코에 관한 어쩌구 했잖아.]
[훗, 그 점이 신경 쓰이는 겁니까? 역시 양반은 못 되는군요. 뭐,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재판이 자알~풀리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테니까. 그럼 검사!]
[ok~]
내 좌측, 다이아와 가까운 쪽에서, 마리가 천천히 일어나 내게 가까이 왔다.
검사는 마리인가. 마리는 내가 정말 어렸던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 온, 흔한 말로 소꿉친구이다.
최근엔 오랜 시간 소원했었던 시간을 극복하고 꽤 드라마틱한 화해를 했는데, 그 효과 때문인지 전보다도 한층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친밀한 정도를 넘어서, 최근엔 나조차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스킨십을 해대고는 말이야...조금은 다이아도 신경쓰는 게 좋을 텐데.
어쨌든, 나를 정말 좋아하는 마리가 검사라니, 이건 분명 내게 유리한 상황인 거겠지.
[피고인은, 나 오하라 마리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아이에게 상습적으로 허그를 해온 사실, 인정합니까?]
마리는 마치 처음 보는 사이라도 되는 양 시치미를 뚝 떼고 나에게 질문해왔다.
...조금 불안해지는데.
어떤 목적으로 마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실이니까 인정할까.
[네. 인정합니다.]
[huh? 그러면, 피고인은, 누구나 피고인의 허그를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악용해서,
리코와 연인이 아님에도, 연인만이 할 수 있는 파렴치한 스킨십을, 상습적으로 리코에게 했다는 것을 인정합니까아~~?] 마리가 얼굴을 내게 바짝 들이대고 침을 튀겨가면서 날 추궁했다.
마리의 그 말이 촉매가 되어, 내 안에서는 리코를 안았을 때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좁은 어깨에서 시작해서,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듯한 가녀린 허리를 따라, 엉덩이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운 굴곡.
벚꽃이 가득 핀 가지를 껴안고 있는 듯한, 위태로우면서도 마음이 차오르는 이 감각.
그런 것들을 이런 자리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마치 소중히 묻어놓았던 보물이 강제로 파헤쳐지는듯한 기분이어서-
불쾌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리를 외면했다.
[...말 안 할래.] [재판장! 이 녀석! 전혀 반성할 생각이 없어! 유죄야!]
마리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방방 날뛰었다.
[네, 유죄-]
다이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망치를 들었다.
저 망치가 내려가 책상을 두드리면, 이 재판이 끝나는 거구나.
뭐, 맘대로 하라지.
이 재판은 완전히 억지다.
애초에, 연인만이 할 수 있는 스킨십이라니 그게 뭐야.
그런 걸 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이잖아.
나도 리코도 우리 사이의 스킨십이 그저 장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파렴치한 스킨십이니 뭐니 하는 마리의 말은 틀렸고, 내가 유죄라는 것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장난이고, 이걸 빌미로 이상한 걸 시키거나 하면 나도 진짜 화낼 거니깐.
다이아의 손이 내려가 망치가 막 책상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치카쨩이 뛰어나가더니 손으로 망치를 잡아냈다.
[잠깐! 정말~ 나도 있다구요? 카난쨩, 걱정마! 이 유능한 변호사 타카미 치카가 제대로 변호해 줄 테니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쭉 피는 치카쨩
. ...치카쨩이 내 변호사라니, 이것들 정말로 작정했구나. 나는 법 같은 거 잘 모르지만, 보통 피고인이란 거, 자기가 원하는 변호사를 쓸 수 있지 않아?
모처럼 치카쨩이 몸을 날려서 막아줬지만, 이런 재판 따위, 그냥 끝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치카쨩, 그만하자. 나 유죄 할 테니까.]
[에에~ 안 된다구? 피고는 제대로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미...미...뭐시기 원칙에도 나와 있는걸!]
치카쨩은 뭔가를 적당히 얼버무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런 원칙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나도 치카쨩과 마찬가지로 공부와는 담을 쌓은 인간이라,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럴 때 리코가 있었다면 얼른 눈치채고 치카가 말을 더듬기도 전에 작은 소리로 알려줬겠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도, 리코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차라리 리코가 내 변호를 해 준다면, 무척 기쁠 텐데.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앞에서 노력하고 있는 치카쨩에게 실례잖아.
으음...못 미덥지만 일단 맡겨볼까.
[알았어 치카쨩. 변호해줘.] [응! 그럼~ 에~카난 쨩은 죄가...없지는 않지만...]
변호사님, 첫 문장부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좀 더 분발해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카난쨩은 둔감할 뿐이지, 마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리코쨩과는 뭔가 어긋난 것일 뿐, 카난쨩은 카난쨩 나름대로 분명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치카쨩은 진지하게 나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카난쨩은 항상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인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알지 않나요? 안 그런가요? 마리씨.]
[으응...치캇치의 말은 맞지만...]
치카의 말에 조금 수그러드는 마리.
치카쨩이 말로 마리에게 우위를 점하다니, 설마 이거 꿈은 아니지?
단순히 마리를 이기는 것뿐만이 아니다.
치카쨩은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정확히 대변해주었다.
역시 내 소꿉친구답다.
나 꽤 감동받았다구...
분발이니 뭐니 건방진 생각 해서 미안해.
