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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불도 켜놓지 않은 채, 방 귀퉁이에서 손으로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치카쨩과 요우쨩을 보내고 난 뒤, 나도 교실로 돌아왔지만, 오후 수업이 끝날때까지 우리 셋 사이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치카쨩은 줄곧 울 듯한 얼굴로 있었고
요우쨩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가 많은 치카쨩과 요우쨩이기에 클래스메이트들이 종종 말을 걸어왔지만, 둘은 그때마다 적당한 말로 그들을 쫓아내버렸다.
난 그런 공기가 견딜 수 없이 불편해서, 종례를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줄곧 이 자세-
요우쨩이나 치카쨩은, 그 후에 부실에 들리거나 했을까?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나는 도망쳐버렸으니까.
한심하다.
내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아쿠아를 지키겠다면서 내 비밀을 감춰놓고
상냥하게 나를 도와주려고 한 치카쨩에게 심한 소릴 해 버리다니.
치카쨩도 이젠 나 같은거, 쳐다보기도 싫겠지. 경멸하겠지.
요우쨩도 그렇게 차가운 모습, 본 적 없고...
그 상큼한 요소로 머신 요우쨩이 내 말을 무시하다니, 믿을 수 없어.
내가 잘못한 것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긴 그렇겠지.
치카쨩을 정말정말 사랑하는 요우쨩이니까.
나는 치카쨩을 울려버렸으니 이제는 그냥 원수인거야.
당장 내일 학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인기인인 요우쨩에게 미움받아 버렸으니, 신발장은 이제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책상에 레즈비언 죽어. 라거나 여러가지 심한 말 써있어도,
부실에 있던 내 물건들, 다 버려져있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힘내는거야, 사쿠라우치 리코씨.
그래도 멤버들이 날 투명인간 취급 한다거나 하면...그건 트라우마가 되어버릴지도.
하아...
내 학교생활 정말로 끝나버렸네.
남은 2년동안 학교에서 치카쨩과 요우쨩을 비롯한 아쿠아 멤버들에게서 경멸받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거야.
꼼짝없이 배드 엔딩인데, 다시 시작할 수가 없어.
줄곹 end 화면인 채로 멈춰버린 거야? 내 인생은?
[...코쨩.]
어디선가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쫑긋 귀를 기울였다.
[리코쨩.]
이 목소리는, 치카쨩이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발코니로 달려나갔다.
[치카쨩?!]
기세좋게 문을 열어젖혔지만, 우리 집 반대편, 치카쨩네 집 발코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난간 아래까지 살펴보았지만, 치카쨩의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리코쨩~]
이번엔 좀 더 분명히, 치카쨩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지.
유령?
치카쨩 죽어버린거야? 나 떄문에? 내가 심한 말을 해서?
기다려,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천국에서 함께 살도록 하자?
[여기야 리코쨩, 벽 뒤.]
눈을 찌푸리고 발코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난간 위로 치카쨩의 바보털이 삐져나와 있었다. 털끝 하나. 보인다.
[...어째서 숨어있는 거야?] [그치만 지금은, 리코쨩의 얼굴 보기 무서운걸. 또 차가운 얼굴로,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치카쨩이 우물쭈물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그런 말은 이제 절대로 안 할 거니까. 정말 미안해 치카쨩! 정말정말 미안!]
엄청 반성하고 있으니까요. 치카쨩만 허락해준다면 지금 거기로 가서 도게자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부디 치카쨩 전속 노예로 삼아주시길
낮의 일이나 밤의 일이나 성실히 봉사할테니까요.
나, 손가락 기니까. 그쪽 일은 자신 있는걸.
폼으로 피아노 치고 있는 게 아니라구? 주인님.
[됐어. 어차피 그렇게 화가 난 것도 아니니깐. 잠깐 충격받았을 뿐이야. ...그런데 리코쨩이야말로, 혼자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는 거야?]
치카쨩의 지적이 예리하다.
어떡하지, 치카쨩에게 버림받은 줄 알고 방구석에 박혀서 궁상떨고 있었다는 말,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지금이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믿음직한 쿨뷰티를 보여주지 않으면-
[엣...그...그건 뭐랄까...]
[뭐 됐어. 어차피 방구석에서 궁상맞은 상상이나 잔뜩 했을 게 뻔하니까.]
[아냐! 자...잠깐 자고 있었을 뿐이니까.]
[흐응-과연.]
어떻게 알았지. 치카쨩 대단해-
...아니, 그런데, 최근 내 생각이나 행동, 너무 잘 읽히지 않아?
카난 선배도 그렇고 마리씨도 그렇고 치카쨩마저...
방금 엄청나게 사과한 주제에 이런 생각 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치카쨩에게 읽힌다고 생각하니 슬슬 위기감이 느껴진다.
2학기 때는 이미지 변신이나 해볼까
갸루, 시작했습니다! 라거나
리코프리♥ 여자의 길! 이라거나.
장소는 맥X날드 안, 트윈테일을 하고 입에 빨대를 문 채, 치켜뜬 눈으로 귀여움을 어필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
그만두자.
그래도 다행이네, 치카쨩과 제대로 화해할 수 있어서.
이제는 방에 틀어박히거나 전학을 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치카쨩은 항상 이렇다.
치카쨩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떄면 언제나 먼저 내게 다가와준다.
그리고 전력으로, 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준다.
때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결말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치카쨩이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더라도 쉽게 일어날 수 있어.
치카쨩 덕분에, 내 삶은 더 나아졌다고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치카쨩은 나같이 수수한 소녀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다.
난 어째서 치카쨩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좋아.
말하자.
타카미! 치카쨩맨, 부탁드립니다.
[치카쨩...괜찮다면, 내 고민 들어줄래?] [아, 아냐! 괜찮아! 리코쨩이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치카쨩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궁금한 듯 고개를 뺴꼼히 들어서 이쪽을 바라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쳐,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치카쨩은 천천이 일어서서, 난간에 걸터앉는다.
드디어 우리는, 평소의 텐션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카난 선배에 관해서라면, 이미 털어놓기로 결심했지만...막상 말하려니 입을 떼기 힘들어, 꽤 머뭇거렸다.
그 동안 치카쨩은 이런저런 잡담으로 내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게...사실...나 카난 선배가 신경쓰여.]
마침내 각오를 마친 나는, 치카쨩에게 털어놓았다. 카난 선배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고
시원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나까지 행복해진다.
영원히 이대로,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더 원하게 되어 버려.
밤에는 카난 선배 옆에서 잠들고 싶고.
아침에는 카난 선배의 목소리로 깨워지고 싶어.
아름다운 군청색 머리카락도, 빗어주고 싶어.
변태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카난 선배를 더 만지고, 느끼고 싶어.
키스도 하고 싶고, 연애 소설이나 동인지에서 나오는 것까지 카난 선배와 같이 하고 싶어.
다른 여자아이들을 볼 떄 속으로 장난치듯 뱉어내는 성희롱과는 다르다.
서로 진심이 되어서, 마음과 마음을 마주본 채로 카난 선배에게 안겨지고 싶은 것이다.
[분명 이것은, 연애 감정...이야.]
카난 선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죄여온다.
사랑이란 건, 이렇게 아픈 거구나.
그래도 싫지 않아.
이 마음을, 소중히 하고 싶어.
[에에에에엣?! 리코쨩이 카난쨩을?!]
[자..잠깐! 치카쨩, 목소리가 너무 커!]
[으...응. 미안.]
정말~ 치카쨩도 참. 입을 확 막아버리고 싶네.
치카쨩의 팬티로.
[그런 거였나...그런 거였나...응~ 카난쨩인가~ 이해되네. 그게, 우리 동네 여자애들 첫사랑은 거의 다 카난쨩이었는걸. 예전부터 엄청 멋졌으니까. 카난쨩이 워낙 그런 데 둔감하고 경쟁자도 많으니 다 마음고생만 하다가 얼마 못 가서 포기해버리지만 말야. 리코쨩은 면역이 없으니...] ...
면역이라니.
뭡니까 카난 선배.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나요.
우치우라 향토병인건가요.
뭔가 치명적인 느낌이라 더 매력적이네요.
[좋아! 타카미 치카! 오늘부터 카난쨩과 리코쨩을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타카미! 치카쨩맨. 마음이 따뜻해진다.
친구라는 건, 역시 좋은 거야.
목소리는 여전히 크지만.
아니 진심으로, 누가 들으면 큰일이잖아. 신경 좀 쓰라구, 치카쨩.