이런 소중한 소꿉친구에게는 선물을 해야 하겠네. 다음에 미역이라도 한 소쿠리 따다 주자.
분명 나한텐 소꿉친구가 세 명이나 더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알 게 뭐야.
내가 보기엔 꽤 인상적이었던 치카쨩의 변론이었지만, 치카쨩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 것은 루비쨩 뿐이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갑자기 창밖을 응시하거나 손톱을 다듬거나 하며 전력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뭔가 약속이랑 다르지 않아유?)
(그러게, 치카 선배도 참, 분위기 못 읽는다니까. 뭣 하러 저런 인간을 감싸준대?)
요시코쨩과 마루가 또 옆에서 속닥거린다.
너희들...나중에 두고 봐.
[...그렇지만 말야, 카난이 노력했다고는 해도, 결과가 이렇다구?
카난은 지금 저런 상태고, 리코는...뭐. 알잖아? 아무리 봐도 지금 상태는 too much problems인 거잖아. 재판도 그래서 연 거고. 안 그래?]
마리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영문모를 소리를 한다.
이 재판, 그저 장난이었던 거 아니었어?
문제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걸까.
(마리씨, 그때는 many를 쓰는 게 맞죠. 2분의 1확률인데, 좀 맞춰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항상 틀리다니, 정말 신기할 정도라구요.)
(what? 그런 사소한 건 어찌 되든 상관없잖아? 다이아는 정말 stupid bomber head네~)
(이익...당신....나중에 각오하세요.)
(oh~angry penguin~)
다이아의 딴죽으로부터 시작해서, 둘은 멋대로 싸워대기 시작했다.
정말...남이 모처럼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 하고 있는데...
재판을 이끌어 가야 할 다이아가 저렇게 되어 버리니, 이제까지 나름 잘 통제되고 있었던 재판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다이아와 마리는 계속 소근소근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았고, 1학년들과 치카쨩, 요우쨩도 서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뭔가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쪽에도 끼지 못한 채 중간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
...나 슬슬 교실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래도 되려나?
[저...제가 한 마디 해도 되나요.]
루비쨩이 수줍어하면서 손을 든다.
그러자 다이아는 언제 마리와 언쟁했냐는 듯 바로 입을 다물고 차분한 모습이 되어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자기가 방금 한 행동이 언니로서 꼴불견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복잡한 기분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루비.]
[그...리코씨에게도 문제는 있다고 생각해요...
보면, 카난씨와 있는 도중인데도 갑자기 요시코쨩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내고...카난씨와 있는 내내, 감정 기복도 심해 보였고... 혹시 조울증...아 죄송합니다.]
우물쭈물하며 심한 소리를 내뱉고는 바로 사과해버리는 루비쨩.
...루비쨩의 저 귀여운 얼굴 뒤에는, 대체 어떤 생각들이 숨겨져 있는 걸까.
가끔 걱정된단 말야.
거기 멋진 언니 모드인 쿠로사와씨, 당신 동생 이야기라고? 알고 있는 거야?
[리...리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건...그건...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이 바뀌는 거지!]
요시코쨩이 뜬금없이 끼어들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리코가 나를 좋아한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봐, 저번 심해수족관에서도 대참패 당했고.
...그리고 루비쨩이 말했던 이상한 메시지는 사랑 고백? 리코가 요시코쨩한테?
그것도 나와 있던 도중인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 이건, 궁금증이다.
나와 같이 있었던 리코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요시코쨩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메시지, 궁금한 게 당연하다.
단지 궁금할 뿐이니까, 요시코쨩의 메시지를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도, 딱히 잘못된 마음은 아니겠지.
그래, 오직 그것뿐. 다른 감정은 없다.
혹시 어쩌면, 메시지가 왔다는 것도 거짓말일지도 모르잖아?
모두 나를 놀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이건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지. 좋아, 확인하자.
나는 밧줄을 풀고 일어나 요시코쨩에게 걸어갔다.
[다...당신, 뭘!]
다이아가 당황해서는 벌떡 일어나 내게 삿대질을 한다. 고작 일어나 걸어갈 뿐인데 뭘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개그 캐릭터로서 다이아의 입지는 이미 확고한데 말이지.
[리코가 보냈다는 메시지, 나한테도 보여줘.]
[뭐...뭐야...요.]
요시코쨩이 갑자기 수그러들어서 울상을 짓는다거나, 마루쨩이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는 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잠깐 보고 싶은데, 안 될 건 없지 않아?]
[아...안 될 건 없지만...]
요시코쨩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어째선지 몇 번이나 실수하며 이상한 화면을 넘나들던 요시코쨩은, 마침내 메시지를 열고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핸드폰의 화면에는 발신인 리리라는 이름으로, '욧쨩 언제나 고마워 사랑해'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리리라는 건 분명 요시코쨩이 리코를 부르는 별명, 핸드폰 번호도 리코의 것과 같다.
메시지 옆에 표시된 날짜와 시간도 나와 리코가 막 심해 수족관에 도착했던 그때였다.
정말이구나.
정말 리코가 요시코쨩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 보낸 거구나.
...어째서?
왜 리코는 나와 같이 있을 때, 요시코쨩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걸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적당한 이유를 떠올려보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그럴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뭐, 당연한가.
나 같은 게 리코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실, 하나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절대로.
왠지 누가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져 온다.
나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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