[그래도, 중요한 건 카난 선배의 마음이니까. 나랑 치카쨩이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을까?]
내 말에 푸욱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치카쨩.
전력으로 부정당한 느낌이다.
치카쨩, 그런 행동은 삼가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심코 죽고 싶어지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칭찬해주라구요?
진지하게 경청한 다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에, 그것도 좋은 지적이지만, 내 생각은...을 어두에 붙여 달라구요?
[정말~그러면 안된다구 리코쨩~ 제대로 어필하지 않으면 그 둔감 대마왕, 리코쨩의 마음 같은 건 영영 모를테니까.] [그...그런가?]
확실히 그럴 것 같지... 그래도 말이야.
어필이라니, 어떻게 하면 좋은거야?
으음~
백합 동인지처럼 하면 되려나?
내키진 않지만, 오랜만에 구석에 넣어둔 저수위 백합이나 꺼내볼까.
고수위 백합은...좀 그렇지.
대부분 5페이지도 못 가서 섹x하니까. 전혀 참고가 안 된다구.
[으음~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네. 역시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다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떄? 왜, 마리씨라던가.]
[마...마리씨는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게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의 만약에라도 둘이 사귀고 있는데, 내가 둘의 관계를 물어본다면.
마리씨가 할 대답을 듣는 게, 너무 무섭단 말야.
(WHAT? 카난이랑 나? 그야 당연 끈적끈적 후끈후끈한 사이인게 뻔하잖아? 그것도 모르다니, 리코는 SO STUPID~)
마리씨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것 같고...
그런 대답을 들어버리면, 나 그 자리에서 뛰어내려버릴지도.
그런데 이런 말을 치카쨩에게 해도 되려나.
질척질척한 치정에 질려버리지 않으려나.
안 되겠지. 나라도 질려버릴 거야.
[그...그게. 아무튼 마리씨는 안 되니깐!]
[에~ 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 음...그래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제대로 상담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분명 힘이 될 텐데...]
[저기 그게...멤버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거부감이 있으니까...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하는 방향으로...]
[응! 알았어....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치카쨩, 그에 맞춰 잠옷이 흔들려 볼록한 옆가슴이 살짝 드러난다.
네~잘 받았습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
[헤헤헤...지금은 말고~]
나를 보며 잠깐 망설이더니, 특유의 순박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치카쨩. 그 모습이, 최고로 귀엽다.
치카쨩이 지금 알 필요가 없다면 그런 거겠지.
신경 쓰지 말자.
[하암~]
치카쨩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한다.
졸린가 보네. 하긴, 이미 밤이 늦었으니.
하품할 때의 표정이나 입 안쪽이 훤히 보이는 것이 여자아이로서 어떨까 조금 걱정되지만
내가 편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다.
[치카쨩, 이제 슬슬 잘까.]
[응...리코쨩, 잘 자.]
[치카쨩도 잘 자.]
우리는 헤어져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달빛이 밝아서 침대까지는 어디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갔지만,
침대에 누우니 밝은 달빛 때문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내 비밀을, 치카쨩에게 말해버렸다.
이걸로 해결이라는 시원한 마음이나, 치카쨩이 알아서 해 줄 거라는 기대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도 치카쨩에게 의지해버리고,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뭔가 싶은 마음이, 날 괴롭게 한다.
치카쨩에겐 일단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긴 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아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그러면 멤버들은 방해하든 도와주든 나와 카난 선배의 사이에 개입할 테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나와 카난 선배의 사이가 어떻게 변할지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상상히 가지 않는다.
치카쨩은 혼자 고민해서 이렇게 엉망진창이니까, 둘, 아니면 여럿이서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게 옳은 일일까?
혼자 고민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일은, 결국 혼자 제대로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정말!]
모르겠다고~!
그래도 나 혼자 해결해보려다가 여러모로 일이 커진 것도 사실이고
치카쨩을 믿기로 했으니까, 일단 그런 쪽으로 계속 가 볼까.
잘 되면 좋겠는데... 아-정말-
이거는 말야-
[카난 선배가 나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더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카난 선배가 나쁜 거야. 애초에 그 사람이 태도만 확실하게 해줬으면 나도 마음을 빨리 정했을걸.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알 수가 없어, 정말.
순간 바보같은 얼굴로 멍하니 있는 카난 선배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잘까.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기를 몇 분, 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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